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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생의 샘물 (요일 4: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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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의 샘물 (요일 4:3-26)


사람에게는 두 가지의 욕구가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적인 욕구이고, 다른 하나는 영혼의 욕구입니다. 밥을 먹지 않으면 시장기를 느끼고, 땀 흘려 일을 하다보면 갈증을 느끼고, 먼 길을 걸으면 피곤해서 쉬고 싶은 마음이 드는 데, 이런 것들은 육체적인 욕구에 속합니다. 반면에, 육체적인 욕구와는 상관없는 영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경우에,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때가 있는가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 받아야겠다는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것은 육체적인 욕구가 아니고 영혼의 욕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사람이 소나 말과 같은 짐승에 불과하다면 육체적인 욕구만 충족하면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복지 시스템이 잘되어 있는 스웨덴과 같은 나라의 자살률이 높은 것은 어디에 원인이 있겠습니까? 멀리 외국의 사례까지 언급할 것도 없이, 우리나라의 경우만 보아도 과거에 가난하게 살적에는 자살 사건이 희귀했는데, 세계 12위의 경제 강국이 된 지금은 자살률이 OECD에 가입한 34개국 가운데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저는 한국동란의 폐허 속에서 태어났고 성장했으므로 우리나라의 경제가 발전해 온 전 과정을 다 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발전의 속도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야말로 무일푼에서 큰 부자가 된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국민들이 행복해야 할 텐데, 자살률 1위가 말해 주듯 사람들은 과거보다 더 불행해 합니다. 이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신 성경 말씀과 같이, 영적 욕구가 육체의 욕구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자는 인간적으로 매우 불행했습니다. 이 여자는 시집을 다섯 번이나 갔으나 다 실패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남자는 여섯 번째로 만난 사람입니다. 이천년 전에 유대 사회의 관습은 여자가 제 뜻대로 남편과 이혼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이혼을 결정하는 권한은 남편에게 있었습니다.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혼 증서를 써주고 내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여자는 다섯 번이나 이혼을 당했다는 말이 됩니다. 이 여자에게 무슨 딱한 결함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참 불행한 여자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 여자가 혼자 살지 않고 번번이 시집을 간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마 혼자 힘으로 살아갈만한 능력이 없었거나, 그렇지 않다면 혹시라도 새 남편을 만나 행복하게 살기를 기대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새 남편이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했습니다.

과거에는 서구인들의 이혼율이 높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인들도 그들 못지않습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지난 해 8월부터 금년 1월까지 6개월간의 이혼율이 무려 34%나 됩니다. 열 쌍이 결혼해서 그 중 3.4쌍이 이혼한 것입니다. 이 역시 OECD 국가 중에서 상위권에 속합니다. 과거에 비해서 경제적으로 잘 사는데 왜 이혼율이 증가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가정을 통해서 행복을 누리지만, 그렇다고 남편이나 아내가 영혼의 갈증을 충족시켜 줄 수는 없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자가 이 사실을 우리에게 잘 일러줍니다.

이 여자는 그 동안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통해서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을 것입니다. 이웃 사람들은 이 여자를 백안시하고 상대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이 여자가 정오에 물을 길러 우물에 온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유월절 명절을 지내시고 갈릴리로 돌아가시는 중이었으므로 시기적으로 4월 말이나 5월 초순쯤 되었을 것입니다. 대낮에는 햇빛이 강렬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활동을 삼가고 집안에서 쉽니다. 그러한 시간에 혼자 우물로 물을 길러 왔으니 딱한 사정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한편, 우리 주님께서는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시던 중에 사마리아를 통행하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이 같은 주님의 행동은 그 당시 선민의식이 강한 유대인들과는 대조적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가급적이면 사마리아 땅을 밟지 않으려고 요단강 동편 길로 빙 둘러서 다녔습니다. 시간이 훨씬 많이 들었지만 그 편을 택한 것은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처럼 여겼기 때문입니다. 선민이 이방인의 땅을 밟으면 부정하게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사마리아를 통행하는 편을 택하셨습니다. 이야말로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려고 오신 구세주다우신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은 피곤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육신을 지니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마침 거기 우물이 있는지라 우물곁에 앉으시니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습니다. 그 얼마 후에,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우물로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시니 그 여자가 대답하기를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아마 이 여자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는 평소에 사마리아인을 멸시하던 유대인이 목이 마르니까 별 수 없이 물을 달라고 부탁하는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물을 마시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인정에 목말라하고 사랑에 목말라하는 이 불행한 여자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해 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주여,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적 진리를 말씀하셨으나 이 여자는 마실 물에 관한 것으로 알아들었습니다.

제가 아는 한 사람이 한 동안 두통으로 고생했습니다. 뇌에 이상이 생겼나하고 뇌파 검사를 해보았으나 이상이 없습니다. 그러던 중에 누가 말하기를 “혹시 눈에 이상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으니 안과에 가보세요”라고 했습니다. 안과에 가서 검사를 했더니 난시 증세가 있다고 해서 안경을 맞추어 섰더니 머리 아픈 증상이 사라졌습니다. 병을 고치려면 먼저 바른 진단을 해야 합니다. 영혼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이 영혼의 문제인 줄을 알지 못하고 다른 데서 원인을 찾으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불의가 만연한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난 데 그 원인이 있는데도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법과 제도가 미비해서 또는 교육이 부족하고 환경이 나빠서 그런 줄로만 생각합니다. 왜 교육수준이 높아 가는데도 사람들은 점점 더 이기적이고 비정하게 되어 가는 것일까요? 그것은 사람들의 영혼이 죄로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목이 마를 때 바닷물을 마시면 더욱 갈증이 심해지듯이, 사람들은 영혼의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엉뚱한 방법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술을 마시고 쾌락을 추구하고 오락을 즐기고 무엇엔가 몰두함으로써 해결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고 하시자, 그 여자는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라고 말했습니다. 그 여자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우리는 이 말씀을 올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물은 사마리아 수가성에 있었던 야곱의 우물물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이 갈급하여 추구하는 모든 것이 다 여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권력이라는 물을 마시고 싶어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명예라는 물을 마시려고 애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재물이라는 물을 마시려고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쾌락을 얻기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사랑과 인정에 목말라 합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알코올에 중독된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약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권력이나 명예나 쾌락이나 재물이나 술이나 마약과 같은 것이 영혼의 갈증을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세상이 주는 이 같은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물을 마셔야 영혼의 갈증을 해소하고 진정한 만족을 맛 볼 수 있습니다. 어제 카메룬에서 선교하시는 이 목사님이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거기 보니, 사하라 남쪽 지역에서는 우물을 팔 형편이 못되어 사람들이 모래 바닥을 2미터 정도 파고는 한 번에 한 명씩 조심스레 내려가서 웅덩이에 조금씩 스며 나오는 물을 퍼다가 먹는데, 그 광경을 볼 때마다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올해에 그곳 모라 지역에 우리 교회에 있는 관정과 같은 것을 열 개 파는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물을 얻기 위해 그렇게 고생하던 그곳 사람들이 펌프질만 하면 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본다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정오에 우물로 물 길러 온 여자에게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아예 그 여자의 속에 마르지 않는 샘을 선물로 주셔서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고 늘 기쁘고 만족한 삶을 살아가게 해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일컬어 “생수의 근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12장 3절에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고 하였고, 55장 1절에는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7장 37절 이하에 보니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 영혼의 목마름이 말끔히 해결해 주시고 늘 생명이 넘치는 삶을 누리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장차 성도들이 들어가서 살게 될 새 예루살렘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고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는 곳입니다. 이 땅에서는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핍박을 받고 때로 굶고 갈증으로 고통을 당할지라도 거기서는 다시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 것인데,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어 잘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받기 위함입니다. 구약 성경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약속하신 현세적인 복은 영적인 복에 대한 그림자입니다. 지상의 가나안은 영원한 천국에 대한 모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목적을 성경적으로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당면하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영적으로 성숙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는 기회로 선용해야지, 단지 어려움을 해결 받고 이 땅에서 형통하게 살게 되는 것으로 만족하면 안 됩니다. 

간혹 보면, 물질적인 어려움을 만났을 때는 열심히 기도하고 헌신하다가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 그만 바쁘다는 이유로 예배도 안 드리고 돈 쓰는 재미로 신앙생활을 등한히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병들어 고생할 때에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시면 그만 세상일에 분주해서 신앙생활을 등한히 합니다. 왜 이 같은 일이 생겨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목적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단지 육신의 목마름을 해결할 목적으로 물을 길으려고 우물에 나온 사람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던 사람이 처음 교회에 나올 때에는 영적인 은혜를 알지 못하므로 물질적인 복을 받고 가정이 화목하고 무병 강건하기를 원해서 나올 수 있습니다. 물론 성도들이 하나님께 이 땅의 복을 구할지라도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점은,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기본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같은 목적으로 믿는다면 그 믿음은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헛된 믿음에 불과합니다.

우리 각자는 영혼 속에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의 샘을 소유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을 마음에 모시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성령을 모시고 살 때에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또한 성령으로 충만할 때 우리 마음속에 기쁨의 샘이 터져 나옵니다. 세상이 주는 것과는 전혀 다른 하늘의 평안이 우리 심령을 가득 채웁니다. 또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므로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되는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시냇가에 심긴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이 그 행사가 다 형통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사마리아 여자는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이 여자는 아직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우물에 물 길러 오지 않게 되는 것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셨습니다. 누구나 한두 번 설교를 듣고서 곧바로 구원의 도리를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현세적인 복을 받을 목적만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점점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가운데 획기적인 전기를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돌연 여자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셨습니다. 여자는 급소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이 여자의 가장 아픈 곳을 지적하셨기 때문이지요. 그로나 이 여자는 비로소 밝은 빛 가운데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여자는 주님 앞에서 때 묻고 추하고 상처 입은 자신의 모습을 숨길 수 없었으므로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주님 앞에서 자기의 실상을 솔직히 고백할 때 그 사람은 비로소 구원의 길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여자의 대답이 진실함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여자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선지자로 생각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이 여자의 마음눈이 열렸음을 의미합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과 대화를 해나가는 동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더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여자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대하여 질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에는 마실 물만 생각하고, 왜 유대인이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고 따지는 데만 관심이 있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는 길이 무엇인지 묻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구약시대에는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었으며, 이는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출입할 수 없었으므로 별도로 그리심 산에 자기들의 성전을 만들어 놓고 거기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하여 언제부턴가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그리심 산에서 드리는 예배라야 하나님께서 받으신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내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어느 정해진 장소에서만 하나님을 예배하였으나 사실인즉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어느 장소에 모셔둘 수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소부재(無所不在) 하시므로 어디서나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제사를 드리게 한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빙자하여 우상을 섬기는 일을 방지하려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세상에 오셔서 자기의 피로써 영원한 속죄 제사를 드려주실 것이므로 더 이상 장소를 따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 어디서 예배할지라도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서울에서 드리는 예배뿐 아니라 광주에서 드리는 예배도 열납하십니다. 아니, 전 세계 어디서 드리는 예배일지라도 동시에 다 받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목적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사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인생의 본분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하신 대로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마리아 여자는 드디어 메시아에 대한 자기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고 하였습니다. 이 여자가 마음 깊이 감추어 두었던 메시아에 대한 신앙을 고백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주저 없이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고 자기가 메시아이심을 밝히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사마리아 여자의 영안이 환히 열렸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 여자의 영혼을 얽어맸던 모든 억압이 풀리고 모든 의심이 사라지고 영혼의 갈증이 해소되었습니다. “오, 하나님! 저처럼 부족하고 추한 죄인에게 메시아를 만나는 놀라운 은총을 주시다니” 이 여자의 영혼은 물밀듯한 감격을 주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여자는 메시아를 만난 기쁨을 혼자만 간직할 수 없었습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달음질쳐서 동네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했습니다. 작은 동네에서 이 여자가 행한 일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좋은 의미는 아니지만 이 여자는 그 마을에서 소문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조금도 개의치 않고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외치니,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고 다 예수님을 보려고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께 자기들과 함께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므로 주님께서는 이틀을 머무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뿐 아니라, 그 마을에 사는 많은 사람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메시아를 만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고는 못 견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신학적인 지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여자처럼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 내가 체험한 주님”을 전해 주는 것입니다. 남에게 들은 바를 전하는 것은 효과가 없지만, 내가 경험한 바를 전하면 사람을 감동시켜서 전도의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소유하신 분들은 “아멘!” 하십시다. 사마리아 여자가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던 부끄러운 과거를 용서받았듯이, 우리 역시 모든 추악한 죄를 사함 받았습니다. 마셔도 다시 목마를 수밖에 없는 세상이 주는 물이 아니라 영원한 샘물이신 성령께서 우리 영혼 속에 임하여 계십니다. 이 사실로 인하여 성도님들의 심령에 사마리아 여자가 그랬듯이 메시야를 만난 기쁨과 감격으로 충만한 삶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뿐 아니라, 아직도 목말라 방황하는 이웃들에게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함으로 많은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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