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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에서 참된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 (요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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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참된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 (요 5:1-9)


신앙이란 언제나 최악에서 최선을 만들어내는 작업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에게 믿음만 있으면 최악의 상태가 최상의 상태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갑자기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태도가 문제입니다.  우리가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나가면 반드시 역사는 일어날 것입니다.  믿음의 자세가 모든 인생의 승패를 좌우합니다.  어떤 고난과 고통 가운데서도 믿음의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으면 반드시 승리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지만, 믿음의 사람은 믿음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 안에서 다시금 희망을 선포하며 일어나십시오.

종종 우리들 주위에는 치유를 경험한 사람들이 자기가 어떻게 그 어려웠던 상황에서 치유를 경험했는지 그들의 마음속에서 터져 나오는 기쁨에 넘치는 감격적인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내가, 아니 우리들이 복음을 받아들여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체험했다는 이 사실은 난치의 질병 속에 빠진 사람이 거기에서 회복된 사건보다 훨씬 더 기적이고, 훨씬 더 감격이고, 훨씬 더 기뻐할 만한 사건이라는 사실에 동의하십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바로 이런 기적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적을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최악의 난치의 질병을 앓고 있던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이 오늘 본문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무려 38년이나 병마에 찌들려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이 사람을 치유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시간을 초월해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38년을 병으로 앓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있어서 이 38년은 아무런 장애물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사건은 동일한 기다림을 안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는 위로와 희망의 말씀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2천년 전에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은 시간을 초월해서 오늘도 동일하게 우리들 안에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있어서 문제가 얼마나 오래되었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의 문제가 얼마나 오래되었던, 얼마나 오랫동안 질병 가운데 앓아오셨던, 얼마나 오랫동안 절망과 불신앙 가운데 살아오셨던 그것이 예수님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진실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다시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측량할 수 없이 풍성한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기만 하면 우리는 동일한 은혜와 치유를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이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은혜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그를 만나면 길이 있습니다.  그를 만나면 새생명이 있습니다.  그를 만나기만 하면 당신의 삶에서 기적은 시작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다시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시간의 벽을 초월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만지심과 치유의 역사를 경험하십시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어제 역사하셨던 예수님은 동일하게 오늘도 역사하십니다.  내일도 동일하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까?  아니 우리들 주위에 있는 내 형제와 이웃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물음에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정확하게 인지를 하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첫째로, 우리 모든 인생들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치유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본문 3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여기에 보면 많은 병자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러한 눈에 드러난 육체의 질병들을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핵심은 그들의 병이 치유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사건의 내면에 감추어진 영혼의 질병이 치유되었다는 사실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초점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저들이 육체의 질병에서 고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혼의 질병에서도 고침을 받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치유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 걸을 수 없었던 지체장애인, 활동할 수 없었던 혈기 마른자.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동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들 모두가 당시의 의학수준으로는 아니 지금의 발달된 의학수준으로도 거의 치유가 불가능한 환자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에서 괄호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라고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 4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아닙니다.  이것은 당시 그렇게 믿고 있었던 일종의 유대인들의 민간 신앙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연못의 물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 가장 먼저 그 물 속에 들어가는 사람이 낫는다는 민간 신앙의 속설을 믿고 그 연못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비참한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민간 신앙이 설혹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볼 수가 없습니다.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활동할 수가 없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그 물 속에 뛰어들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저들에게는 애당초 불가능했습니다.  이것은 저들의 절망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38년 된 본문의 이 주인공, 이 사람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38년이라는 숫자는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절망을 의미하는 숫자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를 방황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명기를 보게 되면 보다 정확한 역사는 38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38년이라고 했을 때 그들은 아무런 소망이 없었던 그 지겨웠던 광야에서의 방황하던 시간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이 환자, 그는 38년을 앓았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절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절망하고 있던 사람에게 희망의 씨앗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에게 예수님이 다가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의 이 물음에 이 사람이 어떤 대답을 했습니까?  본문 7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주님, 저는 도저히 저 물 속에 먼저 내려갈 수가 없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저는 절망입니다"라는 고백일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었습니다.  이 사람을 포함해서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었던 모든 병자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들 모두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치유될 수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이 상태가 아담의 범죄로 죄 가운데 빠진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의 형제와 이웃들의 영적인 상태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아셔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 모두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을 이룰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오늘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의 형제와 이웃들이 구원자시이며 치유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는 단순히 눈만 멀었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소경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볼 수 없고,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은 청각 장애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습니다.  구원의 메시지가 들려오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절망을 박차고 일어나 소망을 붙잡을 수 없는 앉은뱅이들입니다.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성령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생명의 길을 걸어갈 수 없는 혈기 마른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은 다른 일들에 있어서는 잘 했을는지 몰라도 구원에 관한 한 철저하게 무능하고 무기력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팡세의 저자인 파스칼인 이러한 인간들을 향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오, 위대한 인간이여!  영광스러운 존재여!  그러나 더 비참한 존재여!"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에게는 확실히 다른 동물들과 비교했을 때 영광스러운 존재들인 것은 사실입니다.  인간은 위대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 측면에서 본다면 인간은 훨씬 더 비참한 존재입니다.  적어도 구원에 관한 한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런 능력도 갖지 못한 철저하게 무기력하고 무능한 존재입니다.  종교개혁자인 요한 칼빈은 인간의 존재를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구원에 관한 한 인간은 철저하게 무능하며, 철저하게 부패한 존재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사도 바울은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연약할 때'라는 표현은 보다 정확하게 번역한다면 '무력한 때'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구원에 관한 한 전혀 무력한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불경건하고 부패하여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우리들을 위해서 그가 스스로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바울은 그것이 바로 복음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사람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얼마나 무력하고 무능한 존재인가를 말입니다.  그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전적으로 무력했던 존재였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이 한 주간 동안 살아가면서 우리가 만나야 할 내 형제와 이웃들은 누구입니까?  이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치유될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구원을 기대할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내 이웃과 형제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두 번째 중요한 사실은 우리 모든 인생들은 오직 은혜로만 치유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많은 병자들이 그들의 치유를 희망하며 누워 있었던 곳이 베데스다 못이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베데스다'라는 말은 "자비의 집, 은혜의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연못가에서 사실상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38년 된 병자가 치유 받을 수 있었던 원인은 오직 한 가지 밖에는 없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요청한 적도 없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부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보시고, 그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치유하셨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5장을 계속해서 읽어보면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치유를 기다리는 병자들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중간쯤 넘어서면 사람들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한복음의 저자인 요한은 예수님께서 단순히 병자의 육체적인 질병을 치유하셨다는 그 사실을 증거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서는 인간 실존의 문제인 죄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시면서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 가르치기를 원하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5장의 중심 되는 구절은 24절의 말씀입니다.  24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38년 된 병자의 사건을 통해서 영생을 얻는 사건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치유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 이것이 기독교 구원관의 본질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한 가지 면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들 모든 종교는 예외 없이 모두가 자력 구원 종교라는 것입니다.  나의 노력으로, 내가 추구하는 어떤 것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인간들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신들을 만들어갑니다.  어떤 나무를 가리켜 신이라고 하고, 돌을 가리켜 신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거짓된 희망이라고 가르칩니다.  저들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인간이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짓된 종교입니다.

물론 성경은 인간의 노력을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어떤 스스로의 노력으로 결코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스스로 열심히 하나님을 찾아보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붙잡고 보니 그것이 우상이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나를 구원할 수가 있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스스로 내 안의 깊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면 나에게는 치료자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고칠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치료자이신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나의 어떤 행위로도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에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스스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출발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은혜라고 말합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에베소서 2장 8절의 말씀을 아십니까?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리고 9절에 보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자랑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어떤 행위도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모자랍니다.

그렇습니다.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들, 바꾸어 말한다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치유될 수 있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아직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내 형제와 이웃들입니다.  그리고 저들은 이 은혜의 소식을 듣고 싶어서 먼저 믿은 저와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38년 된 이 병자의 절망적인 소리를 다시 들어보십시오.  "나를 저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서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고 있습니다.  나는 절망입니다."  그러나 이 절망의 고백 밑바닥에서 솟아오르고 있는 이 사람의 소리는 은혜를 갈구하는 소리입니다.  구원을 갈구하는 외침입니다.  구원을 갈구하는 이 애절한 신음의 소리를 우리는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 은혜의 소식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누군가 나에게 이 은혜의 소식을 전해 주었기에 나는 오늘 이 은혜의 자리에로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의 저와 여러분을 받아주시고 구원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동일하게 지금도 오직 은혜로만 치유될 수 있는 내 형제와 이웃들을 기억해 주십시오.  그리고 저들에게 이 은혜의 소식을 가지고 다가가십시오.  우리가 저들에게 이 은혜의 소식을 전하는 순간 저들의 삶은 달라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 은혜의 소식은 살 소망을 잃어버린 저들에게 새로운 생명이 펼쳐지게 하는 생명의 공급선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 주간 저와 여러분이 내 형제와 이웃들에게 이 은혜의 소식을 전하는 전달자로 쓰임을 받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의 형제와 이웃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치유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사실은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만나야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치유의 희망 없이 인생을 사는 우리의 인생들이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도대체 이 예수는 누구이십니까?  본문 6절에 보면 38년 동안 병자로 살아온 이 절망의 사람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알 수가 있습니다.  6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여기에 인상적인 두 개의 동사가 있습니다.  "보시고, 아시고"  38년 된 병자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은 그를 보시자 마자 그의 병이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그리고 그를 붙들고 있는 절망이 얼마나 깊은 것이었는지를 다 알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사람들에게서 존경받아야 하는 어떤 성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다는 사실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에게 다가온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 사람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람은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감히 이 사람에게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도대체 그가 누구이시기에 감히 이 사람에게 이렇게 말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성경은 예수님의 이 선포가 끝나자 마자 일어난 일에 대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38년 동안 앉아있던 이 사람을 일으켜 세워서 새로운 생명을 주실 수 있었던 분, 이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창조의 모습으로 걸어갈 수 있게 하셨던 분, 그분은 전능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단순히 인생들에게 모델이 아니라 절망 가운데 있는 인생을 구원하실 수 있는 구원자요, 치료자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는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아니 우리의 형제와 이웃들에게도 구원자이시며 치료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아니면 인생은 결코 구원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  감히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는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과의 중보자로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의 사건을 앞에 두고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흥미로운 사실은 오늘 본문에 그려진 베데스다 못, 그 자비의 연못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사람들은 반드시 양문을 통과해야만 했었습니다.  본문 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여기에서의 양문은 제사장들이 속죄의 제사를 드릴 때 제물로 쓰여질 양들을 가지고 통과하는 문이었습니다.  이 문을 통과하면 바로 베데스다 못이 있습니다.  양문을 통과해야만 은총의 못, 자비의 못에 도달할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이렇게 선포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구약에 드려졌던 수많은 양들은 장차 오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어떤 행위와 노력으로도 구원받을 수 없는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피 흘리심이 있었기에 오늘 저와 여러분의 죄가 용서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만나는 순간 우리는 놀라운 하늘의 은혜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어느 누구도 양문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고서는 결코 새생명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고서는 절망 가운데 신음하는 인생들이 소망으로 다시 일어나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내 삶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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