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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약에 감춰진 예수님의 피 (요 5:39; 고후 3: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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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에 감춰진 예수님의 피 (요 5:39; 고후 3:13-18)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

성경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성경 이야기의 주연이실 뿐 아니라 성경의 원천이십니다. 성경을 일점일획도 폐할 수 없는 이유는 성경의 모든 것이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모든 철자 하나하나가 유기적으로 영감되어 하나의 목적을 완성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매장 매절이 다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1장부터 요한 계시록 22장까지, 1189장 31175절 하나도 예외없이 모두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초림의 예수님, 재림의 예수님, 그리고 예수 믿는 성도의 신앙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주위에 둘러선 유대인들을 향해 하신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이것이 예수님의 성경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신령한 몸, 신비한 능력을 갖고 계시면서 오히려 기록된 구약 성경 말씀을 중요하게 다루셨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하신 말씀을 보십시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눅 24:32).

예수님은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즉 성경을 예수님으로 풀어주셨습니다. 

신약 성경의 증언에 의하면 사도 바울과 요한도 모두 예수님으로 구약을 해석하였습니다. 모든 성경, 특히 구약은 예수님을 알리는 시청각 교재라는 말입니다. 구약의 모든 인명, 지명, 사건, 제도, 동식물, 사물 등은 예수님을 말하는 수단입니다. 구약의 율법, 역사, 시가, 예언 모두 예수님을 증거하고 예수님을 드러냅니다. 

본문 고린도후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구약을 읽을 때에 수건을 벗고 구약에 감춰진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고후 3:15-16).

오늘 말씀은 구약 속에 감춰져 있는 그리스도의 피에 관한 말씀입니다. 놀랍게도 구약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재림, 예수님 신앙을 다루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더욱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신 사건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가장 결정적이고 중대한 의미를 지닌 사건입니다. 

구약에 감춰진 예수님의 피!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눈과 마음을 덮고 있는 수건을 벗겨내고, 그리하여 주님의 영광에 한발 더 다가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아담의 갈빗대로 하와를 지으심

창 2:21-23=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것은 천지 창조 6일째의 이야기입니다.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시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여기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신 사건은 ‘피’라는 단어는 없지만 곧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의 사건을 예표합니다. 그리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으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가 탄생한 것과 비교됩니다.

성도 여러분! 아담의 갈빗대로 하와를 지으신 것부터 구약에는 예수님의 피의 사건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본문을 좀더 살펴봅시다.

첫째 아담의 경우 금요일에 갈빗대에서 역사가 이루어졌다면,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은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려 옆구리를 찔리셨고 물과 피를 쏟으셨습니다(요 19:34). 

첫째 아담에게 주어진 여자의 이름은 ‘생명’을 의미하는 ‘하와’이고, 마지막 아담에게 주어진 신부는 교회입니다. 

아담은 자신에게로 이끌려오는 여자를 향하여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고 했고, 예수님에게 있어 교회는 ‘그의 몸’(엡 1:23)이라 했습니다. 

아담이 머리이고 하와는 지체이듯, 성경은 예수님이 머리이고 교회는 그의 지체(고전 12:27, 엡 5:23)라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예수님만을 위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동시에 교회를 이루는 성도들은 그 자신이 그리스도의 신부의 지체임을 깨달아 자신을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보존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처럼 인간 창조의 사건에서부터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그림자를 볼 수 있습니다. 교회를 향한 주님의 관심과 사랑이 어떠함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2. 아담 부부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심 

창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에 대하여 7절에는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범죄하여 자신들이 옷 벗었음을 보고 부끄러워하는 아담 부부를 위해 하나님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본문에는 ‘피흘림’이란 표현은 나오지 않지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과정에서 짐승의 피를 흘렸음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여기 ‘지어’(아사)로 표현된 원문은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제작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피흘림으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고 아담 부부의 수치를 가리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범죄한 인류의 죄를 덮으시고 가리심을 예표합니다. 

성도 여러분! 당시 아담과 하와가 희생된 짐승의 가죽 옷을 입음으로 수치를 가렸던 것처럼, 십자가에서 희생의 보혈을 흘리신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는 모든 자들은 지은 죄가 무엇이든간에 모든 죄의 수치를 온전히 가리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 부부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의 언약사와 구속사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놀랍게도 구약은 온통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가득합니다.
  

3. 아벨의 제사

창 4:3-5=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세월이 지난 후에 아담의 아들 가인과 아벨이 장성하여 각기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만 받으셨습니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물을 삼아 드렸습니다. 

이것을 문법과 단어의 뜻을 고려하여 의역하면, ‘그의 가장 좋은 어린양들로부터 얻은 고기의 기름진 조각들’로 제물을 삼았는데, 이는 정성을 다하여서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렸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아벨의 태도는 하나님이 만물의 주인임을 인정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놓는 겸손의 표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벨의 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거기 ‘희생의 피’가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십자가 사건과 직결되며,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 신앙으로 예배함을 의미합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의 상징의 세계에서 보면, 아벨이 목축업을 한 것은 땅에 물질을 쌓지 않고 이땅에서 나그네 신앙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양의 첫새끼를 드린 것 역시 맏아들로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을 뜻합니다. 이후 아벨이 가인에게 죽임을 당한 것은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죽임 당하심을 의미합니다. 
 
보십시오. 문자주의로만 성경을 본다면 아벨은 아벨이고 양의 첫새끼는 그저 양의 첫새끼일 뿐입니다. 그러나 상징주의 성경해석으로 볼 때 예수님 구원의 비밀이 벗겨집니다. 아벨의 제물 속에는 예수님 십자가 피가 홍수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4. 노아 방주의 역청

창 6:14=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게 하시고 홍수 심판에서 보호받게 하신 것은 신약 시대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보호받음을 의미합니다. 방주(方舟)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테바’는 갓난 아기 모세를 나일 강에 띄어보낼 때 태웠던 갈대 상자(출 2:3, 5)를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이로 보아 방주는 자체적인 동력을 가진 선박이라기보다는 단지 물이 스며들지 않게 하여 물 위에서 잘 뜰 수 있게 만든 상자 형태의 배였습니다. 

거센 파도와 물결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방주의 모습에서 우리는 신약 교회의 중요한 특징을 발견하게 됩니다. 교회는 주님의 손에 철저히 붙들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까지 미혹하는 이 세상에서 멸망의 물결을 거부하고 주님께로 안전히 나아가려는 자는 구원의 방주인 교회의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기서 ‘역청’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 피의 예표입니다. 이를 단순히 문자주의로만 본다면 바닷물이 스며들어오는 것을 막는 방수재를 말한 것 외에 무슨 의미를 지닌 것이 되겠습니까?

여기서 ‘역청(코페르)’ 이란 명사는 ‘칠하라(카파르)’ 란 동사에서 유래한 말이므로 두 단어는 동일한 어근의 말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칠할 것으로 칠하라’ 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카파르’는 ‘속죄하다’로도 번역되므로 본문은 ‘속전으로 속죄하라’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역청’을 예수님의 보혈로 해석함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죄의 물결이 넘실대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의 속죄 제물되시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칠해져서 죄의 세력이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영적 방주인 교회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영적 생명을 보호받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마치 잉태된 아기가 어머니의 양수 속에 흠뻑 빠져 있듯이 노아의 가족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넘쳐 흐르는 은혜의 강수 속에 잠겨 있어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노아 방주와 안팎에 칠한 역청은 상징주의 해석 세계를 선명하게 반영해주는 너무나도 좋은 실례입니다. 여러분 모두 수건을 벗고 구약 속에 감춰진 예수님의 모습, 특히 주님의 피를 보고 기뻐하며 취하도록 마시는 성도 되시기를 바랍니다. 


5. 유월절 어린양의 피

출 12:5-7=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이 달 열나흗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유월절 어린 양의 피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상징합니다. 이에 대하여는 거의 모든 주석가들이 동의합니다. 이를 지독한 문자주의들까지 인정하는 것은 요한복음 1:29에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 했고, 고린도전서에서 그리스도께서 희생하신 사건을 ‘유월절 양’과 직접 연결시켰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구약을 읽을 때 우리의 수건이 벗겨져야 합니다. 세례요한과 사도들이 어린 양의 피 사건을 예수님과 연결시키는 것을 우리도 배워야 합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흘림의 사건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건들 역시도 선지자들,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피와 연결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예배는 언제나 예수님의 보혈이 넘치는 예배가 되어야 영과 진리의 예배가 됩니다. 


6. 기생 라합의 붉은 줄 

수 2:18-21=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라합이 이르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을 끝내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와 처음 맞부딪친 곳이 여리고성입니다. 여리고성 함락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여호수아서 2장에 보면 라합은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들을 도와주었고, 정탐들은 라합에게 ‘붉은 줄’을 맬 것을 강조하고, 라합은 약속대로 붉은 줄을 창문에 매어 성읍이 멸망하는 가운데서 구원을 받습니다. 

여기의 ‘붉은 줄’은 15절에 나오는 ‘줄’ 과는 다른 줄입니다. 라합이 정탐꾼들을 성벽 밑으로 내려보내는 데 사용한 줄(헤벨)은 꼬아 만든 ‘밧줄(cord)’의 일종이었고, 라합이 이스라엘 군사들에게 식별되기 위해 창문에 내어걸어야 했던 줄(후트)은 몇 개의 실을 엮은 ‘가는 줄(thread)'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한글 성경은 ‘붉은 줄(후트 핫솨니)’이 수식하는 ‘티크와트’는 번역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단어는 본문을 제외하고는 주로 ‘소망’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룻 1:12, 욥 4:6, 시 9:18). 

이는 정탐꾼들이 라합과 맺은 언약대로 그녀와 그녀의 가족을 살려주기 위해 창문에 달아놓게 한 붉은 줄의 의미가 바로 ‘소망’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창문에 묶은 ‘붉은 줄’은 라합이 이스라엘의 정복 전쟁으로부터 구원을 얻게 되는 증표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을 운명에서 구원의 소망을 보여주는 창문에 매단 붉은 줄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상징합니다.

이렇게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이를 역사적으로만 보면 기생 라합 사건은 창기 직업을 가진 비루한 여인이 자기 목숨을 얻고자 자기 동족을 배신한 사건으로밖에 해석되지 않습니다. 성경이 이것을 말하자고 이렇게 ‘붉은 줄’을 강조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 여호수아는 재림 주로 오시는 예수님을 예표한다면 정탐꾼들은 주의 종을 뜻합니다. 여리고는 멸망 받을 세상이며 그 가운데서 구원받는 길은 정탐꾼을 영접하고 붉은 줄을 매는 것 뿐입니다. 이는 주의 종을 영접하고 십자가 대속을 믿는 것을 예표합니다.  

라합이 붉은 줄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을 사는 성도들에게 구원 언약의 성취는 본문의 붉은 줄이 의미하는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성도의 구원의 ‘소망’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담도, 아벨도, 노아도, 아브라함도, 야곱도 그리고 기생 라합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과거, 현재, 미래에까지 그 능력이 확대됩니다.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수건을 벗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 모든 구절에서 예수님을 읽어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한국교회 강단에서 성경에 감춰져 있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더욱 드러나야 합니다. 일반 세상에서도 쉽게 들어볼 수 있는 윤리 도덕적 교훈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명확하지 않을 때 유교주의나 무속신앙이 혼합되기 쉽고, 번영의 신학과 세속주의가 번성하게 됩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1등주의 성공주의 일색의 가짜복음, 위조복음으로 기형화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복음의 사회변혁 기능은 마비되고 언론과 사회의 질타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케리그마를 회복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구약 곳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실감하셨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구약에서 신약의 그리스도를 향하는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완결된 안목으로 성경을 되돌아보는 ‘그리스도 완결적 해석’으로 더욱 진전해 가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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