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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최선의 선택 (창 13: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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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선택 (창 13:5-18)


우리의 삶은 수많은 선택으로 이루어집니다. 매일 아침에 출근할 때면 무슨 옷을 입을까를 선택합니다. 교통편도 버스를 탈까, 택시를 탈까, 아니면 승용차를 타고 갈까를 선택합니다. 점심시간이 되면 어디 가서 무엇을 먹을까를 선택합니다. 이런 종류의 선택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을 선택하든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선택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젊은이들이 처음으로 직장을 선택하는 것이나 배우자를 선택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체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때 택한 직업이 평생의 업이 되기 쉽기 때문에 직업을 선택할 때는 자기의 적성이나 장래성 따위를 잘 검토해서 결정해야 합니다. 배우자를 선택할 때에도 마찬가집니다. 누구를 배필로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일생이 행복할 수도, 불행할 수도 있으니까요. 물론 예외가 있기도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성미가 고약한 부인을 만나서 훌륭한 철학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행한 사유를 그런 식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그러므로 직업과 배우자를 선택하는 문제는 매우 신중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직업이나 배우자의 선택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선택은 아닙니다. 적성에 좀 맞지 않는 직업이지만 노력 여하에 따라서 잘 적응할 수도 있고, 부부간에 성격차가 날지라도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다보면 얼마든지 마음을 맞추어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심각하고 중요한 선택은 신앙적인 선택입니다. 이 선택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어느 편을 택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영원히 후회 없는 ‘최선의 선택’에 관해서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로, 세속적인 삶을 버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날 적에 아내 사라와 조카 롯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롯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삼촌인 아브라함의 슬하에서 성장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온 후에도 한 동안 아브라함은 롯과 함께 거주했습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두 사람의 소유가 많아져서 한 곳에 동거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두 사람은 목축을 하였는데 양떼와 소떼가 많았습니다. 자연히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목초지와 물을 놓고 서로 다투는 일이 빈번해졌습니다. 삼촌과 조카가 다투는 것을 그 땅의 거민들이 본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서 창피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이제 롯도 혼자 살만큼 되었으니까 헤어질 떄가 되었구나’ 생각하던 중, 하루는 롯을 불러 말하기를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롯도 선뜻 “삼촌, 그렇게 하지요”라고 응수했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사방이 훤히 내다보이는 언덕에 올라갔습니다. 롯이 요단들을 바라보니 소알까지 펼쳐진 드넓은 들판에 물이 넉넉한 것이 마치 여호와의 동산과도 같고 애굽 땅과도 같아 보였습니다. 물이 넉넉하니 목초가 풍부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롯은 요단 온 들을 택하고 아브라함을 떠나서 동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롯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이제는 이 기름진 들판에서 대대적으로 목축을 해서 큰 부자가 되어야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롯은 더 큰 부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껏 자기를 거두어준 삼촌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가 먼저 기름진 땅을 차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경고하십니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라고 하였습니다. 돈이 일만 악의 뿌리가 아닙니다. 돈은 우리의 생활에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은 돈 자체를 악으로 보지 않습니다. 다만,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됩니다. 우리가 돈을 사랑할 때에 믿음 생활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됩니다.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났다”고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집니다. 돈도 사랑하고 하나님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돈을 사랑하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 배타성이 사랑의 성격입니다. 

롯이 소돔 들판을 택한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소돔성의 화려한 생활을 동경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12절에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단번에 소돔 성 안으로 거주지를 옮긴 것이 아니라 점점 장막을 옮겨 소돔 가까이 다가갔다가 나중에는 아예 소돔에 집을 사고 그곳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소돔은 그 당시 가나안 전역에서 가장 번영한 도시 중 하나로서 화려하고 세련된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그와 동시에,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고 13절에 언급한 것처럼 소돔은 극도로 타락하고 죄악이 가득한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롯은 우상숭배자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이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롯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동시에 세속적인 즐거움도 어느 정도 누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기름진 소돔 들판을 택하였고, 드디어는 소돔 성에 거주하는 편을 택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 가운데는 세속적인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롯과 같이 세상적인 이익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뿐 아니라, 혹 우리 자신은 그런 적이 없었는지 반성해 볼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이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이 주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선택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자기 영혼을 마귀에게 팔아먹는 것과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일컬어 도적이라고 하시면서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요 10:10)라고 하셨습니다. 롯은 소돔에서 살면서 그곳 사람들의 불법하고 음란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써 그 심령에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나마 롯은 불의한 환경 속에서도 어느 정도 신앙을 지켜나갔지만, 그의 아내와 두 딸은 완전히 소돔 사람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 유황과 불로 소돔을 멸하실 적에 롯과 그의 가족은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덕분에 겨우 구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천사의 지시를 받고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불타는 소돔을 바라보았다가 그만 그 자리에서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두 딸은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동침하여 각기 자식을 낳았으며, 그들은 암몬 족속과 모압 족속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한편, 넓고 기름진 지역을 조카에게 양보한 아브라함은 해발 900미터가 넘는 고원지대인 헤브론으로 갔습니다. 헤브론 역시 비옥한 곳이었지만 요단 하류인 소돔 들판에 비할 바는 못 되었습니다. 그곳은 포도와 감람과 무화과를 많이 재배하는 전형적인 농촌으로서 문화생활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소돔은 밤에도 대낮처럼 거리에 등불을 밝히고 술과 노래와 춤을 즐기던 도시였다면, 헤브론은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먼 분위기였습니다. 그 대신 헤브론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이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데는 유리한 곳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아브라함과 롯은 단지 거주할 땅을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선택하였고, 롯은 세속적인 삶을 선택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세속적인 삶은 당장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지만 결국은 우리 영혼을 병들게 하고 믿음에서 떠나게 만듭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세인들의 눈에는 따분하게 보이지만 마치 딱딱한 껍질 속에 고소한 알맹이가 들어있는 호두처럼 그 속에 진정한 기쁨과 생명과 행복이 넘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십시오. 그가 일평생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최우선 순위를 두었더니 하나님께서 그의 일생을 인도하셔서 모든 대적에게서 지켜주셨고, 노비와 은금과 가축이 풍부하게 하셨으며,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방백으로서 그를 우러러보게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백세에 독자 이삭을 낳게 하셨고, 이삭을 통하여 하늘의 별과 같이 해변의 모래처럼 큰 민족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일컬어 “나의 벗 아브라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같은 복을 받은 이유는 오직 하나,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아브라함처럼 복을 받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같이 세속적인 삶을 버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이기적인 삶을 버리고 이타적인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롯이 요단 들판을 선택한 것은 순전히 이기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브라함이 누굽니까? 롯이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을 적에 삼촌 아브라함이 그를 거두어 자식처럼 보살펴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롯에게 아버지 노릇을 한 것입니다. 롯이 가정을 이루고 경제적으로 독립하게 된 데에도 아브라함의 도움이 컸으며. 무엇보다도 아브라함 때문에 롯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아브라함의 존재는 롯에게 아버지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생명의 은인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거기 비하면, 롯의 행동은 한 마디로 배은망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네가 먼저 마음에 드는 땅을 택하라”고 했더라도, 응당 “삼촌, 가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삼촌께서 먼저 택하십시오.”라고 양보했어야 옳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하는 것이 그 동안 은혜를 베풀어준 삼촌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롯은 이기심에 사로잡혀서 자기가 먼저 좋은 지역을 차지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롯은 소원대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소돔성에서 유지가 되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창세기 19장 1절에 ‘저녁 무렵에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었다’는 표현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 성문은 유지들의 회합 장소였거든요. 그 당시에 전체 주민과 관련된 중요한 사안을 다룰 때 유지들이 성문 위에서 의논했습니다. 소돔 성이 불탈 적에 롯의 처가 천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뒤를 돌아본 것 역시 롯이 상당한 부자였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돔 성이 하늘로서 퍼붓듯 한 유황불에 멸망할 때, 롯의 그 많던 재산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롯이 남의 것을 빼앗거나 속이는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은 것이 아니지만, 그 재물은 삼촌 아브라함에 대한 의리를 외면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등한히 하면서 모은 재물이었기 때문에 일순간에 다 잃고 말았습니다. 소돔 성이 불탈 때 롯은 빈손으로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철저하게 이타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연장자로서, 삼촌으로서, 은인으로서, 당연히 좋은 땅을 먼저 차지할 권리가 있었지만, 조카 롯에게 “네가 먼저 택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양보하였습니다. 그것은 그의 진심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이 잘되기를 바랐습니다. 

아브라함이 이타적인 행동을 보여준 사례가 또 있습니다. 소돔 왕이 그돌라오멜 연합군과 전쟁하였는데 그만 패했습니다. 그리하여 롯이 소돔 주민들과 함께 사로잡혀 갔습니다. 때에 아브라함이 이 소식을 듣고는 집에서 훈련시켜온 318명을 거느리고 다메섹까지 쫓아가서 야간기습작전을 펴서 적을 격파하고 잡혀간 사람들과 재물을 도로 찾아왔습니다. 그 적은 수를 가지고 대 부대를 이긴 것은 목숨을 건 모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편, 아브라함이 개선하고 돌아오는데 소돔 왕이 나와서 영접하면서 하는 말이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고 하였습니다. 적군이 소돔성에서 빼앗아간 전리품이었으니 값으로 치자면 엄청났을 것입니다. 대번에 거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소돔 왕의 제안을 한 마디로 거절했습니다.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오직 소년들의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취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거절한 첫째 이유는, 소돔 왕이 주는 재물을 받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아브라함이 이타적인 마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 재물을 소돔 주민들에게 도로 돌려줌으로 그들을 돕고자 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소돔성의 죄악이 관영하여 불과 유황에 멸망하게 되리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은 소돔 주민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중보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재차 간구하기를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오십 의인 중에 오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오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이번에도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베푸시고 “내가 거기서 사십 오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다시 고했습니다. 

“거기서 사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사십 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내가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그래도 아브라함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이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이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이쯤 되었으면, 그만 일어설 만도 한데, 아브라함은 또 간구했습니다.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하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내가 십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아브라함이 얼마나 이타적인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작금에 우리사회는 이기주의로 인하여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개인과 집단의 이기주의 앞에서 민족 공동체의 유익은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달리 이타적인 삶을 추구할 책임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3절로 24절에 “23)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24)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아브라함이 이타적으로 살았더니 빈한하게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당대에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이기적인 삶을 버리고 이타적인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적용하시는 경제 원칙이 있는데, 잠언 11장 24절로 25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24)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25)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고 하셨습니다. 오늘 이 설교를 경청하시는 성도님들께서는 아브라함을 본받아서 이타적인 삶을 선택하심으로 아브라함과 같이 풍성한 복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불순종을 버리고 순종하는 편을 선택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적에 순종하여 곧바로 가산을 정리해서 길을 떠났습니다. 요즘 이민 가는 사람들처럼 미국이나 캐나다로 가겠다고 행선지를 정해 놓고 떠난 것도 아닙니다. 75세의 노인이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하시니 일단 떠나고 보았던 것입니다. 이 때 조카 롯도 함께 떠났으니 정말로 가상한 일입니다. 롯 역시 최선의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들어온 후에 롯은 변질되었습니다. 그가 사람의 모양을 하고서 소돔 성을 찾아온 천사들을 정중히 자기 집에 초대하여 대접한 것을 보면, 양심이 살아있는 경건한 사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롯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명령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를테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자들처럼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미지근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적극적인 불순종은 아닐지라도 불순종에 속합니다. 로마서 14장 23절에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 가운데는 그릇된 축복관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복 받기를 갈망하면서도 복 받을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미신을 섬기는 자들을 보면, 새벽에 정화수를 떠놓고 신령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빕니다. 그들이 그토록 간절하게 비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지 복을 받고,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은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극 정성을 드리면 하늘도 감동시킬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께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무턱대고 정성을 다해 기도만 한다고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으십니다. 복을 받으려면 복 받을 행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의 토대 위에서 드리는 기도라야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되지, 순종이 결여된 기도는 허공을 치는 메아리에 불과합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는 복을 받은 것은 그가 철저한 순종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30장 15절로 16절에 “15)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16)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그리하면”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기꺼이 순종하면 하나님의 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하면”이라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축복 대신에 저주가 임할 것입니다. 

“17)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18)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할 것이니라” 하신 신명기 30장 17절로 18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순종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하셨을 적에도 그는 아무 변명 없이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아들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의 명하신 산을 향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의 위대함은 이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철두철미하게 순종한 데 있습니다.

우리가 순종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긴 많이 듣는데도 순종이 없는 것은 건성으로 듣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듣는 것 자체가 곧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사울에게 사무엘이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서 아무리 많은 희생 제물을 바친들 하나님께서 받으실 리가 만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순종하는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의 인정과 복을 받기 원하신다면, 아브라함처럼 최선의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세속적인 삶을 버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선택하십시오. 이기적인 삶을 버리고 이타적인 삶을 선택하십시오. 불순종하는 편을 버리고 순종하는 편을 선택하십시오. 그리할 때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삼아주셨던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에게도 영육 간에 복을 주시되 차고 넘치도록 부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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