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순절] 예수,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다 (막 14:32-38)

첨부 1


예수,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다 (막 14:32-38)
 
죽음이란, 두려운 자리입니다. 

며칠 전에 베네수엘라 대통령인 차베스(Hugo Chavez)가 58세 나이로 사망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습니다. 임종 당시 옆을 지키던 경호 실장은 대통령이 마지막 순간에 입술을 움직여서 “나 죽고 싶지 않다. 제발 나를 죽게 놔두지 말라.” 호소했다고 전했습니다. 독재 권력을 가졌던 한 대통령의 소원이 ‘더 살고 싶음’, 그것이었습니다. 

아무런 힘이 없는 사람이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음 앞에서 ‘더 살고 싶다.’ 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도대체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죽음 앞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모든 좋은 것들이 다 초라해지고 무력해집니다. 그렇게도 좋아하고 즐겨하던 것들이 아무런 가치 없이 나둥그러집니다. 교양, 지식, 재물, 권력, 인생의 가치와 의미, 삶의 모든 보람들까지도 마치 아침 안개와 같이 덧없이 사라지는 것이 바로 죽음이라는 사건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죽음 둘을 댄다면, 하나는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죽음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주님으로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일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담백하게 맞이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요새 말로 아주 쿨하게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오히려 그의 제자들과 친구들이 그를 걱정하였습니다. “탈출하시오. 우리가 옥사의 관리들을 다 매수했으니 어서 이곳을 떠나시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과감하게 그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그때 그는 70세였습니다. 살만큼 살았으니 이제 죽을 때가 됐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는 슬퍼하는 친구들에게 말합니다. “여보게들, 용기를 내게나. 단지, 내 육체를 매장하는 데 불과하다고만 생각하게.” 그는 서슴없이 독배를 마시고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누구에게나 죽음이란 아쉽고 떨리는 자리가 분명한데도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용기 있게 죽어 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쩌면 헬라철학이 말하는 것처럼, 죽음이란 육체라는 옥으로부터 영혼이 탈출하는 자유와 해방의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 주님인 예수님의 죽음은 이와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 통곡하십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있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는 처절하기까지 합니다. 이 마지막 수난의 처연한 분위기를 공관복음서(Synoptic Gospels)의 저자 마태, 마가, 누가는 동일하게 보고하고 있습니다. 

... 고민하고 슬퍼하사 (마태복음 26:37) 

...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마가복음 14:33∼3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누가복음 22:44) 

예수님이 언제 이렇게 놀라시고 슬퍼하시며 두려워하셨던 적이 있었습니까? 아니요, 없었습니다. 언제나 당당한 예수님이셨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이 놀라고 두려워할 때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다.”며 제자들을 격려하시고 그들에게 용기를 주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릅니다. 하나님 아들의 모습은 볼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지혜와 능력과 담대함이 가득하시던 모습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 왜 그렇게 반응하셨을까요? 나이 때문이었을까요? 소크라테스는 70세가 되어서 죽었고, 예수님은 33살, 청년의 나이에 죽게 되었기 때문일까요? 그래서 예수님이 죽음을 아쉬워하신 걸까요? 아니면 죽음의 잔의 모습이 달랐기 때문일까요?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시기만 하면 금방 죽음에 이르지만 예수님은 육체에 치명적인 고통을 주는 가장 처참한 십자가의 죽음, 양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벌거벗긴 채로 부끄러움을 당해야 했기 때문일까요? 

로마의 정치가였던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는 노예들이 당하는 가장 극단적인 징벌은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가장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형벌이라는 것입니다. 유대 역사가였던 요셉프스(Josephus)도 십자가를 가장 비참한 죽음의 형틀이라고 언급합니다. 

그만큼 십자가의 죽음은 고통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셨기에 육체의 고통이 힘드셨을 것입니다. 그의 생명줄이 서서히 잘라지는 것이 안타깝고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으로는 예수님이 지금까지 보여주신 당당함이 변화된 것을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한 이해 때문일까요? 소크라테스는 죽음이 육체의 세계를 뛰어넘는 영혼의 자유함이라는 헬라철학 속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이란 쏘는 것이며 아픈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이란 생명이 단절되는 하나님의 징계며, 죄악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이 죽음이라는 형틀을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죽음이란, 하나님과의 생명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저주를 받고 버림을 받는 사건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이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는 바울이 가진 예수님 죽음의 이해와 죽음에 대한 기독교의 이해가 나타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라디아서 3:13)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율법의 저주, 아니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의 죄악 때문에 우리의 죽음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절대적인 단절을 경험하고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견디기가 어려우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가장 큰 슬픔은 단절일 것입니다. 사랑은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더불어 있기를 원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별이 아픈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게서 떠나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이 단절과 저주를 당신 몸으로 받아들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적인 모습으로 두려움을 극복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셨을까요? 예수님의 극복에는 몇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단계에는 인간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첫째, 슬픔과 외로움, 두려움을 예수님은 스스로 인정하셨습니다. 내가 이 고난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기독교 변증가인 C.S 루이스(C.S. Lewis)는 예수님의 죽음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인간으로서 참된 삶을 살았던 그 분만이 죽음의 공포를 온전히 맛볼 수 있었다.” 그 분이 참된 인간이었기 때문에 인간이 당하는 모든 슬픔과 탄식, 죽음의 두려움을 온전히 경험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난받는 의인으로서 이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자기 자신과의 마지막 싸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리는 고통까지 감내하고 계신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 다가와서 “당신은 서른세 살에 죽으라.”라고 한다면, 받아들이시겠습니까? 그것도 무섭고 혐오스러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게다가 내 잘못과 죄악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잘못과 죄악 때문에 죽으라고 한다면, 받아들일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그 길을 가셨습니다. 한편으로는 두려워하시면서도, 담담하게 그것을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위기를 극복하시는 첫 번째 단계였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마음을 나누셨습니다. “내가 두렵구나. 내가 참으로 놀라고, 죽기까지 괴롭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슬픔과 두려움을 제자들과 나누기를 원하셨습니다.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마가복음 14:34) 

심히 고민해서 죽기까지 고통스러운 마음을 예수님은 감추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제자들은 연약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아직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고통스럽게 기도하시는 중에도 잠을 자던 자들입니다. 아니, 마지막 순간에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이 부끄럽고 무서워서 도망갔던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 기대시며 당신의 연약함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제자들은 베드로였고, 야고보였고, 요한이었습니다. 대표로 뽑은 제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통에 참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슬픔과 두려움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듣고도 깊은 잠에 빠져 듭니다. 예수님이 그 모습을 보시며 물으십니다. 

...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마가복음 14:37) 

예수님은 안타까움을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또 한 번 이야기하십니다. “깨어 있어라.” 

두려움을 나누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아픔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우리에게도 외로움이 있고, 슬픔이 있습니다. 두려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마음을 믿음의 친구들에게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힘들고 괴롭다고, 어렵다고, 두렵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그리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두렵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겁쟁이로 조롱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특별히 남자들에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남자들은 세상의 치열한 경쟁 속에 들어가면서부터 끊임없이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런데 세상은 두려움을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세상은 겁쟁이를 싫어한다고, 남자는 눈물을 흘리지 말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모든 남자들은 두려움과 슬픔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박탈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표현하지 못한 마음들은 속에 쌓여 병을 만듭니다. 왜 한국의 40대 남자들의 사망률이 높을까요? 두려움을 표현할 데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차곡차곡 쌓아둔 두려움들은 때로 남을 비난하고, 조롱하며, 공격하는 데 표현됩니다. 나의 두려움을 다른 모습으로 발산하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한국 사회를 더욱 힘들게 만들고 있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마음을 듣고도 잠이나 쿨쿨 잘 제자들에게, 조금 있으면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갈 제자들에게 당신의 문제와 고통, 슬픔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예수님도 그리하셨으니 우리도 더 이상 속으로 감추지만 말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내에게, 때로는 자녀들에게 “아빠 위해서 기도해라. 두렵고 힘들다. 나를 좀 도와주지 않겠니?”라고 이야기를 하십시오. 

두려움이란 이야기를 하면서 반감됩니다. 부모님에게 이야기할 수도 있고, 친구에게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100% 기대를 못해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본질적인 슬픔과 두려움을 이겨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가변적입니까? 인간의 생각이 얼마나 자주 바뀝니까? 얼마나 변덕스럽고 간사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아픔과 두려움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두려움을 이기게 합니다. 

그리고 나서 세 번째 단계로 넘어갑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과 담판을 지는 것입니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마가복음 14:36) 

“아버지는 모든 것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내가 이 죽음의 잔을 마셔야 되겠습니까? 나는 마시고 싶지 않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까? 내가 아들의 권리를 상실하는 것, 이것이 마땅합니까? 아버지에게 저주를 받는 이 길을 내가 가야 됩니까?” 예수님은 애통해 하시며 하나님께 질문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당신이 애통해야 세상이 참된 위로를 받고, 당신이 두려워해야 세상이 하나님이 주시는 용기로 바뀐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당신이 슬퍼해야 이 세상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이 다시 위로를 받고 즐거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고통을 아시면서도, 제발 그 힘든 자리를 면할 수 있게 해 달라 말씀하시면서도, 우리의 슬픔과 외로움, 우리의 두려움 속에 당신 스스로 참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가복음 14:36) 

“이제 하나님께 맡기겠습니다. 이 길이 단절의 길이어도, 이 길이 두려움의 길, 저주의 길이어도, 이 길이 내 몸이 바스라지는 길이라 해도 주님께 나 자신을 맡기고 순종함으로 나아가겠습니다.” 당신에게는 순종만이 남았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두려움을 극복하신 모습입니다. 

우리가 구할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어떤 윤리학자가 콜카타의 테레사(Mother Teresa) 수녀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남은 인생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해서 명백한 답을 얻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도와줄지 묻는 테레사 수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뭐라고 기도해 드릴까요?”
“확실하게 대답을 얻도록 기도를 해주세요.” 

그때 테레사 수녀가 웃으며 말합니다. 
“확실한 답이야 말로 당신이 붙들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내려놔야 할 것입니다. 
확실한 답이란, 내 자신에게도 있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내게 늘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러니 당신도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문제들 앞에서 얼마나 많은 순간 확실한 답을 달라고 하나님을 불렀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답을 알지 못해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나의 전체를 맡기는 것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내 모든 것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답이 오고,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의 자리가 열립니다. 하나님께 위임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당면한 고통과 두려움의 최고 해결책입니다. 

다윗은 시편 27편10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시편 27:10) 

그런데 예수님은 그 하나님에게서마저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외면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마지막 보루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등을 돌리신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께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하나님, 내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제가 주님을 신뢰합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갖고 있는 두려움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갖고 있는 근심과 걱정, 외로운 탄식이 무엇입니까? 확실한 답을 알고 싶어서 “하나님 답을 주옵소서.”라고 수없이 외치고 있습니까? 

내 두려움, 아픔과 슬픔 모두를 믿음의 친구들에게, 아내에게, 남편에게, 부모님에게, 때로는 자녀들에게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다시 머리를 숙이십시오. 그리고 두려움 앞에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신 예수님처럼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내 뜻은 이러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해주세요. 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렇게 주님 앞에 나올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애 가운데 하나님의 비밀과 하나님의 응답을 보여주시고, 우리의 삶을 새롭게 열어주실 것입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김지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