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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수고하는 인생아 (마 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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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는 인생아 (마 11:28-30)


I. 수고하는 인생

덕이동 하이파크 시티에 살던 맹생원이 저승사자의 손에 이끌려 재판관 앞에 섰습니다. “그래 예수를 믿었는가?” “아닙니다.” 

“그 좋은 한소망교회를 코 앞에 두고 뭘했나?” 유구무언입니다.
“자네는 지옥에 가야하는데 마지막 소원이 없는가? 한번 지옥에 떨어지게 되면 돌아올래야 돌아올 수도 없고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고 끝없는 고통과 괴로움 뿐이야.”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그래, 뭔가?” “평생 소주나 마시고 기생충처럼 살던 놈이 지옥가는 거야 당연하지만, 지금 가기는 너무나도 억울합니다. 어릴 때는 농촌에서 고생하다 논마지기 팔아 서울에 올라 왔습죠. 

20년전 종로바닥에서 조그마한 사업을 하다 실패하여, 일산 땅에 자리잡고 지금까지 고생고생하다가 지병으로 이렇게 재판관님 앞에 섰습니다. 저를 다시 한번만 더 저 세상에 보내 주시되 이번엔 부도 없는 조그마한 중소기업 하나 주시고 양귀비 같은 색시 하나 짜매주시고 말썽 안 피우는 자식놈 두 셋에 힘 좋고 노사분규 일으키지 않는 종업원 몇 놈을 주십시요. 이처럼 걱정 근심없이 다만 몇 년이라도 살다가 그때는 예수 잘 믿고 이곳에 오겠습니다.” 

그러자 재판관이 배꼽을 잡고 한참이나 웃다가 하시는 말씀 
“야, 이놈아, 인생사에 그런 자리가 있으면 내가 내려가지 
 너를 내려 보내겠느냐?”

인생은 고해 – 수고의 바다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아오면서 수고의 짐이 없던 때가 있었나요? 나에게는 인생의 어떤 수고도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나요? 아무도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대로 고달프고, 돈이 많은 사람은 많은대로 인생의 무거운 짐을 걸머지고 살아가며, 지식인은 지식인대로 괴롭고, 권력자는 그들 나름대로 힘겨운 고통의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공부하는 학생들도 공부하고 시험을 치러야 하는 짐이 있고, 직장인은 직장인대로, 노인은 노인대로 연약함과 죽음의 짐이 있습니다.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간에게 괴로움은 떠나가지 않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고통 속에서 태어나서 고통 속에서 살다가 고통 속에서 죽어갑니다. 

그러기에 세계 정복을 꿈꾸던 나폴레옹도 세인트 헤레나 섬에 유배되었을 때, “나는 지금까지 단 일주일도 행복한 날이 없었다. 
 저기 바닷가에 넘실거리는 물결은 세상 사람들의 눈물이요, 
 저기 부는 바람 소리는 세상 사람들의 한숨소리로구나”
 라고 한탄했던 것입니다.

애기가 보채고 울기 시작합니다. 열이 납니다. 숨을 할딱거리고 몰아쉽니다. 애기를 품에 안은 엄마의 마음이 오죽하겠습니까?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구릅니다. 내가 대신 아파 줄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아파 줄 수만 있다면, 
그러나 그게 됩니까? 안되지요. 
그렇습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인생의 짐을 대신 져줄 수가 없습니다. 
인류 중에 그 누구도 우리의 무거운 짐을 대신 져준 사람은 없습니다. 

이순신도, 세종대왕도, 알렉산더도, 마호멧도, 석가도, 공자도, 그 어떤 성현도 괴로움을 안고 괴로워하다가 죽었습니다. 자기가 죽어서 무덤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살릴 수가 있습니까? 흙 위에 누워 흙을 덮어쓰고 누운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 – 오늘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수고한다’는 말은 원문에 능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사서 고생하는 능동적인 고생을 의미합니다. ‘무거운 짐’은 원문에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즉 피동적인 고생입니다. 원치 않는 환경 속에서 겪는 그런 고생입니다. 
원하는 수고든 원치않는 수고든, 수고의 짐을 지고 사는게 인생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스피드 시대입니다. 
남보다 좀더 빨리 움직여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신없이 움직이는 경쟁대열에서 사람들은 한결같이 피곤에 지쳐 있습니다. 
빨리빨리 문화속에서 인생은 지쳐만 갑니다.

라면이 얼마나 많은지 숫자마다 라면이 있습니다. 
일 – 일품 짜장면,  이 - 이백냥 라면,  삼 - 삼양 라면, 
사 – 사리곰탕면,  오 – 오징어 짬뽕,  육 – 육개장면, 
칠 – 칠보면,  팔 - 팔도 비빔면,  구 – 구운면, 
열 – 열무 비빔면 - 소위 인스턴트 문화입니다. 
인스턴트, 스피드 문화는 과정이 주는 행복을 빼앗아 갑니다.

뿐만 아니라 현대사회는 스트레스 시대라는 겁니다. 
이번에 제가 한번 아파보니 원인이 스트레스요 치료도 그 스트레스를 푸는 길밖에 없다는 겁니다. 
스트레스는 두려움, 불안과 공포심, 분노와 짜증을 증대시킵니다. 그 외 모든 질병 - 고혈압, 심장마비, 갑상선질병, 위궤양, 불면증, 당뇨, 간장질환 등의 직접적인 원인이 됩니다.

II. 지금 당신은 쉬어야 할 때

“지금은 쉬어야 할 때입니다” 라는 글이 있습니다. 

방글방글 웃고 있는 아기를 보고도 마음이 밝아지지 않는다면 
- 지금은 쉴 때입니다. 
식구들 얼굴을 마주 보고도 살짝 웃어주지 못한다면 
- 지금은 쉴 때입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창문을 비추는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 지금은 쉴 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하루가 궁금하지 않고 전화도 기다려지지 않는다면 
- 지금은 쉴 때입니다. 

오랜만에 걸려온 친구의 전화를 받고 “바쁘다”는 말만하고 끊었다면 
- 지금은 쉴 때입니다.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서도 소리만 들릴 뿐 마음에 감동이 흐르지 않는다면 
- 지금은 쉴 때입니다. 
슬픈 영화를 봐도 눈물이 나오지 않고 슬픈 연속극을 보면서 
- 극본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오래된 사진첩을 넘기다가 반가운 얼굴을 발견하고도 궁금해지지 않는다면 
- 지금은 쉴 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기 위해 
- 한 번 더 뒤돌아보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아침과 저녁이 같고 맑은 날과 비 오는 날도 같고 
- 산이나 바다에서 똑같은 느낌을 받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당신은 그동안 참 많은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일 한 가지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쉬는 일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아, 지금은 내가 쉬어야 할 때이구나’라고 느끼지 않는 현대인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저는 그 생각을 가장 절실히 하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본문 마태복음 11장 28절-30절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너무나 잘 알고 있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장 28절- 일일이 이 팔로(11:28) 안아 주리라.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 

수고라는 단어가 성경에 처음 나타나는 곳이 어디입니까? 
창세기 3장 15절 이후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나는 상황,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상황에서 처음으로 등장되는 단어가 수고라는 단어입니다. 여자에게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다”(창3:16) 
남자에게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3:17)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어떻게 쉴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내가 해야 할 모든 일들조차 예수님께 맡겨 놓고 룰루랄라 먹고 놀자는 얘기인가요? 인생의 모든 짐이 교회에 와서 부려 놓기만 하면 요술적으로 마술적으로 감쪽같이 사라진다는 뜻일까요? 교회 와서 찬송 열심히 하고 소리질러 기도하고 나면 모든 짐이 다 벗겨져 세상에 나가니까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 있던가요? 카타르시스는 되겠지만 본문이 말하는 뜻이 그런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족 중에 내가 돕고 섬겨야 할 일까지 하나님께 맡겨놓고 떼를 쓰면 
하나님이 다 맡아 주신다는 뜻인가요? 
때로 크리스챤들이 이 사회에서 감당해야 할 역사적 책임까지 다 팽개치고 나는 교회와서 기도만 하면 된다는 뜻일까요? 이 본문을 잘못 받아들이면 기형적 신앙인이 되고 무책임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너의 수고와 무거운 짐을 다 벗어 던지고 살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무책임한 크리스챤이 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세상을 섬기는 멋진 제자가 되라는 겁니다.

「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
예수 안에 살면 인생이 재미있고 가볍고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일을 해도 보람이 있습니다.
똑같은 사람과 살아도 인생이 설레일 수 있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하나님이 천지 우주만물을 창조하고 난 다음에 새들이 항의 방문을 했습니다. 하나님, 다른 동물들은 전부다 튼튼한 다리 넷을 다 주고 우리는 왜 소위 새다리 둘을 주십니까? 게다가 어깨에 무거운 짐 둘을 짊어지어 놓았습니까? 이 거추장스런 짐을 짊어지고 다리는 그야말로 새다리 둘을 주면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이렇게 만들어 놓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짐이라고 생각했던 거추장스러운 것 한번 펴봐라. 그리고 열심히 저어봐라. 펴서 저어 봤더니 훠어이 하늘을 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의 삶이 짐이 될 수도 있고 날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걸핏하면 인생사 모든 것, 조금만 세상 일이 힘들면 교회사역조차 내려놓고 살아보자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이런 사람들을 속칭 새다리 인생이라고 합니다. 펴고 저어보면 내 인생을 하늘로 훠어이 훠어이 날아오르게 해 줍니다. 

수고하는 인생들아,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어렵고 힘든 짐일수록 좋은 멍에가 필요한 것입니다. 멍에가 없으면 아무리 힘센 황소라도 빈수레 하나도 끌지 못합니다. 그러나 좋은 멍에를 짊어지면 수레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도 쉽게 가볍게 인생 길을 달려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전해오는 얘기에 의하면 예수님은 멍에를 잘 만드는 목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태초에 천지 우주만물을 잘 다듬어 만드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목수의 집에 태어나셨습니다. 
아버지 요셉 목수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난 다음에 목공소를 맡아서 특별히 멍에를 잘 만들었다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지금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가 살 집을 짓고 있는 목수로 하나님 나라에 계시지 않을까요? 

부부간에도 멍에가 서로 잘 맞아야 행복합니다. 
목사와 교인간에도 멍에가 서로 잘 맞아야 합니다. 
친구간에도 멍에가 잘 맞아야 평안할 수 있습니다. 
직장생활도, 사업도 멍에가 잘 맞아야 행복합니다. 

III. 예수만이 인생의 짐을 벗겨줄 수 있다

오늘 교회에 처음 오신 여러분 참 잘 오셨습니다. 왜요? 교회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곳입니다. 교회가 뭐가 그리 좋으냐구요? 사람이 한번 예수를 믿기 시작하여 믿음의 맛을 알면 평생을 믿게 됩니다. 자신만 예수 믿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가족도 자식도 평생을 예수 믿고 살게 만듭니다.

그만큼 예수 믿는 것이 좋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식만 아니라 저 멀리 한번도 안 가본 외국사람들도 예수 믿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많은 봉헌을 드려 선교사를 보내고 예수 믿도록 도와주는 겁니다. 거기엔 그만한 이유가 분명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에 인생의 짐을 풀어 주실 분이 누구신지, 그 짐을 풀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분명히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즉 우리 인생의 짐을 해결해 주실 분은 오직 한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저는 어릴 때 유교집안에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저희 동리 뒷산에는 합천 해인사의 큰집 연수사 절이 있어서 자주 다니곤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크리스마스가 되면 빵 받아먹기 위해 교회도 종종 나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유교나 불교나 기독교나 종교란 다 한 가지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유교도 좀 알고 불교도 조금 알고 기독교도 조금 알만한 시절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건 일화니까 이 자리에 혹시 유교나 불교를 믿는 분이 계셔도 이해하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한 사람이 넓은 길로 가지 않고, 좁은 사잇길로 가다가 그만 실수로 깊은 수렁에 빠졌습니다. 그곳에서 나오려고 안간힘을 써도 자기 힘으로는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꼼짝없이 죽게 되었지요. 그때 마침 깨끗한 옷을 차려입은 어떤 점잖으신 한 분이 그 옆길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하고 소리치는 그 사람에게 지나가던 젊잖으신 분이 혀를 끌끌 차면서 하시는 말씀이, 

“군자 대로행이라고 했거늘 남자가 왜 좁은 사잇길로 가다가 그 꼴을 당하는고. 또 설사 수렁에 빠졌기로서니 대장부가 젊잖치 못하게 꽥꽥 소리를 질러!” 그러고는 그냥 지나가더랍니다. 누굴까요?

잠시후 또 다른 사람이 지나갑니다. 또 그 사람은 지나는 사람에게 “사람 살려, 사람 살려”하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역시 그도 구해줄 생각은 하지 않고, “인생은 어차피 고해이니라. 생노병사에 시달리는 또 하나의 중생이 있구나. 거기서 잠시 고행을 하여 지푸라기라도 잡고 나올 수 있도록 도를 닦으시오.”하고 자기 갈길로 바삐 지나가 버렸습니다. 누구의 가르침입니까? 누굴까요?

잠시후 세 번째 사람이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이번만은 꼭 살아야겠다는 신념으로 더욱 목청껏 죽을 힘을 다해 소리쳤습니다. 언제나 마지막 사람이 주인공이죠?

 “너는 왜 넓은 길을 놔두고 좁은 길로 가다가 이 고생을 하느냐?”하고 책망하지 않습니다. 불쌍하다고 동정할 겨를도 없습니다. 

그대로 수렁으로 뛰어들어 빠져서 다 죽게 된 그 사람을 강뚝에 건져내고는 자신은 나오지 못한 채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어갔습니다. 이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예수님 앞에 나오는 것이 구원입니다. 
“내게 오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로 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 앞에 오는 사람은 영원히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돈 많은 사람은 오라. 많이 배운 사람은 오라. 건강한 사람은 오라 하셨다면 여기 많은 사람이 구원받을 수 없었겠지요.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과거에 우리가 누구였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다는게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나의 주님, 구세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IV. 인생을 초청하신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때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초청할 때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의 초청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저는 국무총리, 국회의장 초청을 여러번 받았습니다. 
대통령 초청도 받아봤습니다. 사람들이 그것도 영광이라고 합디다. 

여러분을 초청해 주신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예수님은 하늘 위와 땅 위에서 가장 높으신 분이십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전 역사를 통하여 가장 높으신 분입니다. 그분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고 마지막 날에 온 인간을 심판하실 우주의 대왕이십니다. 바로 그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초청해 주셨습니다.

초청받고 나온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의 초청은 짐 없는 자를 부르지 아니하고, 짐이 있는 자를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초청은 병이 전혀 없는 자를 부르지 아니하시고, 병든 자를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초청은 죄 없는 자를 부르지 아니하시고, 죄있는 자를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초청은 부담없는 자를 부르지 아니하시고, 부담스러운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나는 아는 것이 없다구요? 성경이 가르쳐 줄 것입니다.
나는 죄가 많다구요? 바로 당신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나는 드릴 것이 없다구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히려 당신에게 복을 주시려고 은혜를 주십니다. 

V. 예수님이 풀어주시는 짐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와 풀어야 할 짐, 예수님이 풀어주시는 짐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첫째로, 예수님께 나오면 죄의 짐이 풀어집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죄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죄가 없어” 
“나는 법 없어도 살아”하는 사람을 종종 보는데 그런 사람이 제일 흉측한 죄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루 세 번 죄 예화

둘째로, 질병의 짐이 있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무서운 고통 중의 하나가 질병입니다. 질병은 생명을 앗아가고 행복한 가정을 파괴해 버립니다. 가정에 남편이 병들면 행복이 깨집니다. 자식이 아프고 아내가 병들면 온 가정이 우울해집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병을 퇴치하려고 지구가 생긴이래 수천년간 약초를 찾아다녔고, 오늘날도 의학이 발달했다고 자랑은 하지만 불치병은 더욱더 늘어갈 뿐입니다. 

말세의 재앙 중에 질병으로 고통하는 자가 많으리라고 성경은 예고하고 있습니다. 갖가지 암, AIDS, 이름 모를 난치병들...

그러나 야훼 라파!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출15:26) 이십니다. 
성경에서 예수를 만난 모든 환자들은 나음을 얻었습니다. 이 시간도 예수님께서는 질병의 짐을 지고 있는 사람을 향하여 “내게 오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못된 질병의 짐아 풀어 져라!” 
이 시간도 진정 예수를 만나기만 하면 질병의 짐이 풀어집니다.

세째로, 가난의 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세계지도를 펴놓고 국민 소득 2만불, 3만불 이상 되는 나라마다 색칠해 보십시오. 그리고 나서 색칠된 나라가 예수를 믿는 나라인가 다른 종교를 믿는 나라인가를 알아 보십시요. 여러분이 찾아낸 30여개 국 중에서 95%가 기독교 국가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5%에 해당하는 그 외 한 두 나라도 기독교를 받아들여 경제부흥을 이룩한 다음 껍데기만 취하고 알맹이 예수를 버린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는 그 물질적 풍요로 인하여 무서운 도덕적 타락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우리 이웃에도 그런 나라가 하나 있습니다.

네째로, 죽음의 짐이 있습니다. 
인생이 산다는 것은 곧 늙어간다는 것이고 죽음을 향해 걷고 있는 것입니다.

10대엔 화장을 하지 않아도 이쁘지요. 그래서 이때하는 화장은 치장입니다. 
20대가 되면 여성들의 아름다움이 절정에 달합니다. 
- 그때가 되면 아름다움을 매만진다고 해서 이를 비로소 화장이라고 한답니다. 
30대가 되면 벌서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감추기 위해 화장을 합니다. 
- 이땐 벌써 화장을 넘어서 분장입니다. 
그리고 40대가 하는 화장은 변장입니다. 
50대가 하는 화장을 뭐라고 할까요? 그건 무장입니다. 
완전무장이라고 한답니다.
어차피 인생은 늙어가고 결국 죽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오늘밤 찾아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죽음 이후의 준비를 하고 계십니까? 예수 앞에 나와 죽음의 짐이 풀려진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늘 내 인생이 끝난다고 해도 오늘 지구가 없어진다고 해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무거운 짐들을 벗기를 원치 않습니까? 짐이 이것들 뿐이겠습니까? 인간은 모두가 생활고의 짐, 자녀들의 염려, 근심, 걱정, 절망, 좌절, 실패의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VI. 어떻게 그 짐을 풀어놓을 수 있는가?

어떻게 인생의 짐을 풀어 놓을 수 있을까요?
서너살 난 어린아이가 밖에 나갔다가 동리의 큰 아이가 괴롭히면 “엄마”하고 찾습니다. 밖에 나가 놀던 아이가 넘어져 상처가 나면 “엄마”하고 집으로 들어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아이가 되십시오. 
무슨 일을 만나면 “하나님”하고 기도하는 것이 어린아이가 되는 길입니다. 상처난 몸을 끌어안고 실패한 몸을 이끌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하며 겸손히 예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교만한 자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면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마을에 호랑이가 내려오면 큰 개들은 무서워 흔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왈 왈 거리고 짓는 개가 있어요. 강아지입니다. 그것도 똥개 강아지입니다. 이걸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겁니다. 참으로 위대한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고 겸손합니다. 여러분은 초청에 응하셔서 이곳까지 오셨습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영접하시면 됩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차려놓은 뷔페식당에서도 내가 집어먹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여러분을 향해 아무리 멋진 계획을 준비하고 계서도 우리가 마음 문을 열고 예수를 영접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묻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의 수고가 무엇입니까? 짐이 무엇입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다 예수께로 오라 말씀하십니다.
당신도   /   당신도   /   당신도   /   오라 하십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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