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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가장 작은 어린이가 큰 자 (창 25:21-23, 눅 9:4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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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작은 어린이가 큰 자 (창 25:21-23, 눅 9:46-48)

바다에서 가장 덩치가 큰 동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새우입니다. 새우는 바다가 좁아서 몸을 구부리고 있으니까요. 바다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동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새우입니다. 새우는 늙어서 등이 굽었으니까요. 바다에서 가장 지혜로운 동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새우입니다. 수염이 길기 때문입니다. 가장 작은 것이 가장 크고, 가장 작은 것이 가장 지혜로운 세상의 아이러니가 우리 주위에 많습니다. 
  
지구에서 가장 덩치가 큰 동물은 흰수염고래라고 합니다. 흰수염고래는 무게만 자그마치 160톤이라고 합니다. 주라기 시대의 동물인 공룡은 덩치가 어마어마하게 컸습니다. 그런데 덩치가 큰 동물은 보기가 힘들고, 덩치가 큰 공룡은 다 멸종했습니다. 큰 것이 작은 것입니다. 세상에는 작으면서 큰 것도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전 세계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는 포유동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쥐입니다. 쥐는 세계 모든 나라에 다 분포되어 살고 있습니다. 덩치가 큰 코끼리나 하마가 아니라 작은 쥐가 가장 많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근동에 분포되어 있는 시베리아 호랑이는 굉장히 큽니다. 길이가 2미터나 되는 호랑이입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거의 멸종상태에 있어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너무 큰 짐승들은 생존하지 못합니다. 반면에 아주 작은 짐승들이나 순한 짐승들은 생존하고 있습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쌍둥이를 임신하였습니다. 에서와 야곱이 쌍둥이로 태어납니다. 창세기 25:23에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합니다. 동생인 야곱이 형인 에서를 이길 것을 하나님이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합니다. 작은 자에게 한 것이 큰 자에게 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작은 자를 작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보세요. 흔히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란 비유로 말합니다, 경쟁의 상대가 안 되는 대상들이 만날 때 이런 비유로 말합니다. 골리앗은 다윗에게 경쟁 대상이 아닙니다. 골리앗은 키가 여섯 규빗 한 뼘이었습니다. 여섯 규빗 한 뼘은 3미터가 넘는 키입니다. 다윗은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어린 소년이 키가 크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런데 결과적으로 작은 아이가 큰 장수를 이겼습니다. 다윗은 골리앗뿐만 아니라 나머지 네 장수도 다 죽였습니다. 그래서 물맷돌 다섯 개가 필요했습니다. 역대상 20:8에는 “가드의 키 큰 자의 소생이라도 다윗의 손과 그 신하의 손에 다 죽었더라”고 합니다. 다윗은 손가락 발가락이 여섯 개씩이나 있어 스물네 개를  가진 거인까지도 다 물리쳤습니다. 
  
작은 자가 큰 자를 이기고, 한 사람이 천명을 이기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사람은 작지만 세상의 큰 자를 이기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며 축복입니다. 
  
제자들 중에 “누가 크냐”라고 하는 변론이 일어나 논쟁이 심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 사이에 심각한 격론이 벌어졌습니다. 불과 얼마 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부인을 가르쳤고, 수난예고도 했지만 제자들은 세울 왕국에서 누가 높은 요직을 가질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런 욕심으로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어린이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주일입니다. 세상에서 작은 자인 어린이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어린이들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양육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라”고 하신 의미를 알고 작은 자가 되어 하나님 나라의 큰 자가 다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가장 큰 자인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9:48에는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핵심은 어린이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즉 어린이를 영접하면 하나님을 영접한 것입니다. 어린이를 통하여 예수님을, 나아가서 하나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영접하는 방법을 어린이를 통하여 가르치십니다. 
  
어린이를 위대하게 보신 주님은 “나를”이라고 하여 어린이와 성자 예수님을 일치시키고, “보내신 이”라고 하여 성부와 어린이를 같은 대열에 두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이를 얼마나 높이셨는가 하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성부와 성자와 어린이는 같은 대열에 오를 만큼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손님을 극진하게 영접하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우리나라에서 손님을 잘 영접한다는 것은 음식을 푸짐하게 대접하는 것을 말합니다. 손님으로 어디를 방문했다가 대접을 잘 받았다는 것은 음식을 잘 먹었다는 뜻입니다. 러시아에서는 손님을 영접하기 위해서는 발레를 구경시켜 줍니다. 오래 전에 영국 친구들에게 간다고 하면 연극을 보고, 테니스를 함께 치는 것으로 영접합니다. 이런 것이 그들의 극진한 대접입니다.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주님께 무엇을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나의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어린이를 영접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어린이의 가치를 인정하고, 어린이를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20세기 최대의 발견은 어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20세기를 ‘어린이의 재발견 시대’라고 합니다. 어린이가 어른의 아버지라고 발견하는 것이 위대한 사실입니다. 20세기에 와서 어린이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고 어린이의 위대함을 알게 되어 어린이를 작은 아이가 아니라 큰 사람으로 보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이를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떤 사람들이 어린이를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어린이들을 꾸짖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도 몰랐고, 어린이의 가치도 모르는 제자들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0:14에는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어린이를 꾸짖는 제자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노하셨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노하셨다는 말이 몇 번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 편 손 마른 사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셔서 고쳐주시려고 하는데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주시하는 자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노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를 꾸짖는 제자들에게 노하셨습니다. 어린이를 꾸짖는 것이 예수님께 얼마나 나쁜 일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17:42에는 “그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고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다윗이 어리다고 업신여겼습니다. 골리앗과는 상대가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교만이 골리앗을 죽게 하였습니다. 블레셋이 참패하게 만들었습니다. 다윗은 작은 아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아무리 작아도 작은 사람이 아니라 큰 사람입니다. 
    
‘499살 외계인, 지구에 오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어린이 공상소설인 이 책이 주는 의미는 아주 깊습니다. 잘 익은 바라티 호박을 따서 햇볕이 잘 드는 따뜻한 장소에 둡니다. 80일이 지나면 인간이 호박에서 나오는데 갓 태어난 인간을 어른이라고 부릅니다. 어른이 나이가 들수록 어린이로 성장하는데 우리도 어린이가 되기 전에 다들 어른이었던 때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입니다. 이 소설이 설정하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거꾸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어린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른이 자라서 어린이가 됩니다. 
  
‘소로우의 탐하지 않는 삶’이란 책도 어른들에게 깊은 교훈을 줍니다. 이 책에는 “어린이보다 지혜로운 어른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어린이는 어른보다 더 깊은 지혜가 있습니다. 순수성 그 자체가 어른들은 가지지 못하는 하나님 나라의 지혜입니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입니다. 어린이에게는 어른 이상의 숨겨진 지혜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이는 가장 큰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어린 아이가 가장 큰 자라는 것을 어른들은 알아야 합니다. 
  
교육전문가 데일 스펜더는 “어른들이 세상을 움직이는데 필요한 기술을 아이들이 갖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어린이들은 세상에 필요한 온갖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이들은 세상을 편히 살고 즐겁게 살고 두려워하지 않고 삽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영접한 자들을 보세요.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서 고침을 받고 주님을 영접하고 받들어 섬겼습니다. 베다니의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이 오실 때마다 예수님을 잘 영접하고 말씀을 경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여리고로 가시는 길에 만났던 키가 작은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께서 내려오라고 하실 때에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린이 하나를 영접하면 이것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셈이 됩니다. 
  
어린이들을 영접하여 예수님을 영접합시다. 우리 아이들을 보세요. 어리다고 업신여기고, 마구 대할 아이들이 아닙니다. 이들이 장차 교회와 사회와 세계의 일꾼들입니다. 그들이 우리보다 훌륭한 인재가 될지 누가 압니까? 장래의 대통령, 장래의 위인, 장래의 지도자를 섬기는 자세로 우리 어린이들의 가치를 알고 잘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가장 작은 자의 가치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누가복음 9:48 하반절에는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작은 자를 큰 자로 여겨 그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라고 하신 것은 큰 자는 자기를 낮추는 자라는 뜻입니다.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돌보아 주는 자가 진정 큰 자입니다. 
  
어린이들은 자기를 낮추는 자입니다. 자기가 어린 것을 아는 자입니다. 그래서 작은 자가 가치 있는 자입니다. 자기를 낮출 줄 아는 자가 가치 있는 자입니다. 성경에서 자기를 낮추는 자를 보세요. 모세는 자기를 낮추어 자기는 백성을 이끌 사람이 못 된다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은 스스로 “종은 작은 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는 자기를 낮추어 입술이 부정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만났을 때에 자기가 죄인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바울은 자기는 가장 작은 자이며 죄인의 괴수라고 하였습니다. 자기를 낮출 때에 하나님은 가장 높이십니다. 자기를 낮출 때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일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작은 자, 낮은 자의 가치입니다. 
  
가장 작은 자는 하나님이 가장 높은 자리에 앉히십니다. 가난하고 갈급한 마음을 가진 자에게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자리를 주십니다. 바로 이런 것을 영점(零點)의 가치라고 합니다. 영점은 밑바닥입니다. 영점은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시작점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는 3년 동안 예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시작점이 영점이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모든 운동에 공통의 철칙이 있습니다. 무슨 운동이든 자세가 높으면 절대 안 됩니다. 특히 골프가 그렇습니다. 골프를 배울 때에 힘을 빼고, 고개를 들지 않는 것을 배우는데 3년은 걸린다고 합니다. 낮음의 가치입니다. 낮아서 잘못 되었다거나 낮추어서 손해를 보는 경우는 없는 것 같습니다. 낮출 때에 비로소 사람은 높아집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진리입니다. 
  
현대의 신비주의자 마들렌 델브렐은 예수님을 ‘작은 자들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자를 사랑하셨고, 작은 자의 가치를 인정하셨습니다. 작은이의 가치, 작은 것의 가치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예수님의 뜻인 이 지혜를 가지고, 예수님 말씀의 뜻을 알고, 작은이의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8:10에는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고 합니다. “업신여기지 말라”는 말을 영어성경에는 ‘despise’(경멸), ‘scorn’(비웃음), ‘look down’(낮춤) 등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작은 아이라도 업신여기지 말아야 하며, 경멸하지 말아야 하며, 낮춰볼 상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위에서 내려다 볼 존재가 아니라 무릎을 꿇고 그들의 눈높이에서 보아야 할 존재입니다. 
  
요셉은 위로 층층이 형들이 있었습니다. 르우벤은 요셉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을 것입니다. 형들은 어린 동생인 요셉을 철부지 꿈쟁이로 생각하고 업신여겼습니다. 그 동안 쌓였던 원한 때문에 이런 동생쯤이야 죽여도 괜찮고, 팔아버려도 괜찮고, 버려도 괜찮은 어린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랜 후에 요셉이 애급의 총리가 되고 그들이 곡식을 구하기 위하여 애급에 갔다가 마침내 총리가 된 요셉을 만났습니다. 어린 동생이 아니라 애급의 제2인자가 되어 있었고 그들이 눈을 마주치기도 어려운 높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 형들은 혹시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 틈을 타서 요셉이 자신들에게 보복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성경은 “요셉의 앞에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창 50:18)라고 합니다. 형들이 요셉에게 자기들이 종이라고 합니다. 작은 아이 요셉이 자신들보다 크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한 것입니다. 
  
사사 기드온은 300명이라는 적은 군사를 데리고 13만 5천 명의 적군과 싸워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군사를 다 돌려보내고 300명만 싸움에 나가게 하신 것입니다. 적은 군대를 데리고 나간 기드온은 작은 것이 큰 것을 이길 기적을 일으킬 확률이 확실히 높아지게 된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적은 기드온 군대가 거대한 미디안 군대를 이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작은 것을 크게 하시고, 약한 것을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작은 겨자씨 한 알이 새가 깃들 큰 나무로 자랍니다. 예수님은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긴다고 하셨습니다. 겨자씨는 작은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큰 나무가 숨어 있습니다. 작은 도토리 한 알이 큰 상수리나무로 자랍니다. 도토리가 작은 것이 아닙니다. 작은 개울이 큰 강을 이룹니다. 개울이 작은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들 그 속에 큰 것이 잠자고 있고 큰 생명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는 작지만 큰 말을 하였습니다. “작은 일은 작은 일이다. 그러나 작은 일에 신실한 것은 큰일이다”. 작은 일을 소홀히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큰일도 잘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많은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작은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비중이 훨씬 더 큽니다. 하나님은 작은 것 하나도 버리지 않으십니다. 망가져 못 쓰게 된 것도 고쳐서 쓰십니다. 적은 것으로 많게 하십니다. 
  
부자가 되려면 1원의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환율 1원이 오르는 것에 큰 관심을 가져야 큰 사람입니다. 작은 돈을 가진 사람은 1원이 아무 것도 아닐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큰돈을 가진 사람은 1원이 엄청나게 큽니다. 큰돈을 가진 사람은 작은 것의 가치가 엄청 나게 크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작은 어린아이를 보고 크다 작다고 판단하는 것은 사람의 눈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모두 다 큽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가장 작은 아이가 가장 큽니다. 어린이의 가치는 어른보다 더 큽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눈입니다. 우리 아이들을 크게 보세요! 우리 아이들 가운데 작은 아이는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나보다 더 훌륭하게 될 인물로 봐야 나보다 크게 됩니다. 어린아이들의 가치를 인정하면 아이들은 자신의 능력보다 크게 자랍니다. 우리 모든 아이들이 가치를 인정받고 자라서 우리보다 더 훌륭한 우리 후대가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최근 텔레비전에서 공익 캠페인으로 나오는 이야기 중에 감동적인 것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초기의 문신 박연은 장애인에 대한 처우개선을 주장하고 임금께 상신하였습니다. 세종대왕은 이를 좋게 여겨 받아들였습니다. 세종은 실력을 갖춘 장애인들을 공직에 등용하였습니다. 그래서 박연은 “세상에는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조선 초기에 ‘명통시’라는 시각장애인단체가 있어서 스스로 권익을 보호받았다고 합니다. 장애인을 구분지어 차별하거나 사회에서 격리시키지 않았던 것이 우리 민족 전통이라고 합니다. 역시 ‘예의지국’(禮儀之國)이지요? 실제로 버릴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에는 작은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물며 어린 아이이겠습니까? 
  
누가복음 7:28에는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고 합니다. 세례요한은 당시에 위대한 큰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모든 사람이 세례요한보다 큽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작은 자가 없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볼 때는 작은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모두가 큰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하나님 나라는 어린이의 것입니다. 우리 모든 어린이를 귀중하게 여기고, 그들을 잘 영접하여 장래에 나보다 더 훌륭하고 위대한 사람으로 양육합시다. 우리 모든 어린이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을 잘 믿는 훌륭한 믿음의 사람으로,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며 큰 자로 성장하는 귀한 샛별 같은 존재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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