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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가 슬퍼하며 떠난 진짜 이유? (막 10: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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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슬퍼하며 떠난 진짜 이유? (막 10:17-22)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라는 시를 아십니까?  요즘 세대는 시가 없는 세대라 안타깝지만,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선생님께서 무조건 외우라고 해서 외우기도 했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사랑했던 시였습니다.  제가 한 번 낭송해 드리겠습니다.
"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그런데 이 시를 경상도 버전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내 꼬라지가 비기 실타고 갈라카모
내사마 더러버서 암말 안코 보내 주꾸마.
영변에 약산 참꽃 항거석 따다 니 가는 길빠다게 뿌리 주꾸마.
니 갈라카는 데마다 나뚠 그 꼬슬, 사부자기 삐대발꼬 가뿌래이.
내 꼬라지가 비기시러 갈라 카몬
내사마 때리직이삔다 케도 안 울 끼다."

이번에는 충청도 버전입니다.
"이제는 지가 역겨운감유,
가신다면유 어서 가세유.
임자한테 드릴건 없구유
앞산의 벌건 진달래뭉테기로 따다가
가시는 길에 깔아 드리지유
가시는 걸음 옮길 때마다 저는 잊으세유
미워하지는 마시구유
가슴 아프다가 말것지유 
어쩌것시유 그렇게도 지가 보기가 사납던가유
섭섭혀도 어쩌것이유
지는 괜찮어유 울지 않겄시유
참말로 잘가유 지가슴 무너지겄지만
어떡허것시유 잘 먹고 잘 살아바유."

전라도 버전입니다
"나 싫다고야 다들 가부더랑께 워메∼ 나가 속상혀.
주딩 딱 다물고 있을랑께
거시기 약산에 참꽃 허벌라게 따다가
마리시롱가는 질가상에 뿌려줄라니께
가불라고 흘때마다 꼼치는 그 꽃을 살살 발고 가시랑께요
나가 골빼기 시러서간다 혼담서
주딩이 꽉 물고 밥못 쳐묵을때까지 안 울랑께."
1. 신경 쓰덜말고 가부더랑께
겁나게 괜찬응께, 워메∼ 참말로 괜찬아부러
2. 뭣땀시 고로코름 허야 써것쏘이?
나가 시방 거시기가 허벌나게 거시기 허요이∼"

세계 제 2차대전이 끝난 직후에 필리핀의 산악지대에 숨어있는 일본 군인들에게 헬리콥터가 저공 비행을 하면서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알리는 방송을 했습니다.  전쟁은 끝났습니다.  일본군들은 항복을 하고 나오시고 당신들은 이제 당신들의 조국인 일본으로 돌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산악지대에 숨어있던 많은 일본군인들은 이것을 연합군의 전술 전략으로 오해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은신했습니다.  어떤 일본 군인은 종전 후 무려 30년 동안 동굴 속에 들어가서 생명을 유지하다가 1970년대 말에 원시인과 같은 모습으로 동굴 속에서 발견되기도 했었습니다.  이것은 오해 때문에 30년간의 세월을 잃어버린 비극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의 말씀에도 예수님께로 왔다가 떠나갔던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비극의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가 떠나갔던 이유는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1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가시는데 한 사람이 달려왔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  그런데 같은 기사를 다루고 있는 마태복음 19장 20절에 보면 그를 한 청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8절에도 같은 기사가 나오는데 거기에는 그가 관원이었다.  그 사회의 엘리트 계층이었던 관리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으로 보아서 그는 또한 부자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보십시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젊은이, 그는 청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천국이나 영생의 문제를 인생을 다 산 노인들이 기댈 수 있는 어떤 망상의 나라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회적인 성공을 거둔 관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천국이나 영생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실패한 어떤 사람들이 취하는 일종의 정신적 도피처와 같은 곳으로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부자였습니다만 천국을 가난한 사람들의 심리적 보상의 인간의 내면 속에 존재하는 허구의 나라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진지했고 경건한 구도자의 자세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인생의 숙제를 풀 수 있는 올바른 대상 앞에 찾아왔습니다.  예수님 앞에 말입니다.  그는 올바른 대상을 찾아왔을 뿐만 아니라 올바른 질문을 던졌습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영생에 대한 문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은 비극적인 사건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본문 22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말씀을 그냥 이 사람이 부자였기 때문에, 혹은 재물이 많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예수님을 떠나갔다. 이렇게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피상적인 관찰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등지고 슬퍼하며 떠나간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를 예수님으로부터 돌이켜 떠나가게 만든 오해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는 예수가 누구이신가에 대한 오해가 있었습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1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본문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청년의 이 질문 속에서 그가 예수님을 어떤 호칭으로 불렀습니까?  "선한 선생님이여!"  청년의 이 호칭에 대해서 예수님 자신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그 다음의 구절인 18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말씀을 피상적으로 관찰해서 얼른 결론을 짓기를 예수님은 자신이 선하다는 것을 부인하셨다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본문의 말씀은 절대로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 가운데는 선한 이가 없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선함이 구원의 조건일수가 없다, 자신의 선함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10절 말씀을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했고, 이어서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 앞에 인정될 수 있는 선함을 가지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의 선은 상대적인 선에 불과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안목에서 관찰될 때 그 선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올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선한 자는 하나님 밖에 없다."라고 말씀하시는 의도가 어디 있을까?  저는 간접적으로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더 중요한 진리는 이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내가 그 하나님이다."  이 말입니다.  "나는 선한 선생의 차원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이다" 라는 선언이라는 것을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위대한 모델로서의 인간!  오늘 이 시대에는 예수님을 그렇게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존경할 만한 스승, 위대한 인류의 교사, 위대한 휴머니테리안으로 예수님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관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스승, 그 이상의 분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이시고 무엇보다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구주이십니다.  이것이 정답입니다.  위대한 인간은 위대한 모본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구세주일 수는 없습니다.

나폴레옹은 세계를 정복한 정복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나폴레옹이 기독교인들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아주 뛰어난 많은 명언을 남긴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 중에 하나는 이런 이야기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이 방에 들어온다면 우리는 모두 일어나 그 분에게 경의를, 존경심을 표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가 이 방 안에 들어온다면 우리 모두는 엎드려 그 분을 경배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존경받을만한 스승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그는 예배를 받으시고 또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했다는 증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청년 관원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선한 선생의 수준이었습니다.  선한 선생으로서의 예수는 자기 손익 계산서가 나에게 맞지 않는다는 결론이 생길 때에는 언제라도 쉽게 떠날 수 있는 그런 대상이었습니다.  '선한 선생님 예수' ― 우리는 선생님에게서 배울 것을 다 배우고 떠나가도 전혀 무방한 것처럼 그런 존재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가 슬픈 기색을 띠고 예수를 등지고 떠나간 진짜 이유, 그것은 그가 예수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찾아왔던 예수가 누구인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가 선한 선생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가 하나님이시고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구주이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묻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를 누구라고 이해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를 누구라고 고백하십니까?  물론 입술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의 모든 것을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드리고 있습니까?

오늘도 사람들이 예수를 등지고 떠나가고 있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두 번째로 영생을 행위로 얻을 수가 있다고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청년이 던진 질문 그 자체는 아주 바람직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영생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을 안으로 들여다보면, 이 질문은 매우 그릇된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전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구원에 대한, 기독교에 대한 보편적 편견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본문 17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다시 말하면 이 청년의 질문에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행해야만, 커다란 업적을 세워야만 주님이 아마도 나에게 영생을 주실 것이다.  그는 그렇게 영생을 얻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생의 구원을 얻는 길에 있어서 가지고 있는 매우 보편적인 선입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청년과의 지속적인 대화 가운데서 구원의 근거로써 행함을 가정하고 있는 이 잘못된 가정이나 근거를 파괴시키기 위한 질문을 18절에서 계속 하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
이것은 네가 선을 들고 하나님 앞에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선으로 영생을 얻을 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 정도로 네가 선하다고 생각하느냐?  이 청년의 마음을 찌르는 반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계속되는 예수님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19절에서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이대로 하고 있느냐?

그러나 깜짝 놀랍게도 20절에 보면 청년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저는 이 청년이 상당히 도덕적으로 자신이 있었던 사람인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도덕적인 자존감을 가지고 있었던, 꽤 괜찮은 삶을 살아온 사람이 아니면 이 정도의 대답은 힘들지 않겠습니까?
"선생님, 어려서부터 저는 이런 계명을 다 지키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대답의 밑바탕에는 아직도 그가 그의 정체를, 자기의 진실한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21절 말씀에 보면,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것은 차라리 불쌍히 여기는 아가페의 사랑이었습니다.  이런 사랑으로 이렇게 묻습니다.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그렇게 할 수가 있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말씀을 또 비약시켜서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재산을 다 팔아야 한다는 말로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잘 알아들으셔야 합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는 아직도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항변하고 있는 이 청년을 향하여 너의 죄인됨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만나기 위해서, 그리고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인됨을 깨달아 알아야 하고….  그래서 예수님은 아픈 곳을 찔렀던 것입니다.  이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당당한 도덕적 자존감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숨기고 있었던 자기 내면의 갈등, 그를 지배하고 있었던 가장 강력한 삶의 동기 중의 하나는 바로 재물에 대한 탐심이었습니다.  이 한 가지의 죄를 통해서 그의 죄인됨을 보여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부족한 것, 이것을 통해서 그의 전면적인 죄인된 모습을 주님께서는 보여주시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기 위해서는 많은 계명을 파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 하나의 죄명의 파기만으로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충분히 죄인이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피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죄는 비교적 가볍고 남들의 죄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령, 교도소에 살인한 자와 간음한 자, 두 사람이 붙잡혀 왔다고 가정을 해 보십시다.  살인한 자는 간음한 자에게 이렇게 말할는지 모릅니다.  "야, 나는 흥분하고 좀 열이 올라서 사람을 죽였지만 그래도 여자는 건드리지 않는다.  나는 그런 치사한 짓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간음한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신성하고 거룩한 사람의 생명을 해칠 수가 있느냐?  나는 로맨스에 빠진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자기를 합리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남의 죄는 지적하면서 자기 죄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판단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야고보서 2장 10절에서 이런 말씀을 보신 일이 있습니까?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단 하나의 계명의 파계, 단 하나의 거짓말로도 충분히 하나님 앞에 우리는 죄인이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아마도 여러분 가운데 틀림없이 이런 반문을 제기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도대체 누가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청년과 예수님의 대화를 옆에서 가만히 엿듣고 있었던 제자들이 드디어 이 질문을 끄집어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조금 지나서 26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그렇다면 누가?  누가 인간 가운데 구원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고 있습니까?

27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사람을 결코 구원할 수가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람의 그 어떤 최선도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이웃을 돕는 어떤 자선 행위도 그것으로 이웃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동정할 수는 있습니다.  일시적인 도움을 베풀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다 죄인이고, 사람은 다 그릇된 길로 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만이 나를 구원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실 때 인간의 행함에 근거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은 선물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사람의 행동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니 이는 아무든지,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선을 자랑할 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선물로 주십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영생이나 구원은 인간의 행동의 성취를 통해서 결과적으로 얻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아 마땅한 나에게 하나님은 아무런 조건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6장 23절에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두 단어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그 다음에 접속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삯은 사망이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은사,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선물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선물은 어떻게 받습니까?  구원과 영생이 선물이라면 선물은 어떻게 받습니까?  선물은 그냥 받습니다.  그냥 받으면 됩니다.  선물을 염치없이 제일 잘 받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에게 선물을 줘 보십시오.  그냥 잘 받습니다.  어른들은 선물을 주면 이것이 선물인가, 뇌물인가?  무슨 의도가 뒤에 있는가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선물을 있는 그대로 잘 받습니다.

저는 이 청년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생의 선물을 받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를 이렇게 생각합니다.  본문의 사건 바로 앞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가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어린아이들은 잘 받아들입니다.  청년에게는 어린아이와 같은 인식이 없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의 인식이 없었습니다.  아직까지도 그는 자기 안에 있는 행함의 부조리를 알면서도 여전히 자기 행위에 매달립니다.  내가 그래도 무엇을 해야지.  그리고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을 때, 자기의 전 재산을 내어 줄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별 수 없이 예수님에게서 돌아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 오해가 여러분에게는 없습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등지고 떠나가는 또 하나의 진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지막으로 그가 인생의 우선 순위를 오해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선 순위란 무엇입니까?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우리 인생에서 무엇이 좀 더 중요한가? 그 순서일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우선 순위를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러면 불행이란 무엇입니까?  불행은 우선 순위의 혼란에서부터 인생의 불행이 생긴다고 믿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축구를 좋아하는데 미국 사람들은 미식 축구를 좋아합니다.  미국에는 미식 축구팀이 많은데 그 중에서 전통적인 영예로운 별명을 갖고 있는 팀이 '달라스 카우보이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팀이 여러 번 우승을 했고, 많은 팬들을 가지고 있고 사랑을 받는 이유 중에 하나가 아주 유명한 전설적인 코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코치의 이름이 '탐 랜드리'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신화적 코치요 감독이었고, 여러 번 달라스 카우보이를 우승시켰고, 아주 인기 있는 팀으로 만들었습니다.  명예의 전당 속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훌륭한 코치요, 감독이었을 뿐만 아니라 아주 인기 있는 신사였습니다.  아주 멋진 신사였고, 성경 공부를 잘 가르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선수들과 늘 성경 공부를 하고 Home Bible Study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행복한 가정을 가진 사람으로서 또한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기자가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의 행복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탐 랜드리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예수 믿은 그 날부터, 내가 예수를 믿기 시작한 그날부터 우선 순위를 붙잡고 살아 왔습니다."  그러니까 또 묻기를 당신의 우선 순위는 무엇입니까?  그는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first God), 두 번째는 나의 가족(second family), 그리고 세 번째는 축구, 저는 이 우선 순위가 한 번도 흔들린 일이 없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두 번째는 가족, 그리고 세 번째는 축구였습니다."  이 우선 순위를 따라 살아가는 삶,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불행은 우선 순위의 혼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저는 본문에 나타난 이 청년이 우선 순위를 혼돈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은 영생을 얻는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을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 왔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관심도 있었고, 영생을 얻는 문제에 관해서도 진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관심보다도 이 청년을 지배하고 있었던 더 중요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재물에 대한 탐심이었습니다.  예수가 중요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영생을 얻는 것이 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 문제가 인생에서 중요하다.  그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을 지배하고 있었던 가장 중요한 관심은 재물에 대한 탐심이었습니다.  자기 재산을 늘리고 재물을 축적하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우선 순위였습니다.  결국 우선 순위에서 예수는 밀려났고, 우선 순위에 있어서 영생의 문제는 밀려났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마침내 예수님을 등지고 떠나갈 수 밖에 없었던 슬픔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들 주변을 보면, 교회 안에서 신앙 생활을 하고 교회에 출입하면서도 그런 우선 순위의 혼란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우선 순위는 무엇입니까?

보십시오.  이 사람이 예수님도, 영생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보다는 훨씬 더 중요한 그 무엇, 그 어떤 것…, 그것은 재물이었습니다.  그것이 우상이었습니다.  우상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우상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끼어 드는 것,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일체의 것이 우상일 수가 있습니다.  그는 이 우상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생애에서 무엇이 중요합니까?  예수보다 더 중요한 분이 있습니까?  예수보다?  여러분, 예수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믿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나의 구주요, 나의 주님이십니다.  나를 구원하신 분, 그리고 나의 전 일생을 다스리고 나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는 나의 삶의 놀라우신 분이라고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보다 중요한 분이 없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인생에서 성공했다고 하십시다.  그러나 구원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끝없이 영원을 그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불꽃이 타오르는 지옥에서 보내야만 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인생은 나그네길입니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아도 그 연수는 기껏해야 40년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육체의 장막이 무너진 이후의 삶은 40년이 아니라 영원입니다.  영원히 잘 살 수 있고, 영원히 못 살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의 문제입니다.

구원을 얻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 앞에 왔을 때 주님께서 나를 용서하시고, 십자가에서 나 대신 피 흘리신 그 거룩한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온 나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던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  그래서 나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이것 보다 더 위대한 축복이 어디에 있을까요?  이 시간 예수 믿고 구원 얻은 행복을 확인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예수님을 모르고, 아직도 구원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우선 순위를 바꾸십시오.  십자가 앞에 서십시오.  하나님이 오늘 나의 주인됨을 보이시고 깨우쳐 주셨다면 할 수 없는 이 죄인, 나의 최선도 나의 노력도 나를 구원할 수 없었다면 이제 십자가 앞에 겸손히 서십시오.  그리고 거기서 주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깨달아 아십시오.  나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시고 피 흘린 십자가 앞에 나아와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주인 되심을 고백하며 믿음으로 주님을 올려다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행복을 받아 누리시고 올바른 우선 순위 안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인생을 살아가는 이 놀라운 행복 속에 들어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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