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너희는 거룩하라 (레 19:1-4)

첨부 1


너희는 거룩하라 (레 19:1-4)


오늘 본문을 보면 “너희는 거룩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거룩하라고 명령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거룩할 수 있을까요?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거룩할 수 있을까요? 우리처럼 세속사회 한 복판에 사는 사람들이 거룩할 수 있을까요?

물론 거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할 수 없는데 거룩하라고 명령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다운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거룩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거룩을 알자

일반적으로 ‘거룩’은 성스러운 상태나 행위로 이해합니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을 ‘성인’이라고 부르는데, 그들의 인간됨이나 그들의 삶이 지극히 성스러운 경지에 올라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남다른 노력과 수련으로 여느 사람들이 도달할 수 없는 성스러운 경지에 오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거룩은 이와는 좀 다른 개념입니다. 성경 원어로 이 거룩이라는 말은 ‘카도쉬’(Kadosh)입니다. 이 말의 원뜻은 ‘구별되다’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씀하는 거룩이라는 의미는 ‘성스럽다’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고, ‘구별되다’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면 구별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왜 구별되며 어떻게 구별되는 것일까요?

성경에 ‘거룩’이라는 말이 제일 처음 나오는 곳이 창 2:3입니다. 이런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의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우선 하나님께서 7일 중에 마지막 일곱째 날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날은 다른 6일과 달리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끝내시고 안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일곱 날은 원래부터 특별한 날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이 날은 태양 빛이 다른 날과 달라서 더 밝다든지, 이 날은 다른 날과 달리 시간이 더 길다든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날은 겉으로는 다른 날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날이 다른 날과 구별되는 점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 날을 선택하셨다는 점입니다. 원래 이 날이 남달라서 구별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셨기 때문에 구별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 날을 특별하게 대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날에는 다른 날과 달리 일하지 않으시고 안식하셨습니다. 이 날을 특별한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이 점은 출 3:5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나님께서 호렙산에서 모세를 부르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가 있던 그 장소를 거룩하게 구별하셨다는 것입니다.
원래 그 곳은 특별히 다른 곳은 아닙니다. 호렙산 주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아주 특별한 경치가 펼쳐진 곳이 아닙니다.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힘든 아주 값비싼 보석이 가득한 곳도 아닙니다. 그곳은 아주 평범한 호렙산 기슭 어느 지점입니다. 거기 호렙산 주변에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가시떨기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이 다른 곳과 구별되는 점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곳을 선택하셨다는 점입니다. 왜 하필이면 이곳을 선택하셨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셨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곳을 특별하게 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모세와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 위대한 구원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이곳에서 특별한 일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거룩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거룩과는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거룩은 어떤 사람, 어떤 장소, 어떤 물건이 그 자체로 성스러울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거룩은 어떤 사람, 어떤 장소, 어떤 물건이 하나님에 의해 구별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성경을 보면 ‘성도’(聖徒)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롬 1: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로마 교인들을 축복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로마 교인들을 거룩한 사람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로마 교인들을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원래부터 로마 교인들이 성도는 아니었는데, 이제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원래부터 거룩한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구별해 주실 때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셨기 때문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대해 주셨기 때문에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도 성도들입니다.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왜 성도입니까? 하나님께서 성도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해 주셨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로 대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거룩을 경험하자

독일의 신학자 루돌프 오토(Rudolf Otto)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흐름에 하나의 충격파를 던진 신학자로 유명합니다. 1917년 출판된 [거룩한 것](Das Heilige)라는 책에서 저 유명한 ‘누미노제’(Numinose)라는 개념을 소개했습니다. “누미노제란 ‘신비스럽고, 두려우면서도 매혹적인 것’(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as)과의 만남이다.”

다시 말하면 이 누미노제란 인간이 신비한 경험이나 거룩한 존재 앞에 섰을 때 느끼는 “거룩의 경험”을 뜻하는 말입니다. 일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어떤 신비하고 거룩한 존재를 경험할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놀라움을 경험하게 되는데, 바로 그런 경험을 누미노제라 부른 것입니다.

시인 고은의 짧지만 울림이 깊은 시가 있습니다. [그 꽃]이란 시입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시인은 산에 오를 때 그 꽃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런 저런 생각에 그 꽃을 유심히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 꽃들 중의 하나로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꽃이 거기 그렇게 있는 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려올 때 그 꽃이 거기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모습이 자기 마음 깊은 곳에 비수처럼 꽂힙니다. 천둥처럼 놀랐습니다.

시인 윤동주도 서시에서 이런 놀람을 이야기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다가 별 하나를 보고 놀랍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을 느끼며 놀랍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천둥처럼 놀랍니다. 바로 그 놀람이 누미노제입니다.

사 6장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바로 이 누미노제를 체험한 이야기를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5절에 그 두렵고 놀란 체험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이사야 선지자는 언제나처럼 성전에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습니다. 환상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보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천둥같은 두려움이 밀려들었습니다. 

눅 5장을 보면 베드로가 이런 누미노제를 경험한 이야기를 기록해 놓았습니다. 베드로가 언제나처럼 고기잡이를 마치고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가 오셨습니다. 자기 배에 오르셔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밤새 고기잡이를 했으나 허탕을 친 상황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물때가 아니라 고기잡이를 할 때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말씀하셨기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베드로는 고기를 많이 잡아 기쁜 것은 두 번째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바로 보면서 천둥 같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무릎 아래 엎드려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거룩하려면 먼저 거룩을 경험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해야 합니다. 

우선 예배 자리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해야 합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이 자리에 임재해 계신 것을 영안을 열고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이사야가 체험했던 그 놀람을 경험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체험했던 그 두려움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세가 체험했던 마음이 뜨거워짐을 체험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말씀 앞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해야 합니다. 마음속에 울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해야 합니다. 내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거룩을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거룩을 이루어가는 구체적인 방법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레 19:3 이하의 말씀을 보면 우리가 거룩하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을 자세하게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거룩하라는 말씀은 다른 말로 표현해 보면 하나님의 명령을 잘 듣고 그대로 지키라는 말씀이기도 한 것입니다.

한자어로 ‘거룩할 성’(聖)자를 풀이해 보면 그 뜻이 심오합니다. 우선 이 성(聖)자는 ‘귀 이’(耳)와 ‘입 구’(口) 그리고 ‘곧은 줄기 정’(壬)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거룩하다는 것은 듣고 말하는 것이 곧은 줄기처럼 올바른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거룩하려면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잘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올바로 잘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그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의 명령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핵심 메시지는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너희 자신을 구별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별하여 거룩한 성도로 세웠으니 이제 우리가 거룩한 성도로서 이 세상에서 우리 자신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출 3:5을 다시 한 번 자세히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신 그 자리를 거룩한 땅으로 구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모세를 거룩한 사람으로 구별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발은 모세의 과거의 삶을 상징합니다. 그가 그 발로 인생길을 걸어왔습니다. 과거 40년을 바로의 왕궁에서 공주의 아들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지난 40년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 목자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세상 한 복판에서 세상 사람들과 다름없이 살아왔습니다. 이제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세상에서 자신을 구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근자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실망하여 교회를 떠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들이 교회에 대해 실망하는 이유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저를 비롯한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에게서 거룩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세상 사람들과 별로 구별됨이 없어 보입니다. 

정말 부끄러운 것은 일부 목회자들이 성적인 스캔들에 휘말려 매스컴에 그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또 일부 목회자들은 재정문제 때문에 사람들의 입방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일부 목회자들이 논문 표절 문제로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 발에서 신을 벗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상 한 복판에서 살면서 세상 사람들과 자신을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사람으로 구별해 놓으셨지만 정작 자신은 세상에서 자신을 구별하지 못한 것입니다.

딤후 3:1-5을 보면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 한 복판에서 살아가지만 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죄의 길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음란의 길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거짓의 길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부정부패의 길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송건호의 [한국현대사 인물론]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특히 처음에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나중에 두 가지로 나뉘어 평가가 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끝까지 독립운동가로 남아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중에 변절하여 친일파가 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왜 이렇게 나뉘게 됐는지를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관점으로 정리했습니다. 바로 ‘역사의 길을 간 사람’과 ‘현실의 길을 간 사람’의 구분입니다. 역사의 길을 간 사람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고난 가운데 뜻을 지킨데 비해, 현실의 길을 간 사람은 고난 앞에 굴복하여 현실과 타협하여 친일의 길로 나아간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적 관점에서 해석해 보면 역사의 길을 간 사람이란 끝까지 거룩을 추구하며 산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현실의 길을 간 사람이란 후에 거룩을 추구하는 일을 포기한 사람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거룩한 사람으로 구별해 놓은 사람들입니다. 우선 하나님 앞에서 거룩을 경험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우리 자신을 거룩한 사람으로 구별해 놓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 말씀을 지키고자 힘써야 하겠습니다. 비록 힘들고 어렵더라도 우리 자신을 지켜가야 하겠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