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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맥추감사] 맥추절의 감사 (신 16: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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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추절의 감사 (신 16:9-12)


어느 날 사냥꾼이 사냥을 나갔습니다. 그 날은 저녁 무렵이 다 되도록 아무 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냥꾼은 집으로 돌아가기로 하고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전방 10m 앞에 커다란 물체가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곰이었습니다. 사냥꾼은 속으로 ‘오호, 아무 것도 사냥을 못 하는 줄 알았는데 수지맞게 되었구나!’라고 생각하며 총을 겨누어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헌데 총이 고장이 났는지 발사가 되지 않았습니다. 당황한 사냥꾼은 도망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죽을 힘을 다해  도망을 치다가 그만 낭떠러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냥꾼이 살아날 방법은 없어 보입니다. 이 때 사냥꾼이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제가 죽게 되었습니다. 저 곰이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 주셔서 저에게 자비를 베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자 곰이 갑자기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사냥꾼은 자신의 기도가 응답된 줄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습니다. 헌데 곰의 기도 내용을 듣고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곰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오늘 하루 종일 굶었는데 맛있는 만찬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다음 주일 우리는 맥추감사주일로 지킵니다. 유대인은 성경에 따라서 세 가지 절기를 지킵니다. 그것은 곧 유월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입니다. 유월절은 애굽에서 구출해주신 것을 기념해서, 칠칠절은 봄에 밀을 수확하게 된 것을 기념해서, 그리고 초막절은 광야에서 40년동안 하나님의 보호 가운데서 산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중에 맥추절은 첫 열매를 거두면서 드리는 절기이기에 초실절이라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감사절을 지키는 뜻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맥추 감사절은 기뻐하는 절기라는 사실입니다.
이민 생활을 막 시작한 교포가 영어 발음 때문에 적지 않은 곤혹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워터”도 “워러”라고 하지 않나 “컴퓨터”도 “컴퓨러”라고 하지 않나... 
문제는 미국 사람들이 그러는 건 이해하겠는데 말이죠. 자기보다 미국에 조금 더 일찍 온 친구 녀석이 말끝마다 혀를 굴리면서 말이죠, “배러리” “배러리” 그러는데, 그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네가 미국 말을 언제 배웠다고 그렇게 잘난 체 하느냐는 생각이 들어서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옆에 재떨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걸 집어 들면서 다음과 같이 소리쳤습니다. 
“야, 너, 자꾸 배러리 배러리 그러면 재러리 확 던진다.” 

저 자신도 예외는 아닙니다만 여러분, 사소한 일 가지고 그렇게 짜증내고 마음 상해하지 마시고 너그럽게 용서하고 감사하는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옆에 있는 분들과 인사하겠습니다. 
“짜증내지 말고 감사하는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언젠가 어떤 책에서 본 재미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뜨거운 여름에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일하던 한 농부가 호두나무 그늘에 앉아 쉬게 되었습니다. 그때 농부는 호박 넝쿨에 달린 아주 큼직한 한 개의 호박을 보고는 다음과 같이 원망을 했습니다. 
“하나님도 참 불공평하시지 말이야. 왜 무겁고 큰 호박은 저렇게 얇은 줄기에 열리게 하시고, 저렇게 조그만 호두는 높고 튼튼한 나뭇가지에 열리게 하셨을까 말이야? 참 이해가 안 된다니까...”라고 중얼거렸습니다. 

일에 피곤했던 농부는 이런 말을 하며 앉아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호두열매 하나가 떨어지면서 농부의 이마를 때렸습니다. “아야” 
호두열매에 맞아서 깜짝 놀라 깨어난 농부는 이마를 쓰다듬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이쿠 하나님, 호박은 땅에 닿을 듯 열리게 만드시고 작은 호두는 높은 데 열리게 하신 건 참 잘하신 겁니다. 만일 저 큰 호박이 높은데 열리게 하셔서 그게 제 머리에 떨어졌다면 제 머리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간사한 게 인간이다.” 
참 그렇지 않습니까? 조금 형편이 안 좋으면 금방 낙심하고 불평합니다. 또 어렵다가도 조금 형편이 나아지기 시작하면 언제 그랬냐는 둥 좋아하고 목에 힘이 들어가는 게 우리입니다. 환경에 따라 너무 쉽게 이리 치우치고 저리 치우치는 게 우리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보시기에도 얼마나 한심하겠습니까?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너와 너희 자녀와 너희 중에 있는 모든 자와 함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라고 하여 하나님께서 이미 복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혹은 말할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니 도대체 무슨 복을 주셨다는 것이냐?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면 나의 형편이 어찌 이토록 힘들기만 한 것이냐? 왜 내 몸은 이토록 아파고 내 마음에는 상처만 가득한 것이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하늘나라 백성이 된 것 만으로도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온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의 복을 받았음을 먼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또한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이미 복 주신 것으로 인하여도 감사하지만 앞으로 복 주실 것을 믿는 마음으로 또한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요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얼마나 많이 거두었느냐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그보다는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을 지키시고 이끌어주시며 복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세를 통해 애굽으로부터 이끌어 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죄와 허물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고 이제 우리의 마음을 열어 깨닫게 하여 주심으로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믿음 안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그 은혜를 먼저 감사하며 이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삶을 주관하시며 이끌어 주시되 복된 자녀로 삼아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내 힘으로 무언가를 이룬 줄로 생각합니다. 다 내가 땀흘려 수고한 결과로 오늘의 내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구원 역시 내가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얻은 줄로 생각합니다. 물론 믿음이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열어 주시지 않았다면 아무리 우리가 믿는다고 외쳐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하나님이 내 길을 열어 주시지 않았다면 결코 구원받은 백성이 될 수도 없었을 것이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며 내 길에 함께 하시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와 같이 모습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스스로도 실망스러울 정도로 내 위치나 형편이 너무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온 세상을 다 가졌다고 해도 내 생명을 잃어버린다면 그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당장 형편이 너무 힘든 걸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곧 믿음의 눈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주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그리고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믿는다면 결코 실망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좌절할 이유도 없고 포기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따라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요새 사는 게 어떠세요?” 하고 물으면 어떤 분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한마디로 죽을 맛입니다.” 또 어떤 분은 “죽지 못해 삽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사는 게 어떠세요?'라고 물으면, ‘사는 거요? 죽을 맛입니다. 죽지 못해 삽니다.'라는 말이 나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도 감사하면서 삽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범사가 다 감사할 제목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감사할 게 없는데 어떻게 감사할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아니, 당신도 보다시피 내 형편에 어떻게 감사할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감사가 없이는 막혀진 인생의 문도 열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스펄젼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행할 때 감사하면 불행이 끝나고, 형통할 때 감사하면 형통이 연장된다.”
그렇다면 여러분, 왜 감사해야 할까요? 사는 조건이 좀 나아져서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것이 우리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사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한번 자연을 흔드시면 우리가 이 땅에서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것이 우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 우리에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주어졌을 뿐이다!” 라는 고백이 필요합니다.  구원의 복도, 죄 사함의 복도, 오늘 우리가 지금 호흡하며 사는 것조차도 다 값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졌다는 고백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범사에 감사하는 인생이 은혜를 아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범사가 원망이 아니라 범사가 감사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감사절은 함께 나누는 절기라는 사실입니다.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11절의 말씀은 감사의 절기에 누가 감사해야 하는가 하면 온 가족 그리고 노예와 성직자 그리고 나그네 된 자들과 고아와 과부 같은 아주 어려운 사람들이 다같이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는데 그것도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 즉 하나님의 집 성전에서 즐거워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멀리 다른 나라에 가서 사는 사람들까지도 이때에는 하나님의 성전을 향해 먼 길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도 12살 때 부모님들과 함께 감사의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었고 그곳 성전에서 머물며 랍비들과 함께 묻기도 하며 대답도 하면서 며칠을 지내셨던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만큼 절기에 성전을 찾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함께 모여서 해야 할 일이 바로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는 일입니다. 여기에는 제외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모두가 다 함께 참여해서 함께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볼 때 이유야 어떻든 간에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고 했으니 하나님이 보실 때도 그래 그렇게 하는 거야 하실 수 있도록 참으로 즐거운 마음을 가지고 감사절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외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함께 나누는 교제의 자리를 결코 피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성도들이 함께 나누는 교제의 자리를 피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 간에 함께 나누는 교제의 자리야말로 정말 중요한 자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그러졌던 교제의 자리를 바로 세우기 위해 함께 힘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누구 한 사람의 수고와 노력만으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하나 되지 못하는 이유를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입니다. 누구 때문에 그렇다고요. 하지만 그 하나 되고자 하는 노력은 함께 기울여야 합니다. 누구는 이래서 안 되고 누구는 저래서 안 된다고 한다면 누군들 자유로울 수가 있겠습니까? 결점 하나 없이 완벽한 사람이 세상에 누가 있겠느냔 말입니다. 따라서 서로가 상대방의 결점을 덮어줄 수 있는 아량과 배려가 또한 필요합니다. 

함께 나눈다고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내 여유 있는 것을 가지고 상대방의 부족한 것을 채운다는 의미로 생각들을 합니다. 하지만 꼭 여유가 있어서만이 아닙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감사하며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만 있으면 내가 굶어가면서까지 상대방을 먹일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현장에 있던 한 아이가 그랬습니다. 그는 자기보다도 먼저 주님을 생각했습니다. 어머니가 싸 주신 도시락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그는 그것을 먹지 못하게 됐다고 투덜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조심스럽게 그것을 예수님께 전했습니다. 

그랬을 때 예수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그것을 손에 들고 축사하십니다. 한 마디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He gave thanks to God'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감사의 시점이 언제입니까? 무리들을 먹이신 다음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기적을 보이신 다음에 감사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기적 때문에 감사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족하고 모자라는 순간, 고작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을 때 감사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누구라도 원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고작 오병이어를 가지고 5000명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이의 드린 손길에 감사하는 주님의 손길 그리고 이를 받아다 나누어주는 제자들의 손길 그리고 아이에게 도시락을 싸준 어머니의 사랑의 손길이 함께 합하여 오병이어의 기적과 감사로 이어진 것입니다. 
옛적 한참 힘들던 시절에 어머니들은 자신의 배를 움켜쥐면서까지 자식들을 먹였습니다. 그래서 사랑하기에 기쁨으로 배고픔을 견뎌 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내가 굶을망정 자식들이 먹는 모습을 보면서 흐믓해 했습니다. 

함께 하는 마음이 바로 이런 마음입니다. 상대방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참된 사랑의 기쁨입니다. 주 앞에서는 헬라인이나 유대인 할 것 없이 또 자유한 자나 매여 있는 자나 상관이 없이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상관이 없이 하나님 앞에서 즉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서 가진 자들은 추수를 해도 없는 자들을 위한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추수를 해도 다 거두지 말고 좀 남겨 둘 것이요 땅에 떨어진 이삭도 가난한 자들로 와서 거두어 갈 수 있도록 내버려두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곧 이웃과 함께 나누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런 베푸는 마음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계속해서 감사절은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성도가 밤거리를 지나다 보니까 남루한 옷차림을 한 아이가 빵 가게 밖에서 창문 너머로 빵을 들여다보며 침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이 소년이 배가 고픈가 보다. 빵이 먹고 싶은가 보다 생각하고 아이의 손을 붙들고 빵 가게로 들어가서 맛있어 보이는 빵을 이것저것 골라주었습니다. 볼이 미어터지도록 빵을 먹는 걸 보니까 얼마나 그 빵이 맛있어 보이는지, ‘이 아이에게 더 많은 걸 사줘야겠다. 케잌도 사줘야겠다󰡑싶었습니다. 그래 손을 내밀면서 “얘야 나도 그 빵 좀 먹어볼까?” 그랬더니 가슴을 움켜쥐면서 “싫어요” 하고 도망을 가더라는 것이지요. 

지금 누리는 이 은혜가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배고프던 과거에 자기가 얼마나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죄인이었는가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더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뿌리치고 “싫어요” 하고 돌아서는 철부지들이 이 땅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 할 때 본문 10절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따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예물 자원하는 예물을 가지고 와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내 앞에 나올 때 빈손을 보이지 말라고도 하셨습니다. 

왜 빈손으로 나오면 안 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복을 주셨고 우리는 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복을 따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예물을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내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뿐 아니라 우리의 물산 우리의 소출과 우리가 손을 댄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복 주셨습니다. 그 받은 복을 따라 그 힘대로 예물을 가지고 나아가라고 하셨으니 우리는 정성을 다한 예물을 준비하되 내 할 수 있는 대로 힘써 준비하고 정말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결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절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진정으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도 나를 사랑하시고 복 주신 것을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하시며 놀랍도록 도우시며 복 주실 것으로 믿어 또한 감사드립니다” 하는 의미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립니다. 그렇다면 주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믿을 때 우리는 더욱 귀한 것으로 값진 것으로 많은 것으로 주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기쁜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바울은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왜 인색해집니까? 내 힘으로 하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내 가진 것이 다 내 것인 줄로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의 가진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애완동물 가운데는 강아지가 있고 고양이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릅니다마는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강아지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둘 다 키워보면 사람을 잘 따릅니다. 그런데 고양이와 강아지는 차이점이 있다고 합니다. 강아지란 녀석은 주인이 열 가지를 잘못하도 한 가지만 잘해주면 그 한 가지 잘해주는 것 때문에 주인을 졸졸 따르고 고맙게 생각한답니다. 한데 고양이란 놈은 열 번 잘해주다가도 한번 잘못해 주면 잘해준 것 싹 잊어버리고 잘못한 것 때문에 토라져서 주인을 따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성도들도 보면 강아지형이 있고 고양이형이 있습니다. 교회생활도 강아지형이 있고 고양이형이 있습니다. 고양이형의 믿음은 하나님이 열 가지 축복을 주다가도 한 가지 조그마한 고난을 허락하시면 그것 때문에 불평합니다. 원망합니다. 절망합니다. 좌절합니다. 가정생활도 마찬가지고 교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강아지형의 믿음에는 열 가지 어려움이 있다가 한 가지 하나님께서 회복시켜주시면, 좋은 일이 있으면 그것 때문에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찬송합니다. 

보십시오. 동방의 욥이 동방에서 제일 가는 부자였는데 하루 아침에 쫄딱 망하는 것을 욥기 1장에서 봅니다. 그런데 욥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그렇습니다.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오 취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심을 알아 하나님께 감사했더니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갑절로 복을 주시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 마음으로 찬양하고 자원하는 예물 드려 감사하고 돌이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요 모든 필요를 따라 체우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어 감사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렇게 살게 하소서”라는 제목을 좋은 글을 소개합니다. 

하루 분량의 즐거움을 주시고 
일생의 꿈은 그 과정에 기쁨을 주셔서 
떠나야 할 곳에서는 빨리 떠나게 하시고 
머물러야 할 자리에는 
영원히 아름답게 머물게 하소서. 

작은 것을 얻든 큰 것을 얻든 
만족은 같게 하시고 
일상의 소박한 것들에서 
많은 감사를 발견하게 하소서. 

누구 앞에서나 똑같이 겸손하게 하시고 
어디서나 머리를 낮춤으로써 
내 얼굴이 드러나지 않게 하소서. 

마음을 가난하게 하여 눈물이 많게 하시고 
생각을 빛나게 하여 웃음이 많게 하소서. 

기쁨이 있는 곳에 찾아가 함께 기뻐하기 보다 
슬픔이 있는 곳에 찾아가 같이 슬퍼하게 하소서.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게 하시고 
내가 상처 입었을 때는 빨리 치유해 주소서. 

이전에 나의 어리석음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었거나 상처 입힌 일이 있으면 
나를 괴롭게 하여 빨리 사과하고 용서받도록 하소서. 

인내하게 하소서. 
인내는 잘못을 참고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깨닫게 하고 
기다림이 기쁨이 되는 인내이게 하소서. 

용기를 주소서. 
부끄러움과 부족함을 드러내는 용기를 주시고 
용서와 화해를 미루지 않는 용기를 주소서. 

투명하게 하소서. 
왜곡이나 거짓이나 흐림이 없게 하시고 
무엇이 내 마음을 통과할 때 그대로 지나가게 하소서. 

그때 무엇인가 덧붙는다면 그것은 
사랑이나 이해나 감사나 희망이게 하소서. 

약속을 조심스럽게 하게 하소서. 
그 자리에서 결정하기 보다 잠시 미루게 하시고 
순간의 감정에 흔들리지 않게 하소서. 

주기로 약속했다면 더 많이 주게 하소서.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짐이 되지 않게 하시고 
나에게는 교만이 되지 않게 하소서. 

음악을 듣게 하시고 햇빛을 좋아하게 하시고 
꽃과 나뭇잎의 아름다움에 늘 감탄하게 하소서. 

사람과의 헤어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되 
그 사람의 좋은 점만 기억하게 하소서. 

시간을 아끼게 하소서. 
하루 해가 길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하시고 
내 앞에 나타날 내일을 설렘으로 기다리게 하소서. 

나이가 들어 쇠약하여질 때도 
삶을 허무나 후회나 고통으로 생각하지 않게 하시고 
나이가 들면서 찾아오는 지혜와 너그러움과 
부드러움과 안정을 좋아하게 하소서. 

삶을 잔잔하게 하소서. 
그러나 폭풍이 몰려와도 쓰러지지 않게 하시고 
고난을 통해 성숙하게 하소서. 

그리고 그 이후에 오는 잔잔함을 새롭게 감사하고 
이전보다 더 깊은 평안을 누리도록 하소서. 

가족에 대한 사랑, 
가정의 기쁨을 늘 가슴에 품게 하시고 
이런 마음을 전할 기회를 자주 허락하소서. 

언제 어디서나 사랑만큼 쉬운 길이 없고 
사랑만큼 아름다운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늘 그 길을 택하게 하소서.

맥추 감사절은 단순히 매년 치르고 넘어가는 연례 행사가 아니라 우리의 감사의 마음을 드릴 수 있고 기뻐하고 이웃과 함께 나누고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으로 기뻐하며 이웃을 돌아보는 것 그리고 예물을 주님께 드리는 이유는 나의 가진 모두가 다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는 믿음의 고백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어떤 유대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별로 배운 바가 없는 무식한 어머니였습니다. 그런데 자식은 굉장히 훌륭한 자식으로 키웠습니다. 그 비결이 어디에 있었느냐 하면 어머니는 자식에게 늘 다음의 세 가지를 반복해서 가르쳤다고 합니다. 

하나는 모든 일에서 감사하라.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라. 
두 번째는 원망하는 사람과 깊이 어울리지 말아라. 왜요? 그 원망은 전염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망하는 사람과는 가까이 지내지 말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감사하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라. 그리고 감사하는 사람과 함께 하라. 이 세 마디로 훌륭한 자녀들을 양육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한 인생을 복되게 하고 한 인생을 위대한 인물로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따라서 감사가 성품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간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약속을 따라 주 앞에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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