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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싫어 버림받은 예수 그리스도 (사 5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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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 버림받은 예수 그리스도 (사 53:1-9)


사람은 외모를 중요시합니다.  그래서 학력을 보기도 하고, 그 사람의 가정을 보기도 합니다.  그 사람의 지난날의 과거를 보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 사람의 외형을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을 선택할 때에는 인간만큼 그렇게 까다롭지가 않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그의 학력이 어떻든, 환경이 어떻든, 비록 내 성격이 어떻든, 내 외형이 어떻든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쉽게 말해서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쓰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지 못할 성격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불완전한 상태에서 불완전한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이 말씀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사상이 좀 불완전해도 괜찮습니다.  우리의 지식이 좀 불완전해도 괜찮습니다.  우리의 성격이 좀 불완전해도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성격이나 인격이나 지식보다도 우리의 변화의 정도를 통하여 일하십니다.  기억하십시오.  큰 변화가 없으면 아무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변하고자 하는 의지입니다.

주님의 몸된 이 교회는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자기의 동업자를 자신 있게 초청해서 데려올 수 있는 곳입니다.  이 교회는 자기의 제일 친한 친구를 데려올 수 있는 곳입니다.  이 교회는 자기에게 제일 불편한 친구를 데려올 수 있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통하여 구원의 사역을 완성해 가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여기 이곳에 온 모든 사람들은 거룩한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는 희망이 있습니다.  전에는 어둠의 자녀였지만 이곳에 오면 빛의 자녀가 됩니다.  전에는 저주의 자녀였지만 이곳에 오면 축복의 자녀가 됩니다.  전에는 악한 마귀의 권세에 억눌려 살았지만 이곳에 오면 성령으로 자유함을 누리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주님의 전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비록 실개천 같은 믿음일지라도 여러분의 심령에 믿음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보다 더 큰 자산은 없습니다.  믿음 이상으로 인간 관계를 아름답게 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어디에서 옵니까?  하나님의 은혜에서 옵니다.  성령께서 감동을 주시고 은혜를 주셔야 우리 안에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비추어주지 않으면 결코 우리는 믿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간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성령께서 내 마음에 빛을 비추어주셔서 강단에서 들려오는 말씀이 내 말씀으로 들려질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을 붙잡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삶이 힘들고 어려울수록 우리는 더 믿음을 붙잡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물론 믿는 사람에게도 어려움은 옵니다.  고난의 때가 옵니다.  그렇지만 믿음으로 살고 있는 한, 그는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고난의 때일수록 더욱 믿음으로 버티십시오.  절망의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감사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도하며 매달리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증인이 되리라!  이것이 나의 간증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나의 찬송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을 더 크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나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깊은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사십시오.  포기하지 말고 믿음을 붙잡으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로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일생을 슬픔과 고난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한 수난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수난자는 계속해서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배척을 받고 거부를 당하고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아주 철저하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받고 있는 슬픔과 고난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가 저지른 잘못이나 죄로 인해서 벌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받아야 할 슬픔을 대신 당하고 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받아야 할 고난을 대신 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 대신에 고난을 받고 슬픔을 당하는 이 수난자를 향해서 오히려 손가락질하고 있습니다.  침을 뱉으며, 심한 모욕을 하고 있습니다.  배반의 화살을 쏘아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고난 당하는 자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고난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의 고난을 가장 세밀하고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성경의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을 가리켜서 '메시아의 수난 장'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을 기록한 이사야 선지자는 주전 8세기 때의 인물입니다.  예수님 보다도 700년 정도 앞선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고난 당하심과 죽으심은 어쩌다가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구원하시고자 계획하신 것임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고난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렸다.  그가 상했다.  그가 맞았다.  그가 징계를 받았다.  그는 멸시를 받아 버림받았다.  특별히 이사야 선지자는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해서 고난 당하시는 메시아의 모습을 두 가지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 그는 아주 철저하게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여기에서 "누가 믿었느냐?"라는 말은 아무도 믿는 자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라는 이 질문은 누구도 그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아예 처음부터 사람들에 의해 거절을 당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죄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셨건만 예수님께서는 처절할 정도로 사람들에게 싫어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십자가 위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거룩하신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신앙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장 11절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들에게서조차도 비참할 정도로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예수님은 소위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종교 지도자들로부터도 버림을 당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로부터도 자신들의 욕망을 채워주지 않는다고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3년 동안이나 사랑으로 가르쳤던 제자들도 예수님이 싫어서 버렸습니다.  가룟 유다는 돈을 위하여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베드로는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낙심과 무서움 때문에 예수님을 싫어하며 버렸습니다.  3년 동안이나 함께 하면서 그 엄청난 사랑을 받고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이 자기들의 스승이신 예수님을 이처럼 싫어서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사람들로부터 처참하게 싫어 버림을 받아야만 했습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그 이유를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예수님은 연한 순 같이 나약해 보이셨습니다.  마른 땅에서 겨우 나온 뿌리처럼 아무런 힘이 없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었고, 위풍당당한 풍채도 없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우러러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인간적인 매력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볼품이 전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가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냐?  무슨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겠느냐?"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외모가 너무 초라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배척을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위풍 당당한 모습으로 오시지 않으셨다는 사실에 많은 위로를 받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사울에 대해서 그는 준수한 소년이라고 하면서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이나 더 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압살롬에 대해서는 그가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런 사람들 옆에 서면 기가 팍 죽습니다.  키가 작아서 언제나 저들을 우러러보아야 합니다.  저를 이야기하자면 솔직히 인간적인 매력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이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인간적인 매력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제가 이 말씀에 얼마나 많은 위로를 받고 사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 교회는 예수님께서 이처럼 볼품이 전혀 없는 분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담임 목사를 청빙할 때 마치 영화배우를 청빙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 교회가 목사를 청빙할 때 조건들이 아주 대단합니다.  박사 학위는 기본이고, 키는 175cm 이상이어야 합니다.  그 외에도 많은 조건들을 내걸고 있습니다.

미국 미시간 주의 어느 한 침례교회에서는 담임목사를 청빙하는 데 13가지의 조건을 제시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만 소개하겠습니다.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는 사람.  교육가, 행정인, 외교관, 신학자, 심리학자, 의사, 사회 사업가 등을 잘 지도할 수 있는 사람.  철학이나 신학 박사 학위가 있어야 하며 서민적인 생각으로 말하며 표현하는 사람.  체력이 건강하며 교양이 많은 사람.  아내는 보수적인 사람이어야 하며 인자하고 교회에서 부엌일을 할 수 있고 남을 감싸주는 타입.  목사의 자녀는 행동과 성격이 모범적이어야 함.  목사의 사택은 항상 열려 있어야 하고 친절해야 함.  여기에 따른 몇 가지 실사를 받게 됩니다.

아마 오늘 교회의 기준으로 본다면 예수님은 결코 이 땅에 오셔서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아니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훨씬 더 심하게 싫어하고 배척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시대에 목사로 사역을 하신다면 아마 아무도 가지 않는 어느 외딴 섬에서 교인이 몇 되지 않는 그런 교회에서 목회를 하시고 계실 것입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3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싫어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보십시오.  빌라도의 법정에서 빌라도가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살인 강도 바라바를 놓아주랴? 그렇지 않으면 예수를 놓아주랴?"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를 지릅니다.  "우리에게 바라바를 놓아주소서."  예수님은 살인자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흉악한 강도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처절하게 싫어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은 간고를 많이 겪으셨습니다.  고통을 많이 겪으셨다는 말입니다.  보십시오.  사람들에게서 침 뱉음을 당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예수님의 뺨을 때리면서 희롱했습니다.  갈대로 예수님을 치면서 희롱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가시 면류관을 씌우면서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사람들의 외면과 멸시 속에서 죄인 취급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아무리 원수 같은 사람이라도 죽는 순간에는 불쌍하게 여깁니다.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는 측은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어 가는 그 마지막 순간에도 사람들에게 멸시와 조롱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서만 버림을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위에서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부르짖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은 그렇게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류 역사상 어느 누가 예수님 만큼이나 처절하게 버림을 받았겠습니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우리도 남들에게서 멸시를 당할 때가 있습니다.  배신을 당하고, 버림을 받을 때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배운 것이 없다고 무시를 당할 때도 있고, 가진 것이 없다고 멸시를 당할 때도 있습니다.  못생겼다고 멸시를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사람들로부터 당하는 멸시와 조롱 때문에 너무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그것 때문에 너무 절망하지도 마십시오.  세상이 그럴수록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보다 먼저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보다 더 처절한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내가 버림받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예수님은 처절하게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성경은 그 예수님이 우리의 처지를 알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이 지금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힘들고 외로울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시면서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버림을 받으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을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주셨습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하여금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  모든 입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건축자들의 버린 돌을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우리도 얼마든지 머릿돌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쓰시기를 작정하신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크게 쓰임 받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외모를 봅니다.  사람은 환경을 봅니다.  사람은 그의 배경을 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선택하실 때에 결코 외모를 보시지 않습니다.  학력을 보지도 않습니다.  재물을 보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마음 중심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거기에는 결코 예수님의 외모에 대해서 한 글자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도 외모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거나 어떤 사귐의 기준으로 삼지 말라는 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사람들에게서 싫어 버린 바 되는 사람은 장차 그의 나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권세를 누리고 높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오늘 본문에서 고난 당하는 메시아의 모습은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온갖 고난을 다 당하시고 죽으신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본문 4절을 함께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예수님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매를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린 시절 교회학교 선생님들에게서 자주 듣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철수라는 아이는 본시 성격이 매우 명랑하고 쾌활한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커갈수록 성격이 내성적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싫어했습니다.  외톨이로 놀기를 좋아했습니다.  학교에 가는 것조차도 싫어했습니다.  심지어 집에서는 책가방을 싸들고 학교에 간다고 이야기하고서는 뒷동산에 올라가서 혼자 시간을 보내다가 시간이 되면 집으로 돌아올 때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타일러 보고, 때로는 달래보기도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참다못한 그의 어머니가 회초리를 들고서 사정없이 치면서 다그쳤습니다.  그제야 철수는 소리내어 울면서 왜 자신이 학교에 가는 것을 그토록 싫어하는지 이유를 밝혔습니다.

"학교에 가면 저를 보는 친구들마다 놀리잖아요.  어머니 얼굴이 귀신의 얼굴과 같다고요.  저도 귀신의 아들이래요.  그러니 제가 무슨 재미로 학교에 가겠어요?"

이 아들의 말을 듣고서 철수의 어머니는 왜 자기의 얼굴이 그토록 흉하게 일그러졌는지 아들에게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얘야, 나도 과거에는 이쁜이라고 불려질 만큼 얼굴이 고운 사람이었단다.  네가 갓난 아이 때 잠시 너를 재워두고서 집밖으로 나갔다 왔더니 그 사이에 그만 집에서 큰불이 나고 말았단다.  너무나도 불길이 거세어서 모두들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지.  그러나 차마 나는 너를 그대로 죽게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그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갔단다.  그리고는 너를 품안에 안고 나오다가, 그만 화상을 입고서 얼굴이 이렇게 흉하게 일그러지고야 말았단다."

그 말을 들은 철수는 어머니의 품에 와락 안겼습니다.  그리고는 흐느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제가 다시는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집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동네 친구들을 다 불러모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우리 어머니의 흉한 얼굴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나를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 되셨다.  나는 어머니 때문에 살았다.  이 세상에서 그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우리 어머님이 제일 이쁜 미인이다."  철수는 그 때부터 두 번 다시 어머니의 흉한 얼굴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질고를 지신 것은 우리를 위해서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슬픔을 당하신 것도 우리를 대신해서 당하신 것입니다.  본문 5절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좀 더 구체적으로 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셔야 했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 우리 예수님이 가시 면류관에 찔리셔야만 했습니까?  왜 예수님의 손과 발이 굵은 못에 찔리셔야 했습니까?  왜 예수님의 허리가 날카로운 창에 찔리셔야 했습니까?  오늘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 그가 징계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그 후손인 우리 인간들의 죄악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원수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놓인 자들이었습니다.  영원히 죽어야 할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죄로 멍든 우리의 영혼을 치유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채찍을 맞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찔리셨고,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상하셨기 때문에 그 찔림과 상함 안에서 우리의 허물과 죄악이 다 용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징계를 받으시고, 나를 대신하여 채찍에 맞으셨기 때문에 그 징계와 채찍의 맞으심 안에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다 나음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삶이 힘들고 지칠 때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주님께로 나오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 받고 힘을 얻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왜 고난을 당하셔야만 했습니까?  본문 8절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8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예수님이 살아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지셔야 했던 것은 마땅히 형벌을 받아야 할 우리의 허물 때문이었습니다.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허물 때문에 예수님은 그 모든 고난을 감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서 싫어 버림을 당하고, 갖은 멸시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에게 힘과 권세가 없으셔서 고난 당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당장이라도 하늘로부터 열두 영이 더 되는 천사들을 불러오실 수 있는 능력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마땅히 형벌을 받아야 할 우리의 허물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서 싫어 버린 바 되어서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본문 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강포를 행하다는 말은 폭력을 휘두르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폭력을 행하신 적이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께서 폭력을 휘둘렀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입에는 거짓이 없었습니다.  말과 행동에 전혀 잘못이 없는 분이십니다.  죄와는 전혀 상관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악인처럼 취급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아마도 강도들과 함께 묻어버리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악한 계획을 막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하나님은 아리마대 부자 요셉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아리마대 부자 요셉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요셉은 자기를 위해서 바위 속에 파놓은 새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모셨습니다.  이와 같이 이사야 선지자가 700년 전에 예언했던 그 말이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정확하게 예수님에게 그대로 성취된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시면서도 침묵하셨습니다.  하실 말씀이 많이 있으셨고 얼마든지 말씀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그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의 침묵하신 그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땅히 침묵해야 할 그 자리에서도 침묵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조금 힘들다고 해서 입을 열어서 불평합니다.  조금 속이 상한다고 해서 입을 열어서 마구잡이 떠들면서 원망을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난의 채찍을 맞으면서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온갖 조롱과 멸시를 당하면서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만을 바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고난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명자의 길을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충성된 일꾼이 될 수 있는 비결은 입을 적게 움직이고 몸을 많이 움직이셔야 합니다.  손과 발을 많이 움직이십시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받았던 사람처럼 착하고, 충성스러운 일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손과 발은 움직이려고 하지 않고, 말로 떠들고 입만 많이 움직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처럼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철저하게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온갖 고초를 다 겪으시고 피를 흘리시고 살이 찢기시며 죽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나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서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철저하게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 당하신 고난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내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 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말고 침묵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바라보면서 나와 주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십시오.  이것이 고난 주간에 우리가 깨달아야 할 교훈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신 주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벗기고, 때리고, 조롱하고, 끌고 가고, 홍포를 입히고, 가시관을 씌우고, 침 뱉음을 당하는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멸시와 굴욕과 천대를 받으신 예수님을 바라 볼 때에 내가 만난 고난이 무슨 문제며, 내가 당한 시련이 무슨 대견스러운 것인가?  내가 당한 수치, 부끄러움이 무슨 큰 것이나 되는 것처럼 그렇게 슬퍼할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천대를 받으시고 싫어 버린 바 되신 우리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 모두가 고백해야 합니다.
"주여, 지금 여기서 나를 구원하소서!"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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