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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회개한 후 (수 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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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한 후 (수 8:1-9)

한국의 개신교는 동네북입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지나가면서 한 마디씩 던지는데 별로 좋은 말이 아닙니다. 개신교에 대한 강한 비판과 반발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별로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국의 개신교는 이미 요단강을 건너는데 성공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넌 후에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것은 시간문제에 불과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아이성에서 패배를 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아이성이 강했기 때문이 아니고 이스라엘 내부에 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한 후에는 이스라엘을 당할 자가 없었습니다. 

한국의 개신교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개신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크다는 말이 시사하는 것은 첫째는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안티가 생겼다는 말은 그만큼 지명도가 높아졌다는 뜻입니다. 모든 정치인, 대기업 오너, 연예인들에게는 안티가 있는데 그건 그들이 그만큼 크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지명도가 없는 사람에게는 안티도 없지만 팬도 없습니다. 만일 정치인이 자기를 비판하는 사람들 때문에 기가 죽는다면 그 사람은 정치를 하면 안 됩니다. 당연히 정치인에게는 반대자가 있지요. 그러나 자기를 믿고 지지하는 사람이 더 많기 때문에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이고 그들이 맡긴 사명을 감당해야 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나무가 클수록 바람이 잦다고 했듯이 사람이든 단체든 종교든 커질수록 바람이 잦은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비판의 소리가 크다는 것이 시사하는 두 번째는, 한국의 기독교가 약자의 입장에서 강자의 입장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을에서 갑으로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한국의 정서는 약자에게는 후하지만 강자에게는 비판적이에요. 요즘 갑과 을에 대한 담론을 보아도 그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개신교가 아직 작을 때는 약자가 누리는 이점이 있었지만 더 이상 작지 않기 때문에 과거의 프리미엄을 누릴 수 없고 이제는 강자에게 적용되는 책임을 감당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가 13년 전에 개척했을 때에는 개척교회의 이점이 있었습니다. 개척교회라고 하면 사람들마다 협조하려고 하고 후하게 대하고 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저희 교회가 13년이 됐기 때문에 더 이상 그런 이점을 누릴 수 없고 오히려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입니다. 
정당이 야당으로 있을 때에는 비판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여당의 입장이 되면 실적을 올려야 되고 이제는 입장이 바뀌어서 남의 비판을 받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개신교가 비판의 대상이 된 것도 야당에서 여당으로 입장이 바뀐 것과 같습니다. 변화된 위상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만큼 책임이 큰데 우리가 책임을 다 하지 못한 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앞으로 하면 됩니다. 종교는 종교의 특성상 야당으로 머물러 있을 때가 더 편합니다. 왜냐하면 비판만 하면 되기 때문에. 사회가 어떻다느니, 문화가 어떻다느니, 비판만 할 때는 쉬웠습니다. 그러나 위상이 여당으로 바뀐 후에는 비판만 해서는 안 되고 대안을 제시해야 되고 본을 보여야 되는데, 야당만 하던 정당이 여당이 되면 쩔쩔매는 것과 비슷합니다. 경험과 시간과 인식의 변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요즘은 여자들만 거울을 들여다보는 게 아니고 남자들도 거울을 많이 들여다봅니다. 여러분은 남자들이 더럽다고 생각하시죠? 남자 사우나에 가 보세요. 얼마나 남자들이 열심히 씻는지 모릅니다. 여자들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 세상에 남자가 어른이 된 다음에는 얼마나 자기의 몸을 신경 쓰고 그리고 저울에 올라가는 남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매일 저울에 올라가서 조금만 몸무게가 줄면 좋아하고 늘면 싫어하고…. 그래서 남자들이 거울을 들여다보고 살이 쪘는지, 빠졌는지, 식스팩이 생겼는지, 이런 것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그러나 사람이 거울만 들여다보고 있는 한은 어떻게 자기의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 기독교인들도 가끔 거울을 들여다보고 우리의 모습을 확인해야 될 필요가 있지만 거울만 들여다보다간 우리의 할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종교의 역할은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자기성찰이 아니에요.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기독교의 목적은 자기성찰을 위한 것이 아니에요.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들여다보는 것이 내 자신을 더 의롭게 만들지도 못하고, 인생을 제대로 살도록 돕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돕지도 못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가 새벽에 닭이 울 때마다 깨어서 자기가 과거에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것을 기억하고 회개하고 울었다고 하는데, 사실 그 문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물어보실 때 이미 해결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고두고 과거의 죄를 기억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죄 사함을 믿는다면 그 죄를 잊어버리고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어야지, 두고두고 거울을 들여다보고 우는 것은 그건 믿음이 아니에요.

마찬가지로 요즘에 개신교가 대한민국에서 비판을 받는 것에 대하여 기독교 교인이 스스로 위축이 돼서 덩달아 기독교를 때리는 사람이 많은데 그런 사람들은 정신을 차려야 됩니다. 자기가 예수님의 입장에 서서 그렇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세상의 입장에 서서 그렇게 하는지를 분간해야 됩니다. 건강한 반성과 병적인 자책은 다른 것입니다. 저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판적인 말을 많이 했지만 최근에는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언제까지 자책만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사명을 감당해야 됩니다. 

한국의 개신교가 요단강을 건너는데 성공했다는 말은 한국 사회에서 결정적인 위치를 점유했다는 말입니다. 물리학에 ‘인계질량 - Critical Mass’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핵분열을 일으키기 위하여 필요한 최소한의 질량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가서 누구를 만나든, 대중문화든, 사회 각 곳에서 기독교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기독교인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모두 한 두 사람만 건너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고, 대한민국 사람들은 다 예수님의 이름을 들어 봤고, 어렴 풋이라도 예수를 믿어야 천국 간다는 말을 들어보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느 정도는 들어보아 압니다.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을 돌려 대라"는 말이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씀이든지,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든지, 이 말씀을 모르는 사람은 현대인이 아니고 그동안 산에서 산 사람이에요.

그리고 한국 사회에는 기독교가 널리 퍼져 있습니다. 이것은 해외 어느 나라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입니다. 미국 같은 나라에도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많지만 대학 교수라든가, 지성인이라든가, 오피니언 리더 중에는 기독교인의 수가 현저하게 적고 오히려 반기독교적인 정서를 발견할 수 있는데, 대한민국에서는 대학교수든, 고위 공무원이든, 예술가든, 연예인이든, 음악인이든, 운동선수든, 사회 어느 계층에도 기독교인들이 퍼져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그냥 명목상의 기독교인이 아니고 매우 복음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신앙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여성 연예인들 중에는 ‘하미모’라는 모임이 있어요. 그 말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미인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초청받은 분 계십니까? 저는 외국 어느 나라에도 이런 유의 모임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대한민국에만 일어나는 아주 독특한 현상이에요. 인구 대비 기독교인들의 비율보다도 기독교의 영향력이 훨씬 더 큽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 사회에서 기독교 신앙은 결정적인 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넌 것과 마찬가지에요. 요단강을 건너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건너고 나면 가나안땅을 차지하는 것은 시간문제에요. 

하지만 아직 가나안 땅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집을 짓고 입주하지 못한 것과 같고, 공장을 짓고 가동하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기가 죽었습니다. 사회적 비판에 자신감과 당당함이 잃어버렸습니다. 야단맞은 아이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그런 중에 한국교회의 어르신들이 전부 다 은퇴하거나 퇴장해 버렸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호수아처럼 다시 일어서야 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아이성에서 패배한 것은 아이성이 강해서가 아니고 이스라엘 내부에 죄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리고성을 함락시킨 후 하나님이 아무 것도 취하지 말라고 명하셨는데, 아간이란 사람이 은과 금과 의복이 탐나서 그것을 취하여 자기 장막 아래 숨겨 두었어요. 하나님이 그것에 노하셔서 이스라엘이 아이성에서 패배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건 아이성이 강해서가 아니고 이스라엘의 도덕적인 실패 때문이었습니다. 아이성 패배 이후에 이스라엘은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자신감을 상실했어요. 

그러한 상황에서 오늘 본문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가라 보라 내가 아이 왕과 그 백성과 그 성읍과 그 땅을 다 네 손에 주었노니’ 이스라엘이 죄를 지은 것이 맞지만 그렇다고 탈락한 것이 아니고, 자격을 잃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사에는 후회함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죄를 회개한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아야 됩니다. 죄를 회개한다는 말은 죄 사함을 받는다는 뜻뿐만이 아니라 죄의 문제를 제거하고 해결해서 더 이상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셨음을 믿고 담대하게 앞으로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너의 죄를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아이성에서 패배했지만 다시 아이성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할렐루야!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가라’ 아이성에서 패배한 적이 있는데 그것 때문에 위축되고 자신감을 잃어버렸지만 하나님은 이들에게 ‘다시 아이로 가라!’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아이성뿐만이 아니고 가나안 땅에 있는 모든 성읍을 차지할 사명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할 일이 많아요.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생애에 남북통일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면 남북이 통일된 후에 북한에 신앙을 회복할 책임을 누가 맡아야 됩니까? 우리가 아니면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북한에 공산주의가 떠나간 후에 생긴 그 빈 공간을 무엇을 메꿀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돈으로 메꿉니까? 방종으로 메꿉니까?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21세기 포스트모던 시대를 맞아서 혼동에 빠진 사회 가치관을 제대로 바로잡을 책임이 기독교 신앙에 있습니다. 최근 미국 대법원이 결혼은 이성 간에만 이루어진다는 주장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지요. 이제는 동성 간의 결혼이 합법화 된다는 말인데, 가치관의 혼동입니다. 가치관의 혼동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기독교 이외에는, 교회 이외에는 혼동에 빠진 가치관을 바로잡을 단체가 없습니다. 인간은 문제를 제기하고 또 남의 의견에 반대하는 것은 잘하지만 대안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제가 이제껏 살면서 터득한 것은 남이 일을 더 잘 하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남이 해줄 줄로 생각했는데 남이 해주지도 않거니와 남이 하더라도 더 잘 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믿고 내가 확신하는 것에 대하여 내가 하지 않으면 대신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없어요. 내가 나서면 협조하는 사람이 생기지만 내가 방관하면 아무도 그 일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제가 어제 어느 결혼식 피로연에 갔는데 이 피로연장의 바닥에 빈 그릇이 놓여있었습니다. 제 앞에서 음식을 덜던 분이 ‘어? 이거 큰일 나겠네.’ 하면서 그냥 그걸 발로 건드리고 갔어요. 큰일 난다고 하면서 그냥 갔어요. 그래서 제가 보니까 이만한 빈 대접이 바닥에 놓여있는데 사람이 음식을 가지러 코너를 돌다가 그것을 밟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것을 일부러 들어서 저쪽 테이블 위에 갖다 놓았는데, 누가 대신 일을 해주리라고 기대할 수 없습니다. 내가 하지 않으면, 지금 하지 않으면, 여기서 하지 않으면, 누가, 언제, 어디서 그것을 한다는 보장이 있다는 얘기입니까. 이것은 오지랖이 넓은 게 아니고 사명이에요. 

그리고 세계선교. 세계선교의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잠시 하다가 중단할 일이 아니고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해야 되는 것입니다. 옛날만 하더라도 선교는 선진국이 후진국을 돕는 양상이었어요. 또 제1세계가 제3세계에 베푸는 식의 선교였습니다마는 이제는 선진국이 다시 선교지가 돼버렸습니다. 영국 같은 나라는 주일 예배를 참석하는 사람의 숫자가 인구의 5도 되지 않습니다. 

한때 요한 웨슬리와 요한 위필드와 또 수많은 부흥을 일으켰던 영국이 이제는 인구의 5도 교회를 가지 않아요. 이건 영국뿐만이 아니고 북구라파와 서부유럽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선진국이 후진국을 선교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의 확신과 능력이 있는 나라가 그것을 잃어버린 나라를 선교해야 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정말로 할 일이 많아요. 우리나라가 과거에는 남의 나라의 도움을 받았지만 이제는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입장이 되었다는 사실이 신앙적으로 시사하는 것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느냐?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어른이 된다는 말은 내가 스스로 나의 삶에 책임을 질 수 있다는 말이에요. 과거에는 누가 우리에게 어른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젊었을 때에는 모세라는 인물이 있어서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여호수아를 위해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세가 세상을 떠나고 없습니다. 

그러므로 과거처럼 여호수아가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 없습니다. 여호수아가 어른이 되어야 됩니다. 기도하는 것도 여호수아가 해야 되고, 전쟁에 나가 싸워 이기는 것도 여호수아가 해야 되고,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세를 데리고 가신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제는 어른의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모세가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데려가신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모세를 데려가지 않았다면 여호수아는 영원히 모세를 의지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우리보다 강한 나라, 우리보다 더 부유한 나라, 누군가를 의지하는 것에 익숙해졌는데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운명을 책임지는 것에 대해서는 경험이 별로 없어요. 인식의 변화가 이루어져야 됩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학교 행사가 있을 때 어머니가 찾아오셔서 응원을 해주셨지만 이제 어머니는 연로하시고 세상을 떠나시고 안계시고 우리 자녀가 학교에 행사가 있을 때 부모가 돼서 찾아가야 되는 것처럼 신앙적으로도 마찬가지에요. 

이 모든 일은 우리가 해 본 적이 없는 일입니다. 모세가 그렇게 위대했지만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보지 못했고 여호수아가 그 땅에 들어갔습니다. 해보지 못한 것입니다. 믿음이 필요한 이유는 해보지 못한 것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해본 것이면 믿음이 필요 없어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많은 것들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몰라요. 이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이 시대에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을 우연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이것은 대단한 특권이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입니다. 

아이성의 실패는 유익했습니다. 아이성의 실패를 통하여 겸손을 배웠고 전쟁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실패를 극복하고 다시 아이성을 차지하려고 하지 않으면 아이성의 교훈은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이성의 교훈을 얻게 하신 이유는 아이성을 차지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이성뿐만이 아니고 우리 앞에 있는 모든 성읍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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