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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니엘의 감사 (단 6: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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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의 감사 (단 6:10,28)   
 
 
단 6:10,28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대로 하루 세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이 다니엘이 다리오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

유치원에 다니는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아이는 잠자리에 들기 전이면 언제나 예쁘게 무릎을 꿇고 또 두 손을 깍지끼고 고개를 수그리고는 경건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오늘밤에 우리 가족 모두를 지켜 주셔서 잠 잘 자게 해 주세요. 우리 아빠 하시는 사업도 잘 되게 해 주시고, 우리 가족들의 건강도 지켜 주세요."
그리고 나서 그 아이는 그대로 잠자리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는 다시금 일어나서 그 날 유치원에서 배운 율동과 노래를 멋있게 한 번 하고는 잠자리에 들곤 했습니다. 
하루는 그의 어머니가 아이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겨 그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너는 기도가 다 끝났으면 잠자리에 들어야지, 왜 자기 전에 꼭 그렇게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르느냐?"

아이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기도하는 동안에는 그저 하나님께 내 부탁만 드렸잖아요.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어요. 그래서 유치원에서 배운 노래와 율동으로 하나님을 잠시라도 기쁘게 해 드리고 싶어서요."
얼마나 예쁩니까? 우리보다 나은 줄 압니다. 우리는 그 동안 하나님께 "이것도 해 주시고 저것도 해 주시고"라며 무척이나 졸라대면서 많은 요구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기도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족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오늘 하루만큼이라도 하나님께 졸라대는 간구는 보류하고, 하나님께 참된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잊지 말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이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헬라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아내인 크산티페는 소문난 악처였습니다. 하루는 소크라테스가 제자들과 함께 이런저런 토론을 하느라 집에 늦게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크산티페는 그를 향하여 바가지를 긁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남자가 되어서 처자식이 굶는지 안굶는지도 모르고 밖으로만 쏘다니면 다예요? 들어오기는 왜 들어와요? 차라리 나가서 살지!"
그러면서 바가지에 찬물을 담아서 물벼락을 씌웠습니다. 그러니 소크라테스가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그런데도 소크라테스는 쓴웃음을 짓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금 전에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니 결국 물벼락이 떨어지는구먼."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크라테스의 친구는 참다못해 그를 밖으로 불러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여보게! 어떻게 저런 여자하고 일평생을 같이 살 수 있겠나? 그러니 지금이라도 갈라서는 것이 낫지 않겠나?"
그 때 소크라테스는 이런 명언을 했습니다. 
"아닐세! 나는 늘 내 아내로 인해서 감사한다네. 생각해 보게나. 만일 내게 저런 악처가 없었더라면 내가 어떻게 철학자가 될 수 있었겠는가?"
그렇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고, 고쳐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감사할 일뿐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그것도 자기를 모독하고 악담을 퍼붓는 악처로 인해서 감사하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늘 하나님의 은혜를 듬뿍 받고 사는 우리들이야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으로 인해서 감사하고, 또 내 주변에 있는 모든 것으로 인해서 감사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다니엘의 감사를 잠시 생각해 보면서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바벨론이 멸망을 당했습니다.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게 되었습니다. 다리오 왕은 전국에 120명의 방백을 세웠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나라를 다스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 위에 총리 셋을 세웠습니다. 방백들을 감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총리 셋 중 한 사람이 바로 다니엘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워낙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다니엘은 자연히 다리오 왕의 신임을 얻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다른 두 총리와 또 그들을 지지하는 방백들 가운데 일부가 다니엘을 시기했습니다. 다니엘을 올가미에 덮어씌우기 위해서 한 가지 음모를 세웠습니다. 그들은 왕을 부추겨서 하나의 법령을 만들었습니다. 왕의 권위를 실어주겠다는 명분으로 앞으로 30일 동안 왕 이외에 누구에게든지 무엇을 구하거나 또는 어떤 신에게 기도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사자 굴에 집어던진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다니엘도 왕의 법령이 어떠한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어떻게 했습니까? 평소처럼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있는 창문을 활짝 열어놓은 뒤 무릎을 꿇고 하루에 세 번씩 변함없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것도 불평하고 원망하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10절 끝 부분입니다.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다니엘은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니엘은 왕의 법령을 어겼기 때문에 사자 굴에 던지움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셔서 그를 보호해 주셨습니다.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사자 굴에서도 그의 몸 하나 상하지 않고 그대로 무사했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의 원수를 갚아 주셨습니다. 다니엘을 모함했던 자들을 다니엘 대신에 사자의 밥이 되어버리게 했습니다. 왕이 바뀌고 시대가 바뀌었지만 다니엘은 하나님의 축복 속에 그가 사는 날 동안에 형통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본문의 줄거리입니다. 다니엘의 감사를 세 대지로 나누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다니엘이 어떠한 때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는지 살펴봅니다.

1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다니엘은 자기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사자 굴 속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10절 끝 부분 말씀입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그는 사자 굴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시련이 그의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감사는 신앙의 문제이지, 환경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다니엘처럼 환경에 따라서 좌우되지 말고, 신앙인답게 늘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독일의 신학자 본 회퍼는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불평과 원망을 일삼는 사람은 비기독교인이다. 그러나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바로 기독교인이다."
감사는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표지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떠한 형편 속에서도 감사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 20장 "다 감사 드리세"가 지어진 배경은 이렇습니다. 작시자 마르틴 린카르트(Martin Rinkart(1586∼1649)는 17세기 독일교회를 담임했던 목사님이었습니다. 그 당시 독일을 비롯해서 전 유럽에는 아주 무서운 흑사병이 나돌고 있었습니다. 그 병으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심지어 린카르트 목사님의 아들조차도 흑사병에 걸려서 죽었습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장례를 치러야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날은 린카르트 목사님의 교회에서만 50명의 장례식을 한꺼번에 치를 정도였습니다. 그 때 린카르트 목사님이 작사한 찬송이 "다 감사 드리세"였습니다. 
"다 감사 드리세 온 맘을 주께 바쳐… 감사와 찬송을 다 주께 드리어라."
내 온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자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감사는 신앙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환경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욥이 많던 재산을 다 약탈당해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사고로 죽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욥1:21의 말씀입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그는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드렸습니다. 감사는 신앙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에 보면 마게도냐 교인들이 풍성한 감사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풍성한 감사를 드렸습니까? 그들의 삶이 풍요로워서 감사를 드린 것입니까? 아닙니다. 고후8:2의 말씀입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감사는 신앙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감사가 환경에 좌우되면 안됩니다. 
사실 신앙심이 없는 사람은 환경이 아무리 풍요로워도 감사할 줄 모릅니다. 사울 왕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나라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없으니까 감사하지 못하고, 그의 마음 속에는 불평과 원망이 가득차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도 그러했습니다. 농사가 잘 되었습니다. 창고를 새로 짓고 곡식을 가득 쌓아 놓았습니다. 그러나 신앙심이 없으니까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이 열 명의 문둥병자를 낫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아홉 명은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신앙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찰스 브라운이라는 사람이 예수님께 감사하지 않았던 아홉 명의 심리를 아주 재미있게 추리해 놓았습니다. 제가 잠시 소개해 드립니다.
첫번째 사람은 "병이 진짜 나은 것인지 아닌지 한 번 확인해 봐야겠어." 그러면서 아마도 그는 제사장에게 뛰어갔든지 그렇지 않으면 의원에게 달려가서 자기의 몸을 보였을 것입니다. 
두번째 사람은 "병이 낫기는 했지만 과연 이것이 앞으로도 지속될 수 있을 것인지?" 나병이 재발할지도 또 후유증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좀 더 두고보아야겠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가서 다 나으면 감사하겠다는 생각을 가졌을 것입니다.

세번째 사람은 "천천히 주님을 찾아보면 될 것 아닌가?" 그러니까 더러운 옷도 갈아입고, 목욕도 깨끗이 하고, 또 예물도 준비해서 정식으로 나중에 찾아뵈어야겠다고 감사하는 것을 미루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네번째 사람은 "이제 보니 나병이 아니었던 것 같아!" 애당초 나병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마도 오진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 감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섯번째 사람은 "약간 나은 정도야." 겉에 있는 부스럼은 떨어져도 아마 속에는 아직도 나병이 남아있을지 모른다며 감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섯번째 사람은 "제사장에게 가서 감사드렸을 것이다." 일단 제사장에게 뛰어가서 자기의 몸을 보이고 나서 나았다는 것을 완전히 보장받고 난 뒤에 마음대로 거리를 활보하면서 돌아다녀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일곱번째 사람은 "주님께서 나를 위해 특별히 애쓰신 것도 별로 없는데 뭐…" 사실 예수님이 하신 것이라고는 말씀하신 것밖에는 없었습니다. "너희 몸을 제사장에게 가서 보여라." 약을 발라주신 것도 아니고, 상처부위에 손을 얹고서 애써 안수 기도해 주신 것도 아니니까 특별히 예수님께 감사할 것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여덟번째 사람은 "이런 것은 랍비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데 뭐…"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니까 감사할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홉번째 사람은 "사실 나는 이미 회복되고 있었다구." 예수님 때문에 자기가 나은 것이 아니고, 나을 때가 되어서 저절로 나았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아홉 사람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열번째 사람은 돌아와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단순했습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나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또 나 혼자 돌아가서 예수님께 감사하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여길지 그런 것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병을 낫게 해 주셨으니까 당연히 예수님께 돌아가서 감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되돌아가서 엎드려 사례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상하게 여기시며 물으셨습니다.
"너희 열 사람이 다 나음을 받지 아니했느냐?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
다 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를 드렸어야 마땅한데 한 사람만 돌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서 가라.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감사는 신앙의 문제인 것을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없는 사람은 환경이 아무리 좋아도 감사하지 못합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감사하였더라."

다니엘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니엘의 감사가 우리의 감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다니엘이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었던 이유를 살펴봅니다.

다니엘에게 있어서는 감사하는 생활이 체질화되어 있었습니다. 습관화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10절 하반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대로 하루 세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다니엘에게 있어서는 늘 감사하는 생활이 몸에 배였습니다. 그 날 처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한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니 어려운 시련 속에서도 몸에 배인 대로 변함없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감사생활을 계속해서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서신서를 쓸 때 첫머리에 인사말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나서 본문을 시작할 때 언제나 제일 먼저 감사로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을 것입니다. 교훈도 해야되고, 잘못된 것을 충고도 해야되고, 책망도 해야 되었습니다. 할 말이 많았지만 바울은 그런 것을 다 뒤로 접어두고, "첫째는"하면서 하나님께 먼저 감사드리는 일로 시작을 했습니다. 감사를 체질화한 것입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마다 또 무엇을 생각하든지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일단 감사부터 하고 나면 절로 마음 속에 있는 불평과 원망은 사라집니다. 그런데 감사하지 아니하고 답답한 이야기부터 꺼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감사는 다 잊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감사를 체질화해서 감사하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 마음 속에는 절로 평안이 찾아옵니다. 불평과 원망은 사라집니다.

미국의 발명왕이었던 토마스 에디슨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실수로 고막을 다쳤습니다. 나이가 들면서부터 귀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의사는 진찰해 보더니 그에게 수술을 하면 나을 수 있을 것이라고 권장했습니다. 그래서 날짜를 잡아놓고 수술을 하기로 했습니다. 
약속한 날이 되었습니다. 의사는 수술준비를 다 끝내놓고 나서 에디슨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다 되어도 그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기다리다 못해서 의사는 에디슨을 찾아갔습니다. 그랬더니 에디슨이 자기 연구실에 앉아서 연구에 몰두를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의사는 깜짝 놀라서 에디슨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수술 안받으실 것입니까? 지금 수술을 안하시면 영영 귀가 먹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랬더니 에디슨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시끄러운 소리, 세상의 잡소리는 안듣는 것이 더 났겠네요. 차라리 귀머거리로 지내는 것이 내가 연구하는데 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는 수술을 안받았습니다. 남은 여생을 귀머거리로 지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 자기가 귀머거리가 된 것을 감사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평소에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왔으니까 가능한 것입니다. 

그가 67세가 되었을 때입니다. 그의 집에 큰 불이 났습니다. 다 타버렸습니다. 때마침 에디슨은 집에 없었습니다. 그의 아들만 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불길이 타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에디슨의 아들은 아버지 걱정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일평생 동안 애써 발명해 놓은 것들이 다 잿더미가 되는 것을 보면서 이런저런 걱정에 휩싸였습니다. '아버지가 얼마나 충격을 받으실까? 나이가 67세나 되셔서 회복하시기도 어려우실 텐데… 아버지 마음에 상처가 얼마나 크실까?' 그 때 외출하고 돌아오던 에디슨은 집에 불길이 타오르는 것을 보고서 아들에게 대뜸 이렇게 말했습니다.

"Where is your mom(얘야, 엄마 어디 있니)? 빨리 엄마 모시고 오너라! 그리고 엄마 친구들도 다함께 모시고 오너라! 아마 우리의 일평생 동안 저렇듯 현란하게 타오르는 불꽃놀이는 두 번 다시 구경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들은 놀랐습니다.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데 에디슨은 또 이렇게 일러주는 것이었습니다.
"얘야, 저 불길은 어차피 우리가 잡을 수 없지 않니? 그렇다고 해서 우리 마음의 여유까지 잃을 수가 있겠느냐? 우리 얼굴의 웃음을 잃어서야 되겠느냐? 불탄 것은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다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그의 넉넉한 마음, 그의 아름다운 신앙이 얼마나 귀합니까?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이 늘 감사하는 생활이 체질화되기를 바랍니다. 기쁠 때도 감사하지만 슬플 때도 감사하고, 즐거울 때도 감사하지만 괴로울 때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해서 늘 감사가 습관화될 때 우리도 다니엘처럼 어려운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감사하는 삶을 계속할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다니엘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후 결과를 살펴봅니다.

다니엘이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6:28의 말씀입니다.

"이 다니엘이 다리오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

그냥 다니엘이라고 하지 않고, "이 다니엘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어떤 다니엘입니까? 역경 속에서도 감사를 잃지 않았던 다니엘이었습니다. 감사를 체질화했던 다니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는 사자 굴에 던지움을 당했지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셔서 다니엘을 지켜주셨습니다. 사자들의 입을 봉하게 하셨습니다. 그 몸이 하나도 상치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의 원수를 갚아 주셨습니다. 다니엘을 모함했던 자들은 다니엘을 대신해서 사자의 밥들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뒤에 왕이 바뀌었습니다.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축복은 다니엘과 늘 함께 하셔서 그는 언제나 형통한 삶을 살았습니다. 변함없이 감사하는 삶을 살았던 다니엘이기에 하나님의 축복도 변함없이 늘 그와 함께 하면서 그의 삶을 형통하게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감사의 결과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까지 말했습니다.
"감사는 그저 드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늘에 저축하는 것이다."

이자까지 다 해서 하나님이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아들 이삭을 주셨습니다. 바치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아들이니까 아브라함은 기꺼이 감사한 마음으로 자기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받으시고 어떻게 했습니까? 창25:2에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덤으로 여섯 명의 아들을 더 주셨습니다. 이것이 감사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한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에게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나아와서 아들을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이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에게 사무엘을 주셨습니다. 한나는 너무나도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아들이기 때문에 사무엘을 하나님께 헌납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받으시고 덤으로 다섯 자녀를 더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한 어린 아이가 자신의 도시락을 예수님께 기꺼이 바쳤습니다.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오병이어, 곧 보리떡 5개와 소금에 절인 왕멸치 2마리가 다였습니다. 예수님은 보잘 것 없는 것이지만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셨습니다. 그 때 그곳에 있는 5,000명이 다 배불리 먹었습니다. 한 사람의 도시락이 감사하고 나니까 5,000배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도 남은 조각이 열 두 광주리나 차게 거두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뜻깊은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작은 정성이지만, 오늘 감사한 마음으로 우리 주님께 드리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에 비하면 우리가 아무리 많은 물질을 바친다고 해도 사실은 보잘 것 없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것을 기쁘게 받으시고 5,000배의 축복으로 우리 모두에게 다시금 되돌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도 열 두 광주리가 차고 넘치게 거두는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옛날 미국에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만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병원에서 그의 다리 하나를 잘라내 버렸습니다. 험한 세상에서 두 다리를 가지고도 살기 어려운데 한쪽 다리가 잘려나갔으니까 얼마나 낙심이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곰곰이 생각하는 가운데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하나님이 교통사고 가운데서도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도록 지켜주신 것을 감사하자. 그리고 두 다리를 다 잃지 않고 한쪽 다리가 남았으니까 그것만으로도 감사하자!' 그러면서 그 때부터 그는 마음을 고쳐먹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교통사고 가운데서도 저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쪽 다리를 남겨주신 것 감사합니다. 주여! 이 남은 한쪽 다리를 가지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기를 원합니다."

그 뒤에 그는 신학교로 들어갔습니다. 졸업을 하고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로 건너갔습니다. 그 때 그의 선교지에는 식인종들이 아직도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식인종들이 그 선교사님을 잡아먹기 위해서 덮쳤습니다. 그는 얼른 자기가 달고 있는 고무다리를 빼서 던져주었습니다. 식인종들은 "이게 웬 다리냐?"며 기뻐했습니다. 그리고는 씹으려고 하는데 그것이 씹히겠습니까? 
식인종들은 너무나 놀랐습니다.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저 사람은 신이다!' 그래서 무조건 그 선교사님의 말이라면 다 듣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식인종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감사의 축복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이런저런 역경과 시련이 임할 때가 있습니다. 믿음이 좋은 다니엘에게도 시련이 있었는데 왜 우리에겐들 없겠습니까? 그러나 역경만 바라보지 마십시다. 다니엘처럼 역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 모두 감사의 창문을 활짝 열어보십시다.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에게도 다니엘처럼 모든 시련이 물러가고 더 큰 축복, 더 큰 감사의 조건들이 우리 앞에 다가오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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