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주께서 원하시면 나병을 깨끗하게 하신다 (마 8:1-4)

첨부 1


주께서 원하시면 나병을 깨끗하게 하신다 (마 8:1-4)

지난 시간까지 산상수훈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마태복음 8장과 9장 전체를 보고서 본문인 8:1-4절의 나병환자를 고치신 일에 대하여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은 마가복음과 다르게 예수님께서 행하신 권능의 사역을 8장과 9장에 집중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5장으로부터 7장까지 묶어 놓은 것처럼, 8장-9장도 함께 묶어 놓았습니다. 

서울 시내 을지로에 가면 건축자재들을 파는 상가들이 밀집해 있고, 청계천에 가면 공구상들이 함께 모여 있는 것처럼, 마태복음은 한 종류의 일들을 함께 모아서 말하고 있다는 점을 보면 좋겠습니다. 

그런 다음 10장에는 추수하는 일꾼으로 제자들을 파송하며 명령하시는 내용이 나오고, 그 일꾼들이 어떻게 일할 것인가를 설명하는 내용이 11장에 이어집니다. 이렇게 마태복음은 전체적으로 제자도가 중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대표적으로 5편의 설교가 큰 뭉치로 마태복음에는 나타나 있습니다. 

즉 구약의 제사장 나라였던 유대인들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 제사장 나라로 참여하여 그 일꾼으로 봉사함으로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 삼아 주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결론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집중된 8장-9장의 전체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해서 그 의미를 알 수가 있겠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9:35절을 보십시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여기 보면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고 합니다. 마태는 이런 표현을 그냥 단순한 인사말처럼 하지 않고 의미가 있게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4:23절을 보십시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4장의 말씀과 9장의 말씀이 거의 비슷합니다. 4장에서는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행하신 것을 말하고, 9장은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행하신 일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지리적으로 예수님의 행하신 일이 확대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런 비슷한 표현을 따라 마태는 무언가 의도적으로 구별을 해놓으려는 것이 보입니다. 천국 복음을 예수님께서 전파하셨는데 그 결과가 무엇인가?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더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복음 전파와 병을 고치신 것을 보게 되면 우리는 5-7장과 8-9장의 관계를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5-7장에는 천국의 율법이 전체적으로 나와 있고, 8-9장에는 병과 약한 것들을 고치시는 일들이 집중적으로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9:35절이 말하는 바를 5-7장으로, 8-9장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5-7장의 최종적 결론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무리들이 놀랐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8-9장의 끝에서도 거의 같은 표현을 합니다. 9:33절입니다.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예수님이 행하신 권능의 사역에 대하여도 ‘도무지 본 적이 없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왜 5-7장의 가르치심 이후에 마태는 8-9장의 권능의 사역을 기록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 봅시다.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군사독재 하에서 억압을 받던 자들이 민주주의 시대가 도래하면 그들이 받았던 고통과 억압을 벗어나게 하고 그들을 치료할 것입니다. 이는 경제부흥국가의 이념이 임하게 되면 가난한 서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천국 복음이 임하면 모든 병과 모든 약한 자들이 치유함을 얻는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것과 모든 병과 모든 약함이 고침을 받았다는 것이 함께 연이어 나오는 이유입니다. 5-7장이 천국의 법을 천명하신 것인데, 이 천국의 법을 따라 천국 백성은 어떤 혜택을 입어 병과 약함이 치유가 되는가를 8-9장에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렇게 천국의 법을 전파하시고 권능으로 그 백성들을 고치신 것은 무엇 때문인가요? 이를 9:36절에서 말합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들로 천국을 세우시는 왕으로 오셨는데, 이런 권능을 행하심은 바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은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모든 왕과 대통령들은 일차적으로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왕이 행하는 권능은 백성들을 약탈하고 압제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불쌍히 여김으로 그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천국의 왕으로 천국복음을 전파하며 모든 병과 약한 것들을 고치시는데 그 백성 가운데 목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10장에서는 추수하는 일꾼으로 부르시는 것이 나옵니다. 목자 없는 양들을 천국복음을 따라 생명으로 치료하는 일에 제자들을 부르시고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전능한 왕 혼자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정권이 들어서고 대통령이 세워지면 그 정부의 각료들을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하여 그 정부가 가진 정책을 함께 시행할 일꾼들과 함께 백성들을 돌아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는 마가복음처럼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을 간략하게 사건보도만 하고 지나가지 않습니다. 중간에 예수님이 하신 일들에 대하여 마치 품평회를 하듯이 정리를 하고 다음 사건들로 진행을 합니다. 

그러니까 8-9장에 기록된 사건들을 그냥 일어난 순서대로 나열한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몇 개의 덩어리로 묶어 말합니다. 그런 다음에 소결론을 내는 식으로 언급을 한 다음에 또 다른 몇 개의 덩어리로 묶어 말합니다. 그런 다음 역시 소결론처럼 언급을 합니다. 

예를 들면 8:16-17절입니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여기서도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냈다고 하시고, 다음에 병든 자들을 다 고치셨다고 말합니다.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모든 약한 것들과 병든 것들을 고치셨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그럼 이렇게 행하신 까닭이 무엇인가?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함입니다. 이것이 8-9장 안에 나타난 소결론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 다음에는 중풍병자를 고치신 일에서 소결론적인 것이 보입니다. 9:8절입니다.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거늘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더라.” 8-9장에 나타낸 예수님의 권능이 어떤 권능인지에 대하여, 또 누가 하신 권능인가에 대하여 말하여 줍니다. 그것은 바로 죄사함의 권능입니다. 

이것을 더 부연설명하자면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고 서기관들이 말한 것처럼, 사람으로 오신 분이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 소결론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후에 9:9절 이하는 새로운 내용이 이어집니다. 이는 마가복음을 통해서 여러분께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항상 권능이 나타나면 그 다음에는 생명에 관한 기사가 이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죄사함의 권능을 따라 어떤 생명을 주는 것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가복음을 기본으로 알고 있으면 마태복음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죄사함의 권능으로 백성들을 어떻게 불쌍히 여기사 그들에게 생명을 베푸시는가를 말하기 시작합니다. 우선 죄사함의 권능을 가지셨으니 당연히 죄인들이 이 생명을 누리겠지요. 그래서 세리 마태의 집에 들어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심으로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 나라의 권능이 임하면 공산주의 통치하에 신음하던 백성들이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 공산당원이 아닌 민주투사들이 생명을 얻겠지요. 그와 같습니다. 이제 인자가 죄사함의 권능을 가지신 분으로 오셔서 그의 나라를 세우시면 유대인처럼 이전에 의인이라고 여겼던 자들이 아닌 세리와 같은 죄인으로 여김을 받은 자들이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와 새 부대를 말씀하셔서 새 생명을 주심을 나타내고,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인과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죽은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그 새 생명이 어떤 생명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그를 믿고 구하는 자들에게 눈이 열리게 하심으로 메시야의 권능과 생명을 보게 하고, 귀신들을 쫓아내심으로 그들을 구원하시는 왕이심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 일에 무리들이 도무지 보지 못한 일이라고 놀랐습니다. 

이렇게 소결론들을 따라서 8-9장의 내용을 정리할 수가 있겠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의 사역은 무엇인가? 선지자 이사야의 약속을 성취하심이다고 말하고, 그의 권능은 신만이 가지는 죄사함의 권능이며, 그 권능으로 죽은 자를 살리는 새 생명을 주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 복음을 전파하며 많은 병들과 약한 것들을 고치시는 주님의 사역입니다. 

이처럼 이전 역사에서 구약의 이스라엘이 망했습니다. 그러나 다 버리시지 않으시고 남은 자들을 구원하실 것을 이사야를 통해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나셔서 성령세례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침을 받으시고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이전에 멸시 받았던 갈릴리 지방에 거하셔서 그들에게 천국의 생명으로 복을 주셨습니다.

이 주님을 보고 따라오는 많은 무리들에게 천국의 율법을 선포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가르침이나 교훈으로 끝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천국율법으로 세우는 나라는 천국 왕이 가지신 권능과 생명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냥 무한한 권능이 아니라, 이사야에게 약속하신 권능이십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을 위로하고 새롭게 하시는 권능의 왕으로 자기를 나타내셨습니다. 그 권능은 죄사함의 권능입니다. 모세와 다윗이 갖지 못했던 하나님 아들이 가지신 권능입니다. 

이 권능으로 죄인을 부르셔서 그들에게 하늘의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새 시대에 속한 새 생명을 주십니다. 그 새 생명은 이전에 치료치 못했던 12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는 회당장의 딸과 눈먼 소경을 치유하심으로 나타내셨습니다. 그리하여 귀신을 쫓아냄으로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천국복음과 권능으로 구원하십니다. 

이제 그러면 오늘 본문 8:1-4절이 속해 있는 소단락의 소결론의 주제를 다시 살펴보십시다. 8:17절입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 즉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신 일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이사야 52:13-53:12절 말씀의 성취입니다. 특히 53:4-6절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선지자는 옛 이스라엘이 망하고 다윗의 자손이 오셔서 그가 받는 고난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나라를 이룰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사야 53:1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의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런데 마태복음이 예수님께서 권능을 나타내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것들을 고치시는데 이를 왜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는 것이라고 말합니까? 여기까지는 오히려 예수님이 멋지게 승승장구하는 모습이 계속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나병환자를 고치시고, 백부장의 하인의 중풍병을 낫게 하시고,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시는 일들은 전혀 고난을 당하는 모습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한 나라의 왕이나 대통령은 백성의 약함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돌아본다고 할 때 그것은 백성의 아픔을 전시실 유리관에 넣어 놓고 감상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백성 중에 들어가 그들이 처한 환경과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대궐에 앉아서 무슨 명령이나 내리면서 백성을 돌아본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의 아픔과 고통과 현실을 짊어지고 그 모든 고난을 능히 이겨내신 분이 비로소 왕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왕이 이겨낸 그 승리의 길을 백성들로 하여금 뒤따르게 하여 함께 이기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죄사함의 권능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래야 죄인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도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단지 우리 모두의 죄악을 담당하시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즉 십자가의 죽음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심까지 이루어야 합니다. 죄와 죽음을 이긴 권능을 나타내 보이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백성들에게 죄와 죽음을 벗어나는 새 길을 열어주고 따라오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이 일관되게 말하는 것처럼 여기서도 ‘선지자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 나옵니다. 이 성취는 결국 마태복음의 결론에서 나타났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주님이 갈릴리 산에 제자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거기서 주님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으로 제자 삼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제자를 삼는 것은 ‘주님이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모든 민족이 구원에 이르는 길과 생명을 누리게 하려 하심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연약한 것과 병을 짊어지시고 능히 승리하신 그 길과 삶으로 우리를 인도하려 하심입니다. 

이전에 구약의 이스라엘 왕인 다윗도 이러한 길을 자기 백성에게 주지 못했습니다. 죄와 죽음을 이긴 생명을 나타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다윗 왕이 전쟁에서 이긴 승리와 전리품들로 자기 백성에게 줄 수 있었던 것은 솔로몬 왕의 영광 뿐이었습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얻은 왕은 아니어서,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짊어지고 이긴 왕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사함의 권능을 가지시고 우리의 모든 연약한 것들과 병들을 짊어지사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심을 통해 새 생명의 구원과 길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이 분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죄와 죽음을 이긴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마태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권능의 사역의 목표입니다. 

그러면 이제 오늘 설교본문인 마태복음 8:1-4절의 말씀을 자세히 보도록 하십시다. 8:1절입니다.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이런 말을 통해서 나병환자를 고치신 것을 산상수훈의 가르침과 연결시키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천국복음 전파’와 ‘많은 약한 것들을 고치심’을 함께 말하는 의미와 같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수많은 무리 가운데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절을 했습니다. 절을 했다고 하는 것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왕에게 드리는 경배입니다. 그후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시기를,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즉시 나병이 깨끗하여졌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나병환자라면 이런 내용의 대화가 오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것이 먼저입니까? 예수님이 원하는 것이 먼저입니까? 절박한 쪽은 나병환자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내가 원하오니 내 병을 고쳐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제가 이런 점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병을 고치시는 일들도 성경저자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주목하자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9:27절 이하에 두 소경을 고치신 일은 이와 전혀 다르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여기 두 소경을 고치신 일은 두 소경이 예수님을 쫓아오면서 소리를 질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이 두 사람에게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하시니 두 소경이 ‘주여 그러하오이다’고 하니까 비로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네 믿음대로 되라’고 하시므로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병을 고치시는 일이 여러 번 나온다고 해서 무조건 예수님은 ‘능력 많으신 분’으로 일괄처리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상황이 다르고 요청하는 일도 다르며 예수님께서 고쳐주심도 다양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나병환자가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는 말과 예수님께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신 말씀에 대하여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은 ‘나병환자도 거뜬하게 고칠 수 있거든!’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무슨 일이든, 무슨 병이든 못 고치는 것이 없는 ‘전능하신 분이야!’라고 한다면 성경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점을 놓치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계속해서 교리적 해석을 경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반복합니다. 앞의 흐름을 되짚어 보십시다. 예수님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시는 천국을 세우시려고 오셨습니다. 그가 천국의 율법을 산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 가르침은 모세의 가르침과 전혀 권위가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천국 율법을 통해서 천국을 가르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무언가 원하시는 것이 있을 것이 아닙니까? 

작년에 박근혜씨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당선된 것이 아닙니다. 박근혜씨가 만들려고 하는 나라의 청사진을 제시했습니다. 그가 제시한 정책은 그가 원하는 나라입니다. 그가 원하는 나라에서 그가 원하는 백성들이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박근혜씨가 당선이 되고 그는 재벌기업 총수들보다 중소기업 사장들을 먼저 만났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원하는 바를 드러낸 것입니다. 중소기업이 잘되는 나라를 만들기 원한 것입니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면 중소기업들이 보호나 후원을 받을 것은 당연하게 보이지 않겠습니까? 이명박정부와 대조적인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마태는 나병환자를 고치신 일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성령세례로 하나님 아들로 취임하신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자로 천국율법을 반포하시고 그 율법으로 세우는 나라의 제일 먼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나병환자 고치심에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왜 마태가 가장 먼저 나병환자를 고치신 일을 기록했는가 하는 점이 해결이 됩니다. 

그러면 어째서 마태는 천국율법을 반포하시고 나병환자를 고치심이 가장 먼저 원하는 바라고 말씀하는 것이겠습니까?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은 나병환자를 고치신 일을 가정 먼저 앞세우지 않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선교적인 복음이어서 이방인에게 전하려고 쓴 것이기 때문에 나병환자를 앞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마태복음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독자로 한 책이기 때문에 나병환자를 가장 먼저 기록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가장 저주스러운 병은 나병이었기 때문입니다. 레위기에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지 못하고 격리가 되는 병 중에 나병이 제일 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레위기는 유출병보다 나병에 대한 말을 훨씬 많은 분량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병이 걸린 것을 진단하는 것부터 고침을 받은 것을 진단하는 것까지 자세히 기록을 합니다. 심지어 나병환자의 의복에 접촉하는 것, 그릇과 집에 접촉하는 것까지 기록했습니다. 나병환자의 정결케 되는 규례까지 상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이처럼 나병이 이스라엘 백성 중에 가장 저주를 받은 병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지방에 왜 가셔서 거기 거하셨는지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지방이 가장 학대와 멸시를 받던 곳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병환자를 돌아보는 것이 천국율법을 산상수훈으로 반포하신 주님이 가장 원하시던 바였던 것입니다. 

산상수훈을 가르치고 나서 수많은 무리가 따라오는 가운데 제일 먼저 돌아본 자가 바로 이 나병환자였습니다. 천국복음을 가르치시고 많은 병들과 약한 것들을 고치심은 백성을 긍휼히 여기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긍휼의 사역 중에 제일 먼저 나병환자를 돌아보셨다고 마태는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갈릴리 지방에 거하심도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이루심이요, 나병환자를 고치심도 결국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이루심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이 예수님의 권능의 사역을 말하면서도 무엇이 제일 중요한 것인지 유대인들에게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긍휼의 사역은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치료하신 일에서도 나타났습니다. 구약의 레위기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나병환자를 고치시는 모습을 쉽게 그냥 지나칠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제가 성경을 역사적으로 해석함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어떻게 고치셨습니까? 물론 예수님께서 맹인들을 치료하심도 다 똑같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계실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요한복음 9장의 날 때부터 소경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발랐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기록하고 표현을 하는 성경저자의 뜻이 무엇인지 바르게 해석이 되어야 우리는 요한복음 9장의 맹인 고치심에 대하여 제대로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치실 때 ‘네 믿음대로 되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3절에 말하는 바와 같이 ‘그에게 손을 내밀어 대셨다’고 했습니다. 접촉했다고 한 것입니다. 이는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구약의 레위기에서는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 일입니다. 나병환자와는 의복이나 집에도 접촉을 하는 자는 부정한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엄청난 태도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현재에도 나병환자를 직접 만진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이런 일은 예수님이 세리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고 마신 일을 보고 서기관들이 비난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가장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자였던 나병환자에게 직접 손을 대셨습니다. 그렇게 접촉하면 그도 나병환자와 같은 천대와 멸시와 격리를 당해야 합니다.

바로 이런 표현들이 바로 8:17절의 ‘우리의 연약한 것을 짊어지셨도다’라는 말씀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들의 아픔과 고통에 동참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저주스러운 질병으로부터 나병환자를 벗어나게 하는 일이 주님이 세우시려는 천국의 가장 원하는 바였던 것입니다. 짧게 언급하고 지나가는 듯이 보이지만 이런 접촉은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엄청난 일입니다. 

대통령이 수재민이나 이재민이 처하고 있는 현장을 헬기를 타고 하늘에서 둘러보는 것과, 그 현장을 직접 방문하여 수재민의 고통을 위로하고 그들의 손을 잡아주며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나병환자를 천대하고 가까이 하려 하지 않았던 모세의 율법과 다르게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자기를 동류로 삼으셨습니다. 그 나병의 자리에까지 짐을 지고 내려가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약함을 함께 짊어지러 오셨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목자 없는 양들을 불쌍히 여기셨다고 하는 것처럼 유대인들의 가장 악질적인 고통을 먼저 돌아보여서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는 천국의 왕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이것이 나병환자의 고치심을 통해서 마태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우선 예수님이 레위기에 말한 모세의 율법을 따라 나병환자로 하여금 그가 정결케 되었다는 결정을 받도록 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하신 것이 아니냐고 묻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현재에도 선배 의사나 병원장이 자기 환자의 병을 치료했는데 자기보다 후배나 어린 의사에게 병이 나았는지 확인을 받도록 하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천국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다윗 왕도 자기의 왕이라고 경배했던 예수님, 히브리서의 표현으로 보면 아론의 반차가 아닌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 병을 정결케 하고 나서 자기보다 낮은 제사장에게 몸을 보여 입증을 하라고 하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완전히 자기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 일일 것입니다. 내가 치료하고 내가 완전히 고쳤는데 그것을 다른 의사에게 검증을 받으라고 하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런 놀라운 병고침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신 것에서 우리는 더욱 이상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소문을 내고 광고해서 유명한 의사가 나타났다고 알려도 속이 시원하지 않을 판에 숨기라고 말씀하시니 더욱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점에 대하여 신학적으로도 논란이 많습니다. 아직도 해결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직 공식적인 입장을 내세울 때가 아님을 알게 된다면 이런 말씀들이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죽고 부활하신 후에 마태복음 28장에서 ‘하늘과 땅의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신 때와 다르다는 말입니다. 부활하신 후에는 공식적으로 왕으로 등극을 하신 때입니다.

이런 상황은 현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박근혜씨가 현재 대통령 당선자 신분입니다. 아직 대통령에 공식 취임한 때가 아닙니다. 엄연히 현 대통령은 다른 분입니다. 그러므로 현재는 당선인으로 대통령의 공식적인 일을 나타내면 안됩니다. 그리고 자기가 대통령보다 우선해서 권력을 행사하거나 나라 일에 간섭을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분명 왕이 되었으면서도 철저히 현 정권에 복종을 해야 합니다. 자기 목소리를 내서는 안됩니다.

구약의 버림을 받고 저주를 받은 나병환자를 치료하려고 오셨습니다. 그것이 천국율법으로 천국을 세우시려는 하나님 아들이 원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아직 그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서는 안됩니다. 그런 권세는 부활하신 후에 공식적으로 선포하시게 될 것입니다. 
구약의 이사야가 예언했던 메시야가 오셨습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하나님 아들이 세우시는 천국의 율법을 가르쳤습니다. 이 천국율법으로 세우는 나라의 가장 원하는 바는 나병환자를 치료하심입니다. 그리하여 자기 백성을 돌아보시는 긍휼의 왕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일을 유대인들이 대적하고 거절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였음에도 예수님은 삼일 만에 다시 사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시고 하늘과 땅의 권세를 얻으셔서 만물을 상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자기 백성 이스라엘은 예수를 거절하였지만 이제 하나님은 이방인을 부르셨습니다. 어둠과 흑암의 권세 아래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말 못하는 우상 앞에 경배하고 살았던, 이스라엘의 나병환자보다 더 멀리 격리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가 없었고, 하나님 나라의 성전에 감히 들어갈 수가 없었던 여러분과 제가 이제 부활의 나라의 가장 큰 시혜자가 되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약속했던 열방이 돌아오리라는 말씀이 다 성취가 된 것입니다. 이제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숨기지 않습니다. 대대적으로 이방인들이 들어오는 영광의 나라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죄와 어둠의 권세 아래, 몸의 질병으로 고통받던 이스라엘 백성의 슬픔과 저주 정도가 아니라, 우리는 아예 죽어 있었던 영혼들이었는데, 예수님의 긍휼의 사역으로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오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의 원하시던 바였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세워지기를 원하셨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면 이 성전은 이전의 영광과 다른 성전으로 세워질 것이었습니다. 이사야가 말했던 것처럼 열방과 바다와 섬들 가운데 거하였던 자들이 이 나라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죄와 죽음을 친히 짊어지시고 삼일 만에 다시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이방인인 헬라인 몇이 예수님께 왔을 때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땅에서 들리심, 곧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심으로 이방인이 그 나라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당하는 질병과 고통과 죽음은 우리의 잘못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사탄의 권세 아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귀신이 쫓겨가게 되었다는 말처럼 이제 이런 어둠의 권세들이 물러가야 합니다. 마치 민주주의가 들어오게 되면 공산주의가 물러가는 것처럼. 

우리의 약함과 병들이 물러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왕이 우리에게 왕노릇하시기 때문입니다. 약함과 병들에게 굴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죽어 무덤에 들어간다 해도 우리는 더 이상 무덤의 권세에 굴복해서는 안됩니다. 빛이 임하면 어둠이 물러가야 합니다. 그런 것처럼 부활의 빛이 여러분에게 임하면 여러분은 죽음의 권세에 조롱을 당해서는 안됩니다. 

예수의 복음을 듣고 믿었다는 것은 좋은 지식을 습득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나라의 생명이 권세로 임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가난과 궁핍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풍부에 처할 줄도, 가난에 처할 줄도 알았습니다. 모든 일체의 비결을 알았습니다. 이런 말은 단순히 그런 것들을 경험하고 체험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게, 세상의 질서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할 때 교회는 더 이상 이 약함과 질병들로 슬퍼하고 고통 가운데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예수님의 권능과 권세가 아직 공식적으로 나타나지 않아야 하는 그런 시대를 사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위험도 칼도 장래의 모든 일이라도 결코 예수의 사랑에 끊어질 수 없는 관계로 사는 것임을 알고 고백하며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몸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기거나 질병이 생기면 이 복음을 듣고서도 약국이나 의원으로 먼저 달려가기 일쑤입니다. 죄사함의 권능을 가지신 우리 왕께 의뢰하지 않습니다. 그게 현명한 그리스도인줄 알고 있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말씀합니다. 5:14-15절입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야고보 사도는 병과 죄를 함께 언급합니다. 16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우리 가운데 병이 걸리면 기도하는 것은 무시하고 병원으로만 의사에게만 달려가는 자들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죄의 권세 때문에 이 질병이 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죄사함의 권능을 가지신 우리 왕께 먼저 구해야 합니다. 

복음의 능력은 말로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의 권세로 임합니다. 그리고 천국에 속한 하늘의 생명으로 온전케 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현재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형제 자매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에게 우리 천국 왕의 권세가 임하여 죄의 권세로부터 벗어나고 질병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함께 의인의 기도를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몸에 속하여 살면서도 죽지 아니함을 입고, 썩지 아니함을 입고, 영원한 생명의 몸으로 우리가 고백하며 증거하며 능히 죄와 질병의 권세를 이기는 자들로 우리가 이 땅에 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주님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하늘의 생명으로, 죄와 죽음을 이긴 생명으로 지금 여러분 가운데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게다는 주님의 약속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