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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충분한 답변 (행 27: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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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한 답변 (행 27:9-26)

 
나는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가? 나는 왜 그리스도인인가? 옛날에는 에디슨이나 ‘왜’라는 질문을 했는데 요즘에는 모든 사람들이 ‘왜’라고 묻습니다. ‘왜’라는 질문은 무서운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충분한 답변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별 확신이 없이 하던 일도 ‘왜’라는 도전을 받게 되면 둘 중의 하나의 결과를 맞게 되는데 충분한 이유를 찾지 못해서 그만두든가 아니면 충분한 이유를 찾는 계기가 됩니다. 충분한 답변을 주지 못하는 것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유명한 정신과 의사였던 칼 융, 그는 지그만 프로이드의 제자였습니다. 

칼 융의 아버지는 루터교 목사님이었습니다. 융이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삼위일체가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납득할 수 있습니까?’ 그때 아버지가 대답하기를 ‘그런 것은 질문하지 말고 그냥 믿어라.’고 했습니다. 그 순간에 어린 칼 융은 기독교 신앙이 지적인 탐구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 기독교 신앙을 포기했습니다. 그 아버지가 심각한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한 영혼을 잃어버리는 실수를 범한 것입니다. 아마 아버지도 삼위일체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에게 충분히 믿을만한 확신을 심어주지 못한 것입니다. 

유럽의 기독교 문명이 통째로 흔들리게 된 이유는 ‘왜’라는 질문에 답변을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덮어놓고 믿는 것은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는 통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지금은 어떤 것도 덮어놓고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에요. 그랬다가는 큰일 납니다. 모든 일은 진지한 대화와 답변을 요구합니다. 

수년 전에 한국의 항공기가 괌에서 추락한 적이 있었지요. 그때에 한국 항공사의 조종실 문화가 문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군대에서 하는 듯한 상명하복의 문화가 민항항공기 조종실에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장이 내린 결정에 대하여 부기장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장이 실수를 저질렀을 때 부기장이 이의를 제기하여 바로잡을 수가 없기 때문에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처럼 효율적인 군대를 가진 나라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20세기의 많은 전쟁을 통해서 아주 효율적인 군대로 키울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군대를 가보면 상관에게 경례하는 군인을 찾아보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군대는 상명하복의 군대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상당한 자율성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군대로 하여금 더 잘 싸우는 군대가 되게 한 것입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는데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세상의 변화는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고 우리 신앙에 영향을 끼칩니다. 우리가 이러한 시대에 우리의 믿음을 간수하고 그것을 전하기 위해서는 덮어놓고 믿음을 요구할 수 없고 믿을만한 충분한 이유를 우리 자신도 알고 그것을 말할 수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충분한 답변을 요구하는 몇 가지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첫째는 도덕과 윤리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도덕과 윤리에 대하여 어떤 권세를 갖고 계시며 우리가 왜 그것을 따라야 하느냐? 하는 질문이에요. 옛날에는 이런 질문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뿐만 아니고 국가가 요구하는 것 그리고 학교가 가르치는 것을 이의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국가에서 <걸어서 가자>는 운동을 하면 당연히 그래야 될 줄로 알고 순종했습니다. ‘상쾌한 아침이다 걸어서 가자’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 하던 운동입니다. 당연히 그래야 될 줄로 알고 순종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휘발유 값이 폭등해서 유류사용을 줄이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었어요. 이유를 알게 되니까 약간 속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이의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학교에서 도덕을 가르친다는 사실을 아시지요. 가치관을 주입식으로 가르친다는 사실이 좀 꺼림직 합니다. 게다가 시험까지 봅니다. 학생들이 도덕을 공부하는 이유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시험성적을 높이기 위한 것입니다. 이건 말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정답이라는 게 채점을 위한 정답이지 인생의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서 우리나라는 스스로 생각하는 창의력이 있는 인재를 만들겠다고 말합니다. 말도 안 되는 얘기에요. 말은 창의적인 인간을 만들겠다고 말하면서 행동은 주입식으로 가르칩니다. 국가가 하면 다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계명을 왜 지켜야 되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도 충분한 대답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라는 대답은 사실 충분하지 못합니다.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이런 음식을 먹지 말라 이런 음식만 먹으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힌두교에서는 소고기를 금지하지요, 이슬람에서는 돼지고기를 금지하지요, 또 불교는 아예 육식을 금지하지요, 유대교에서는 돼지고기와 그 이외의 부정한 짐승을 금지하지요, 몰몬교에서는 커피와 카페인이 들어간 모든 음료를 금지합니다. 그 모든 것을 지키다가는 굶어죽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음식도 금지하지 않는 기독교가 오히려 신뢰가 가요.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이 선하다고 했는데 종교의 이름으로 이런 것을 금지하는 것은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종교가 할 말이 없으면 쓸데없는 음식이나 금지하겠습니까. 

왜 애꿎은 음식이나 금합니까. 뭔가 말은 해야 되겠고 마땅히 할 말은 없고 그러다 보니까 애꿎은 음식만 금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행함으로 마치 인간이 거룩해지는 것처럼. 사람이 어떤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하나님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유익이 있다면 사람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저를 보세요. 이 시점에 제가 무엇을 많이 먹는 것이 유익이겠습니까, 절제하는 것이 유익이겠습니까. 여러분도 마찬가지에요. 먹지 못하는 게 문제가 아니고 너무 많이 먹는 것이 문제에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대부분의 계명은 하나님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이것은 하나님의 유익을 위한 계명이 아니에요. 우리의 혜택을 위한 것입니다. ‘도적질 하지 말라’ 사람이 도적질을 하지 않아 누가 혜택을 입습니까. 사람이 혜택을 입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이것도 인간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가정과 결혼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거짓증거하지 말라’ 인간 사회를 지탱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 역시 가정의 질서와 평화를 위한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라’ 예수님이 설명하지 않았습니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우리가 이 계명을 지키면 누가 혜택을 입습니까. 사람이 혜택을 입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어떤 계명도 억지가 없고 다 타당성이 있습니다. 계명을 지킴으로 유익을 얻는 것은 사람이에요. 우리에게 그 유익이 돌아옵니다. 반대로 계명을 지키지 않았을 때 그 해도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도덕과 율례를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충분한 답변이 필요한 이유는 왜 인간이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해야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현대인은 어느 누구에게도 순종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순종이라는 말은 나쁜 말이 됐습니다. 권위주의를 지탱하기 위한 말이 되었습니다. 요즘에는 국민이 국가에 대하여 반발하고, 학생이 선생님들에 대하여 반발하고, 고용인이 고용주에 대하여 반발하고, 연소한 자가 연로한 자들에게 반발하고, 여자가 남자에게 반발하는 시대에요. 과거에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권위를 더 이상 당연하게 행사할 수 없습니다. 요즘에 청소년에게 담배 피운다고 뭐라 했다가는 큰일 납니다. 얻어맞습니다. 

또 선생이 학생을 때렸다가는 큰일 납니다. 학생들이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찍어서 고발합니다. 요즘 남자가 여자에게 함부로 농담했다가는 성희롱으로 고발당합니다. 시대가 이처럼 달라졌습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이기 때문에 순종해야 된다는 말은 설득력을 잃어갑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해야 되느냐. 하나님께서도 이 문제에 대하여 고민을 하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도 하도 말을 안 들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 아들이 왕의 왕으로서 권세를 행사하게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종이 되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대접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다’ 그래서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보고 비로소 무릎을 꿇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이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물으실 때 비로소 사울은 ‘주여 뉘시오니이까’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께서 우리의 순종을 요구하시기 전에 먼저 당신이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내가 너의 발을 씻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고 먼저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사람이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독생자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순종은 이 모든 것의 결과에요.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만일 여러분이 주님의 사랑을 받은 적이 없다고 믿으신다면 주님에게 순종 안 해도 됩니다. 억지로 하는 순종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순종의 이유는 주님이 제공하십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우리가 주님께 순종해야 될 이유를 주님이 제공하십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왜 하나님을 신뢰해야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신뢰할 근거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답변이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고 둘째는 우리의 경험에 의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포함돼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의사를 말씀 속에 다 나타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진지하게 말씀을 읽고 말씀을 들으시고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붙들고 기도하시면 믿은 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해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내가 왜 하나님을 신뢰해야 되느냐. 그 이유는 우리가 경험해 봐야 알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신뢰했더니 정말로 그대로 되더라,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했더니 정말로 그대로 되더라, 이런 경험을 통해서 처음에는 작은 일로 주님을 신뢰했을지라도 점점 큰일을 가지고 주님을 신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국의 기독교가 기복신앙의 영향을 받았다고 비판했어요. 나는 그렇게 안돼야지, 이렇게 다짐을 했는데 기복신앙을 무조건 비판만 할 수 없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했다는 사실을 반증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그냥 사람의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힘없고 기댈 곳이 없는 사람들에게 누가 희망을 제시합니까. 누가 그들을 위로합니까. 누가 그들을 도울 수가 있습니까. 힘없고 약한 사람들이 어디에서 위로를 받았겠습니까. ‘당신은 오늘 누굴 만났나요 위로 받았나요 이 세상 누가 나를 대신하여 고통 받았나요’ 한국에 기복신앙이 많다고 무조건 비판만 할 것이 아니고 그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통하여 위로를 받았다는 것을 반증해 주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풍랑을 만난 배와 같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항해를 시작할 때는 잘난척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풍랑이 닥쳐서 며칠 째 표류하고 해와 달도 보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낮인지 밤인지도 몰랐다는 얘기입니다. 사람들이 며칠 째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여망이 사라졌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제는 잘난 척 하는 사람도 없고 말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말 할 기운도 없고 할 말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 가운데 일어나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랬더니 지금까지는 전부다 자기 의견을 말하고 시끄러웠던 사람들이 묵묵히 들어요.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상황에서 할 말이 있는 사람은 진짜 하나님의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때로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기 위하여 극심한 풍랑을 허락하십니다, 사람이 할 말이 없을 때까지.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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