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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니고데모의 변화 (요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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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데모의 변화 (요 2:1-15)


사람에게 만남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살면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어떤 부모, 배우자, 스승, 친구 등을 만나느냐는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그 어떤 만남보다도 예수님과의 만남은 중요합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세계관이 변하는 것입니다. 가치관과 인생관이 바뀌는 것입니다. 삶의 목적과 방향이 바뀌는 만남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과 만난 많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다 생명의 만남으로 이어진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멸망의 만남으로 만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대지도자들과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무의미한 만남으로 만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군중들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생명의 만남으로 만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의 역사를 이룬 사람들입니다.

사도 요한이 의도적으로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니고데모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4장에는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사마리아 여인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두 인물은 모든 면에 있어서 매우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들 중에서 모든 것을 갖춘 최고의 지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찾아 와 만난 시점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밤 시간이었습니다. 반면에 사마리아 여인은 가장 천한 신분의 사람입니다. 

이방인보다 더 천하게 여겨지는 사마리아인입니다. 더군다나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꾼 창녀였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을 만난 시간은 창녀가 사람들을 피할 수 있는 하루 중에 가장 뜨거운 대낮이었습니다. 신분적으로 가장 높은 사람과 가장 천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되어 구원에 이르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 안에서는 모두가 똑같은 구원의 대상이 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니고데모의 밤과 사마리아 여인의 낮이라는 시간 개념은 정반대의 시간입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자신들의 약함과 한계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약함과 한계성을 가지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올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과의 진정한 만남은 자신의 허물과 죄를 가리고 위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허물과 죄를 그대로 인정하고 나오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변화하는 내용을 살펴보며 은혜를 나눌 생각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니고데모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1절을 한 번 읽어봅시다.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니고데모의 첫 번째 특징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우리들은 바리새인이라고 하면 아주 위선적인 사람으로 생각합니다만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은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며 살려고 애를 쓰고 자신들이 그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아주 엄격하게 도덕적으로 살려고 애썼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았습니다. 유대인들 사회 속에서 가장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세력이었고, 이들 중에서 대 율법학자나 경건한 지도자가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니고데모가 바로 그 바리새인이었습니다. 10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선생’은 ‘랍비’입니다. 니고데모는 율법으로 유대인들을 가르치는 최고의 지도자이면서 최고의 지성인이었습니다. 

두 번째 특징은 ‘유대인의 지도자’이였습니다. 성경 아랫단을 보면 2)라는 숫자와 함께 ‘산헤드린 공회원’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원은 유대인 지도자들 가운데 70명으로 뽑힌 사람들입니다. 산헤드린 공회 의원은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모든 분야에서 법을 집행할 수 있고, 경찰권과 권력을 가진 단체입니다. 그들은 사형 외에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기관입니다. 1절은 니고데모가 유대인이면서도 산헤드린 공회 의원이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산헤드린 공회원은 대체적으로 사두개인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 바리새인으로서 니고데모가 뽑혔다는 것은 니고데모가 바리새인 중에서도 가장 영향력이 있는 바리새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의 다른 특징은 그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9, 40절을 보면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매우 비싼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고 세마포를 입혀 장례를 치렀습니다. 이런 모습을 볼 때 니고데모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말씀을 종합해서 정리해 보면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중에 바리새인으로서 지성과 권력과 재력을 모두 골고루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남부러울 것이 없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그에게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 왔다는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찾아온 시간은 모든 사람들이 다 보는 훤한 대낮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밤’이었습니다.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사회적인 위치로 인해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예수님을 찾아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니고데모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그는 지성과 권력과 재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내면에는 말 할 수 없는 고민과 불안함과 허무함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외면의 세계의 것을 소유함으로써 행복과 성공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having과 doing을 통해서 행복과 성공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행복과 성공이 외면의 세계의 것을 소유하고 행함으로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내면의 세계에 귀를 기울이는 삶을 산 사람입니다. 달리 말하면 니고데모는 being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에 니고데모와 관련된 내용이 세 번 나옵니다. 한 번은 오늘 본문입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에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두 번째는 7장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 향해 예수님을 옹호하는 말을 하다가 그들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습니다. 19장에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아리마대 사람인 요셉이 나서서 빌라도의 허락을 받아 예수님의 시신을 거둡니다. 그 때 니고데모가 향유와 장례에 필요한 물건을 제공하며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르는데 동참합니다. 그 당시의 상황에서 니고데모의 행동은 대단히 용기 있는 결단이었습니다. 그와 같이 행동한다는 것은 산헤드린 공회원의 자격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의 사회에서 매장 당하는 것을 각오한 행동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죽임을 당하는 것까지도 감당하겠다는 결의에 찬 행동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니고데모의 모습을 사도 요한을 3장, 7장, 19장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은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변화가 없다면 제대로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의 깊이와 성장을 교회 생활에 익숙해지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 생활에 익숙해지는 것, 교회 행사에 익숙해지는 것, 교회 행정에 익숙해지는 것이 신앙의 성장이 아닙니다. 신앙의 성장과 성숙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변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자신의 생각과 욕망을 벗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자신을 세우는 삶을 살았습니다. 3장에서 니고데모는 자신의 것을 예수님으로 인해 채우기 위해 찾아 왔다면 19장에서는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것은 비우고 내려놓은 모습으로 변화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의 변화는 신앙의 성숙함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이 변해야 합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당황해 하고 싫어합니다. 다른 사람이 변해야 하고, 주변 상황이 변해야 한다고 말하면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공감합니다. 그러나 ‘변해야 하는 것은 당신이다’라고 말하면 싫어합니다. 더 심하게는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자신들이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며 다른 사람들 속에 숨어 있고 싶어 합니다. 니고데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하는 말이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니고데모는 ‘내가’라는 말 대신에 ‘우리가’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니고데모는 집단 속에 자신을 숨기고 있습니다. 

자신이 일대 일로 예수님과 만나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그는 ‘우리’라는 집단 속에 자신을 감추고 집단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접근하는 니고데모에게 3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리라’고 말씀하시면서 ‘네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라는 집단에 숨어 있는 니고데모에게 ‘네게’라는 말씀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신앙의 모습에 숨어서 너의 신앙을 변호하거나 합리화 시키지 말고 ‘너, 개인이 내 앞에 서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대중 심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많은 사람이 있는 곳,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곳에 포함되어 있으면 일단은 안정감을 갖습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 속에 포함되지 못하면 불안 해 하고 초조해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잘못하면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무서워하고 의지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인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외톨이가 될까 봐 못이기는 척하면서 함께 어울립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삶을 ‘우리’로 살 수 있을지 몰라도 죽음 앞에서는 ‘우리’로 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우리’로 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다는 것입니다. ‘부부로’ ‘교인들로’ ‘친구들’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서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나와서 ‘우리가’라고 말할 때 예수님은 그에게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거듭남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나의 현 위치’를 묻고 계십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 우리의 신앙의 상태와 위치를 묻고 계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는 말입니다. 네가 어떤 영적인 상태로 예수님 앞에 서 있느냐는 물음입니다. 매우 엄중한 물음입니다. 한 주간을 살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지를 돌아보며 ‘우리’속에 묻혀 숨어 지내는 신앙이 아니라 ‘나’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세우는 훈련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허물 많은 영적인 모습을 예수님 앞에 숨김없이 내어 놓을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니고데모의 변화를 나의 변화로 만들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으로 만들어 가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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