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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 (행 13: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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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 (행 13:14-52)


요즘의 사업들은 거의 다 소위 '프랜차이즈' 즉 연쇄점의 형태로 되어 가는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어떤 기술이나 서비스의 비법이 자자손손으로, 혹은 장인으로부터 도제에게 수직적으로 시간의 축을 따라 이어졌지만, 지금은 그런 특별한 비법들이 프랜차이즈를 통하여 수평적 즉 온 세계에 공간적으로 동시에 널리 퍼져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즉 같은 프랜차이즈에만 속해 있으면 비록 가게는 다르다 할지라도 그 안에서 제공되는 서비스나 파는 물건은 세계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똑같게 된 것입니다. 
'맥도날드 햄버거'는 대표적인 프랜차이즈로서 그 유명한 '노란색의 M자'가 걸려 있는 햄버거 가게에 들어가기만 하면, 언제 어디서든지 똑같은 맛의 햄버거와 프렌치프라이를 먹을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스타박스' 역시 마찬가지 예로서 그 프랜차이즈 가게에서 파는 커피의 종류와 맛은 전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동일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어느 한 프랜차이즈에 속해 있는 모든 가게들이 그 제공되는 서비스나 상품을 각 가게의 주인의 마음대로 정하거나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 프랜차이즈 본사의 지시대로만 따르고 거기에서 제공해 주는 똑같은 재료와 상품들만 사용해야 합니다. 
만약 어떤 한 가게가 그와 같은 본사의 지시에 어긋나는 상행위를 하거나 본사에서 제공하는 것 대신에 그와 유사한 물품을 다른 경로를 통해 구입한다면 당연히 처음에 맺은 계약에 따라 패널티를 받거나 아니면 아예 프랜차이즈의 특권을 박탈당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가게는 그 프랜차이즈가 표방하는 것과 다른 서비스나 질이 떨어지는 제품을 고객에게 제공함으로써 결국은 그 프랜차이즈 전체의 신용과 명성을 떨어뜨리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전개되고 있는 복음전파 운동은 그런 면에서 비유해 볼 때 그야말로 시공을 초월한 최고의 영적 프랜차이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복음의 내용부터 시작해서 그 전파 방법에 이르기까지 초대교회 시절이나 오늘날 21세기의 현대교회에서나,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똑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정하고도 꾸준한 복음전파의 패턴을 이미 사도 시대에서부터 볼 수 있습니다. 
하루에 삼천 명의 교인을 얻었던 사도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나, 순교당하기 직전까지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에게 당당하게 선포했던 스데반 집사의 설교나, 그 핵심 내용은 동일했습니다. 
그리고 저 유명한 전도자 사도 바울의 제1차 전도여행에서도 역시 그 비법은 조금도 바뀌지 않고 있음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14절부터 16절의 말씀에 "14저희는 버가로부터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15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16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비시디아 안디옥"은 바울 일행의 선교사들을 파송했던 '수리아 안디옥'과는 다른 곳으로서 당시 소아시아 한가운데에 있던 도시였습니다. 
그 곳 역시 유대인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이어서 "회당"이 있었으며, 바울 일행은 항상 행하던 선교 전술을 그대로 따라서 거기서도 역시 "안식일에" 그 곳을 찾아갔습니다. 
통상 회당장은 각 회당에 한 명씩 있는 것이 관례였지만, 본문에 "회당장들"이라고 복수로 되어 있는 것을 볼 때 그 곳은 두 사람 이상이 회당장으로 있던 특수한 경우였던 것 같습니다. 
  
관례에 따르면 회당장이 그날 회당에서 설교할 사람을 지정하는데, 그 곳의 회당장들은 타지에서 찾아온 바울 일행에 대한 호기심이나 기대감 때문이었는지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고 청해 왔던 것입니다. 
물론 바울로서는 절호의 기회인지라 당장 응낙하고 "일어나 손짓하며" 말했다고 했는데, 여기서 '손짓하다'란 그가 제스처를 쓰면서 설교했다는 뜻입니다. 

과연 사도 바울은 그 자리에서 어떻게 전도를 했습니까?
오늘 총회선교주일을 맞이하여 신약 시대 최고의 전도자로 이름 높은 사도 바울의 전도 비결, 그 이후로도 역시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조금도 바뀌지 않았으며 조금이라도 바꾸면 안 될 '불변의 전도 비결'이 과연 무엇인지를 이 시간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복음전파의 내용은 오직 '성경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세주 되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17절부터 22절에 "17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18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 19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약 사백 오십 년간) 20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21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22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증거하는 내용은 이스라엘이 바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언약의 백성이었다는 역사입니다. 
그 택하신 백성을 이끄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여호수아에 이어서 사사들과 왕들을 주셨습니다. 
그 중에서 다윗은 사람 앞에서도 이름 높은 명군이었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으며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게 할" 지도자였던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그 다윗 왕가를 통하여 보내 주실 완벽한 군주 즉 메시아에 대한 언약과도 직결되었습니다. 
즉 장차 오실 최고의 왕, 진짜 구세주야말로 다윗과 오히려 비교도 안 될 만큼 하나님의 마음에 완전하게 합한 사람, 그리고 다윗조차도 못 다했던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룰 사람이 될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전 구약 예언의 핵심이었으며 당시 모든 유대인들이 공감하며 기대하고 있던 바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배경을 재확인해 놓은 후에, 사도 바울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바로 그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이어서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23절 이하 37절에 "23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24그 오시는 앞에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25요한이 그 달려 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 풀기도 감당치 못하리라 하였으니 26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27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28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29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30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지라 31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으니 저희가 이제 백성 앞에 그의 증인이라 32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33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34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35그러므로 또 다른 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36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37하나님의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다윗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는데 그 분이 "곧 예수라"고 선포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다윗 언약의 완성이요 정점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것이야말로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에 해당되는 세례 요한이 그의 평생을 통해 증거한 사실이기도 했다고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이 점에 대하여 치명적인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데, 사도 바울은 그렇게 된 이유를 가리켜 그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라고 아주 예리하게 정곡을 찔렀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구세주 되심을 알지 못한 것이야말로 최악의 무지였으며, 그 결과 그들은 구원의 기회를 제 발로 스스로 차 버린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정적인 원인은 그들이 '선지자의 말' 즉 구약 예언을 바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안식일마다 낭독은 하고 있었지만 정작 그 말씀의 뜻을 깨닫지 못한 까닭에 예수님을 제대로 알 수 없었고 따라서 "구원의 말씀"으로 오신 그 분을 영접할 수도 없었다고 사도 바울은 실로 정확한 분석을 내렸던 것입니다. 

이어서 사도 바울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구체적으로 어떤 성경의 예언을 성취한 것인지를 조목조목 확증해 주면서, 우선 그 모든 것은 "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었다고 밝혔습니다. 
고난당하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 역시 "선지자의 말을 응하게 한 것"이었으며, 죽었다가도 '썩음을 당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살리신' 부활 사건 역시 시편 곳곳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이루어 주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참되고도 유일한 구세주시라는 사실은 이처럼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조금만 눈뜨고 살펴보아도 아주 간단하고도 확실하게 믿을 수 있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논증인 것입니다. 

이 설교가 성경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첫 공식 설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때부터 오직 성경 말씀을 통하여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하는 이것 하나만 가지고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물론 이 복음의 내용은 바울의 나머지 전도 여행들이나 목회 사역들을 통해서도 조금도 바꾸어지지 않았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최고의 군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니 실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완전한 사람이셨으며, 또한 성자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시기에' 이보다 더 완벽한 사람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즉 죄인을 구원해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 언약에 있어서 그 주인공은 '오직 예수' 한 분이실 뿐입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이 곧 '구원의 말씀' 즉 복음 그 자체이며 따라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복음전파의 주제인 동시에 핵심이 될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그 어떤 경우에서도 결코 바뀔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예수님이 곧 구세주이심을 알려 주고 깨닫게 해 주고 믿게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성경입니다. 
복음은 무슨 유창한 달변이나 재치 있는 화법이나 논리적인 설득에 의해서가 결코 아니라 오직 '성경의 증거'를 통하여 선포되고 전파될 따름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길은 '오직 성경' 외에 다른 왕도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무리 시대가 다르고 환경이 변화되어도 결코 바뀔 수 없는 복음전파의 '알맹이'입니다. 
고대인에게나 현대인에게나 오로지 '성경에서 예언된' 예수님만이 참된 메시아라고 전도해야 합니다.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오직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인을 위해 찾아오신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소리 높여 외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만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속사가 완전히 성취될 그날까지 그 교회들에게 주신 '불변의 오리지널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진정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참된 교회라면 그 어떤 대상을 향해서도, 그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성경이 증거하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선포해야 함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복음전파의 요령은 오직 '택하신 자를 믿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맡기는' 것입니다. 

38절부터 41절에 기록하기를 "38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39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40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41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이를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후에 이제 사도 바울은 청중들로 하여금 결단을 내리도록 촉구합니다. 
복음의 결론적 핵심은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 즉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면서 그 분을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는 자는 즉시 "죄 사함"을 받게 되고 그 결과 하나님께로부터 죄 없다고 인정을 받는 '칭의'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참된 복음만이 가지고 있는 이 놀라운 은혜는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것이었습니다. 
즉 사람은 자신의 공로로써는 그 무슨 수를 써도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었지만, 이제는 오직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전적으로 '이 사람을 힘입어'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렸다고 사도 바울은 그 청중들을 초청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와 반면에 사람이 이 믿음을 가지지 못할 때 그 결과는 실로 무서운 것이 될 수밖에 없음을 곧 이어서 엄중히 경고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너희 때를 당하여" 즉 마지막 날에 "한 일" 즉 심판을 행하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날은 불신자들이 "놀라고 망할" 날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었습니다. 
그 최후의 심판은 "사람이 너희에게 이를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 즉 전도자들이 사람들의 귀에 아무리 외쳐 주어도 불신자들은 도저히 믿지 못했던 일이지만, 결국은 반드시 '그들에게 미칠' 즉 일어나고야 말 일이라고 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큰 은혜를 끝까지 거부하는 자는 실로 두려운 심판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역시 똑똑히 일러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전도는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권함과 동시에 불신앙을 경고하는 것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귀에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것은 결코 바른 전도도 아니며 그 영혼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태도도 될 수 없습니다. 
'구원'이 '심판' 대신에 주어지는 것처럼 참된 복음전파는 항상 엄중한 경고가 따라와야 마땅한 것입니다. 
  
42절 이하 52절에 "42저희가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43폐회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44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45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 46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47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48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49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50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51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52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전도는 어떤 설명이 아니라 단순한 선포였습니다. 
그의 전도에는 '예수님은 이래 저래서 그리스도이시다.'라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렇게 저렇게 증명될 수 있다.'라는 식으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그저 성경 말씀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께서 구세주 되심을 천명하고 성경 말씀에 경고하고 있는 대로 불신앙에 대한 심판을 선포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선포된 복음을 바로 그 자리에서 그대로 믿는 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그 결과를 두고 본문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감탄스러운 어조로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구원이 어떤 인간적 지혜의 깨달음의 결과도 아니요 어떤 인위적 노력의 산물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결과'임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물론 복음을 들었다고 해서 다 믿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바울 일행을 적극적으로 핍박하고 성내의 유력 인사들을 정치적으로 선동하여 결국 그들을 쫓아내기까지 한 유대인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런 불신자들을 두고 '전해진 복음을 버리고 스스로 영생 얻는 일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는' 무리라고 간단히 일축해 버렸습니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접하지 않는 것은 영생 얻는 일에 대하여 무자격자임이 완전히 드러나는 순간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그 본인에게는 비극적인 최악의 결정이지만 바울 사도의 능력 밖에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저 바울 자신은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또 다른 사람들 즉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을 찾아 전도하는 것을 계속할 따름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전도의 결과는 전도자의 책임이나 능력에 속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최종적으로는 복음을 전해 듣게 된 각 개인이 양심적으로 판단할 문제이며, 근본적으로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전도자는 누가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인지 알 수 없는 까닭에 그저 땅끝까지 모든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만이 유일한 전도 방침이 될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신자를 전도하면서 '이 사람이 과연 전도가 될까, 안 될까?'하고 지레 염려하면서 겁을 낼 필요는 조금도 없습니다. 
그 전도 대상자가 복음을 영접하고 안 하고는 우리가 얼마나 전도를 잘 하나 못 하나에 달려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전도를 했는데도 상대방이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위축되거나 좌절감을 느낄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전도를 받고도 믿지 않은 그 본인에게만 전적으로 있을 뿐이지 전도한 사람에게는 조금도 돌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도를 하기만 하면 그 모든 전도는 다 '완전히 책임을 완수한 전도'입니다. 
다시 말해서 '실패한 전도'란 있을 수 없으며 오로지 '전도를 하지 않는 것'만이 필연적인 실패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실로 마음 편하게, 그러면서도 아주 당당하게 누구에게나 어디서든지 전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도의 결과는 오직 하나님의 뜻과 능력에 완전히 맡기는 가운데 일단 '나가기만 하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을 택자를 반드시 만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믿게 만드시는 역사를 베풀어 주실 줄을 믿고 담대히 전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이처럼 베드로의 첫 설교로부터 시작하여 스데반의 마지막 설교, 그리고 사도 바울에 이르기까지 복음전파에는 늘 똑같은 '재료'와 똑같은 '방법'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라 해서 무슨 남다른 화술이나 능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면서 '택자를 믿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전적으로 의지했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똑같은 전도'는 실로 놀랍게도 셀 수 없는 수많은 심령으로 하여금 믿고 영생을 얻도록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께서 애초부터 정해 놓으시고 시행하시는 유일무이한 방침이며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여기에는 그 어떤 추가나 삭제가 있을 수 없으며 '새로운 비법'이라는 것으로 대체될 수도 없습니다. 
이웃전도와 세계선교를 위하여 초대교회 시절부터 조금도 변함없이 전수되어 온 이 복음의 내용과 전파의 방법을 바꾸는 것은 그야말로 원래의 '프랜차이즈'에서 제공하는 것이 아닌 '타사 제품'을 사용하려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설교를 잘한다고 소문난 목사라 해도 그 메시지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재료로 하지 않으면 그는 그저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해 주는' 연사일 뿐이지 복음 전도자는 아닙니다. 
아무리 큰 교회라 해도 그 안에 '영생 구원' 얻은 것을 확신하는 진짜 신자들이 모이지 않는다면 그 대형교회란 그저 쭉정이들로만 가득한 '잡동사니 교회'가 될 뿐입니다. 
그런 목사나 교회는 그저 기독교라는 '영적 프랜차이즈'의 간판만 내걸고 있을 뿐이지, 실제로는 이미 예수님께서 '그 촛대를 옮겨 버리신' 다시 말해서 '교회 고유의 영권, 즉 구령의 권능을 박탈해 버리신' 빈껍데기 교회인 것입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택자'는 항상 '똑같은 예수 십자가 복음'을 통하여 '똑같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시작하여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 신자들과 우리나라의 초기 선교사들에게까지 이어졌으며 이 경향교회와 경향선교회를 통해서도 지난 40년 동안 변함없이 계속되었던 이 복음전파의 비결을 끝까지 지키고 발휘함으로써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14만4천인'의 수를 조국전도와 세계선교를 통해 계속 채워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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