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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예수님께 그렇게 되셨습니다 (사 53: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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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 그렇게 되셨습니다 (사 53:9-12)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과 건강이 넘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은 종려주일, 호산나주일, 또는 고난주일로 부르는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를 꺾어서 흔든 것을 기념하여 종려주일이라고 합니다. 그 때 사람들이 호산나라고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호산나주일이라고도 합니다. 

여기에서 호산나는 ‘오 구원해 주소서!’라는 말로 구원의 하나님을 향한 기쁨의 함성입니다. 종려주일과 호산나주일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환호와 기쁨은 곧 슬픔으로 변했습니다. 며칠이 못되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주일은 바로 십자가의 고난을 기억하는 주간입니다. 

이렇게 이번 주일은 기쁨과 슬픔을, 승리와 실패를, 환호와 조롱을 함께 생각하는 주간입니다. 기뻐하던 사람들이 슬퍼하고 다시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승리를 노래하던 사람들이 가슴을 치며 탄식하고 다시 영원한 승리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환호가 조롱으로 바뀌고 다시 거룩한 찬송이 울려 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은 역설(逆說)입니다. 얼핏 보기에 모순처럼 보이지만 중요한 진리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유대인 최대의 명절은 애굽에서의 해방을 기념하는 유월절입니다. 이 날에는 몇 종류의 상징적인 음식을 먹는 풍습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 쓴 나물을 먹습니다. 과거 애굽에서의 종살이하였던 쓰라린 기억을 되새기려 하는 것입니다. 또 무교병이라는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거친 빵을 먹습니다. 이것은 누룩을 넣어 부풀릴 시간도 없이 급히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지는 않지만 유대인들이 유월절에 먹는 음식 중에 삶은 달걀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 역시 매우 상징적입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음식물은 삶으면 삶을수록 부드러워지지만, 달걀은 삶으면 삶을수록 단단해집니다. 

유대 민족은 어려움에 부딪히면 부딪힐수록, 그리고 실패하면 실패할수록 그 신념과 결의가 단단해진다는 것입니다. 삶은 달걀에는 그런 의미가 담긴 것입니다. 이것도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견디기 어렵고 참기 힘든 일이 오히려 더 굳세고 단단하게 합니다. 우리 속담에 비가 온 뒤에 땅은 더욱 굳어진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영적인 역설입니다. 안병욱은 ‘사색인의 향연’에서 “신앙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이성으로는 믿기 어려운 역설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올 고난주일에는 고난의 역설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십자가의 고난이 가지는 첫 번째 역설입니다.

역설1.  

9절 말씀입니다.

: 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이사야가 예언한 의로운 종은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습니다. 거짓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악한 사람과 함께 묻힐 무덤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고난의 종이 악한 사람들과 함께 죽는다는 것입니다. 폭행을 저지른 일도 없었고 입에 거짓을 담은 적도 없으신 분이 죄인들과 함께 처형당하는 것입니다.

1. 그는 악인들과 함께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예수님과 함께 강도 둘이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각각 좌우편에 달렸던 그 강도들에 대하여 알려진 것은 없습니다. 그들이 왜 십자가의 형을 받게 되었는지, 어떻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형을 받았는지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십자가에 처형된 것으로 보아서 일반 죄수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형은 너무 끔찍한 처형 방법이었기 때문에 로마시대 중에 폐지가 되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처형을 당하였다는 것은 그들이 로마에 반역을 꾀하였던지 아니면 사회적으로 민심에 거슬리는 엄청난 짓을 하였기 때문이리라는 것입니다. ‘강도’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 죄 없는 일반 백성들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는 일을 하여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은 이런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 교묘한 방법을 선택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가운데 세우고 그 오른편과 왼편에 사람들이 잘 아는 강도들을 세워서 예수님이 그들의 우두머리라도 되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강도들의 우두머리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동정해 주는 이가 없는 처참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말씀이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인들과 함께 악인으로 죽은 그 분이 오히려 죽은 후에는 부자와 함께 있었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듯합니다. 여기에서 ‘부자[ryvi[/아쉬르]’는 돈 많은 부유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상징적으로 고귀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죽음을 당하였는데 오히려 죽은 후에는 사람들에게 존경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을, 


2. 그러나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이후, 예수님의 장례를 위하여 홀연히 등장한 사람이 있습니다.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습니다(마 27:57). 그는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를 예수님의 제자라고 합니다. 다만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숨기고 있었습니다(요 19:38). 

그런데 그가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하였습니다(막 15:43). 그는 빌라도의 허락을 받아 시신을 가져다가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에 장례하였습니다(요 19:41).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시신을 땅에 묻고 그 위를 평평하게 하는 평토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돈이 있는 사람들은 바위에 굴을 파고 여러 가족의 시신을 함께 넣는 가족묘를 사용하였습니다. 요셉은 자신과 가족을 위하여 새로운 바위 무덤을 준비하여 두었습니다. 아직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 무덤이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께 제공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강도 중에 강도로 내몰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부자의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에는 그 분의 제자라는 것을 숨기던 사람이 오히려 고난 이후에 당돌하게 나서는 것이 역설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모두 도망쳤던 제자들이 두 달이 채 못 되어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나발을 불고 다녔습니다.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십자가는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십자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기에 십자가를 숨길 수 없습니다.

사형수가 진 끔찍한 십자가에서 끝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기를 소원합니다.

십자가의 고난이 가지는 두 번째 역설입니다.


역설2.  

10절 말씀입니다.

: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종을 상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병들게 하셨습니다.

1. 자신은 상함을 받고 질고를 당하였습니다.

극단적으로 영은 거룩하고 육은 저속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고난을 당하실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나사렛 예수라는 이에게 들어와 잠시 머무셨을 뿐이고, 고난을 당하실 때 그 영은 떠나서 하늘나라로 가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고난당한 것은 단지 육을 가진 나사렛 사람일 뿐 그리스도는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허깨비일 뿐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난은 실제였습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이십니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분이십니다(요 1:1, 14).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마 20:28)이셨습니다. 값을 대신 치르기 위하여 친히 고난의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고난을 오늘 말씀은 ‘그의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의 ‘영혼[vp,n</네페쉬]’은 ‘숨을 쉬다’는 말에서 왔습니다. 즉 호흡하는 생명체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사람들을 위한 속죄의 제물로 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제물로 내놓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뜻을 이루어 드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2. 그러나 자신을 제물로 드려 그 뜻을 이루셨습니다.

자신의 희생을 통하여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이야기는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그렇게 찾기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많은 것들이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통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양은순이 ‘사랑과 행복에의 초대’에서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한국 전쟁 중, 한 만삭이 된 어머니가 아기를 낳기 위해 어떤 집을 찾아가던 중이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그 집에 도착하기 전에 길에서 진통을 시작했습니다.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던 어머니는 다리 밑에 겨우 자리를 잡고 아기를 분만하였습니다. 추운 겨울, 아무도 도와 줄 사람이 없는 가운데 그 어머니는 모든 것을 혼자 처리하고, 아기가 춥지 않도록 자기 옷을 모두 벗어서 아기를 감싸주었습니다. 해산 직후 추위에 어머니는 그만 얼어 죽고 말았습니다. 

얼마 후, 어느 미군 장교 한 사람이 차를 타고 그 근처를 지나가다가 휘발유가 떨어졌습니다. 그는 부대로 연락을 취해 놓고 차에서 내려 그 부근을 거닐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깜짝 놀란 그 군인은 그 소리를 따라 다리 밑까지 내려갔습니다. 거기서 그 군인은 기가 막힌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어머니는 벌거벗은 채 얼어 죽어 있었고, 어머니의 옷에 둘러싸인 갓난아기가 몹시 울고 있었습니다. “내가 여기서 기름이 떨어진 것이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살리시기 위함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군인은 그 아기를 데려다가 양자를 키웠습니다. 

그 아기는 미국에서 훌륭하게 자라 청년이 되었습니다. 늘 자신의 출생에 대해 알고 싶어 하던 그 청년는 어느 날 자기를 키워 준 아버지로부터 자기를 낳아 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아들은 무덤을 찾아 한국에까지 나왔습니다. 그 아들은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자기 옷을 벗어서 무덤 위를 덮으면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어머니! 얼마나 추우셨어요! 나를 살리기 위해 어머니는 그런 희생을 치르셨군요! 저는 어머니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벌거벗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겠어요!”

작가는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어머니의 사랑은 이처럼 위대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위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자신이 질고를 지고 상함을 당하심으로 인간을 위한 제물이 되셨습니다. 말씀 그대로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b)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값을 치르셨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위하여 다시 지불할 값이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자유로움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고난이 가지는 세 번째 역설입니다.

역설3.  

11절 말씀입니다.

:11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의로운 종은 이루말로다 표현할 수 없는 고난을 겪었습니다. 여기에서의 ‘영혼의 수고’는 극심한 고통을 가리킵니다. ‘수고[lm;[;/아말]’라는 말이 ‘진저리나는 노력’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1. 자신은 극심한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고난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크게 소리 지르신 것입니다.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마 27:46)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으시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조차 버림을 받으셨다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고통이었습니다.

우리의 몸에서 다치면 가장 아픈 곳이 어디일까요?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고, 사실 다치면 덜 아프고 더 아프고 가릴 곳 없이 모두 아프지요. 그런데 그 중에서 다치면 더 아픈 곳이 있습니다. 이곳을 다치면 마음까지 아픕니다. 이곳을 다치면 평생 동안 아픕니다. 다치면 온 몸과 마음이 아픈 곳, 평생 동안 한이 맺히는 곳, 그곳이 어디일까요? 

정답은 ‘발 등’입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손 안에 있어서 늘 편리하게 사용하고 믿기까지 한 도끼로 자기 발등을 찍으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물론 이 속담은 쇠로 만든 도끼에 자기의 발등을 찍혔다는 말이 아니지요. 믿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였을 때를 가리키는 말이지요. 믿었던 사람이 등을 돌리면 억울하고 약이 오르고 가슴이 아픕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조차 버림을 받으시는 아픔을 겪으셨습니다.   

그런데 의인의 고난은 단지 슬퍼할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수고로 만족스럽게 여기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에서 ‘의롭게 하다’[qd'x/짜다크]‘는 말은 법정에서 사용하는 말입니다. 죄 값을 치렀기 때문에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잘못을 하였으나 잘못에 대한 값을 치렀기에 의로운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극심한 고난을 당하셨으나,


2. 그러나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셨습니다.

성경이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갈 3:11)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습니다.

노르웨이 어느 도시의 한 건물에 높이 솟은 시계탑이 있습니다. 그 시계탑 밑에 한 마리의 양의 조각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건물을 지을 때의 일입니다. 시계탑을 공사하던 한 일꾼이 잘못하여 높은 데서 미끄러져 떨어졌습니다. 까마득한 아래는 단단한 돌이었습니다. 떨어지면 그 자리에서 죽을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바로 그때 그 밑을 양떼들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모여선 사람들이 ‘저런!’, ‘저런!’하는 동안 그 사람은 양떼 위에 ‘퍽’ 하고 떨어졌습니다.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 들었습니다. 그런데 일꾼은 아무데도 다친 곳이 없이 벌떡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양 한 마리가 그의 밑에 깔려서 죽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일꾼의 목숨을 대신하여 죽은 양을 두고두고 기념하기 위하여 시계탑 밑에다 양을 조각하였습니다.

죽어야 할 사람들을 대신하여 어린 양 되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를 믿는 모든 자를 넉넉히 의롭게 하는 값으로 지불되었습니다.

그 은혜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을 확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십자가의 고난이 가지는 네 번째 역설입니다.

역설4.  

12절 말씀입니다.

:12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고난 받는 의인은 죽는 데까지 자기의 영혼을 서슴없이 내맡기셨습니다. 남들이 죄인처럼 여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범죄자 중의 하나로 여김을 받았습니다. 여기에서 ‘범죄자[[v'P;/파솨]’는 반역자를 의미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1. 자신은 범죄자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십자가형은 로마에 저항하는 중대한 범죄자가 아니면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종교주의자들의 눈엣가시처럼 되신 예수님은 빌라도의 손에 넘겨지셨습니다. 예수님이 죄가 없으시다는 것을 알면서도 빌라도는 정치적인 판단으로 십자가에 달도록 내어주었습니다. 철저하게 인간의 이해득실에 따라서 죄인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다른 범죄자들과는 달랐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반역자의 하나처럼 그 속에 끼여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그 반역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여기에서 ‘기도하다[[g"P/파가]’는 말은 탄원하다 중재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2. 그러나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 중에 하나는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는 말씀입니다. 이는 분명히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신 것이었습니다. 이는 분명히 자신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하는 인류를 위한 기도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값으로 내어 놓고 하나님께 인간을 위하여 탄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딤전 2:5). 우리는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었습니다(엡 3:12).

십자가 위에서의 기도가 나 자신을 위한 기도임을 믿으십시오. 그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편 기자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고난을 통하여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는 고난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를 위하여 친히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죄 없으신 예수님의 고난이 얼마나 놀라운 능력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인류 최대의 역설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통하여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시고, 그 사랑으로 세상에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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