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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처음으로 보이신 이유! (막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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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보이신 이유! (막 16: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마가복음 16장 9절)

오늘 부활을 맞이하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축복합니다.
언젠가 아이들에게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너희에게 얼마만큼 기쁘냐? 기쁜 만큼 감사헌금을 해라!”
그랬더니, 아들이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아빠가 담임목사 취임했다는 말을 듣고는 미국에서 50불 헌금을 했어요. 그런데 부활절에는 10만 원 할 거예요”

우리가 부활절에 정말 기쁨과 감사함으로 나온다는 것은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할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의 삶에서 매 주일이 부활주일입니다. 우리가 모이는 이유는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모이기 때문이죠. 문제는 감사가 너무 익숙해지면 감사한지 모르고, 기쁨도 어느 순간엔가 무감각해진다는 것이죠. 그래서 “절기”가 있는 모양입니다. 무감각해진 우리로 하여금 새롭게 생각하도록 말입니다.

몇 달 전 안양감리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마지막 날 집회를 마치고 목사님들과 함께 영화를 봤습니다. [7번방의 선물]이라는 영화를 보는 내내 많은 사람이 울었습니다. 끝나고 나오는데 목사님 중의 한 분이 참 솔직하게 말하더군요.

“아! 집회 때도 흘리지 않던 눈물을 영화 보면서 흘렸네요.” 강사를 옆에 두고 말입니다.
그래서 집회 마지막 날에는 설교하지 말고 영화를 보여줄까도 심각하게 고려 중입니다.
감격할 수 있다는 것, 눈물을 흘릴 이유가 있다는 것, 누군가에게 소리쳐 알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소식이 있다는 것.
오늘은 부활의 감격과 이유에 대하여 말씀을 나눠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마가복음 16장 9절에 보면,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먼저”라는 말의 희랍어 “프로톤”은 “처음으로”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처음으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의 소식을 처음으로 알리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 이후에 예수님은 부활하신 몸을 여러 제자에게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동기가 마리아와는 달랐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마리아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전해도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6장 1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셨습니다.” 또한, 도마에게 나타나신 이유도 그의 의심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이유는 그녀를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종종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게 성경적이고 교리상으로 맞는지 틀리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지만, 똑같이 사랑하시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 첫날 이른 아침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셨습니다.
“처음으로”라는 말이 참 놀랍지 않습니까? 최초의 증인이 되는 것 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꾸짖기 위해 나타나실 수도 있고,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보이실 수도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물론 꾸짖음 가운데도 주님의 사랑이 묻어납니다. 사랑이 없다면 꾸짖을 이유도 없습니다. 꾸짖는다는 것은 그들의 삶에 애정이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죠.
 
두 주전 참 힘든 장례가 있었습니다. 제가 모든 장례에 참석할 수 없지만, 꼭 참석해서 예배를 인도해야 했던 장례죠. 지금 이 순간에도 참 많은 사람이 죽어가지만, 모든 사람의 죽음이 나에게 같은 의미일 수는 없죠.
"죽음 앞에서"

인생의 한번은 누구나 대면해야 하는 것이 죽음이지요.
어제는 참 슬픈 입관예배를 인도했습니다.
지난가을 담임목사를 꼭 만나고 싶어 한다는 아내의 부탁이라고 남편이 연락을 했더군요.
백혈병으로 투병을 하고 있었고.
찾아간 병원에서 머리에 수건을 쓰고 퉁퉁 부은 얼굴로 너무 감사하다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던 모습이 생생한데. 이제 유치원에 다니는 딸과 남편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하고 스케줄을 의논하고 세상을 떠났으면 좋았을걸.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닌지라 어렵게 입관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늘 아쉬움과 아픔을 가집니다. 더욱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그 마음이 더 하겠지요.

우리는 아픔을 거두어 가신 하나님의 사랑보다는 일찍 데려가신 것이 못내 아쉽고 원망스럽기도 하지요.
아침 안개 같은 인생에서 조금 더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말입니다.
투병 생활 가운데 끝까지 하나님 붙들고 예비하신 곳으로 떠나는 사람을 축복하기보다는 남겨진 사람의 아픔에 서로 눈물을 흘리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아쉬운 축복" 그런 복잡한 감정입니다. 잘 죽는 게 소원이라면 잘 살아갑시다.
누군가와의 이별이 안타까움이 아니라 아쉽지만, 축복이 될 수 있는 그런 인생 말입니다.

이번 부활절에 우리가 고민하며 묵상해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죽음이 나에게 특별한가?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에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이죠.

헌신의 삶이 있었기 때문이죠.
특별한 삶의 의미는 “헌신”과 관계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를 궁금하게 만드는 것은 왜 예수님께서 수많은 제자도 있는데 막달라 마리아에게 처음으로 부활하신 몸을 보여주셨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갔던 여인들이 세 명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2절입니다.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우리가 성경을 얼핏 보며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이 여인들이 거기서 예수님을 보았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들이 도착했을 때 무덤은 이미 비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흰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청년이 마가복음 16장 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그리고 오늘 본문에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처음으로 자신의 몸을 보이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가 누가복음 8장 2절 이하에 등장합니다. “자신의 소유를 가지고 예수님을 섬겼다!”라고 말입니다.

헌신했다는 이야기는 그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것을 희생했다는 것이고, 바로 마리아가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헌신한 것을 예수님께서 아셨다는 것이지요.
“헌신”과 “관계”는 아주 밀접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님이 쓰신 「나는 크리스천입니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예배 때마다 교통정리를 돕는 안전팀이 있다. 여기가 미국 서부인지라 바깥에서 차량을 정리하자면 여름의 열기와 겨울의 혹한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예년과 달리 춥고 비가 내린 올해 부활절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교통안전팀 식구들은 목요일 저녁과 금요일 밤 그리고 주일 새벽 4시부터 오후 2시까지 차량 정리에 매달려야 했다. 워낙 혹사를 당한 터라 마지막 예배가 끝나는 주일 오후쯤에 모두 도로에 쓰러져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주차장 입구에 모여 한바탕 잔치를 벌이고 있지 않은가! 내가 다가가자 안전팀 식구가 커피와 과자를 권했다. 모두 행복한 표정으로 왁자지껄 떠들어 대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차량 행렬이 끝도 없었어요. 근처 야구장에까지 차를 대야 했으니까요. 결국, 엄청난 군중이 부활의 메시지를 들었다는 얘기잖아요. 정말 끝내주지 않아요?”
안전팀 식구들은 올바른 동기로 적절한 자리에서 ‘돕는’ 은사를 발휘하고 참다운 섬김을 통해 ‘교제’라는 덤까지 챙기고 있었다.
몇 해 전부터 교회 안에 진정한 교제가 없다고 불평하는 소리가 요란하다. 그러나 참다운 봉사를 실천하는 사람들 사이에 그런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섬김은 사람들로 하여금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게 한다. 그래서 진실한 관계로 통하는 교제의 문이 활짝 열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헌신”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것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헌신과 희생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알지 못하기에 감격을 알지 못합니다.
왜 단기선교를 갔다 오면 사람들이 달라지는지 아십니까? 그곳에서 섬기는 우리의 헌신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부활절이 여러분에게 가장 값진 것이 되기 위해서는 헌신의 아픔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아픔의 열매를 거두는 감사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 자신의 모습을 보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처음으로 막달라 마리아에서 보이시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보이시고. 마가복음 16장 14-18절을 보면, 열한 제자에게 또 나타나셨습니다.

“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이렇게 생각을 해 봅시다.
여러분 손에 초가 있습니다. 아름답고 커다란 초입니다. 그러나 손에 들려있다는 것만으로 그 초가 빛을 내지 못합니다. 초는 불이 댕겨져 자신을 태우는 순간부터 빛을 내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태우기 전까지 결단코 빛을 내지 못합니다.
자신을 태우는 것은 고난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죽음으로 용서의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이아몬드가 빛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빛이 없으면 다이아몬드는 어떤 광채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빛이 없는 곳에서 다이아몬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누군가 불꽃이 되어야, 누군가 자신을 태워야 가치 있는 것들이 빛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가치는 아무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라지고 소명이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태움을 통해 또 다른 소명이 불타오르게 됩니다.
주님께서 나타나신 이유는 자신을 태우라는 것입니다. 빛을 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이 전파될 때 일어나는 일을 보라는 것입니다.

[막 쪄낸 찐빵]의 저자 이만재(카피라이터) 씨의 간증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만재 씨에게는 아주 친한 친구 같은 선배가 있었답니다. 늘 함께 하면 즐거운 사람이었는데 두 사람의 취미가 분명해서 그 선배는 등산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자신은 술자리를 즐기는 사람이었기에 만나면 늘 이렇게 인사를 했답니다.
“요즘도 산행 재미 좋으시죠?”

그러면 그는 이렇게 묻습니다.
“요새도 재밌는 술자리 많이 합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만재 씨가 하나님 앞에 완전히 백기를 들고 항복하므로 삶이 바뀐 것이지요. 단번에 술을 끊은 것입니다.

그 이후로는 자연스럽게 만남이 술을 먹지 않는 점심시간으로 바뀌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인사를 나누는데.
“요즘도 산행 재미 좋으시죠?”
그러자 그는 이렇게 물었답니다.
“아참, 이형은 술 끊었댔죠. 그래 요샌 무슨 낙으로 삽니까?”
그런데 갑자기 이런 대답이 튀어나오더랍니다.
“하하, 요샌 뭘 하든지 다 즐겁고 재밌습니다. 숨 쉬는 것도 즐겁습니다.”
무심코 한 말에 자신도 놀라고, 상대방도 당황하게 되었답니다.
“숨 쉬는 것도 즐겁다, 쉼 쉬는 것도 즐겁다.”
그런데 이 당황스러운 순간에 그 상황을 설명할 말이 없더랍니다. 그냥 “즐겁다!”라는 말 밖에는 말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므로 일어난 변화입니다.
어떻게 말로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인생이 즐거운 겁니다.
두 발로 대지를 밟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예수님과 함께 부활한 자는 이름만이 아니라 정말로 살아있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죄에 대하여 단호히 거절하고, 하나님의 편에 서서 바르게 살아갑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예를 들어볼까요?

한동대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 학교는 모든 학생에게 인성교육을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므로, 기숙사에 들어오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그런데 학교에 돈이 부족하다 보니까, 들어오는 학생들에게 기여금을 받았습니다. 물론 강제성을 띤 것도 아니고, 나갈 때는 찾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 학생이 돈을 내고 들어왔는데, 올해 들어서 문제가 생긴 것은 학생들이 많아지면서, 모든 학생을 다 수용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학교 당국이 선택한 것은, 모든 1, 2학년 학생을 먼저 기숙사에 머물도록 하고, 3, 4학년 학생들은 기여금을 낸 학생들을 우선순위로 넣고, 나머지는 제비뽑기를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학생들이 정식으로 학교에 항의를 했답니다.
왜 우리 학교가 사람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살아가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학”을 표방하면서 사람의 논리가 적용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학생들의 의견은, 기여금을 낼 수 있었던 아이들은 여유가 있기 때문에, 밖에 나가서도 살 수 있지만, 기여금을 못 낸 아이들은 밖에서 살 경제적인 여유가 없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여금을 낸 아이들이 기숙사 등록을 먼저 포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자진해서 밖으로 나간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방법으로 산다는 것과 십자가의 삶을 선택한다는 것이 이해가 됩니까?
십자가의 삶을 살기 시작할 때, 부활이 있습니다.
부활이란, 살리는 것입니다.
부활이란, 생명입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내가 손해 볼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용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나의 강력한 의지적인 결단이 없다면, 우리는 결단코 부활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죽어야 살 수 있다는 것을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십자가의 죽음이야말로, 사망 권세를 이길 진정한 힘이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의 삶은 이 세상의 모든 불의를 깨뜨려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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