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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제자들에게 오셔서 주신 말씀 (요 20: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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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에게 오셔서 주신 말씀 (요 20:19-23)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예수님이 이 세상의 소망이다.

오늘의 말씀은 부활의 첫날 저녁에 일어난 이야기이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 주님이 못 박히실 때 흩어졌으나 오늘 제자들이 다같이 방 안에 모여 있는 것을 본다. 그런데 요20:24을 보면 그 제자들 가운데 의심쟁이 도마는 없었다. 가룟 유다도 없었다. 

요20:19을 읽어보면 제자들이 모여 있으나 저들은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을 닫아 버렸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아닌 것처럼, 아니 발각되면 안되는 두려움으로 인해 숨소리조차 죽이고 모여 있었다. 

사람의 두려움이 얼마나 큰지 모여 있기는 하나 숨어 있는 제자들, 모여 있기는 하나 아무 것도 못하는 제자들, 모여 있기는 하나 무력하기만 한 제자들이 되어 스스로를 방안에 가두었다. 이 말씀을 읽으면 가슴이 아프다. 이 모습이 꼭 나의 모습, 한국 교회의 모습인 듯 하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 주변에는 교회 건물 안으로 모이기는 하나 사명을 잃고 세상 사람들을 향해 아무 것도 외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다. 물론 교회에서는 큰 소리를 치고, 성도들 앞에서는 큰 소리를 치고, 믿는 친구들 가운데서는 큰 소리를 치니 세상을 향해서도 당당하고 죄를 박살내고 세상의 물결을 거스를 것 같은 이들도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예수를 조롱하는 세상을 향해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한다. 도전하기는 커녕 세상의 소리를 따라가고 그들과 함께 하는 배교자들도 있다. 세상 사람들이 주목하고 바라보는 것이 두려워 조용히 숨 죽이고 있는 모습이라면 우리는 방 안에 문을 듣고 있는 제자들과 같지 않은가?

왜 이렇게 문을 닫고 모여만 있는 폐쇄적인 제자가 되었는가? 주님을 잃었기 때문이다. 산상 설교를 하시던 주님, 마음마다 다니시며 전도하시던 주님, 병든 자를 치유하시고 귀신을 축사하시던 주님, 그 주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오히려 죽으신 주님, 저주 받은 자로 나무에 달린 채 십자가에서 죽었기에 모든 것이 끝장난 줄 알았다. 

3년간 좇았던 주님을 따르는 삶이 실패한 줄 알고 자랑했던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도, 섬기며 봉사했던 3년간의 행보도, 왕의 행렬이라 으스댔던 시간도 다 헛된 것으로 느껴졌다. 주님이 없는 신앙의 삶은 두려움 밖에 남지 않는다. 주님이 없는 신앙의 삶은 무기력 밖에 남지 않는다.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가 모이기는 하지만 아무 것도 못하는 기독교, 아무 것도 못하고 우리끼리만 교제하다가 세상에 영향력이 되지 못하는 영적 허약증에 있다면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예배 속에 예수가 없는 것이다. 기도 속에, 기도하는 그 사람의 속에 예수가 없는 것이다. 가정 속에 예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가 없는데 아무리 웅장한 찬양을 불러도 두려움이 물러가지 않는다. 예수가 없으면 아무리 멋지게 피아노를 치고 오케스트라가 화음을 만들어내도 능력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란 책을 쓴 토마스 아 캠피스는 이렇게 말했다. “중세의 교회가 금과 은은 많아졌고 물질의 부요함은 쌓여 있다. 그러나 예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 예수가 있었던 초대 교회가 되지 못하고 금과 은, 나 있어도 예수가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예수가 없으면 교회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어떻게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어떻게 기도가 응답되고, 어떻게 영혼을 구원하고, 어떻게 더러운 죄사함이 가능한가? 그러므로 예수를 다시 찾고 예수가 모임 속에 있어야 한다.   

오늘 본문 요20:19을 보라.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부활하신 주님이 아무 것도 못하는 제자들에게 오셨다. 이것이 은혜다. 무력한 이들에게 다가오셨다. 어떻게 어떤 모양으로 제자들에게 오셨는가?  

첫째, 기이한 몸으로 오셨다. (요20:19)

요20:19을 보면 모인 곳의 문이 닫혀 있었는데 예수께서 나타나셨다. 제자들 가운데 서서 말씀하셨다. 유대인이 두려워 문을 닫았는데 주님이 나타났으니 주님의 부활의 몸은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주님의 몸은 밀폐된 문, 문이 닫혀 있어도 방안으로 들어오시는 몸이시다. 부활의 몸은 기이한 몸임을 알 수 있다. 얼마든지 굳게 닫힌 폐쇄의 문을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오신다.   

둘째, 흔적을 가진 몸으로 오셨다. (요20:20)

요20:20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라고 하였다. 제자들은 그 주님의 십자가 흔적을 볼 때 기뻐하였다. 주님의 몸은 기이한 몸이지만 못 박힌 손, 창에 찔린 옆구리의 흔적을 가지고 계셨다. 분명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매달린 분이심을 시각적으로 보여주셨다. 부활의 주님을 부인할 수 없는 흔적의 몸으로 오셨다. 제자를 사랑하기 위해 가진 흔적이다. 제자를 구원하고 용서하기 위해 가진 흔적이다. 누구도 이 흔적 앞에서 주님이 아니라고 할 자 있겠는가? 제자들은 기뻐하였다. 흔적을 지닌 주님이기에, 너무도 분명한 부활의 주님이기 때문이다.

셋째, 숨을 내쉬는 몸으로 오셨다. (요20:22)

요20:22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라고 하였다. 주님은 오셔서 세 마디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마지막 말씀을 하실 때 숨을 내쉬셨다. 숨을 내쉬다. 사실 숨이란 살아있다는 증거다. 호흡이 멈추면 사람은 죽은 것이다. 숨을 쉬셨다는 것은 바람을 내뿜으셨다는 뜻이다. 그런데 프뉴마, 르하흐인 성령이란 말이 숨, 바람이란 단어다. 주님이 성령을 받으라는 말을 할 때 숨을 쉬셨다는 것은 분명하게 살아있다는 것이다.   

두려워 떠는 제자들 가운데 찾아오신 주님은 유령이 아니다. 환상이 아니다. 착각이 아니다. 살아나신 주님이다. 숨결을 생생하게 느끼게 된 제자들, 그 저녁 시간은 모든 것이 달라지는 순간이었다. 망하고 실패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출발의 시간이었다. 찾아오신 주님은 세 가지 말씀을 하셨다.  

1. 위로의 말씀을 하셨다. (요20:19)

요20:19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란 샬롬이란 인사다. 전쟁에 반대어로서 안녕, 건강, 정의, 화평, 조화, 화목 등 어떤 말로 정의할 수 없는 말이다. 즉 내가 배고플 때에는 배부름을 의미하고 내가 추울 때에는 따뜻함을 의미하는 말이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는 건강을 의미하는 말이다. 제자들은 유대인이 무서워 두려움 속에 있었으나 이 위로의 말, 평강의 헬라어인 에히레네는 용기를 주는 말이다. 

주님은 나의 시급한 형편을 안다. 가장 필요한 위로가 무엇인지 알고 계신다. 에히레네, 샬롬의 기원은 최고의 위로다.  

2. 파송의 말씀을 하셨다. (요20:21)

요20:21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평강을 기원하는 이야기를 다시 반복하시고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의해서 역사 안으로 우리에게 보내지셨다. 하나님이 맡기신 미션을 위해 세상에 들어오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우리는 예수님처럼 예수님에 의해 세상으로 보냄을 받는 파송자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미션을 받아 가지고 가는 자들이다. 

부활의 아침! 우리는 나의 일터, 나의 사업처, 나의 회사로 파송 받은 제자 공동체다. 교회는 이 보내심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을 훈련하고 섬기고 배치하는 곳이다. 우리는 보냄 받았다는 것을 확인하자. 

2013년 8월 18일, 감리교는 하디 부흥 110주년 기념 선교 대회를 연다. 무명의 선교사, 잊혀진 선교사로 알려진 하디이지만 하디가 있었기에 평양 대부흥이 일어났다. R.A.하디, 그는 보냄을 받았다. 캐나다에서 의과대학을 공부하고 평신도 선교사로 1980년 9월 30일에 한국 땅에 보내어졌다. 하디가 파송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면 그의 의과 전공을 살려 돈 버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조선 땅에 들어와 원산에서 일하며 1903년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신의 무능을 회개한다. 선교의 열매 없음을 회개하게 된다. 그리고 장로교 선교사들의 모임에 초대되어 성령의 역사로 회개를 일으키고 그것이 평양 대부흥의 뇌관이 되었다. 

이 땅에 보내어진 자는 선교사만이 아니다. 모든 크리스챤은 보내어지는 제자다. 파송받은 제자들이다. 주님이 보내신다는 말을 오늘 믿고 일어나라. 확신하라. 나는 파송된 자다. 일터로, CM으로, 교회로 보내어졌다.  

3.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요20:22)

요20:22 “이 말씀을 하시고 ...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왜, 성령을 받아야 하는가? 힘으로도 안되고 능으로도 안되기 때문이다. 하디가 교회를 세우고 강원도 지경터 교인이 1902년에 15명이나 되었다. 그가 말하는 열매 없음은 숫자가 아니었다. 회심한 자가 없었다는데서 오는 무능력감이었다. 허나 성령이 역사하실 때 그것을 회개한 것이다. 죄의 회개는 죄를 지적하므로 회개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이 감동하므로 회개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령이 오셔야 한다. 성령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다.  

① 파송 받은 사명을 잘 감당하는 힘이다.

성령의 능력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방 안에 갇혀 머뭇거리는 모습을 깨고 문 밖으로 나가게 하는 힘이 성령이다.   

② 부활하신 주님의 명령이다.

받아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가? 주님은 교회와 제자들을 위해 성령을 언급하셨다. 축복받고, 일등하고, 성공하고 등 그것이 우선이 아니다. 성령을 받아야 제자들이 제대로 서기에, 교회가 교회되기에 성령을 받으라고 가장 먼저 말씀하셨다. 

③ 권세를 가지고 사역할 수 있다.

요20: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죄사함은 하나님만의 권세다. 그러나 성령을 받으면 그 고유한 하나님의 권세가 내 권세가 된다. 계급, 인종, 수준, 혈통, 학력, 성별 등 모든 것을 뛰어넘어 성령을 받으면 권세가 있어 당당하게 나아가게 된다. 이 성령을 받으면 권세가 오므로 두려움이 깨진다. 외부를 두려워하는 공포증이 깨진다. 

문 앞에 모여 있기만 하는 영적 허약증! 

아무 것도 못하는 그리스도인! 
아무 것도 못하는 기독교가 깨어진다. 교회와 성도를 바꾸려면 성령이 오셔야 한다. 세상을 이기려면 성령을 받아야 한다.  

부활의 아침! 

다시 사신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평강이 있으라.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성령을 받으라.” 이 세 마디의 음성이 계속 우리 가슴에서 방망이질 하기를 축원한다. 얼마나 시급하기에, 얼마나 중요하기에, 얼마나 우선의 일이기에 다시 사신 주님이 이 말씀을 던지셨을까? (김철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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