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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님 (행 2: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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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님 (행 2:22-36)

‘예수의 역사 2000년’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예일대학교의 야로슬라프 펠리칸교수가 썼는데 예수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역사를 문화사적 측면에서 고찰한 책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세계 역사라는 것은 곧 예수님의 역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계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해석의 역사라는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예수를 어떻게 받아 들였느냐? 예수를 거절했느냐, 아니면 충성을 다했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겁니다. 또한 예수를 받아들였다면 어느 정도 받아들였느냐에 따라서 그 나라의 문화나 역사가 결정되었고, 그 나라의 정치 경제가 번영했다는 겁니다. 예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역사의 방향이 결정되었다는 겁니다. 

세계 역사를 조금이라도 배운 분이라면 이 말에 동의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세계의 흐름을 주도했던 나라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 나라들은 한결같이 예수를 받아드린 나라들이었습니다. 옛날 로마가 그랬고 독일이 그랬고 영국이 그랬고 오늘날 미국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것은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가 세계 역사를 B.C.와 A.D.로 나누는데, B.C.라는 말은 Before Christ의 약자로 예수 이전이라는 뜻이지요. 그리고 A.D.를 말할 때는 보통 주후라고 하는데, 혹시 A.D.가 어떤 말의 줄임인지 아시는 분이 계시나요? 보통 사람들은 After Christ, 예수 이후 일거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A.D.라는 것은 라틴어의 ‘안노 도미나이(Anno Domini)’라는 약자로 안노(Anno)라고 하는 말은 ‘해’라는 뜻이고, 도미나이(Domini)라는 것은 ‘우리의 주’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옮기면 In the year of our Lord라는 말이지요.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라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기준으로 해서 주전, 주후로 나뉘는 것이 아니고 주전은 맞지만 주후는 ‘주가 다스리는 해’라는 겁니다. 이것이 A.D.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2013년이라는 말을 쓸 때에는 이러한 것을 알고 써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 이후 2013년보다는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2013년. 이게 옳은 것이고, 이렇게 되어야 은혜가 됩니다. 앞으로 2014년 2020년, 그리도 더 나아가 3000년, 시대가 흘러가도 변함없이 예수가 다스리는 세계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드리고 계십니까? 예수님을 어떻게 고백하고 계십니까? 세계 역사는 변함없이 예수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아니 예수님이 다스리시고 통치하고 계시는데 여러분의 기준이 무엇이냐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드렸느냐에 따라서 한 나라의 흥망성쇠(興亡盛衰)가 달려있듯이, 믿음생활하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도 예수를 어떻게 받아드리느냐에 따라서 한 사람의 삶의 흥망성쇠가 달라지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성경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이렇게 받아드려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36절입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아멘. 

오순절에 성령 강림으로 인해서 제자들이 각국 방언을 말하게 되는데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선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놀라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조롱하면서 저희가 새 술에 취하였다고 말합니다. 이 때에 베드로가 설교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인데 그 중에서도 36절의 말씀은 베드로 설교의 핵심입니다. 한 마디로 하면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합시다.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다”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이유를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두 가지로 설교합니다. 하나는 십자가의 죽음이고 다른 하나는 부활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해서 다른 설교를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가지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하지 않아요. 베드로는 오직 십자가와 부활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었으나 하나님이 살리셨다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는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가 된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주라는 말은 주인이라는 의미이고,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공부해 가면서 알게 될 것이지만,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베드로의 설교는 사도행전에 흐르고 있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흐름은 베드로의 설교뿐 아니라 사도 바울의 설교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과 예수를 믿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은 그냥 다니는 거예요. 물론 믿으니까 다니겠지요. 그러나 다닌다고 모두 믿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는 것은 예수님이 나를 구원할 자라는 사실을 믿어서 그 분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믿어서 구원받게 되고 그 분을 주인으로 모셔 그분의 뜻대로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의 잘못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고 자신을 주인으로 섬겼다는 거예요.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는 마음대로 먹어도 되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단순히 사탄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먹었느냐 먹지 않았느냐의 문제를 뛰어 넘어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았기 때문에 삶의 방식이 다르잖아요.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말을 듣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말을 해도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거예요. 어떻게 죽는다고 해도 듣지를 않아요.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았기 때문에 정신이 나간 거예요. 그러니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만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에이 늘 듣는 말씀인데 뭐, 오늘도 또 그 소리네, 지나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의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서 내 생각이 달라지는 거예요. 누구를 주인으로 섬기느냐에 따라서 내 삶이 결정됩니다. 누구의 말을 듣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어떤 열매를 거두나 결정됩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십자가와 부활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고,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와 부활과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구원보다 더 중요한 것이 뭐가 있겠어요? 구원받으려고 예수를 믿는데, 여러분은 예수를 왜 믿으세요? 출세하려구요? 성공하려구요? 복 받으려구요? 예, 예수 믿으면 그러한 것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본질은 아닙니다. 출세하고 성공하고 병 낫고 복 받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것은 구원받는 것입니다. 

외국에 나가보면 한국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더 넓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중국은 남한의 97배, 남북한 47배). 믿다가 보면 영원한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이 땅의 것보다는 영원한 것에 더 가치를 두고,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나도 나중에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살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게 아니겠어요? 아멘입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을 믿는 것만큼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문제는 없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전도할 때에 부딪히는 문제가 있지요. 구원의 문제입니다.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말하면, 종교는 다 같은 것인데 왜 반드시 기독교를 믿어야만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느냐고 되묻습니다. 그러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자기 종교만을 옳다고 주장한다고 말하지요. 기독교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요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종교라고 해서 다 같은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를 종교에 포함시키는 자체가 우스운 일이지만, 굳이 종교라고 한다고 해도 일반적인 종교는 사람이 만든 것이고 기독교는 하나님이 만든 종교입니다. 다시 말하면 원래 종교는 사람이 만든 것이고 구원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사실 종교라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취향에 맞추어서 만들어 놓고는 이것이 옳다고 말하는 거잖아요. 자신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은 옳은 것이고, 그 반대이거나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옳지 않다고 판단합니다. 마치 자신이 문제를 내고는 자신이 맞추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어느 회사에서 한 명의 직원을 채용하는데 많은 지원자가 몰려왔어요. 그 중에 최종적으로 두 사람이 남았는데 둘 중에 한 사람은 조카이고, 다른 한 사람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모르는 사람이 더 실력이 있는 겁니다. 이제 한 사람을 뽑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합니다. 시험관이 짜장면 집과 약국 사이에 무엇이 있냐고 물으니까 실력이 있는 사람은 모른다고 대답을 하고, 조카는 세탁소라고 금방 대답을 합니다. 그래서 조카가 뽑혔어요. 실력 있는 사람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불공평하거든요. 그래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냐고 항의를 했어요. 그 때에 시험관이 이러더랍니다. “옛날에 우리가 사는 동네에 짜장면 집과 약국 사이에 세탁소가 있었다” 답은 맞지요. 그러나 객관성이 없어요. 

여러분, 종교를 이렇게 취급하면 되겠어요? 우리가 종교라는 이름으로 말할 때에는 본질적인 것을 말해야 합니다. 적어도 종교에 대해서 말하려면 절대 진리를 말해야 하는 거예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윤리와 도덕 등의 일반적인 기준을 만들어 놓고는 종교를 말하면 안 되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륜이나 도덕이나 윤리를 기준으로 하니까 충이다 효다 선이다 윤회다 말하는 것인데, 이런 것에다가 기준을 두다 보니까 유교도 괜찮고 불교도 괜찮고 이슬람교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종교는 다 같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나 종교는 그게 아닙니다. 구원을 말해야 하는 겁니다. 기독교는 선하게 살고 선을 베풀고 이것이 우선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구원을 말합니다. 부활을 말합니다. 영원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살면서 느끼시겠지만 이 땅이 영원한 것 같고 이 세상이 길은 것 같지만 영원하지도 않고 생각처럼 길지도 않습니다. 교황도 죽지 않습니까? 교황이 아니라 교황보다도 더 높은 분이 있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죽어요. 미국의 대통령이라고 해도 언젠가는 죽어요. 죽음에 대해서 예외인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요. 이 세상은 잠깐이에요. 그 이후에는 영원한 세계가 있어요. 기독교에서는 그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의 문제는 결국은 구원의 문제를 해결할 분이 누구냐로 돌아가서 생각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창조주가 누구냐를 생각해야 하는 겁니다. 본질적인 문제는 접어두고서는 다들 각자의 논리에 맞추어서 각자의 생각에 따라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니까 그런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신은 많을 수 밖에 없지요. 이런 사람이 백이면 신이 백이 되는 것이고 천이면 신이 천이 되는 거예요. 

구원의 문제는 사람의 손을 떠나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사람이 자기 목숨도 구원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의 생명을 구원해 줍니까? 말도 되지 않는 소리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야 되는 겁니다. 

시험을 치를 때에 기준이 뭡니까? 수험생들이 얼마나 최선을 다했느냐로 따지나요? 정답을 손으로 섰느냐 컴퓨터로 썼느냐로 따지나요? 정답을 쓸 때에 본인이 얼마나 확신하고 썼느냐로 따지나요? 정답을 어떻게 써야 합니까? 출제한 사람의 의도가 무엇이냐, 출제한 사람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를 가지고 쓰는 거지요. 수험생이 아무리 옳다고 생각해서 써도 출제자의 의도와 거리가 있으면 합격하기가 힘든 겁니다. 아니 힘든 게 아니라 떨어지지요. 

여러분,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의 식대로 답을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구원의 문제를 출제하신 분의 뜻에 맞추어서 답을 해야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만이 문제를 내실 수가 있고 우리는 그저 하나님이 원하시는 답을 할뿐입니다. 성경에 그 대답이 나와 있어요. 오늘 21절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사도행전 4장 12절의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요한복음 3장 16절은 너무나 잘 아시지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정답은 예수 밖에는 없어요.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구원의 문제는 기독교밖에는 없어요. 예수 밖에는 주시지 않았어요. 그러니 사람들이 아무리 기독교가 독선적이니 배타적이니 해도 정답이 그게 아닌데 어떻게 합니까? 정답이 예수 밖에는 없는데, 예수 대답을 하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를 못하는데, 구원받지 못하는데,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다고 믿는 것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석가는 안 되냐, 마호멧은 안 되냐,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문제를 출제하시고 그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솔깃하지 마셔야 합니다. 선악과처럼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다고 해도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러운 것뿐이지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구원이 없습니다. 천국이 없습니다. 그것이 주와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베드로의 고백처럼 예수님은 나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다고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시고 나의 구원자가 된다고 믿으신다면 그렇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시인하고 믿는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믿으시고 십자가 정신과 부활 정신을 가지고 그렇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 많은 그럴 듯한 주인 같은 것들이 보이지만 주인 같은 것들로 보일 뿐 주인은 아닙니다. 오직 나의 주인은 하나님만 되셔야 합니다. 

그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 분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기뻐하시는 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가 고백하고 설교했던 예수님은 나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나의 주요 구원자가 되시고 나의 그리스도가 되신다고 고백하셔서 그들도 그 말씀을 통하여 구원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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