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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3) : 사랑의 사도 요한 (요일 4: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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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만난 사람들(3) : 사랑의 사도 요한 (요일 4:7-21)

이런 옛날이야기가 있습니다. 경상도 어느 시골에서 같이 자란 처녀 총각이 있었답니다. 서로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지내다가 결혼을 하였답니다. 그런데 남편이 무뚝뚝해서 평생 한 번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답니다. 늙어 서울 큰 아들 집에 살게 되었답니다. 텔레비전을 보는데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나와 옛날이야기를 하며 서로 사랑을 고백했답니다. 

어느 날 할머니가 이것을 보다가 평생 한이 되어 며느리에게 말했답니다. “나도 저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사람들처럼 네 아버지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 번 들어 보는 것이 소원이다.” 그래서 며느리가 방송국에 신청하여 사랑을 고백하는 프로그램에 나가게 되었답니다. 사회자가 할아버지 앞으로 가서 사랑의 고백을 하라고 했으나 할아버지는 우물쭈물하며 말을 못했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기를 내라는 의미에서 박수를 쳤고, 사회자가 다시 한 번 할아버지에게 마이크를 댔답니다. 드디어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답니다. “니 알제?” 그 날도 사랑한다는 말을 듣지 못한 것입니다. 

며느리가 할머니를 위로해 주기 위해 한강에 가서 시아버지 시어머니에게 유람선을 태워 주었답니다. 신혼여행 무드를 품고 집에 들어온 할머니가 신혼 시절 이야기를 하며 잠자리에 들면서 할아버지에게 말했답니다. "그땐 우리가 잠자리에 들면 내 손을 잡아주곤 했죠." 할아버지는 손을 뻗어 잠시 손을 잡아 주었답니다. 잠시 후 할머니는 "그런 다음 키스를 해주곤 했죠."라고 말했답니다. 잠이 와 짜증이 났지만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살짝 키스를 하고 다시 잠을 청했답니다. 이어 할머니는 "그러고는 내 귀를 가볍게 깨물어주곤 했죠." 라고 말했답니다. 할아버지는 이불을 젖히고 자리에서 일어났답니다. "당신 어디가요?" 하고 할머니가 물었답니다. "이빨 가지러." 

사람이 만나 서로 사랑하고 산다는 것은 고귀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평생 한 번도 아내에게, 남편에게, 부모에게, 자식에게, 친구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못하며 사신 분이 있습니까? 어떤 분은 하루에 한 번씩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문자를 보내며 사시는 성도님도 보았습니다. 부부가 같이 앉아 있으면 “여보, 사랑합니다.” 공개적으로 한 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머님, 아버님, 사랑합니다.” “아들, 딸 사랑한다.” 예수 안에서 우리가 한 형제가 되었는데 주의 사람에게 인사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많이 많이 사랑합니다.”

예수님 제자 중에 가장 사랑을 강조한 제자가 오늘 소개하는 사랑의 사도 요한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가장 오래 사신 분은 사도 요한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제자로서 요한복음과 요한일서, 이서, 삼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랑의 사도입니다. 그는 갈릴리 지방의 어부인 세베대와 살로메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가장 먼저 순교한 야고보의 동생입니다. 배가 있고 품꾼들을 거느리고 사는 것을 보면 그의 집은 어느 정도 부유한 편이었던 것 같습니다(막1:20). 

어느 날 아버지를 따라 형인 야고보와 함께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았습니다. 고기를 잡고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그 현장에 와서 요한과 야고보를 부르시고 자신을 따르라고 했습니다. 이 때 요한과 야고보는 배와 부친을 두고 예수를 좇았습니다. 결단력 있었던 분입니다. 어부였던 요한이 예수님을 만나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직업이 새로워졌습니다. 성품이 새로워졌습니다. 사역이 새로워졌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면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만나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1. 우리는 예수님 만나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7, 11, 20, 21). 

예수님 만나 요한은 사랑의 사람으로 변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 만나 우레의 아들에서 사랑의 사도로 변화되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분은 요한이 기록한 말씀입니다. 그는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려 53번이나 기록하고 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고 말씀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것은 성도의 마땅한 의무라고 말씀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면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2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를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래 요한도 사랑의 사도는 아니었습니다. 

1) 그는 편협한 열성분자였습니다. 매우 성급한 사람이었습니다. 막3:17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그에게 별명을 줍니다. "(막3:17)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천둥 번개의 아들입니다. 그만큼 성격이 급하고 열정적이다는 말일 것입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광경을 본 요한이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다고 금해 버렸습니다. "(눅9:49)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요즈음 말하면 내 편이 아니면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비난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포용력이 있어야 하는데 포용력이 없었습니다. 편 가르기 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다른 권사님이 아무리 주방 봉사를 잘해도 내 편이 아니면 칭찬하지 않습니다. 편협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기준이 아니라 자기가 기준이 된 사람입니다. 흑백 논리로 사람을 생각한 사람이었습니다.

2) 그는 이스라엘이 최고라는 특권의식을 가졌습니다. 엘리트 의식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릇된 선민의식을 가졌습니다. 그릇된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방인을 마땅히 심판받아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외모나, 성별, 재산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경멸하는 그릇된 의식입니다. 차별의식이 강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다가 사마리아 한 촌에서 머물게 되었을 때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이 기거할 처소를 제공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멸시하였듯이 사마리아인들도 유대인들에 대해 적대감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은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분노를 발하였습니다. 그 때 그의 성격이 나타납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눅9:55)"라고 했습니다. 불을 내려 쓰러버리자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을 멸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는데 오해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주를 심판주로 오해한 것입니다. 생명의 귀중성을 모르고 잔혹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서기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열심을 가지는 것은 좋으나 지나쳐 오히려 유오디아와 순두게처럼 경쟁적으로 교회를 섬기다 파벌을 만들고 교회를 해롭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3) 예수님 가까이에 있는 야심가였습니다. 높은 벼슬을 기대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면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따라 다렸던 사람입니다. 베드로와 라이벌 의식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직분을 계급의식으로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섬김과 봉사를 위해 주어진 직분을 상하를 구분하는 계급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막10: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와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산 사람입니다. 

에릭 프롬은 그의 저서 '사랑의 예술'에서 사랑의 특성을 다섯 가지로 이야기했습니다. 사랑은 첫째로는 관심을 가지는 것, 둘째로는 책임을 느끼는 것, 셋째로는 존중하는 것, 네 번째로는 이해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경 고전 13장에서는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아직 이런 사랑이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타자 중심의 사랑, 하나님 중심의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십자가 가까이에서 온 인류를 위해 돌아가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적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배신하고 도망간 제자들을 찾아와 네가 나를 사랑하는냐를 말씀하신 예수님을 통해 참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오순절 성령 체험을 한 후에 완전히 사랑의 사람으로 변하였습니다. 그 후 사랑을 실천하고 사랑을 외치는 사랑의 사도로 변화되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복음을 전하다 에베소에서 잡혔다고 합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다 독사굴에 던짐을 받고 물속에 던짐받기도 하였지만 극적인 하나님의 보호로 살아났다고 합니다. 그의 몸은 만신창이 되어 들 것에 실려 다닐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는 들것에 실려 종종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 참석하여 사람들에게 이런 설교를 하였다고 합니다. "소자들아 서로 사랑하라" 그러자 한 성도가 "선생님 그 설교는 수십 번도 더하였습니다. 이제 새 설교가 없습니까?" 

요한은 다시 말하기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의 삶은 완전히 변화된 것을 봅니다. 앉은뱅이를 사랑하여 베드로와 함께 앉은뱅이를 고쳐주다 옥에 갇힙니다(행3:12-4:4). 우월주의, 엘리트주의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관심도 없는 사람입니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출세를 위해 신앙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편협한 열성분자가 아닙니다. 자신의 기분에 따라 사는 종교적 영웅주의자가 아닙니다.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행8:14). 베드로를 앞세워 일을 합니다. 예수님 만나 사랑의 사도로 변화되어 일평생 사랑을 실천한 사도로 살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우리도 무엇보다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사랑을 실천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실천해야 할 최고의 계명은 사랑입니다. 서기관이 예수님께 나와 질문합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막12:28)" 그 때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12:31)"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 13:13)"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한 형제 자매된 사람들입니다. 영적인 한 가족입니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건강한 교회, 좋은 교회는 사랑이 풍성한 교회입니다.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 사랑 없으면 소용이 없고 심오한 진리 깨달은 자도 울리는 징과 같네 하나님 말씀 전한다 해도 그 무슨 소용 있나 사랑 없으면 소용이 없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1-3)"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결정짓는데 있어서 유일한 표증은 사랑이다. 사랑만이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구별한다"고 했습니다. 페스탈로치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이 가까이 오신다."고 말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어디서도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은 우리 품안에 깃들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기독교 철학자로 라브리 운동을 하신 프란시스 쉐이퍼 박사는 사랑을 가르쳐 그리스도의 '제자의 뱃지'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것을 통하여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좋은 가정, 좋은 교회, 행복한 가정, 행복한 교회, 행복하 세상은 사랑이 넘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2.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한 그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11, 19). 

사랑의 사도 요한은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1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였은즉" 이같은 방법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했다는 말씀입니까?

9,10절 보십시오. 독생자를 보내시는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1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한 그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배반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았을 때, 우리가 사탄의 손아귀에 놀아나고 있을 때 하나님이 우리의 조건을 보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우리를 사랑한 그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의 출발점으로 볼 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줄임말로 만들면 “자사랑, 남사랑, 하사랑”입니다. 

1) 자기로 시작하는 사랑입니다. 자기 욕망에서 시작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이런 사랑은 철저히 이기적인 사랑이요, 에로스적인 사랑입니다. 이용가치가 있으면 사랑하고 이용 가치가 없으면 버립니다. 지극히 감정적이고 말초적인 사랑이 되기 쉽습니다. 보상적인 요구가 거절당하면 증오로 변하여 버리는 것이요, 그 사랑 뒤에는 미움이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2) 상대방로부터 시작되는 사랑입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사랑입니다.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것입니다. 조건적이고 상대적인 것입니다. 조건이 달라지면 금방 배신하고 증오하고 이용합니다. 

3)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사랑입니다. 사랑할 만한 가치가 없고 사랑해도 그 보상을 기대할 수 없음에도 먼저 사랑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주님께서 사랑했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하나님의 본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었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그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살인마를 자신의 양자로 삼은 손양원 목사님이 실천한 사랑입니다. 이것이 문둥이가 된 성자 다미엔 신부의 사랑의 실천입니다. 하와이 군도 몰리카 섬에서 문둥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 자신도 문둥이가 된 다미엔이 실천한 사랑입니다. 

스티브 세인트가 쓴 '창끝(End of Spear)'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창끝'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져 상영되었습니다. 휘튼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짐 엘리엇을 비롯한 5명의 크리스천 젊은이들이 남미 에콰도르의 와오다니(아우카)족에게 복음을 전한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선교사로 갔다 모두 아우카족의 창에 찔려 살해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내들이 남편들의 뒤를 따라 아우카족에게 들어갔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자신들의 남편을 죽인 사람들은 정성껏 섬겼습니다. 추장을 비롯한 모든 아우카족들이 이들의 헌신에 감동했습니다. 부인들이 본국으로 떠날 때에 아우카족 추장이 물었답니다.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우리를 위해 이 고생을 하십니까?" 엘리엇의 부인 엘리자벳이 말했습니다. “남편들은 하나님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당신들이 그들을 죽여 뜻을 이루지 못했지요. 우리는 남편들이 그렇게도 당신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을 들려주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 말이 무엇이냐고요?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입니다.”엘리엇 등을 창으로 찔렀던 5명의 아우카 사람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답니다. 그 가운데 4명은 목사가, 한 명은 전도자가 되었답니다. 아우카족 전체가 복음을 받아들였답니다. 5명의 아우카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푼 사람이 살해된 5명 선교사 가운데 한 명인 네이트 세인트의 아들 스티브 세인트 선교사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랑해야 할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주의 사랑으로 사랑하여야 합니까?

3. 우리는 사랑하라는 계명을 받았기 때문에 그 명령을 실천하는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21). 

21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라는 명령을 주님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은 명령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랑하라는 것은 우리 주님의 명령입니다. 거역하느냐 순종하느냐 둘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죄와 의의 문제입니다. 형벌과 상급의 문제입니다. 실천의 문제요 의지의 문제입니다. 창조와 파괴의 문제입니다. 사랑하면 창조되나 사랑하지 않으면 파괴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의지적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우리가 사랑하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1)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을 하지말라는 것입니다(7절). 
물론 사랑은 거듭남의 조건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사람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조건이 됩니다. 즉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음을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2)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안다고 말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7).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대는 두 가지 길이 있는데 그 하나는 말씀을 통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순종을 통해서 입니다. 순종함으로 경험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도 하나님을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3)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모시고 산다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16). 

12-16절에서 네 번이나 강조됩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소한 것 때문에 원수가 되어 미워합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상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만 되면 문제는 해결되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하고 이해하고 존중해주고 내가 오래 참고 내가 주면 시간 지나면 모든 것은 해결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소중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남편은 남편이라는 하나의 이유로, 아내는 아내라는 하나의 이유로, 부모는 부모라는 하나의 이유로, 자식은 자식이라는 하나의 이유로, 성도는 성도라는 하나의 이유로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는 사랑해야 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아들딸들입니다. 십자가의 댓가를 치르고 한 가족된 사람들입니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 느껴질 정도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그렇게 많은 시간들이 있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하기에도 부족한 시간들입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현실은 어떻습니까? 감각적 사랑이라는 말을 홍수가 되어 넘쳐 흐릅니다. 진정한 사랑은 시들어가고 있습니다. 말세가 되면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24:12)”라고 예수님께서 예언해 주셨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서를 통하여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딤후 3:1)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딤후 3:2)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딤후 3:3)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딤후 3:4)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딤후 3:5)”라고 말씀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우리 성도를 사랑의 대상으로 보지 못하고 고소 고발의 대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요즈음 교회들을 보면 얼마나 고소 고발이 남발되고 있습니까? 장로님이 목사님을 목사님이 장로님을, 집사님이 집사님을 서로 고소 고발합니다. 지난 2006년 대법원에서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당시 1년간 진행된 총 민사소송 건수는 총 379만 건이었으며, 그 중 교회와 관련된 건수가 69만여 건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전체 소송건수의 약 18%에 이르는 수치로, 교회갈등으로 인한 법정소송의 비율이 상당히 높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후의 정확한 통계자료는 아직 나오고 있지 않지만, 현재 교회의 내부갈등으로 인한 소송건수는 아마 그보다 훨씬 만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해야 할 대상들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을 해야 합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은 도미티안 황제의 핍박 속에서도 서로 사랑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 맹수들에게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밤이면 십자가에 매달려 화형을 당합니다. 때로는 끓는 물속에 들어야가야 만 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사랑 때문에 자기의 목숨도 내어 놓은 사람들도 있는데 작은 이해관계로 사랑하지 못하고 서로 고소고발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네 사람의 군목을 위한 기념 예배당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사랑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연이 이렇습니다. 1943. 1. 22 폭스, 구스, 폴링. 웨싱턴 군목이 '도체스터 호'에 승선하였다고 합니다. 그해 2월 3일 55분 독일 잠수함 u-233 이 도체스터 호에 접근하였답니다. 얼마가지 안아 도체스터 호는 어뢰를 맞고 점점 물에 잠기기 시작했답니다. 네 명의 군목은 잠기어 가는 함정 속에서 병사들을 진정시키고 구명정을 커내어 주기 시작하였답니다. 사용할 수 있는 구명정은 모두 바닥이 났습니다. 마지막 남은 구명정까지 모두 꺼내어 주고 그들은 갑판에 어깨를 맞잡고 섰습니다. 그들은 어깨를 맞잡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배는 점점 가라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날 배에 따고 있던 병사 904명 중 605명이 전사하였습니다. 물론 전사자 명단에는 장렬하게 죽어간 4명의 군목명단도 끼어 있었습니다. 1951. 미국 국민은 네 목사 기념 예배당을 건립했다고 합니다. 

1961. 1. 18 의회 표결로 "그들의 영웅적 행위에 대한 특별훈장"을 수여하였고 그들이 천국에 간 2월 3일을 네 군목을 위한 기념일로 정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내 마음에는 맞지 않고, 아직 내 마음에 증오가 가시지 않고, 아직 미운 감정이 정리 되지 않았고, 계속해서 피해를 주고, 괴롭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방법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 때 우리 삶은 사랑의 기적이 일어날 것이고, 우리 가정과 교회 사회는 사랑으로 감동이 넘치는 살만한 땅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 사랑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오늘 말씀 20-2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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