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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 (히 11:32-38)


전화기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미국 필라델피아 근교 시골 마을에 살던 폴 빌리아드라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엄마가 가끔씩 전화기를 집어들고 "교환수"라고 부르면, 엄마가 원하는 곳에 전화를 연결시켜 주고, 모르는 전화번호를 척척 가르쳐주는 모습을 보면서 이 소년은 전화기가 마치 요술기계처럼 너무 신기해 보였습니다.

하루는 엄마가 외출을 하고 아무도 없을 때 망치를 가지고 놀다가 손가락을 쳐서 피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어쩔 줄을 모르고 당황하던 이 소년은 갑자기 전화 교환수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엄마처럼 전화를 집어들고 "교환원!"하고 불렀습니다.  그랬더니 "네, 교환원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이 소년이 대답을 합니다.  "제가 망치를 가지고 놀다가 손을 다쳤어요.  어떻게 해요?"
 어린 소년의 목소리인 것을 알게 된 교환원은 이렇게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엄마가 집에 없는 모양이지요?"  "네, 집에 안 계셔요."  "많이 다쳤어요?"  "조금 다친 것 같아요."  "그래요.  그러면 혹시 집에 얼음이 있나요?" "예, 얼음이 있는 것을 봤어요."  "그러면 얼음 조각을 아픈 손가락에 대고 기다려 봐요.  괜찮아질 거에요."  교환수는 참으로 친절하게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너무 좋았던 이 소년은 그 다음부터 자주 전화를 걸었습니다.  어떤 때는 하루에 두 번 세 번도 걸었습니다.  심지어 학교에 들어간 후에는 숙제를 하다가 모르는 것까지 물었다고 합니다.  한 번은 자기 집에서 기르던 카나리아 새가 죽었을 때 전화를 걸어서 "우리 집 새가 죽었어요.  너무 슬퍼요."라고 했더니 교환수는 소년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카나리아가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또 다른 세상을 준비하셨다고 저는 믿어요.  나는 폴도 그 세상을 믿었으면 좋겠어요.  거기에서 네가 좋아하는 카나리아의 노래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게 될 거에요."

이 소년이 조금씩 성장하면서 자기가 교환수에게 전화를 하는 것이 얼마나 교환수에게 폐를 끼치는 것인가를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이 소년은 이제 더 이상 전화 거는 것을 중단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세월이 지나가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면서 고향 마을을 떠나게 되었을 때 갑자기 그 교환수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녀에게 사과할 마음으로 다시 전화를 걸었습니다.

"저 폴이에요."  교환원은 그 소년의 목소리를 알아차리고 반갑게 인사를 받았습니다.  "정말 오랜만이네요.  정말 궁금했어요.  잘 있었어요?"  그러면서 교환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무척 조바심을 가졌어요.  사실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제 이름은 샐리라고 해요."  사실 교환원은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지만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면서 용무를 물었습니다.

"사실 오늘은 제가 사과를 드리려고 전화를 들었어요.  제가 어렸을 때 너무나 귀찮게 해 드렸죠?  그렇지만 그때 저는 정말 외로웠어요.  엄마가 밖에 일하러 나가시면 저는 집에 혼자 있는 것이 무서웠거든요.  그런데 당신은 저에게 너무나 커다란 힘이 되었어요.  저에게 당신은 너무나 소중한 존재였어요.  당신은 저의 기쁨이었으니까요.  그것을 알았으면 해서 사과의 말씀과 함께 전화를 드린 거에요.  저는 이제 고향을 떠나 대학으로 간답니다."

이때 뜻밖에 교환원 샐리라는 여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폴, 사실을 말하자면 그 당시에 당신이 나에게 커다란 기쁨이 되었어요.  저는 아이가 없거든요.  그래서 폴이 전화를 할 때마다 내 동생처럼, 내 아이처럼 느꼈어요.  그 당시 당신의 존재는 내게 너무나 소중했고, 전화를 걸어주는 것이 전혀 나에게는 싫증이 아니었고, 저의 기쁨이었어요.  이 사실을 꼭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 혹여 이런 생각을 해 보신 일이 있습니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기도를 다 듣기에 하나님이 얼마나 바쁘실까?  그런데 나까지 기도를 해서 하나님께 민폐를 끼치는 것은 아닐까?"

그때 하나님은 어떻게 대답을 하실까요?  저는 이렇게 대답을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내 아이들아, 네가 나에게 기도할 때마다 그것이 나에게 짐이 아니었단다.  사실 너는 나의 기쁨이었으니까.  너는 나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란다.  그래서 나는 너와 대화를 하고, 너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나에게는 커다란 기쁨이었단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히브리서 11장을 가리켜서 우리는 '믿음의 장'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는 많은 믿음의 선배들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난 믿음의 선배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그들은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노력과 어떤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의 기쁨이었어.  너는 나에게 나무나 소중한 존재야."  그들은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오히려 더 큰 위로와 사랑을 경험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히브리서 11장의 중심 되는 요절이 있다면 그것은 6절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다같이 6절의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봉독했던 본문의 앞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믿음의 선배들을 한 사람 한 사람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이런 무수한 선배들의 인생 승리를 집합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 이삭, 모세, 라합과 같은 사람들만 믿음으로 산 것이 아니라 하늘의 별처럼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어떻게 인생 여정에서 믿음으로 승리했는가를 집단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경험할 수 있었던 인생에서의 승리의 패턴은 다시 두 가지 유형으로 관찰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승리하는 믿음의 두 가지 유형은 무엇일까요?  그 하나가 능동적인 형태의 믿음이라면, 또 하나는 수동적인 형태의 믿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동일하게 승리를 가져왔습니다.

승리하는 두 가지 유형 가운데 그 첫째는 정복하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다른 말로 하면 능동적인 믿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여러 경우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기적들을 경험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삶의 고난을 정복합니다.  이것은 정복자의 믿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32절부터 보십시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의 신앙 선배들이 체험했던 기적의 믿음들을 증언하기 시작합니다.  먼저 이런 기적들을  경험했던 여러 사람들의 이름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3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는 사사들입니다.  그리고 다윗과 사무엘로부터 시작되는 선지자들입니다.  사실 이들에 대해서 다 말하려고 하면 제게도 시간이 너무 부족합니다.  그래서 그냥 지나가겠습니다.

33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이 말씀 앞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들이 생각나십니까?  아마도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전쟁들이 생각날는지도 모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에 그 땅을 기업으로 삼기 위해서 많은 전쟁들을 치루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당당하게 승리할 수 있었던 원인은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라."  여호수아는 그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전진했고, 마침내 승리를 얻어낼 수가 있었습니다.

본문 33절을 보면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아마도 이 말씀은 히브리서 기자가 엘리야의 사건을 생각하면서 기록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엘리야가 살았던 시대에 이스라엘의 통치자는 아합이라는 왕이었습니다.  강력했지만 부패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전역에 우상의 재단을 만들고 백성들에게 우상을 강요했습니다.  연약한 한 개인이 강력한 통치자 앞에 나타나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는 감히 하나님의 공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의를 외쳤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불의한 그 땅에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데 쓰임 받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약속을 받기도 하며"  여호수아는 마침내 믿음으로 그 약속을 받아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 땅이 하나님의 기업이 되는 것을 바라볼 수가 있었습니다.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이 말씀에서 누가 생각이 나십니까?  다니엘입니다.  그가 사자의 굴속에 던짐을 받았지만 그의 목숨이 보존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입니까?  다니엘 6장 23절에 보면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왕이 심히 기뻐서 명하여 다니엘을 굴에서 올리라 하매 그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즉 그의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의 하나님을 믿음이었더라."  여기에 보면 그가 사자의 굴에서 보호될 수가 있었던 원인을 그가 자기의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그를 살린 것입니다.

계속해서 3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칠 배나 뜨거운 풀무불 속에 들어갔지만 살았던 사람은 누구입니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라는 다니엘의 세 친구들입니다.  당시 느부갓네살 왕은 거대한 우상을 만들어놓고 모든 국민들에게 참배를 강요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 3장 17절에 보면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왕이 우리를 활활 타오르는 풀무불 속에 던져 넣을지라도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내실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불의 세력을 이겼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불의 세력을 이긴 것은 물이 아니라 믿음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계속해서 믿음으로 승리한 기적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우리는 여기에서 사울의 칼을 피해 목숨을 보존했던 다윗이 생각이 납니다.  사무엘하 22장에 보면, 다윗은 자신이 사울의 칼에서 승리한 이후에 하나님 앞에 이렇게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  다윗이 시편에서 자주 고백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방패시요, 나의 피난처가 되신다."  하나님께서 사울의 칼날에서 지켜주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믿음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모세가, 여호수아가, 다윗이, 그리고 모두가 하나님을 의뢰하고 전장에 나아가 승리했습니다.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35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계속해서 믿음의 사건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우리는 여기에서 엘리야와 엘리사의 사건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려 냈습니다.  모두가 믿음이 가져온 기적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믿었던 동일하신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이 세상 도처에서 지금도 기적을 행하시고 계십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하나님은 어제의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오늘 우리와 함께 역사하시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을 뜨면 이 세상에는 그분의 기적으로 충만합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자신의 짧은 인생에서 가장 많은 기적을 체험한 사람을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죠지 뮬러를 들 수가 있습니다.  죠지 뮬러는 자신이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던 기도의 응답만 해도 5만번이 넘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기적의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별명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믿음이 기적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죠지 뮬러에게 있어서 꼭 불가능한 일로 보여지는 사건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가 젊었을 때부터 아주 친했던 다섯 명의 친구가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가 기도를 시작한지 수개월만에 한 친구가 예수를 믿었습니다.  10년만에 두 친구가 믿었습니다.  25년만에 또 한 친구가 예수를 믿었습니다.  이제 한 명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 한 명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믿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뮬러는 아직도 믿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 한 친구를 위해서 52년을 기도했습니다.  아예 비교가 되지 않으면 놀라지도 않습니다.  한 사람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 52년을 기도했습니다.  그래도 믿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은 이것을 가리켜 뮬러를 겸손하게 하기 위해 주님께서 주신 유일한 불가능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뮬러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불가능은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제 믿음의 분량이 차면 그래서 하나님의 때가 되면 반드시 믿을 것입니다.

그리고 뮬러가 죽었습니다.  그럼에도 친구는 여전히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죠지 뮬러의 장례식장에서 자신을 위해 52년간이나 기도를 했던 뮬러를 생각하면서 이 친구는 통곡과 오열 속에서 드디어 주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은 뮬러의 믿음을 져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뮬러의 믿음은 마침내 친구의 영혼을 정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불가능을 넘어서는 기적의 힘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 번은 뮬러가 알콜중독자를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가 죠지 뮬러를 말렸습니다.  그들은 알콜중독에 찌들어 있는 그는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때 뮬러는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주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을 믿으십니까?"  "믿지요."  "그러면 동일하신 주님께서 포도주를 물로 바꿀 수 있다는 것도 믿으십니까?"  "믿지요."  "그러면 그 하나님께서 포도주 독에 빠진 사람을 물 속에 집어넣을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십니까?"

그렇습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힘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바로 이 믿음으로 인생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고난과 불가능을 정복하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복하는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처럼 믿음으로 세상을 정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인생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승리하는 믿음의 두 번째 유형은 인내하는 믿음입니다.

정복하는 믿음이 능동적인 믿음이라고 한다면 인내하는 믿음은 수동적인 믿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순교자들의 믿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정복자의 믿음 못지 않게 순교자의 믿음도 동일하게 존귀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도, 하나님께 그렇게 간절히 기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전혀 변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냥 참고 버텨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기적은 일어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기적을 보지 못하고 죽는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것도 믿음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버틸 수 있는 능력, 참을 수 있는 능력, 믿음을 부인하지 않고 죽을 수 있는 능력, 이것도 하나님이 주신 동일한 믿음의 능력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 35절 이하의 사건들이 바로 이런 믿음의 수동태적인 능력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이들에게는 베드로나 바울이 체험했던 감옥 문이 열리는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차하게 살기 위해서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 좋은 부활을 소망했기 때문입니다.  더 좋은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믿고 죽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성경은 그것도 위대한 믿음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본문 36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선지자 미가야가, 예레미야가, 바울이 채찍을 맞고 옥에 갇혔습니다.  37절에 보면 돌로 침을 당한 사람도 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렇게 죽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사야가 그렇게 죽었습니다.  칼에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헤롯의 칼에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톱으로 썰리기도 했습니다.  더러는 박해를 피하여 양과 염소의 가죽을 쓰고 피해 다니며 광야를 떠돌아 다녀야 했습니다.  그들에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을 지키며 버티고 인내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들에게 눈에 보이는 어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절망하지 마십시오.  눈에 보이는 어떤 기적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환난과 고난 가운데서도 버티고 인내하는 믿음입니다.  성경은 정복하는 믿음 못지 않게 중요한 믿음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만을 믿음의 사람으로 숭배하기가 쉽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해 어떤 군인들은 예수님을 조롱하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네가 메시아이거든 그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원하셨다면 그는 얼마든지 십자가를 부수고 내려와 그를 핍박하는 자들을 심판하실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무력한 자처럼 십자가에서 고통하며 죽어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만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 십자가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그는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그 힘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들이 기대했던 그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누가 그를 실패자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그분은 실패했을까요?  그렇다면 열방과 민족들 가운데서 오늘 이 시간 이 주일에 그분을 향해서 드려지는 찬양과 경배는 무엇을 뜻합니까?  이 지구상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한 분 앞에 엎드려 그가 만왕의 왕이시라고, 그가 만주의 주님이시라고, 그가 우리의 선한 목자라고 고백하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까?

그는 죽음으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는 수동태의 믿음으로 승리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적이 일어나기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수용하면서 사는 것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위에 계신 그분이 판단하신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그분은 기적 대신에 그 상황을 버티고 인내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동일하게 그 믿음도 기적을 창출하는 믿음 못지 않게 소중한 믿음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정복하는 믿음이 승리인 것처럼, 인내하는 믿음도 동일하게 승리하는 믿음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바로 이 믿음으로 인내할 수 있었다면 여러분과 저도 동일한 믿음으로 인내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과 저를 둘러싸고 있는 오늘의 삶의 장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도, 아니 기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형편이 쉽게 달라지지 않아도 여전히 찬양하며, 여전히 주를 신뢰하며 인내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기적을 행하는 사람들만이 위대한 자가 아닙니다.  정말 위대한 사람은 어떤 삶의 형편에서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인식하는 가운데 믿음으로 신실한 삶을 주 앞에 살아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8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대부분의 성경 주석가들은 그 의미를 이들에게 세상은 적합한 곳이 아니었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런 사람에게 있어서 세상은 차라리 무가치한 것이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런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들의 존재는 너무 소중하고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어서 세상이 감당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  세상은 그들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아니 세상은 결코 그들의 가치를 알아 줄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은 이들을 담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가치를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알아줄 수 있는 또 다른 세상이 필요했습니다.  결국 이들은 이 세상이 아니라 다가오는 저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면서 이 땅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들이 이 세상의 핍박과 고난과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여전히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다가오는 저 영원한 세상을 향한 믿음,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 바로 천국 신앙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세상이, 이 땅의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저 영원한 천국을 향한 믿음으로 인내하며 승리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역사에서 4세기를 살았던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었던 아타나시우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아리우스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었다고 주장하면서 교회는 분열과 혼란 가운데 빠졌습니다.  만약에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의 잘못된 주장을 받아들이고 세상을 따라갔다면 기독교는 이교도의 한 형태로 전락해서 두 개의 신과 함께 하나님도 인간도 아닌 예수를 따르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수많은 이방 종교들 가운데 하나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아타나시우스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을 붙잡고 고독하게 싸워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우리의 구원은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회의는 아타나시우스의 믿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렇지만 아리우스는 로마 황제 율리우스와 권력을 이용하여 아타나시우스를 위협했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20년 동안 6차례나 모든 것을 다 박탈 당한 채 추방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죽이려는 자객들을 피해 이집트에 있는 사막 깊은 곳으로 숨어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은 천사와 같은 삶이었습니다.  자신을 비난하는 자들에게는 항상 부드러웠습니다.  금식과 기도로 금욕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부유한 자들의 부정을 지적하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겸허한 자들에게는 언제나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닮고 싶어했습니다.  그가 참된 믿음을 지키고 죽었을 때 세상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이렇게 불렀습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 아타나시우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은 오늘도 이 고통 많은 세상 도처에서 저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며 인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아 있는 내 인생이 내 이웃들에게 축복이고, 나를 이 땅에 보내신 창조주 하나님께 기쁨이 되기 위하여 그들은 묵묵히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성경은 말합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오늘의 세상에서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영웅들이요, 믿음의 승리자들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보여주었던 승리하는 믿음, 그것이 정복자의 믿음이든, 순교자의 믿음이든 동일하게 이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다면 이 짧은 인생 여정 속에서 어느 날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너는 세상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소중하고 존귀한 존재야.  너를 위해서 내가 또 다른 세상을 준비했단다."

그리고 동일하게 세상 사람들로부터 우리 모두가 이런 소리를 듣게 되기를 기대하고 소망합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 오주철"

이 소망, 이 믿음으로 오늘의 삶의 현장에서 고난과 고통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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