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순절] 너희 중 하나가 (요 13:21-30)

첨부 1


너희 중 하나가 (요 13:21-30)


TV 장면 가운데 주인공이 분노와 좌절에 빠졌을 때 이성을 잃을 정도로 술에 만취되는 모습을 간혹 보게 됩니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마치 술이 괴로울 때의 유일한 위로 수단인 것 같은 연상을 하게 됩니다. 
간장을 상하게 하는 원인 중 대표적인 것이 분노와 억울한 감정입니다. 이러한 감정은 간장을 흥분시켜 열과 독소를 만들고 이담과 혈액순환을 저해해 간장을 손상시키는데 만약 지속되면 간세포의 변이 내지는 경화로까지 이어지기도 합니다.

술은 또 어떠합니까? 소량의 적당한 술은 무리가 없지만 과도하게 되면 술의 열독이 간장에 축적돼 간의 생리기능을 교란시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분노한 상태에서 술을 마시는 행위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간장을 이중으로 혹사시키는 꼴이 되고 큰 후유증이 남게 됩니다. 대개 간암이나 간경변 환자의 습성을 체크해 보면 과도한 스트레스 속에서 과음을 습관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음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괴로움을 잊기 위해 술로 마비시키고자 하는 행위는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릅니다. 괴로울 때는 오히려 시원한 야외로 나가 간장의 열독을 풀고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고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 의뢰하는 지혜로운 길을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느 날 개구리 한 마리가 논바닥을 펄쩍거리며 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한 참 뛰다보니 다리가 너무 아파 쉬면서 하늘을 쳐다보니 독수리 한 마리가 큰 날개를 펴고 너무나 쉽게 하늘을 유유히 날고 있지 않겠습니까? “독수리 선생 어떻게 하면 나도 하늘을 날 수 있겠소?” 독수리가 하는 말 “날개를 달고 높은데서 뛰어 내리면 자동적으로 날게 된다오.” 개구리가 닭털 두 개를 주워 옆구리에 달았습니다. 그리고 15층 빌딩 꼭대기 향하여 펄쩍거리며 뛰어올라 가더니 닭털을 허우적거리며 빌딩 꼭대기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그 이후 이 개구리를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흉내 낸다고 되는 게 아니지요. 선(善)의 날개를 달아도 하늘을 날 수가 없습니다. 종교의 날개를 가지고는 하늘을 날 수가 없습니다. 지식이나 철학의 날개를 가지고 하늘을 날 수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 복음이 시작되던 초기,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거듭나지 못했던 한 흉내 신자, 흉내 제자가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입니다.

일찍이 단테는 “신곡” 지옥 편에서 가룟 유다가 마왕 루시퍼와 함께 가장 낮은 층의 자리에 앉아 지옥에서조차 금해진 혹독한 벌을 받고 있는 장면을 묘사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위대한 성자가 될 기회를 가졌으나 실패하고 말았다면 그 중에서도 가장 애석한 사람은 아마도 가룟 유다일 것입니다. 그는 성자가 될 기회를 악역으로 바꾼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래서 지난 이천 년 동안 자신의 사랑스런 아들의 이름을 가룟 유다라 지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경을 읽어 내려갈 때 가룟 유다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아브라함을 공부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아브라함입니다” 그러면 “아멘” 그럽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으세요.” 그러면 “아멘” 그럽니다. 모세를 공부하고 여호수아를 공부합니다. “여러분 모두 여호수아와 같은 인물이 되십시오.” 그러면 “아멘” 그럽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를 공부하면서 “우리 모두가 가룟 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라고 얘기하면 “아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성서와 비평이라는 위대한 책을 썼던 고트발트라는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확신을 가지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성경을 잘못 읽고 있다는 확신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언제나 나 자신이 가룟 유다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그 가룟 유다의 모습 속에서 오늘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괴로워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11세기의 성자 제롬이 베들레헴에서 성경을 번역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기도하는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제롬은 기뻐서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제가 주님께 무슨 선물을 드릴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이 다 내 것인데 네가 무슨 선물을 내게 주겠느냐?”
제롬이 말했습니다.
“이 성경을 다 번역해서 그것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정말 나에게 선물을 주겠느냐? 그러면 한 가지만 다오.”
“그것이 무엇입니까?”

“네 죄와 고통을 다 내게 다오.....그것이 나에게 최고의 선물이다.”
우리 안에 있는 무기력과 절망, 자포자기와 한숨, 우울증과 탄식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선물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부끄럽고 추해 보여도 그것 없이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깊은 곳"에서 만나시는 분입니다.
성 어거스틴이 말했습니다.
“탄식은 인간에게 큰 힘이고, 하나님께는 큰 약점이 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탄식소리에 가장 약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탄식은 우리에게 오히려 큰 힘이 됩니다.
어머니가 가장 약한 것은 자녀들이 슬피 우는 소리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어머니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자식을 살리십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예수님이 지금 괴로워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마음에 괴로움으로 가득하게 만들었습니까?

그것은 사랑하는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자기를 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그마치 삼년 반 동안이나 함께 생활해 온 제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입니다. 정이 들대로 든 제자들입니다. 눈빛만 봐도 무엇을 원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 정도입니다. 그동안 예수님이 누구신지 너무나도 잘 알게 된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제자 가운데 하나가 자기를 팔아먹는다고 할 때 자기를 배신한다고 할 때 그것처럼 마음 아픈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언제든지 배신자는 내 가까운 곳에 있다고 하지만 이건 정말 아니지 않습니까? 사실이지 처음부터 원수가 나를 힘들게 한다고 할 때 몸은 힘들지 몰라도 마음이 괴롭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가장 믿을만한 사람이 나를 배신했다고 한다면 그 마음의 괴로움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카타콤 순교자들의 얘기 가운데 이런 감동적인 스토리가 하나 전해져 내려옵니다. 몰래 몰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그 카타콤의 동굴에 로마 군병이 나타났습니다. 로마 군병은 그들에게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너희들은 다 들켰다. 이제는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무기를 겨누면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얘기합니다. 
“한 번의 기회가 있을 뿐이다. 열을 카운트 할 때까지 이 자리를 다 떠나면 살겠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로마 군병은 지체하지 않고 열을 세기 시작합니다. 하나, 둘, 셋…. 이렇게 세어나가기 시작하는데 아무도 미동하지 않습니다. 드디어 로마 군병의 눈에 힘이 들어갑니다.
일곱, 여덟, 아홉…. 여기까지 세었을 때 한 사람이 살기 위해서 대열을 이탈해서 뛰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있던 몇 사람이 마음이 흔들려서 같이 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이 더 멀리 사라질 때까지 열을 세지 않습니다. 
그들이 멀리까지 사라졌을 때 군병은 그가 들고 있던 무기를 집어던지면서 남아있던 무리들을 향해 무릎을 꿇고 이런 고백을 합니다. 

“형제들이여, 이제 안심하십시오. 우리 속에 가라지(배신자)는 다 없어졌습니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는 것은 너희 가운데 배신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누구인지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냥 대 놓고 “아무개 네가 어떻게 나를 돈을 받고 팔 수가 있느냐?” 하시며 책망을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마음이 괴로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들어 하시면서도 여러 사람 앞에서 대놓고 드러내어 야단을 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가 회개하고 무릎 꿇고 엎드려 용서를 빌 수 있는 기회를 지금 주시는 것입니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이 주님의 말씀은 사실 다른 제자들의 입장에서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아니 지금까지 삼년 반 동안 어떤 시간을 보내왔는데 이제 와서 주님을 배신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냔 말입니다. 물론 자기들 나름대로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에 서로 보다 높은 자리가 자기 것이 되기를 주님께 간구하며 누가 더 높으냐 누가 더 큰 자냐 하고 서로 다투기는 했어도 주님을 배신한다고 하는 것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들 가운데 하나가 주님을 팔 것이라니 어찌 충격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왕이 되실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있었는데도 예수님은 이를 마다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겠다고 나선다고 하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제자들로서는 내심 바라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거꾸로 죽음을 말씀하십니다. 나는 왕이 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 죽으러 왔다. 그리고 이제 그 시간이 다 되었다고 하셔도 “이게 무슨 말씀이지? 무슨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시는 거지?” 하며 고개는 갸우뚱할망정 주님을 배반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입니다. 

한데 자기들 가운데 하나가 예수를 팔 것이라고 하니 베드로가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워있는 제자 요한에게 머릿짓을 하여 “주님이 말씀하시는 자가 누구인지 말씀드려 보라”고 합니다. 그래 요한이 묻습니다.
“아니 우리 가운데 배신자가 있다고요?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주님을 판다고요? 주여 그게 누굽니까?”
그랬더니 예수님이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예수님이 유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지만 제자들은 그런 주님의 말씀을 더더욱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니 세상에 누가 예수님을 파는 자인지 여쭤봤더니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라”고 하시며 가룟 유다에게 떡을 적셔 주셨는데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제자들은 의아할 뿐입니다. 지금까지 제자들 가운데서도 제일 똑똑한 사람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재정을 맡겼단 말입니다. 그건 그만큼 믿을 수 있다는 뜻도 됩니다. 돈 주머니를 아무한테나 맡기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돈 주머니를 맡기지 그렇지 않으면 남아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돈 주머니를 맡아서 지혜롭게 일을 처리해 왔던 유다입니다. 더군다나 돈이 여유 있게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어떤 때는 땡전 한 푼도 없어서 힘들 때도 있었습니다. 오병이어의 역사 때만 해도 단 하나의 빵도 여분으로 가지고 있지 못할 만큼 주머니가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을 때 유다로서는 참으로 민망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기가 무슨 갑부라서 그 주머니를 채울 수 있는 입장도 아닙니다. 

그런 어려운 시기들을 잘 견디며 꿋꿋하게 주머니 관리를 해 온 유다입니다. 그만큼 믿음이 가는 친구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떡을 적셔 주셨지만 제자들은 그냥 다른 일을 시키려고 하는 말로만 들었지 유다가 예수를 파는 자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단 말입니다. 그만큼 예수님께도 제자들에게도, 믿음이 가는 친구로 살아왔던 유다라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물론 요한이 나중에 이 복음서를 쓰면서 되돌아보니까 사실 저는 도둑이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건 나중에 다시 곰곰이 되짚어 생각해 보니까 “아하 그랬구나” 하고 무릎을 치는 거지 당시로서는 다른 제자들로서도 가룟 유다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유다가 예수를 파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어찌 괴롭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다윗은 울면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지 않습니까? 비록 아버지를 배신하고 아버지를 죽이고 자기가 한 나라의 왕으로서 떵떵거리며 살려고 했지만 그런 아들을 다윗은 한 시도 미워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 나중에 전쟁 중에 압살롬이 요압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난 다음에 그 소식을 듣고 다윗이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면서 “차라리 내가 죽었어야 하는데” 하면서 울지를 않습니까? 지금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그러헸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괴롭습니다. 아니 사실은 가룟 유다를 생각할 때 마음이 괴로운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꿔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예수님은 바라고 계신 것입니다. 집을 나간 아들, 패역한 둘째를 날마다 동구 밖을 지키며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처럼이나 그런 간절한 마음으로 이제 가룟 유다가 회심하기만을 예수님이 바라십니다.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하시는 것은 “빨리 가서 나를 파는 일을 마무리 하라”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기를 촉구하시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너 하고픈 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네가 마음을 바꾸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유다가 어떤 길을 갈지를 아시기에 예수님은 마음이 더 괴로우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우리 자신을 깊이 되짚어 보아야 합니다. 혹 나로 인해서 예수님이 지금 이 시간 마음이 괴로워하고 계시지는 않은지요? 나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이 아프지는 않습니까? 나 때문에 우리 때문에 예수님이 우시며 마음에 힘들어 하지는 않는지요? 

아무쪼록 나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백성다운 백성 자녀다운 자녀 되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 나를 생각할 때마다 주님의 마음이 괴로우신 것이 아니라 기쁘고 자랑스러워하시며, 때로는 민망스러운 마음으로 우리를 지켜보다가 다시 돌아오는 우리를 보시며 환하게 웃으실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를 품에 안아주시고 잘 했다 또는 잘 돌아왔다고 하시며 등을 다독여 주실 수 있도록 그렇게 오늘을 살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너무도 안타까운 이름 가룟 유다입니다.
어떤 사람의 꿈속에서 매일 밤 보자기를 쓴 사나이가 나타나더랍니다. 선을 행하려고 하면 악한 길로 끌고 다닙니다. 나는 멋지게 승리하고 싶은데 실패를 반복하도록 만든단 말입니다. 그래서 화가 나서 보자기를 확 벗겼더니 보자기 속에서 나타난 얼굴이 바로 자기 자신이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언제나 문제는 자기 자신입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내가 나의 적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안의 주인이 내가 되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내 생각에 옳은 대로 살려고 하다보면 그 내 생각이 사실은 내 생각이 아니라 마귀가 주는 마음일 수가 있다는 뜻이 됩니다. 즉 내 안에 성령께서 들어오시어서 나를 사로잡으시고 내 생각이 주님의 마음으로 가득하도록 만들어주셔야지 그렇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다른 마음에 끌려들어가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다루고 있는 요한복음 13장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제자들과 함께 나누는 다락방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하십니다. 부족한 제자들일망정 예수님은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거기에 예외는 없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머리 위로 새가 날아가는 것은 막을 수 없어도 내 머리에 새가 둥지를 만드는 것은 막을 수 있다는 우리네 속담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잠시 우리가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힐 수도 있고 그런 마음이 우리 머리에 스쳐 지나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우리 마음을 지킬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가룟 유다는 몰랐습니다. 오히려 왕의 자리가 앞에 있는데도 그걸 마다하시는 주님에 대한 불만이 저로 하여금 이런 예수라면 필요 없다는 마음으로 끝장을 보게 만들고 있습니다. 아니 그 마음이 그렇게 끌려들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귀가 준 생각과 주님의 사랑이 담긴 말 사이에서 가룟 유다는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주님은 자기의 마음을 다 헤아리고 계신다는 것을 지금 가룟 유다는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자기는 그런 주님 앞에 발을 턱 내밀고 주님이 닦아주는 대로 발을 내맡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 자인데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 자기에게 주시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예수께서 유다 자기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까지 하실 때 가룟 유다는 무릎을 꿇었어야 했습니다. 한데 떡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고 하신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유다가 회개하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마음이 더욱 완악해졌는데 그건 사탄의 생각을 그 마음에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어차피 망가진 몸이라는 것입니다.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라고요? 하지만 그게 바로 사탄의 술책입니다.
 
사람이 실수를 할 수도 있습니다. 잘못될 수 있습니다. 생각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면 이제부터라도 바로 잡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왕 엎어진 물이라고요? 그럼 새로 담으면 되잖아요? 아니면 이제부터라도 엎지르지 않도록 조심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사실은 가장 빠른 때라고 하는 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왕 버린 몸 너 같은 것 필요 없어”가 아니십니다. 

집을 떠난 아들, 아주 몹쓸 아들, 나중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아들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둘째 아들이 집을 떠날 때 아버지의 마음에는 그 자식은 죽은 자식이었습니다. 죽은 것과 같은 자식입니다. 죽은 자식은 가슴에 묻지 않습니까? 그 자식이 한 없이 망가지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도 그 죽은 자식이 다시 살아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아버지가 드디어 다시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 어떻게 합니까? 동구 밖까지 달려가서 그 아들을 품에 안지 않습니까? 그렇게 반가워하면서 그렇게 기뻐하면서 새 신을 신기고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주고 잔치를 열어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아 이 아들은 이제 죽었다가 다시 산 자라고 저에게 이제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거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그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씀을 들으면서도 가룟 유다는 그 말씀을 자기를 향해 주시는 말씀으로 듣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가는 것처럼 들려준 사탄의 말에는 금방 마음을 열고 말았습니다. 한 마디로 뭐입니까? “이왕 버린 몸”이라는 것입니다. 어차피 이판사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처럼 무서운 생각이 없습니다. 이판사판이라니요? 이왕 엎어진 물이라니요? 그럼 새로 담으면 되잖아요? 물론 엎어진 물은 어떻게 할 수 없어요. 하지만 그러면 새로 담으면 되잖아요? 다시 담으면 돼요. 넘어졌다고 그냥 엎어져서만 한 평생 살아갑니까? 일어서잖아요? 부러지고 다쳤다면 수술하고 고쳐서라도 다시 걷는 것이 아닙니까? 머리가 아파서 못 살겠노라고 하십니다. 그런다고 머리를 부숴버리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그거 안 아프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부정적인 생각, 부정적인 마인드에서 우리는 벗어나야 합니다. 무어를 하려고 하는데 잘 안 됩니다. 그래 성질부리고 다 집어던지면 남는 것이 무엇이 있죠? 그냥 아픔과 온통 부셔진 잡동사니밖에 더 있겠습니까? 안 되면 되게 하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아파서 잠도 못 잔다고요? 많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합니다. 그런다고 해서 피곤해 죽겠다고 탄식만 하고 있어봐야 몸과 더불어 마음이 더 아픈 것입니다. 그러면 오히려 차라리 기도하며 찬양하며 감사하십시오. 

어차피 이래도 잠 못 자고 저래도 잠을 못 잔다면 그 시간에 잠 안 온다고 아파서 못 잔다고 신경질 부리기보다는 차라리 그래도 나는 살아있으니 감사하다고, 그래도 찬양할 입은 온전하니 감사하다고 그렇게 감사하며 찬양하고, 그렇게 찬양하며 주님께 부르짖으십시오. 전능의 하나님, 치료의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그러면서 계속해서 감사거리를 찾으십시오. 그러면 우리 마음이 살아납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이 살아나면 우리 몸도 살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왕 버린 몸이 아니라 이왕 버렸더라도 이제부터 다시 세워나가는 그런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엎어진 것만 탓하지 말고 새로 시작하십시오. 새로 담으십시오. 그릇도 다 깨졌다고요? 핑계 삼아 새 그릇을 장만하면 되잖습니까? 돈이 없다고요? 그럼 돈을 위해 알바라도 하면 됩니다. 아니면 좀 오래 됐더라도 안 쓰는 그릇을 하나 새로 꺼내면 됩니다. 이런 긍정적인 생각, 주님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런데 어째서 주님의 마음은 외면하고 사탄의 생각에는 금방 혹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유다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는 것은 마음을 빼앗겼다는 것입니다. 설사 그런 마음이 들어도 나는 그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버려진 몸이 아니라 버려졌기에 새로 빚어진 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물을 엎질렀으면 빈 그릇에 더 좋은 것으로 담으면 되잖습니까? 주님은 얼마든지 새롭게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지금까지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만 해 드렸다고요? 이제부터 기쁘게 해 드리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마음에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사람이 아니라 조각난 마음도 새롭게 고치고 빚고 만들어 가심으로 바울 사도처럼 교회를 핍박하고 교회를 망가뜨리던 사람이 오히려 교회의 중요한 한 축이 되었고 주님 앞에 귀한 제자로 우뚝 선 것처럼 우리 모두가 다 주님 앞에 존귀한 백성, 소유된 백성, 보배로운 백성으로의 아름다운 이름과 더불어 이름에 걸맞은 모든 유업을 누리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결국 유다의 문제는 그 자리를 떠난 것입니다. 주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하지만 그건 해결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만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이게 바로 사탄의 계략입니다. 여기에 속지 마십시오.
오늘도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 가운데 실패의 마음과 좌절감을 불어넣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넣어줍니다. 두려운 마음을 심어줍니다. 미움과 갈등과 원망을 심어줍니다. 사탄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고 있으면 이런 마음들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성령 하나님을 통해 밝고 건강한 생각, 거룩한 마음, 사랑과 친절의 마음을 우리에게 불어 넣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고 있으면 이런 귀한 마음들이 우리를 찾아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예수님 앞을 떠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생각을 어떻게 관리하십니까?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과 사탄이 주는 생각 이 둘 가운데 어떤 생각에 우리 마음을 내어 맡깁니까? 
마지막으로 마더 테레사의 “작은 몸짓으로 이 사랑을” 중에서 “참된 겸손”이라는 시를 소개합니다.  

고통 그 자체는 아무 소용이 없지만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나누어진 고통은 
굉장한 선물이 되며 그것은 사랑의 표징이 됩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사랑의 가장 큰 선물인 은총으로 알려졌습니다. 
왜냐하면 그 고통을 통해 
우리의 죄가 사해졌기 때문입니다.

고통, 아픔, 슬픔, 모멸, 외로움 등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입맞춤에 불과합니다.
그분이 당신에게 입 맞출 수 있도록 
당신이 그렇게 가까이 다가갔다는 표시입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은 항상 
부활의 기쁨으로 끝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당신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고통을 느꼈을 때는 
이제 다가올 부활을 기억하십시오.

어떤 것도 당신을 
슬픔으로 채우게 해서는 안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기쁨을 잊어버릴 만큼 
큰 슬픔이 당신의 마음을 결코 채우지 않게 하십시오. 

그렇습니다. 주님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품을 떠나 나감으로 가룟 유다처럼 실패하는 자가 아니라 주님의 품에 안기어 베드로처럼 다시 새 삶을 시작하고 결국 승리자로 하나님 앞에 우뚝 서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