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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은 무리입니까, 제자입니까? (막 6:4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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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무리입니까, 제자입니까? (막 6:45-46)


아프리카의 세랭게티 공원에는 큰 소같이 생긴 누우라고 하는 떼들이 대이동을 하는 어마 어마한 모습을 TV 프로그램을 통해서 본 적이 있습니다.  수십만 마리가 풍요로운 초원을 찾아서 더 크고 넓은 대륙을 생명을 걸고 끝도 없이 달리는 그 모습은 정말 장관입니다.  그런데 누우들의 대이동이 TV를 통해서 바라보는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장관이지만 누우들의 입장에서는 생명을 건 대 탈출입니다.

가난과 기갈에 강렬한 햇볕이 쏟아지는 그 사막을 등지고서 젖 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찾아 탈출합니다.  그 과정에는 도처에서 위협하는 사자 떼와 호랑이 떼들이 그냥 달려듭니다.  강을 건널 때는 무서운 악어 떼들이 달려듭니다.  그렇게 수많은 공격을 받으면서도 누우 떼들은 오직 새로운 초원인 풍요의 땅을 찾아 탈출을 합니다.  저는 누우 떼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너던 애굽의 대 탈출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의 현실 앞에서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낙심해 하고 있습니다.  쓸쓸함과 외로움으로 지쳐 있습니다.  그 영혼이 사무실에 철벽같이 무디어진 딱딱한 시멘트 벽 안에서 또 다른 무엇인가를 찾아 씨름하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누우 떼들이 새로운 초원을 찾아 달려가듯이 오늘 현대인들은 뭔가 깃발을 흔들면서 그 마음에 소망하는 바를 찾아 끊임없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그 깃발은 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깃발이 명예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 깃발을 찾으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방황하는 현대인들이 흔들 수 있는 깃발, 마음껏 외칠 수 있는 노래는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죽음을 정복했다고 하는 복음의 깃발 밖에는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복음 외에는 인류에게 소망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죄로부터 죽을 수밖에 없는 영혼들에게 소망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전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 있으면 됩니다.  그 복음이 나와 내 가정을 살릴 것입니다.  그 복음이 황무한 이 땅과 이 민족과 열방을 살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도 복음이요, 우리가 외쳐야 할 것도 복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 살아가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바로 그 때를 위한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께서 가장 아끼시는 세대가 되십시오.  정말 하나님의 복을 받은 세대가 되십시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던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출애굽을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가장 직접적으로 접촉하면서 경험했던 세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가장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두 눈으로 보고 온 몸으로 체험했지만 이제 와서는 하나님을 가장 속썩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가장 못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너무나도 자주하는 말씀이지만 예수를 잘 믿으십시오.  제대로 믿으십시오.  적어도 내 가족과 내 자녀들에게는 부끄럽지 않는 믿음의 내용을 보여주십시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것이 정말 좋다는 것을 말로서가 아니라 온 몸으로 보여주십시오.  여러분이 믿고 섬기는 그 하나님을 내 자녀와 가족들이 믿고 섬길 수 있는 분이 될 수 있도록 제대로 보여주십시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입니다.  어쩌면 바리새인들은 역사상 가장 헷갈리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들은 당시에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기도를 많이 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가장 많이 읽고, 가장 열심히 금식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열심에 있어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정도를 넘어서 열심이 아주 특심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가장 기독교인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자부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메시아가 이 땅에 와서 고난받는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달라고 목숨 걸고 기도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했을 때 저들은 목숨 걸고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가장 예수를 거부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저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행위에 있어서는 열심이었지만 고백되어지는 신앙으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했습니다.  저들은 자기 중심적인 신앙의 선을 넘어서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믿는다고 했지만 그 믿음은 어디까지나 자기 믿음이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도 주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어떤 믿음입니까?  하나님이 바라시고 기뻐하시는 믿음입니까, 아니면 자기 믿음입니까?  오늘 우리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우리들도 현대의 바리새인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도 내가 관심이 있는 말씀이라면 아멘을 외치며 열심히 듣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관심이 없거나 부담되는 그 말씀 앞에서는 눈과 귀를 닫아버립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분노하기도 합니다.  왜 귀를 닫고 분노합니까?  말씀이 자기 입맛에 맞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그 믿음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기 믿음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자기 중심적인 자기 믿음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것이 믿음입니다.  내 의지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내 환상을 믿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자장가를 듣기 위해서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이 자리에 왔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 안에는 당연히 거룩한 부딪힘이 일어나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내 골수를 찔러 쪼개는 고통이 있어야 합니다.  결코 이렇게 살수는 없다고 하는 거룩한 탄식이 내 안에서 터져 나와야 합니다.

솔직히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누구나 아멘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멘의 소리가 크다고 해서 그가 믿음이 큰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멘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는 가운데 아멘으로 화답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이 평범한 삶의 자리에서 확증되어야 합니다.  믿는 자의 도리가 지극히 평범한 삶의 마당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무엇보다 복음이 무시 당하는 것에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십시오.  우리는 내 자신이 무시 당하는 어떤 일 앞에서는 쉽게 분노합니다.  내 자녀가 누군가로부터 무시를 당하면 결코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세상 사람들 앞에서 무시를 당하고 있어도 우리는 전혀 반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 더 흥분해서 비난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그럴 수 있습니다.  저들은 빛의 영이신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복음을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조롱하고 무시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향해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복음은 능력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더 복음을 조롱하고 무시합니다.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더 비난하고 있습니다.  다른 세상적인 일들에는 목숨을 걸고 관심을 갖지만 복음에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고난을 당한다고 모두가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에 보면 마지막 때가 되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람들에게서 돌아서라고 했습니다.  지금이 그때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교회에는 나가지만 자신들이 들은 것 가운데 어느 하나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종교적인 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경건함의 능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믿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경건의 훈련을 생활화하십시오.

경건이 생활화되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피곤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온통 세상적인 이야기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도대체 이 사람이 예수를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은 모름지기 내가 믿는 믿음의 내용이 분명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내가 믿는 믿음의 도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 경건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경건의 훈련을 생활화하십시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이신 기적이 있은 이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오병이어'로 일컬어지는 이 사건은 네 복음서에 한결같이 기록되어 있는 사건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의 바로 앞 구절인 44절에 보면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오 천 명이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실제 인원은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왜냐하면 이 숫자에는 어린아이와 여자들은 제외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었던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는 당시 한 아이가 먹을 수 있는 점심의 분량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일인당 다섯 덩이씩을 먹었다고 가정하면 이만 오천 덩이나 되는 엄청난 양입니다.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불가능은 없습니다.  그분은 전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모르는 것이 없고, 못 이룰 일이 없는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오병이어의 사건에 대해서 보다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갈릴리 근방에 사는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맞아 순례 도중에 디베랴 광야로 모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왜 이곳에 모였습니까?  요한복음 6장 2절에 보면, 그들이 디베랴 광야로 모인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그러니까 큰 무리가 모여들었던 것은 그들이 이적을 보았거나 그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신다든가 장님의 눈을 뜨게 하신다든가 하는 소문을 들어왔던 사람들은 때마침 그곳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무리를 지어 구름처럼 모여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신 다음 이제 돌아가려는 수많은 무리들을 보고 걱정하십니다.  복음서들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 같은 이들이 돌아가다가 지칠까 걱정하셨다고 했습니다.  상상을 해보십시오.  넓고 황량한 광야에 오천 명의 굶주린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 이 많은 무리들의 식사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한 소년이 자신의 점심 도시락으로 가져왔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드립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무리들로 하여금 떼를 지어 백명씩 오십명씩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십니다.  그리고 소년이 가져온 이것을 놓고 감사 기도를 드린 다음에 제자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광경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분명히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습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십니다.  그리고 나누어주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이 현실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시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말씀 앞에 절대적인 순종입니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마리아가 하인들에게 한 말은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였습니다.  무조건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은 빌립과 같은 인간적인 계산 방식이 아닙니다.  오직 순종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떡을 나누어줍니다.  그런데 줄어들지 않습니다.  분명히 한 덩어리를 떼어냈으면 한 덩어리가 없어져야 상식입니다.  그런데 그 떡과 물고기는 그대로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숫자에 워낙 둔해서 놀라지 않는 것 같은데, 이것을 나누어주는 제자들이나 그것을 받는 무리들이나 모두가 놀라지 않았겠습니까?  떡덩이를 나누어주는 제자들이나 이들 무리들 모두가 놀라움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는 이 굉장한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유대 랍비들에게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메시아가 오시면 자신들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그 만나를 자신들도 광야에서 먹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광야에서 오천명이 다 먹고도 남는 사건, 이것은 저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그토록 기다려왔던 메시아를 생각하게 하는 위대한 사건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 디베랴 광야에 모든 무리들의 마음이 감동과 흥분으로 한껏 부풀어올랐을 것입니다.
"메시야는 정녕 왔다.  우리 앞에서 떡을 주신 저가 바로 그 메시야다.  이제 우리는 살았다.  저 잔인한 로마의 군대는 물러갈 것이다.  세상은 우리의 것이다."

지금 디베랴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했던 무리들은 모두가 그 옛날 찬란했던 다윗 왕국의 영화를 꿈꾸고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무리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욕망과 연관시켜서 예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무리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왕으로 삼으려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자신들의 왕으로 삼아서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무리들의 마음이 그러하다면 제자들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아마 제자들에게는 남다른 데가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왕이 될 것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는 틀림없이 예수님의 우편에, 또는 좌편에 도열해 앉는 의젓한 장관들이 될 것이다."  제자들은 그렇게 상상했을 것입니다.  이 갈릴리 어부들이 지금 벼락 출세하게 생겼습니다.  큰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아마 어쩌면 제자들은 그런 기분으로 예수님께서 기적으로 만들어주신 떡 덩어리를 무리들에게 열심히 나누어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떡을 받아먹는 무리들보다 나누어주는 제자들이 더 신이 났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자신들의 발이 땅을 밟고 다니는지, 구름을 타고 있는지 모를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이 혼란한 순간, 이 어지러운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무리들을 따로 분리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이대로 놔두면 말할 수 없는 혼란이 일어날 것을 판단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즉시 대책을 세우십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내용입니다.  세속적인 욕망으로 가득 찬 군중들의 행위와 욕망과 기대로부터 제자들을 떼어내려고 하십니다.  또한 그들의 그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배에 태워 디베랴 바다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중요한 순간에 언제나 제자들을 무리들로부터 떼어놓으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이 찾으시고 원하시는 사람이 누구이신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무리들이 아니라 제자들이었습니다.  물론 무리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영광에 물들어 있는 무리들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따라 거룩한 사명의 길을 걸어가는 제자들을 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 시간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무리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제자입니까?  내가 어디에 속했는지 판단이 서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무리와 제자의 차이가 무엇인가라는 물음 앞에 스스로 대답을 해 보십시오.

첫째로, 무리들은 사건을 쫓아가지만 제자는 사명을 쫓아갑니다.

오늘 오병이어의 사건에서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서 쫓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또 다른 기적을 따라 예수님보다 먼저 바다를 건너 벳새다로 갔습니다.  무리들은 한 마디로 사건을 쫓아서 움직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기대하는 사건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을 때 그들은 가차없이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그들이 기대하는 정치적 욕망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물론 한 때 제자들도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가지고 예수님을 쫓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와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을 경험하고 그들은 달라졌습니다.  그들인 더 이상 이적과 기사가 있는 어떤 사건이 아니라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사명을 쫓아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벤트를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  교회의 이벤트 행사가 있을 때만 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적과 기사를 따라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무리는 될 수 있어도 제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제자는 사건을 쫓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명을 쫓아가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로, 무리들은 즐거움을 쫓아가지만 제자는 헌신을 쫓아갑니다.

프로야구 경기장이나 프로축구 경기장에 무리들이 모이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즐거움입니다.  자신들의 즐거움을 채우기 위해서 모여듭니다.  그러다가 자신들이 추구하는 어떤 즐거움이 사라졌을 때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정죄하기 시작합니다.  무리들은 냉정합니다.  무리들에게 기다림은 없습니다.  인내도 없습니다.  그저 자신들이 추구하는 어떤 즐거움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판단될 때 가차없이 떠나갑니다.  무리의 속성은 언제나 관망하면서 바라볼 뿐, 헌신은 없습니다.  경기장에 모인 무리들에게는 어떤 헌신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디베랴 광야에 모인 무리들이 바랐던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저들의 왕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대한 로마제국을 멸하고 다윗의 왕국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자신들의 즐거움을 위해서입니다.  이 고통, 이 어려움에서 벗어나 메시아가 제공해주는 만나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리들이 원하는 그 만나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무리들이 원하는 그 즐거움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들 무리들은 가차없이 예수님을 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는 달랐습니다.  제자는 말없이 묵묵히 헌신합니다.  모두가 버리고 떠나갈지라도 제자는 헌신의 자리를 지킵니다.  그런데 오늘 교회 안에도 세상이 주는 것과 같은 그 즐거움을 쫓아 움직이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가 그 즐거움을 주지 않을 때 떠나갑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이 주는 즐거움을 주는 곳이 아닙니다.  이 교회, 하나님의 몸된 교회는 거룩한 영적 부담을 주는 곳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가 저들을 변화시키라는 사명을 주는 곳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헌신은 없이 즐기려는 무리를 원하지 않습니다.  헌신하는 제자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세상과 역사는 언제나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헌신된 제자들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이 때를 위한 헌신된 제자가 되십시오.  하나님이 아끼시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헌신이 있는 제자가 되십시오.

마지막으로, 무리들은 상황을 따라 움직이지만 제자는 목표를 따라 움직입니다.

보십시오.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상황으로 몰아가니까 무리들도 예수를 버렸습니다.  무리들은 불의한 제사장들의 편에 섰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구원자이신 예수가 아니라 강도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외쳐댔습니다.

교회에는 언제나 무리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들 무리들은 상황이 좋고 편안하면 모여듭니다.  그러나 상황이 여의치 않고 심상치 않으면 흩어집니다.  마치 불나방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무리들은 언제나 소문과 소리에 민감합니다.  "교회가 어떻다더라, 누가 어떻다더라."

스포츠를 보십시오.  자신들이 지지하는 팀이 잘되고 이기면 무리들은 경기장으로 모여듭니다.  그렇지만 그 팀이 연패를 거듭하면 떠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돌을 던집니다.  비난합니다.  무리들의 속성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저들에게는 책임이라든가 의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무리들 속에 있는 것은 좀 더 편안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무리들에게는 상급이 없습니다.

반면에 제자는 상황이 어떠하든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부르신 그분이 내게 허락하신 그 목표를 향해서만 앞으로 나아갑니다.  분위기에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들려오는 소문에 민감하지도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오직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갈 뿐입니다.  그것이 제자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무리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주님이 원하시는 바로 그 제자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무리를 쫓아가지 마십시오.  무리들의 성향은 언제나 평범함을 지향합니다.  무리들은 언제나 어려운 일을 꺼려합니다.  사건과 즐거움을 쫓아가는 맹목적인 무리들이 그 시대에 바른 비전을 만들기 위해 발버둥을 칠 것 같습니까?  저 무리들이 헌신과 사명을 쫓아 자신을 던질 것 같습니까?  예수님을 누가 죽였습니까?  무리들입니다.  그 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무리들이 돌을 들어 스데반을 쳐죽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희망은 제자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붙들고 제자의 자리에 다시 서 보십시오.  좀 미련한 것 같아도 이 시대를 이기려면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제자는 신앙의 기준을 절대로 양보하지 않습니다.  제자는 저 영원한 천국에서 주님의 그 피묻은 손을 잡을 수 있는 그 시간을 위하여 믿음의 수준을 높여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정말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한 번 증거하기를 원하십니까?  정말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인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까?  정말 손이 닿고 발이 닿는 곳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기를 원하십니까?

여기 길이 있습니다.  공식이 있습니다.  원칙이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그 제자가 되십시오.  제자가 되면 사랑이 쏟아집니다.  제자가 되면 삶의 재미가 쏟아집니다.  제자가 되고 나면 삶의 힘을 얻고 헌신할 수 있고 봉사할 수 있는 능력이 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면 생존에 대한 의욕이 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면 모든 일체의 속박으로부터 자유가 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잠시 후에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에는 목사로 서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설 것입니다.  "인자가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신 주님은 마지막 날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그 믿음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 사역을 하고 있기 때문에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교회 안에는 믿음이 없이도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처럼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자들을 멀리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보는지 안 보는지 알 수 없는 아주 캄캄한 상황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다 포기하고 모든 사람들이 파도처럼 노도와 같이 반대하고 난리를 쳐도 하나님 한 분을 믿기에 제자된 자로서 기꺼이 혼자 앞장 서 보십시오.  틀림없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체험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확실한 믿음 위에서만 하나님의 확실한 도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는 언제나 앞장서서 하나님의 일을 일으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무리는 언제나 유동적입니다.  무리는 언제나 즉흥적입니다.  무리는 언제나 관망적입니다.  그러나 제자는 모든 무리들이 관망하고 있을 때에라도 홀로 기꺼이 앞장을 섭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축복의 주역은 언제나 제자에게 있습니다.  상급은 제자의 것입니다.  그 제자됨을 추구하며 제자의 길을 걸어가십시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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