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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정상적인 그리스도인 (갈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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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적인 그리스도인 (갈 2:20)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과 사람이 인정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 종교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크게 인정을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마 23장에 보면 주님은 그들을 향해서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말씀하셨고 그들을 향해서 7대 화를 외치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특별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으나 주님이 보실 때는 그들이 가증한 종교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 7장에 보면 마지막 심판대에서 일어날 일들을 말씀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에게 자신들이 세상에서 얼마나 주님을 위하여 큰일을 했는지 얼마나 능력 있는 삶을 살았는지를 말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은 주님 앞에서 인정받는 신앙생활을 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기대와 정 반대되는 답변을 하셨습니다. 

마 7:23에 보니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주님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판단을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신앙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가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주님은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기왕에 신앙생활을 하는 것인데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정말 잘했다고 칭찬 듣는 신앙생활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설교의 내용은 지극히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다루려고 합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신앙생활에 관한 내용이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내용일 수도 있습니다.
  
갈 2:20은 복음의 진수를 깨달은 사도 바울이 율법주의의 도전을 받고 있는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을 향해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주는 내용입니다.
   
그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는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복음으로 시작했다가 율법으로 행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으로 사는 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또 복음으로 사는 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통해서 갈 2:20에 나타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세 가지로 요약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본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사실 이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을 만난 일도 없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는 십자가가 세워진 골고다 언덕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하는 이 고백은 대표성의 원리를 이해해야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되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우리 모두의 죄악을 함께 지신 것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인류의 대표가 되셔서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우리도 함께 십자가에 달린 것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면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을 때 우리 자신에 대해서 세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나는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십자가에 죽어야 할 만큼 죄인인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라고 말씀합니다.
   
그 당시 십자가는 죄인들을 사형시키는 형틀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죄인이 되셔서 우리 대신에 죽으신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은 나도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의 경중을 따지면서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흉악한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사람을 미워한 것도 살인죄라고 하셨고,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은 것도 간음죄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큰 죄든 작은 죄이든 다 사망에 이르는 죄인 것입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만큼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입니다.
   
둘째,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은 내가 죽었다는 말입니다.
   
나의 옛 자아는 십자가에서 죽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생각하고 내가 계획하고 내가 말하고 내가 일하는 모든 것은 사망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로부터 출발한 모든 것은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다 사망입니다.
   
롬 8장에 보면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나옵니다. 거기서 육신의 생각은 나로부터 출발한 모든 생각을 말하는 것이고, 영의 생각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 생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롬 8장에서는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고,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고 굴복할 수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습니다.
   
왜 나로부터 나온 것 즉 육신으로 행한 모든 것은 사망일까요? 그 이유는 죽은 자아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아로 행하면 사람이 볼 때는 정상적인 것 같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시체가 움직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로부터 나온 모든 것은 사망입니다.
   
셋째,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은 나 자신은 부인해야 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망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그것이 생명인줄 알고 행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망이라고 하신다면 사망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을 부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육신이 원하는 것, 내 육신이 하려고 하는 모든 것은 부인해야 합니다.
   
간혹 어떤 자동차를 타면 내비게이션이 2개나 달려 있습니다. 하나는 내비게이션이 나오기 시작하던 초창기 것이고 다른 하나는 최근에 새로 구입한 것입니다. 2개의 내비게이션을 틀어놓고 목적지를 찾아가다보면 옛것과 새것이 충돌을 일으킬 때가 있습니다. 옛것은 아주 오래전에 다니던 돌아가는 길을 지시하고 새것은 최근에 새로 뚫린 지름길을 지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옛 내비게이션은 부인해야 합니다. 그길로 가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기름 값도 더 드는 것입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어느 날은 하루에 24번이나 기도했다고 합니다. 다급하게 처리하고 올바로 판단해야 하는 일이 많은 날이었습니다. 그분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계속 하나님께 물었답니다. 결국 이분은 큰 실수 없이 존경 받는 대통령으로 퇴임할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퇴임 후 더 큰 사랑을 받고 더 많은 일을 하는 전 대통령이 됐습니다. 지미 카터가 주님에게 물었던 것은 자아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으로 살아야 가장 지혜로운 것입니다.
   
나의 옛 자아는 죽었습니다. 이제는 옛 자아가 원하는 것을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옛 자아는 부인해야 합니다. 

2.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 두 번째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 이것이 바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교회를 얼마나 다녔나, 교회에서 무슨 직분을 받았나, 교회에서 무슨 사역을 하느냐가 아닙니다. 그 사람 속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느냐 계시지 않느냐가 그가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를 결정해주는 것입니다.
   
자연인이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갖게 되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고 그 사람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거하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습니다. 진실된 마음으로 믿는다면 우리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와 계시는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 거하신다는 이 사실은 우리에게 크게 세 가지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첫째,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거한다는 말은 나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전에는 나의 주인이 마귀였습니다. 엡 2:2에 보면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마귀가 주인 되어 살아가면 인생이 괴롭습니다. 어느 도시의 국회의원 이야기입니다. 중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랍니다. 어머니께서 너무 심각하게 편찮으시니 형님들과 집안 어른들이 어머니의 묘지를 보러 다니셨답니다. 그분은 사랑하는 어머니께서 떠나가실 것을 생각하니 기가 막혀서 하나님께 어머니를 살려 달라고 끊임없이 간절히 기도했답니다. 

하루는 꿈속에서 꿈인 줄도 모르고 기도하다가 어머니를 보니 어머니 가슴에 마귀가 올라앉아서 어머니를 짓누르고 있더랍니다. 그 광경을 보고는 간절하게 “하나님! 저 마귀를 쫓아주세요.”하고 막 부르짖었더니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마귀를 쫓아주시더랍니다. 누군가가 자꾸 부르더랍니다. 깨어 보니 어머니께서 부르고 계시더랍니다. “얘야, 일어나 봐라. 이제 시원하다. 살 것만 같다.” 그때 어머니의 병이 나으셨답니다. 마귀는 사람을 망하게 하는 일을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알든 모르든 마귀의 종이 되면 결국 죽음 후에 마귀가 가는 곳인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마 25:41을 보면 지옥은 저주 받은 자들이 가는 곳이고 마귀와 마귀의 사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마귀를 주인 삼은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지 않지만 결국은 마귀가 가는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내 안에 거하시며 하나님께서 나의 주인이 되시는 것입니다. 

성경 고전 3:16에 보면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합니다. 나의 주인이 하나님으로 바뀌게 되면 나의 영원한 처소도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요 14:2,3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40일 만에 승천하셨고 지금은 천국에 계십니다. 천국에 계시는 주님께서 하시는 일 중에 하나가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거할 영원한 처소를 예비하시는 일입니다. 주님은 그 일을 마무리 하시면 저와 여러분을 영원한 처소로 데리고 가기 위해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주인이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거하신다는 말은 나의 가치가 변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나를 신적인 수준으로 대우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요 10:35에 보면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이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말씀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은 나를 신적 수준으로 대우를 해주시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믿게 되면 나의 가치가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가치는 인간 자체만으로도 천하보다 귀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 순간 인간 자체만으로 갖는 가치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고후 4:7에 보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질그릇은 인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질그릇은 질그릇 자체만 가지고는 큰 가치가 없습니다. 그 안에 담긴 보물 때문에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비슷합니다.
   
사실 하나님을 떠난 우리는 영적인 차원에서 죽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고유한 가치를 상실하게 됩니다. 돼지나 소는 죽어도 고기 값이라도 있지만 사람은 고기 값도 없습니다. 오히려 시체를 처리하는 비용만 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질그릇 같은 내 안에 보배이신 주님이 들어오신 것입니다. 나의 가치는 그 순간 주님의 가치만큼 상승하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서 사셔야 합니다. 
   
바울은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기 때문에 이제는 죽은 내가 살아서는 안 되고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께서 나를 통해서 사셔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삶을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그럼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서 사시는 믿음의 삶은 어떤 것일까요? 믿음의 삶은 주님의 뜻이 내 삶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통해서 사시는 것이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내가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 주님이 나를 통해서 사는 삶, 내가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삶은 같은 것입니다.
   
박봉수 목사님이 믿음으로 사는 것을 설명하면서 이런 예화를 들었습니다. 목사님께서 북한에 갔을 때 제한된 사람들이지만 몇몇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었답니다. 특히 목사님을 안내해 준 전도사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답니다.
   
그 때 목사님께서 전도사님에게 시험 삼아 물었습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여기 교회를 세우게 된 원인이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목사님은 우선 하나님의 은혜라 대답할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다 남측 교회들의 기도와 후원 때문이라고 말해 주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답변은 너무도 섬뜩했습니다. “모두가 다 어버이 수령님과 김정일 장군님의 덕입니다” 같은 질문을 교인들에게 했습니다. 이들은 한 술 더 떠서 눈물까지 글썽거리면서 목소리 높여 같은 말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교인들의 입에서, 더더욱 전도사라는 사람의 입에서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저 북한의 현실이 안타까웠답니다. 그러면서 정말 소름끼치도록 무서웠답니다. 얼마나 세뇌가 됐기에 이렇게 말하는가? 목사님은 한편으로 반성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정말 이렇게 철저하게 매사에 주님의 은혜를 인정하며 살고 있는가?’ 우리가 매사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정말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믿음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그럼 주님이 나를 통해서 사시는 믿음의 삶은 어떻게 살 수 있을까요?
   
첫째, 주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아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저는 [누구나 쉽게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 이라는 저의 책에서 11가지 방법을 제시했습니다만 여기서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는 성경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문서화 시킨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헌법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헌법은 국민들이 지켜야 할 법을 명문화 해놓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명문화 해놓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또 하나는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롬 8:14에 보면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저는 몇 년 전에 장모님 팔순 기념으로 형제들과 함께 중국 상해에 다녀왔습니다. 그 때 저는 상해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이 중국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3일 동안 상해의 중요한 곳들을 잘 구경했고 맛있는 음식도 먹었고 좋은 호텔에서 아주 잘 쉬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상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가이드 때문입니다. 저는 상해를 몰라도 상해를 잘 알고 있는 가이드의 인도를 따라 가다보니 상해 여행을 잘 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생활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신 분으로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정결한 심령을 갖고 기도하면서 성령님의 움직임에 집중하며 살아가면 성령님은 우리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믿음의 삶을 살려면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는데 우리는 성경과 성령님의 인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나를 통해서 주님이 사시는 믿음의 삶을 살려면 주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또 중요한 것은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나를 두고 주님과 마귀가 줄다리기를 합니다. 내가 누구의 뜻에 순종하느냐에 따라서 내 삶은 생명의 삶이 될 수도 있고 사망의 삶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 앞에 두 길을 놓고 선택하게 하십니다. 강제적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밀어 넣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선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 30:19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는 내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복과 생명이고, 마귀의 뜻에 순종하면 저주와 사망입니다.
   
여러분! 충성이 뭐라고 생각합니까? 충성은 주인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 처해도 오직 주인의 뜻에만 순종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강문호 목사님께서 파나이섬에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선교사님들을 대형 버스에 모시고 강목사님은 승용차로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 버스에서 나오는 매연이 무척 심해서 운전기사에게 버스를 추월, 앞장서도록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주인인 선교사님이 뒤따라오라고 하였다면서 결코 앞장서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강목사님이 그 선교사의 형이라고 말해도 듣지 않더랍니다. 자기는 주인이 말한 대로 뒤에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차가 멈추었을 때 동생선교사님에게 이런 사정을 말하자 동생은 웃으면서 이 기사는 자기 말 외에는 누구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침이면 화단에 물을 주라고 하였더니 비가 오는 날에도 물을 주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충성입니다.
   
우리는 무조건 주님의 뜻에만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이 하라고 하면 하는 것이고 주님이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나를 통해서 사실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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