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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비다여, 일어나시오! (행 9:3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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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다여, 일어나시오! (행 9:36-43)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활력이 우리들 모두에게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다시금 프로 야구 시즌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봄에는 프로 야구 팀이 하나 더 생기고, 유현진 선수까지 미국 프로야구에 진출을 해서 볼거리가 더 많이 졌습니다. 

지난 15일에는 미국 프로야구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프로야구의 모든 선수들이 하나같이 42번이라는 등번호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추신수선수나 유현진선수도 원래의 자기 번호가 있지만, 이날만큼은 42번을 달고 있었다고 합니다. 선수들뿐 아니라 심판들까지도 모두 42번을 달고 있었다고 합니다. 
   
재키 로빈슨이라는 한 흑인 메이저리그 선수를 기념하는 날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흑인들 중에서 가장 먼저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였던 선수였습니다. 그리고 그 날이 바로 1947년 4월15일이어서 재키 로빈슨 데이로 정하고 그를 기념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등번호가 바로 42번이어서... 지난 1997년부터 미국의 모든 메이저리그 구단에서 그 번호를 영구 결번하여서 그를 기념하기로 정했다고 하니, 우리는 그가 얼마나 위대한 야구선수였는지를 짐작하게 됩니다. 
   
흑인으로서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기까지... 그리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고 나서도... 그가 겪었던 차별이나 고통은 얼마나 큰 것이었을까요? 경기가 끝나고 샤워를 할 때면, 그는 팀의 모든 선수들이 샤워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홀로 샤워장을 사용해야만 했다고 합니다. 어쩌다 잘못하면 엄청난 야유가 그에게 쏟아졌겠지요. 그런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는 위대한 선수로 자리를 잡게 되었고, 이런 그의 활약은 마틴 루터 킹 목사 같은 흑인 운동가에게도 영감을 불어 넣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흑인으로서 처음 대통령이 된 오바마의 길을 닦은 사람이 바로 재키 로빈슨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최초가 된다는 것은 참 영광스럽기는 한데요... 그것은 참 어렵고 모험에 가득한 길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오랜 기다림 끝에 열리는 것이고, 엄청난 인내심과 참을성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 가운데서 재키 로빈슨을 능가하는 최초의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다름 아닌 다비다라고 하는 여성입니다. 그 이름이 꽃사슴이라고 하니... 그는 아마도 생전에 참 우아하고 기품 있는 여성이 아니었을까요? 게다가 그녀는 다비다라는 아람어식 이름 말고도 도르가라고 하는 그리스식의 이름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주어진 한계를 넘어서서 부지런히 움직이며 영향을 끼친 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다비다를 생각하면서 놀라게 되는 것은 성경이 그를 여제자(woman disciple)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은 참 영광스런 호칭입니다. 여제자라는 말은 성경에서 오로지 다비다에게만 헌정된 호칭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여성들 중에서 여제자라고 불리운 사람은 오로지 다비다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생각해보면 다비다는 얼마나 소중한 인물인가요? 그러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합니다. 왜 다비다일까? 초대 교회를 배경으로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고 주님을 섬긴 여성들이 참 많은데... 어떻게 다비다에게 이런 영광이 돌아가게 된 것일까요? 
   
우리는 그가 얼마나 사랑이 넘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 특히 홀로된 여성들을 돌보며 살았다는 것을...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녀가 병이 들어서 죽게 되었을 때에, 평소에 그녀에게 사랑을 받던 많은 여성들이 그녀 곁에 모여들어서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들은 그녀를 찾은 베드로에게 생전에 그녀가 만들어 주었던 옷가지들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는 다비다가 참 사랑이 넘치고, 말 뿐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 특별히 가난하고 힘이 없는 이들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랑을 베풀었나...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들도 오늘 이야기를 읽으면서... 한 번 그런 생각을 좀 해 보았으면 합니다. 나의 장례식을 좀 미리 상상해 보는 것입니다. 과연 나의 죽음을 앞에 두고 진정으로 슬퍼하며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 것인가? 한 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런 것도 한 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다비다에게는 참 아름다운 사랑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가난한 여성들을 위하여 그가 지어주었던 속옷들이며 겉옷들... 사람들이 이것을 얼마나 고맙고 소중하게 여겼으면, 이렇게 베드로에게 보여주면서 애통해 하는 것일까요? 나는 세상을 떠날 때에 무엇을 남기고... 어떤 흔적을 남기고 세상을 떠날까요? 그저 자기만을 위하여 바쁘게 살다가... 그렇게 죽었다... 단지 이것뿐이라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허무할까요?  
   
다비다는 이런 여성이었습니다. 아마 그녀도 홀로된 여성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대에 이런 여성이 한계를 넘어 서고 자리를 잡는 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비다는 개인적인 불행과 아픔을 믿음으로 잘 극복하였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정말 멋지게, 그리고 기품 있게 살았던 여성입니다. 게다가... 자기처럼 어려운 처지에 있는 여성들을 사랑하고 돌보아 주는 일에 힘을 썼던 여성입니다. 아마도... 주님은 다비다의 이런 점이 참 좋으셨나 봅니다. 개인적으로는 불행함과 아픔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한계를 믿음으로 극복하여서, 항상 밝고 건강하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주변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다비다는 유일하게 ‘여제자’라고 불리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춘 여성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 모두의 삶이 다비다처럼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것만가지고도 충분할 것입니다. 다비다가 이제껏 생전에 보여준 삶 말이지요.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다비다를 통해서 누구도 생각하거나 꿈꾸지 못했던 놀라운 일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비다가 죽은 후에... 드러나게 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죽었던 다비다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일어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베드로였습니다. 주님이라면...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주님이시라면... 그리고 그 자신이 죽음에 머물러 있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님이 그녀를 다시 살리셨다면... 어쩌면 이것은 감격스럽기는 하지만... 그 놀라움은 좀 덜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를 통해서... 죽었던 다비다가 다시 살아나다니... 베드로 자신이나 그곳에 있던 성도들은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주님이하셨구나... 주님이 정말 우리들 가운데 계시구나...’ 그들은 다시금 주님의 현존을 경험하고 확인하지 않았을까요? 오늘 말씀의 앞부분에는 욥바와 마치 쌍동이 도시처럼 불리는 룻다에서 베드로가 팔 년 된 중풍병자 애니아를 고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때에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애니아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고쳐 주십니다. 일어나서 자리를 정돈하시오.’(v.34)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고쳐 주십니다.’ 

베드로에게는 이런 믿음이 있습니다.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는 없지만... 그는 주님이 지금도 우리들 곁에... 비록 능력이 없지만, 이들이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려할 때에... 그들 곁에 머무르시면서... 사람들을 치유하시고 살리시는 주님이사라는 것... 그것을 베드로는 굳게 믿었습니다. 
   
오늘 다비다를 이런 주님의 모습은 더욱 확연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베드로가 그녀를 다시 살린 것처럼 보이지만... 베드로 자신도 그렇고... 그 광경을 놀라움으로 지켜보는 성도들도 그렇고... 그들은 다시금 주님이 자기들 곁에 머물러 계시다는 것... 그것을 직접 경험하고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굳게 주님을 믿게 된 것이지요. ‘그 일이 욥바에 알려지니,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v.42) 

오늘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마치고 있습니다. ‘주님이 하셨구나... 아... 주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구나... 주님이 비록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우리들 가운데 계시구나... 주님을 향한 우리의 기도... 우리의 희망이 헛되지 않은 것이로구나...’ 그들은 다시 살아난 다비다를 보면서 이런 믿음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주님을 향한 그들의 믿음은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다비다가 아직 살아 있다면... 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비다는 이미 죽었습니다. 삶과 죽음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니었겠지요. 옆 도시 룻다에 머물고 있던 베드로에게 급하게 와달라고 부탁을 한 것은 이미 다비다가 죽은 후였습니다.(v.38b) 

그들이 이렇게 서두르는 것을 보면, 베드로에게 다비다의 장례식을 맡기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직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들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그들은 결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이미 다비다가 죽었지만... 급하게 베드로를 부르는 행동 속에 담겨 있습니다. 
   
어떻게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가 있었을까요? 죽었다고 포기하지 않고... 베드로를 부르게 한 힘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요?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그런 믿음을 얻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예수가 죽음에서 살리신 나사로도 생각했을 것입니다. 비록 예수가 그들 곁에 계시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들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주님의 부활이 이런 희망과 믿음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다비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는 지체하지 않고 욥바로 떠납니다.(v.39a) 마치 살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지요... 그리고는 다비다를 뉘어 놓은 다락방으로 올라가서 무릎을 굻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가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베드로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죽음 앞에서도 빼앗기지 않는 희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베드로에게는 그런 경험이 이미 있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때의 분위기가 오늘의 말씀과 흡사합니다. 소냐가 죽자 사람들은 다 포기하고 체념하였습니다. 예수가 회당장의 집에 도착을 하니 사람들은 죽음을 슬퍼하며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사람들에게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막5:39)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에 사람들은 다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아이를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다 물리치시더니, 아이의 부모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제자만을 데리고는 아이가 누워 있는 곳으로 들어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소녀의 손을 잡으시고는 ‘달리다굼!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거라...’(막5:41)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죽었던 그 소녀가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다비다의 죽음 앞에서 베드로는 그 광경을 떠올리고 있지 않았을까요? 공교롭게도 오늘의 분위기도 그 날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이미 다비다는 죽었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마치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다비다 앞에서 행동을 합니다. 사람들을 다 물리치고는 홀로 다락방에 머무릅니다. 먼저 무릎을 꿇고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서는 다비다에게 명합니다. ‘다비다여, 일어서시오.’ 주님이 소녀에게 했던 것처럼... 베드로도 그렇게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그 경험이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일은 예수님이나 하시는 것이지... 나는 할 수 없어... 그렇게 포기하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습니다. 그날 소녀를 살리신 주님이 함께 하셔서... 다비다도 일으켜 세우실 것을 믿는 믿음이 그에게는 있었습니다. 
   
그런 것이 믿음이 아닐까요? 병원에 가보면... 우리들의 몸의 모든 상태들이 수치로 표현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놀랄 때가 참 많습니다. 수많은 임상적인 통계들이 쌓여서.. 그런 수치가 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마 지금도 그런 수치들은 끝없이 진화하고 있고... 더 정확하게 우리들의 상태를 표현하여 줄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우리들이 가진 믿음이라는 것은 어떠합니까? 욥바의 성도들이 처음부터 다비다가 죽었는데도 희망을 가진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나사로가 살아난 것을 그들은 경험하였고, 무엇보다도 주님의 부활이 그런 희망을 가지게 하였을 것입니다. 베드로도 그런 것이지요. 그가 경험했던 것이 있습니다. 예수가 소녀를 다시 살리시던 모습... 그것을 그가 보았기에... 감히 다비다를 살리는 일에 도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믿음이 이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눈앞에 예수가 계시고 안 계시고...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되지를 않습니다. 욥바에서 일어난 일을 우리가 이제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계시지 않지만... 주님의 부활을 통해서 희망을 새롭게 가지게 되고... 어떤 경우에도 절망하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주님이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믿음으로 도전하는 이들이 있는 한... 언제나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새로운 생명의 사건은 우리들에게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한 가지만 더 생각을 하려 합니다. 

다비다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의 씻은 다음에 다락방에 두었다고 하였습니다.(v.17) 저는 이 대목이 참 궁금했습니다. 다락방은 집에서 가장 높은 곳인데... 어떻게 그곳에 시신을 올려다 두었을까? 아무리 여자라고 하여도 참 힘든 일이 아닐까요? 무덤에 묻으려면 다시금 내려와야 할 텐데 말이지요. 그런데... 다락방은 생각해보면 희망의 장소요 기적이 일어나는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엘리야와 엘리사도 죽은 아이들을 살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아이들을 살리는 장소가 바로 다락방입니다. 
   
엘리야는 가뭄 동안 그가 머물던 사르밧의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줍니다. 그런데... 아이가 죽었을 때, 그는 아이들 안고서는 자기가 머물던 다락방으로 아이를 데리고 올라갑니다.(왕상17:19b) 그리고는 그곳에서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여서 아이를 다시 살리게 됩니다. 
   
엘리사에게도 아이를 살리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번에는 수넴 여인입니다. 뒤늦게... 엘리사의 기도로... 아들을 얻게 되는데... 그만 갑자기 죽고 맙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수넴여인이 그렇게 하는 것이지요. 죽은 아이를 데리고 엘리사가 머물던 옥상의 다락방으로 데리고 가서는 엘리사의 침대에 그를 눕히고는 엘리사가 오기를 기다립니다.(왕하4:21) 엘리사는 홀로 다락방에 들어가서 주님께 기도를 하고서는 아이를 살리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도 우리는 비슷한 이야기를 접하게 됩니다. 다비다가 죽자 사람들은 그녀를 다락방으로 데리고 올라가고... 베드로는 홀로 다락방에 들어가서 무릎을 꿇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서는 다비다를 살리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본다면 다락방은 아주 특별한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은 사람이라도 그곳에 가기만 하면 살아나게 되는 곳... 여기가 바로 다락방이라...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연약하고 한계가 있는 인간이지만... 주어진 한계를 벗어나서 죽어 있는 생명을 향해서 ‘다비다여, 일어나시오...’ 이렇게 명령을 내리는 사람으로 변화되게 하는 곳... 여기가 바로 다락방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다락방이 있습니까? 문제가 있을 때... 실망스런 일이 있을 때... 절망이 엄습해 올 때... 그것을 끌어안고 올라가기만 하면... 절망이 희망으로 변하고... 죽음이 생명으로 변하고... 슬픔이 변하고 기쁨의 춤을 추게 되는 곳... 그런 다락방이 있는지요?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숨어서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리하면 숨어서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6:6) 주님은 여기서 하나님은 숨어 계시다는 것을 거듭해서 우리에게 일깨워 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어디에 숨어 계신지... 하나님께서 숨으신 그곳을 찾는 곳은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내가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고... 내가 세상으로부터 잠시 숨기만 하면 됩니다. 세상과는 단절된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기만 하면... 비로소 하나님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다락방이란 바로 그런 곳을 말합니다. 세상살이에 지치고 실망하여서... 마치 다비다가 죽었듯... 그런 우리들이 그곳에 들어가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금 생명을 얻게 됩니다. 세상에서 우리를 실망하게 하고, 힘들게 만드는 문제가 어떤 것이든... 마치 수넴 여인이 그랬던 것처럼... 그것을 안고 다락방으로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다 해결해 주십니다. 
   
무엇보다도 신비한 것은 바로 그 다락방이 우리들 자신이 새롭게 되는 장소라는 것입니다. ‘다비다여, 일어나시오...’ 베드로처럼 우리도 죽음을 향해서도 권위를 가지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으로 다시금 태어나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멋진 일인가요? ‘다비다여, 일어나시오!’ 인간으로서 다른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치유하고... 격려하며... 마침내 생명을 살리는 일을 감당하는 것... 이것보다 멋지고 가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지금도 이 자리에 함께 하시는 주님을 향한 믿음...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마음이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합니다. 
    
오늘 우리들 모두가 베드로처럼... 누워 있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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