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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 (딤후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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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 (딤후 1:9-11)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11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오늘은 맥추 감사절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1년에 세 번 감사절기로 지키라 하셨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맥추절입니다. 이 맥추절은 그들의 主食(주식)인 보리 추수를 전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오늘날 우리는 보리농사를 하지 않기에 맥추절을 지키는 것은 의미가 없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직업이 바뀌었을 뿐입니다. 직업이 농업이 아닌 다른 직종이지만 그 일로 나름대로 소득의 결실을 얻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날도 우리는 주님이 베풀어주신 소득에 감사하며 그 은혜를 기념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감사 절기의 근본적인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예배로 감사하며 기억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을 드려 감사를 표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이 주신 은혜를 잊지 말고 감사드리는 절기가 되길 바랍니다. 
그러나 오늘은 몇 주 동안 계속하고 있는 교리 설교를 이어가면서 주님의 은혜를 살펴보려 합니다. 

오늘은 칼빈주의 4번째 교리로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살펴보려 합니다. 

1.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무엇인가? 

‘불가항력적 은혜’란 한마디로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인간이 거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시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구속하신 사건을 사람이 저항하지 않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도록 성령님께서 그 죄인을 효과적으로 부르시고 거듭나게 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장로교의 신앙고백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이‘불가항력적 은혜’에 관한 교리적 진술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앙고백서 제11장 1항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신 모든 사람들을, 자신이 정하시고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때에 효과적으로 부르시되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하시며, 그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처해 있는 죄와 사망의 상태에서 불러내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구원으로 인도하신다.

또한 그들의 마음을 영적으로 구원에 관하여 깨우쳐서 하나님의 일들을 이해하게 하시며, 그들의 돌같이 굳은 마음을 제하시고 그들에게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며, 그들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그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이 선한 것을 결심하게 하시며, 효과적으로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끄신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나요? 어렵지요? 그래서 교리 설교는 어렵습니다. 

이것을 쉽게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택하신 백성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데 인간이 거절하거나 저항하지 않는 은혜로 구원을 이루시고 천국에 이루도록 구원을 효율적으로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은혜가 바로 이런 은혜란 것입니다. 

그래서 이‘불가항력적인 은혜’에 사로 잡혀 자신의 평생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은 성경에 무수히 많습니다. 그중에 오늘 이 시간, 두 사람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주를 믿는 백성들을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섬기는데 열심히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제거하는 것이 ‘자기사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그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그는 두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 질문에 주님은 뭐라 대답하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저는 이 대답이 큰 은혜가 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분이 아니라 성도와 연합되어 거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핍박하는 것은 곧 주를 핍박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왜죠?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와 성도를 핍박하는 것은 곧 주님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아멘? 

그것에 충격을 받은 바울은 곧바로 주님께 묻습니다. 
“주님,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때 주님은 행22:1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참으로 특이한 것은 주님이 직접 바울에게 말씀하실 수 있는데 그러시지 않고 다른 사람을 통해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죠? ‘아나니아’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아나니아를 다 준비시켜 놓으셨습니다. 
행9:15절을 보세요.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나니아에게 바울에게 가서 안수하라고 하면서 그가 누군지를 알려줍니다. 결국 바울은 아나니아를 통해 하나님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사람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불러내시고 구원하시는 일에 완벽하십니다. 

그리고 절대로 실패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순간 그 삶이 완전하게 변화됩니다. 그리고는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을 합니다. 
사도 바울도 거절할 수 없는 은혜를 누린 것입니다. 

또 다른 인물을 보세요. 베드로입니다. 

그는 주님을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고백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몇 시간도 못 되어 대제사장 집 뜰 안에서 주님을 세 번씩 부인합니다. 죽을지언정 부인하지 않겠다던 그였습니다. 그런데 그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저주하기까지 합니다. 

그런 부끄러운 과거를 갖고 있던 베드로, 그는 회개하고 주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어떻게요? 그가 그렇게 회개하고 변화된 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그에게 찾아오셔서 회개할 기회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은혜입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의 위대한 일꾼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거절할 수 없는 은혜, 저항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성도 여러분! ‘불가항력적’이란 용어를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하게 하는 것”이라고 오해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억지로 강요해서 역사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불가항력적’이란 단어의 올바른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불가항력적’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셔서 택자들의 심령 속에서 역사하게 하시면, 그들의 영혼이 거듭나게 되며,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복음을 받아들여, 새로운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한다”그래서 그 일에 사람이 거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불가항력적 은혜’를 다른 말로 ‘유효적 부르심’이라 하고 ‘거절할 수 없는 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2. 불가항력적 은혜 교리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무엇인가? 

모든 교리는 성경적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 교리도 무수히 많은 성경적 배경이 있습니다. 몇 가지만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롬1:6-7절입니다. 

6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7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는 분명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창세전에 택하셔서 우리를 정하시고 때가 되어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성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시고, 성자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해 ‘구속’하신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저항하지 않고 믿음으로 예수님을 받아드리도록 성령님께서 효과적으로 부르시고 거듭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간이 거절하지 못하도록 성령님께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 것은 “그러면 사람은 로봇이냐?”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 임하셔서 자발적으로 응하도록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2) 롬8:30절입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다”누가 하십니까? 하나님이 하십니다. 구체적으로는 성령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기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거절할 수 있지 않는가?” 

걱정하지 마세요. 성령님은 우리 속을 아시고 살피시는 분입니다. 분만 아니라 그분께서는 우리 마음을 깨닫게 하시고, 돌이키게 하셔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주님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3) 고전15:10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렇습니다. 사도바울이 고백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한다’는 말은 ‘실패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인간에게 거절당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거절할 수 없는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저는 인간 중에 가장 못된 인간은 부모님에게 “내게 해 주신 것이 뭐요” 라고 대드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자기 생명이 어디서 나왔나요? 자기가 뭘 먹고 살았나요? 어떻게 그 핏덩어리에서 사람이 되었나요? 다 부모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는 갚을 수 없는 은혜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도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받고도 받은 것이 없다고 원망하고 한숨 쉬면 그 사람은 배은망덕한 자인 것입니다. 

따라서 합시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4) 딤후1:9절입니다. 

오늘 주신 본문 말씀입니다.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우리를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과 영원 전부터 예수님 안에서 주신 은혜대로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구원이 어쩌다 일어난 사건이 아니고 창세전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은혜를 거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된 것은 우리가 현명해서도 아닙니다. 

우리가 선택을 잘해서도 아닙니다. 오로지 그분의 유효한 부르심으로 된 것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거절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주권이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5) 행16:14절입니다.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따라서 합시다.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여기서 우리는 ‘부르심’에 대한 實例(실례)를 하나 살펴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강권적인 인도로 마게도냐로 건너가 빌립보에 도착합니다. 

그런 중에 안식일에 강가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여자가 그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그녀의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영접 했습니다. 그런데 “들었다”“열었다”“청종하게 하셨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루디아가 듣게 된 사건은 “외적 부르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은 오늘날 우리의 생활현장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전도와 설교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적 부르심’인 전도자의 복음을 듣는다고 해서 다 복음에 반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극히 일부만이 반응합니다. 

그런데 이 외적 부르심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을 잘 보세요.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셨다/ 라고 기록합니다. 이것이 바로 “내적 부르심”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바울의 복음을 전해들은 여인들은 루디아 한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여럿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루디아만 홀로 바울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루디아가 청종할 수 있게 된 것은 주께서 그녀의 마음을 열어주신 것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불가항력적인 은총입니다. 따라서 그녀의 구원은 그녀가 이룬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불가항력적 은혜’라 하고 다른 말로 ‘유효적 부르심’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억지로 한 것이 없습니다. 자원하여 영접하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3. 불가항력적 은혜 교리가 주는 영적인 교훈은 무엇인가?

불가항력적 은혜 교리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어떤 것인가요? 
불가항력적인 은혜는 

1) 구원의 확신을 심어 줍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구원을 하시기로 선택한 죄인은 반드시 구원받고 말 것이라는 구원의 확신을 심어줍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택하신 백성을 절대로 포기치 않으십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의 행동에 따라 버리거나 포기하시는 분이라면 우리의 구원은 확신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분이 하나님 아버지라면 우리는 사랑의 아버지라 할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이 밉다고, 싹수가 노랗다고 자식을 포기하지 못하듯이 하나님은 당신이 택하여 구원하기로 작정한 백성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어떤 방법이든 성령을 통하여 은혜를 베푸셔서 구원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임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불가항력적인 은혜는  

2) 복음전도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성령 하나님은 죄인을 부르시어 거듭나게 하시고 믿음을 갖게 하시는 일에 있어서 우리의 복음 전도를 사용하십니다. 은혜는 성령께서 베푸시나 복음을 전하는 일은 사람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러기에 성령의 사람은 힘써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행8장에 에티오피아 내시가 구원을 받습니다. 

기서 빌립집사가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구원사역의 주관자는 성령이십니다. 

행9장에는 사울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아나니아가 전합니다. 여기서도 그를 회심케 하는 역사는 성령이 하십니다. 

행10장에서는 고넬료가 예수를 믿어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누가 전합니까? 베드로를 사용하여 복음을 받게 하십니다. 흑인이나 황인종이나 백인종이나 상관없습니다. 정치인이나 학자나 군인이나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사람을 통해 복음을 받게 합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듣고 믿게 하셔서 구원을 받게 하십니다. 

누가요?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죄인을 불러 거듭나게 하시고, 회개와 믿음을 갖도록 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지만, 그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수단이 바로 우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복음 전도를 통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불가항력적 교리는 


3) 행위 구원을 부정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단독 사역입니다. 

흔히 구원에 있어서 오직 은혜 교리를 반대하거나 불신하는 알미니안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두 종류의 예화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중병에 고통당하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우리 인간이 심각한 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의 병을 고쳐 줄 의사도 없고, 자연적으로 나을 희망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고치려고 하셔도 입을 열어 약을 받아먹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낫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알약을 받아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을 주시는데도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사람은 결코 살아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도 일하지만 인간도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두 번째 예화는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 비유입니다. 

그들은 죄로 인해 타락한 사람을 수영을 못하는 물에 빠진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그래서 죽어가는 인간에게 유일한 희망은 누군가 구명대를 던져 주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구명대를 준비하셔서 그것을 그에게 던지셨다고 합니다. 이제 죽고 사는 문제는 그에게 달린 것이란 말입니다. 그가 비록 죽어가는 처지지만 구명대를 붙잡으면 살 것이고, 끝내 제 손으로 구명대를 잡지 않으면 죽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두 종류의 예화는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자신에게 달려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원에 관한 모든 준비를 다 하셨다고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책임은 사람에게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경은 그 어디에도 이러한 교훈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타락한 사람에 관해 죽을 병에 걸린 죄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물에 빠져 죽게 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타락한 사람에 관해 이미 영적으로 죽었다고 선포합니다. 사탄의 영에 종노릇하는 존재이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아는 엡 2:1-2절을 보세요.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성경은 타락한 사람은 죄 가운데 완전히 죽은 자로 묘사합니다. 죽은 자는 아무리 좋은 약이 있어도 입을 벌리지 못하며 구명대를 잡을 수 없습니다.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는 사람들의 가장 치명적인 오류는 이처럼 영적으로 완전히 죽어 있는 죄인의 현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죽은 자입니다. 그래서 행함으로는 안 됩니다. 
오직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자랑치 못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네 번째 교리인 “불가항력적인 은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속에서 도저히 거부 할 수 없는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껏 우리가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세요. 하나님은 나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때로 내가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이 이해가 안 되어 “왜 그렇게 하셨나요?” 물어보지만 그것도 은혜인줄 알아야 합니다. 

그 놀라운 은혜, 그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은혜가 오늘의 나를 오늘까지 있게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맥추 감사도 주님의 크신 은혜임을 믿어야 합니다. 

매 순간마다 베푸시는 그 은혜, 그 은혜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고 그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다음 주는 마지막 시간으로 “성도의 견인”에 대해 살펴봅니다. 
(최일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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