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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행 2:4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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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행 2:41-47)

유명한 상담전문가이자 심리학자인 헨리 클라우드가 존 타운센드와 함께 쓴 책 중에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성장하는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헨리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미국 댈러스에 있는 기독교 정신병원에서 일을 시작할 때 그는 자신감이 충만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자신감이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병원 복도에서 한때 선교사로 일했던 여성을 만났는데 그 여성이 이렇게 소리를 지르더랍니다. “나는 마리아, 하나님의 어머니다!”

자신이 상담하면 누구든 회복될 수 있다고 자신했던 그는 그 장면을 본 순간, 생각보다 쉽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변화된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금방 주님이 원하는 대로 변화되고 성장해 갈 것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보다 쉽지 않다’라는 헨리의 좌절감을 느끼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변화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은 삼천명 모두가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변화된 삶,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해 갔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사도행전 2장 47절이 그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그들의 변화, 그들의 성장은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처럼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사람들이 날마다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인생을 살고 싶지 않습니까? 선데이 크리스천(Sunday Christian)이 아닌 날마다 변화와 성장을 경험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싶지 않습니까?

Ⅰ.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성장하게 되는 것일까요? 성경의 가르침을 배워야 합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신앙이 잘 자라는 분들과 교회는 다녔지만 신앙은 자라지 않은 분들을 봅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성경의 가르침을 배우느냐 아니냐의 차이입니다. 초대교인들의 성장의 비밀, 그 비밀도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2절을 보시죠.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들에 의해 성경의 가르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사람들이 사도들이 전한 기독교의 가르침을 배우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존스는 “진정한 기독교”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한 배척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새로운 것이 있다면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한 반대가 세상에만 국한되지 않고 교회 자체의 가르침에서도, 그 중심에까지 파고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에 다니는 수많은 교인들이 왜 성장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사도들이 전한 성경의 가르침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가르쳤던 성경의 가르침을 사도행전 2장 36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그렇습니다. 사도들은 기독교 윤리를 먼저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 윤리를 무시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가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구주요, 주님이 되셨다는 복음을 확실히 알리고 가르쳤습니다. 왜요? 이것을 깊이 깨닫지 않고는 그 어떤 변화도 그 어떤 영적성장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제가 여러분에게 윤리적인 삶을 먼저 가르친다고 하면 이 가르침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아니요. 죄책감만 증가될 뿐 아무 변화를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요? 이것은 사도의 가르침도 성경의 가르침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변화되기 원한다면 기독교 윤리를 먼저 배워야 할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가르침을 배워야 합니다. 죄와 허물로 망가진 우리를 위해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날마다 묵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우리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우리 자신이 변화되는 것, 우리의 영혼이 성장하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Ⅱ. 한발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성장하게 되는 것일까요?

성도 간에 참된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으면서도 아니 자신들은 구원받았다고 하는데도 성장하지 않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성도의 교제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성장했을까요? 사도행전 2장 42절 보시죠.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무엇을 했다고요?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었습니다. 교제가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교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장도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의아해 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통은 교회에서 친한 몇몇 성도님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교제하고 있는데 왜 나는 변화가 없는가?’라는 질문을 갖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교제는 단순한 사교적 친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제, “코이노니아”는 단순히 친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서로 온전히 연합했다는 말입니다. 종이와 종이를 풀로 붙인 것입니다. 나눌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교제입니다.

생각해보세요. 교제가 우리가 하고 있는 단순한 친교라면 어떻게 사도행전 2장 44절에서 46절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이런 교회를 본 적이 있습니까? 날마다 함께 있으려 합니다. 어려운 성도를 도우려고 재산과 소유를 팝니다. 그리고 성찬식을 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인 것을 확인합니다. 요즘은 육신의 혈육들도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들은 그렇게 교제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바울은 에베소서 4장 4-6절 앞부분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그렇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한 몸입니다. 한 하나님, 한 아버지를 섬기는 가족공동체입니다. 그래서 떡을 떼며 성찬을 날마다 거행하면서 자신들이 한 가족임을 확인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되는 것, 피상적인 교제가 아닌 마음을 나누는 깊은 교제를 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었겠습니까? 요한일서 3장 14절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을 나타내는 증거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기억하십시오. 성도 간의 교제가 없다면, 그것이 사모되지 않는다면,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만 만나기를 원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거나 영적인 어린아이일 것입니다.

Ⅲ.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성장하게 되는 것일까요? 참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인간은 늘 기도를 합니다. 불완전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기도가 출구를 향하는 것은 아닙니다. 역방향으로 달리는 기도도 많습니다.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보세요. 맺음말이 비슷합니다. ‘제발 ∼하게 해주십시오.’ 하는 내용까지 똑 닮았습니다. ‘제 가족이 건강하게 해 주십시오.’ ‘돈을 많이 벌게 해 주십시오.’ 하는 기도는 찬찬히 뜯어보면 나의 바램, 나의 소유, 나의 집착, 나의 욕망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도한다고 다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대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사도의 가르침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기도를 배우고 기도해야 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는 여기서 순서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본문은 ‘저희가 기도하며, 떡을 떼며, 교제하고, 사도의 가르침 받기를 전혀 힘쓰니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순서이며, 우리는 좋든 싫든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건강하게 성장하기 원한다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해야 합니다. 떡을 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됩니다.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따라 기도가 무엇인지 배우고 그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거래가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그 대화를 통해서 자신의 욕심과 허영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 대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 대화를 통해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기도를 오랫동안 했는데 성장하지 않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지 않습니까? 저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성숙은 없었습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특징인 겸손과 인내, 사랑과 오래참음, 희락과 화평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오만함과 교만이 얼굴에 베어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기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대로 기도한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기도는 죄와 허물로 망가진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자신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 때문임을 알기에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겸손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초대교인들을 성장시켰던 기도였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잭 캔필드와 마크 빅터 한센이 지은 “믿음 소망 치유이야기”에는 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토니 캄폴로 목사 이야기가 나옵니다.

새벽 3시 30분, 토니 목사님은 호놀룰루 거리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동부에 살던 그에게 그 시각은 아침 9시처럼 느껴져 잠은 오지 않고 배도 고파왔습니다. 새벽부터 문을 연 가게가 있을까 찾다가 그는 한 작은 식당에 들어갑니다. 맘에 드는 곳은 아니었지만 딱히 갈만한 곳이 없어 그는 커피와 도넛으로 아침 식사를 합니다. 그런데 그때 더 거북한 일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천박한 매춘부 예닐곱 명이 식당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불편해서 자리를 피하려고 했는데 옆에 앉아 있던 여자의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내일이 내 생일이야. 이제 서른아홉 살이 된단 말이지.”
 
함께 있던 다른 여자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대꾸합니다.

“그래서 뭐? 생일파티라도 해줄까? 뭘 바라는데? 케이크 갖다 놓고 생일축하 노래라도 불러줘?”
 
그러자 그 소리를 듣고 있던 여자가 말합니다.

“진정해! 뭘 그렇게 정색하고 그래? 그냥 그렇다고! 날 더 비참하게 만들고 싶은거야? 너한테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어. 난 여태껏 한번도 생일파티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어. 그런데 이제 와서 할 이유가 없지.”
  그 말을 들은 토니 목사님이 다시 자리에 앉습니다. 그리고 여자들이 다 돌아간 후 해리라는 주인에게 묻습니다.

“그 여자들이 매일 오나요? 생일 맞은 그 여자도요?

“아, 아그네스요. 네. 매일 오는 데 왜 그러슈?”
 
“아 네, 내일이 그녀의 생일이라는 말을 들어서요. 우리가 내일 밤 그녀의 생일파티를 열어주면 어떨까요?”

다음날 새벽 2시 30분 생일 케익을 준비하고, 토니 목사님은 가게에서 산 장식용 주름종이를 사서 “생일 축하해요. 아그네스!”라고 쓴 다음, 식당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장식을 했습니다. 조금 지나자 주방에서 일하던 해리의 아내가 이야기를 했는지 호놀룰루의 매춘부란 매춘부가 다 모였습니다. 그리고 정각 3시 30분이 되자 드디어 아그네스와 그의 친구들이 식당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준비하고 있다가 함께 큰 소리로 외칩니다.
 
“생일 축하해요!”

토니 목사님은 그처럼 놀라 당황하며 몸서리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고 합니다. 아그네스는 입을 다물지 못했고, 두 발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린 것 같았습니다. 그녀가 도움을 받아 카운터 앞 의자에 앉는 동안 사람들은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습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의 마지막 부분에 “사랑하는 아그네스, 생일 축하합니다.”를 부를 무렵, 아그네스의 눈은 촉촉하게 젖었습니다.

이어 촛불이 반짝이는 생일 케익이 등장하자 마침내 그녀는 북받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목놓아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그네스는 케익을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두 괜찮다면 이 케익을 집에 가져가서 집에 계신 엄마에게 보여 드리고 다시 가져오면 안 될까요?”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케익을 집어 들고는 무슨 성배나 되는 양 조심스럽게 문으로 향했습니다. 모두 숨죽여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가 집으로 떠났습니다. 바로 그때 토니 목사님이 침묵을 깨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함께 기도하면 어떨까요?”

호놀룰루의 한 허름한 식당에서 한 사회학자가 매춘부들을 이끌고 새벽 3시 30분, 기도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그네스를 위해서, 그녀의 구원과 삶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가 끝나자 식당 주인 해리가 카운터에 기대며 말했습니다.

“이봐요. 전도사라는 말은 안했잖아요? 어느 교회 다니슈?”

마침 순간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은 토니 캄폴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속한 교회는 새벽 3시 30분에 매춘부들과 파티를 여는 교회라오.”
  
해리가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도 안돼요. 그런 교회는 없어요. 있다면 내가 벌써 다녔지!”
  
토니 목사님이 대답합니다.
 
“그런 교회가 있어요. 해리. 당신이 지금 막 시작했잖아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교회가 이런 공동체, 서로 다른 배경과 기질과 문화에도 불구하고 사도의 가르침을 따라 서로 교제하고 기도하는 공동체, 그리고 그 공동체 안에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인답게 성장해가는 그런 교회이기를 소원합니다.    
(김인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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