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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맥추감사절] 성도의 라이프 스타일 (골 3: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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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라이프 스타일 (골 3:15-17)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어느 분이 카카오 톡을 통해서 보내준 ‘마음 설명서’ 라는 글입니다. <고통은-10개월 무이자 할부를 활용하고, 감동은-일시불로 구입할 것, 사랑은-30년 만기 국채를, 우정은-연금처럼 납입할 것을 권함. 감사는-밑반찬처럼 항상 차려 놓고, 슬픔은-소식할 것, 고독은-풍성한 채소로 만든 샐러드처럼 싱싱하게, 이해는-뜨거운 찌개를 먹듯 천천히, 용서는-동치미를 먹듯 시원하게 섭취할 것, 기쁨은-인심 좋은 국밥집 아주머니처럼 차리고, 상처는-계란처럼 잘 풀어 줄 것, 오해는-잘게 다져 이해와 버무리고, 실수는-굳이 넣지 않아도 되는 통깨처럼 다룰 것, 고통은-편식하고, 행복은-가끔 과식할 것을 허락함. 슬픔이면서 기쁨인 연애는 초콜릿처럼 아껴 먹을 것, 호기심은-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해서라도 마음껏 소비하고, 열정은-신용대출을 권함. 

은혜는-대출이자처럼 꼬박꼬박 상환하고, 추억은-이자로 따라오니 특별히 관리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리움은-끝끝내 해지하지 말 것. 신뢰는-선물 투자를, 의심은-단기 매도를 권하며, 평화는-종신보험으로 가입할 것. 변덕스러움은-애널리스트가 분석하듯 꼼꼼하게 다루고, 아픔은-실손 보험으로 처리하고, 행복은-언제든 입출금이 가능한 통장에 넣어 둘 것을 권합니다.>라는 글입니다. 굳이 이글을 설교에서 인용하는 까닭은, “감사는-밑반찬처럼 항상 차려 놓고” “은혜는-대출이자처럼 꼬박꼬박 상환하고”라는 구절 때문입니다. 

오늘은 맥추 감사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삼대 절기를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은 유월절과, 맥추절과, 수장절입니다. 유월절은 애굽의 압제와 노예 생활에서 구원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절기이며, 맥추절은 곡식의 첫 열매를 드리는 감사 절기이고, 수장절은 연말에 드리는 추수감사절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스라엘의 삼대 절기는, 모두 감사 절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일 년에 세 번이나 감사절을 지키도록 명령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감사의 훈련을 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로서 먼저 하나님에 대한 첫 번째 의무는, 감사하는 생활이 있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드려야 합니다. 

요일 4:10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있었을 때에,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화목 제물로 보내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수천억 개의 은하를 만드신 하나님이, 태양계의 한 행성인 지구위에 사는 70억 인구 가운데서, 벌레 같은 나를 기억하시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 제물로 내어주셨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사랑입니다. 성도의 삶은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인과 응답의 삶 바로 그것이어야 합니다. 그 큰 사랑 을 우리는 전혀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만 감사가 있을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사도 바울 자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돈이 많은 것 중요합니다. 불치의 병 치료받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저나 여러분들에게 아담의 죄가 있습니다. 조상의 죄가 있습니다. 스스로 지은 죄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을 감히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 것, 이것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느냐 그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됩니다. 

2. 주님의 구속의 은총에 감사드려야 합니다. 

눅 7:47절에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 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어느 죄 많은 여인으로부터, 향유를 부음 받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원동력은 속죄의 감격으로부터 솟아납니다. 모든 위대한 봉사의 능력이, 이 속죄의 감격에서 연유했습니다. 속죄의 감격은 곧 감사로 전환되고, 이 감사는 일생을 통하여 성도를 지배합니다.

2002년 3월에 여섯 가족을 포함한 25명의 탈북자들이, 북경에 있는 스페인 대사관에 몰려 들어가, 한국행 망명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절망에 빠져 있었고, 처벌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으니, 제발 살려달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대사관 안에서 기다리면서, 북한으로 다시 끌려가서 죽을지, 아니면 한국으로 와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지, 갈림길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한국행이 결정되었다는 통보가 왔습니다. 

바로 그 때 그 사람들의 마음에, 제일 먼저 찾아온 생각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이 “살았다! 이제는 한국으로 간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공포와 두려움에 떨던 과거의 모든 일도 다 감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동안 마룻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추위에 떨면서 자던 것도 감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비행기가 늦어져 며칠 더 기다려야 한다는 통보를 받고도, 오히려 감사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살았기 때문입니다. 한국으로 가게 되니까 모든 것이 감사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한국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이런 은혜를 받고 살기에 세상에서 좋은 일에도 감사할 수 있고, 나쁜 일에도 감사할 수 있고, 하찮은 일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구원의 은혜가 우리에게서 샘솟을 때,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내가 구원 받은 은혜에 취해서 살게 해주시옵소서. 내가 예수님 때문에 얼마나 큰 구원을 얻었는가를 알게 해주시고, 예수님 때문에 들어가게 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얼마나 찬란한 것인가를 바라보면서, 날마다 소망 중에 살게 해주시옵소서.” 

한재성이란 선교사님이 있습니다. 카자흐스탄에서 8년 동안 선교사로 사역하던 중, 볼 일이 있어 잠시 집을 비운 사이, 괴한들이 들이닥쳤습니다. 한 선교사가 돌아왔을 때, 아내는 온 몸에 피가 낭자한 채 쓰러져 있었습니다. 입에는 재갈이 물려진 채, 아내의 손과 발은 뒤로 향해 꽁꽁 묶여 있었고, 양 손에는 칼로 찔러댄 자국이 선명했습니다.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는, 작은 시내를 이룰 정도였습니다. 그때까지 집 안에 남아 있던 괴한들은, 한선교사도 살해하려고 쇠파이프를 내리쳤으나, 간신히 죽음의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범인이 도망간 후 간신히 의식을 차린 한 선교사님은, 끔찍하게 살해된 아내를 끌어안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여보! 안 돼. 하나님! 제발 살려줘요. 살려 주세요!” “주님, 주님은 하실 수 있잖아요! 제발 아내의 숨을 돌려주세요.” 그러나 아내의 심장 소리도, 숨소리도 더 이상 들을 수 없었습니다. 아내는 한선교사님과 딸아이 둘을 남겨놓은 채, 그렇게 주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주님, 꼭 그렇게 아내를 데려가셔야 했나요? 그러나 하늘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시니, 이 종 그저 머리 숙여 조아릴 뿐입니다. 제가 흘린 눈물보다 아버지는 더 많은 눈물을 흘리셨는데, 이 작은 아픔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고난주간이 다가오면서,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다, 죽은 아내의 모습에서 그분이 당하신 고난이 어떤 것인지, 온 몸으로 절감을 하게 됩니다. 손발이 묶인 아내의 모습에서, 결박당하신 주님을 보고, 괴한에게 맞아 치아가 빠지고 입술이 터져나간 모습에서, 채찍에 맞으신 주님을 보고, 양손 등의 흉기자국에서, 자기를 위해 못 박히신 그분의 손과 발을 보고, 아내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에서, 가시면류관을 쓰신 그분의 고통을 맛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그래도 내겐 잠시나마 가정이라는 행복이 있었지만, 그분은 홀로 고독하셨지 않은가? 내 귀엔 두 자녀의 웃음소리가 들리지만, 그분에겐 사람들의 조롱소리가 메아리치지 않았던가? 사랑하는 아내가 남기고 간, 사랑하는 두 딸아이와 함께 남은 생을 살아가는 동안, 아픔은 계속될지 모르나, 그래도 내겐 부활의 소망, 천국의 소망이 있지 않은가? 

그 소망을 바라보며 아내의 피 흘림이 헛되지 않도록, 아내가 그랬듯 더 많은 영혼들을 가슴에 품으며 주님께 내 삶을 드리리라. 난 그분을 여전히 사랑하니까.” 그리고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 내 영혼 속에 간절한 소망 하나, 아버지 계신 그곳에 나 있게 하소서. 주께서 나를 대속하시려고 죽으신 것처럼, 나의 이 끓는 피와 심장을 주께 드립니다. 그날에 주여, 나를 기억하여 주소서. 아내와 함께 영원히 사는 그날에.” 주님의 구속의 은총을 깨닫게 되면, 세상에서 겪는 어려운 일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3. 범사에 감사드려야 합니다. 

살전 5:18절에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범사는 문자 그대로 ‘모든 일’을 뜻합니다. 범사란 우리가 경험하는 좋은 일만 아니라, 안 좋은 일, 힘든 일, 고통스런 일, 악한 일도 모두 포함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 모든 일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 해답을 롬8:28절에서 이렇게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사도 바울이 범사에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모든 일, 즉 범사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등 수많은 명작을 남긴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가 있습니다. 그는 짧은 한 평생을 살면서,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어려서 아버지가 살해당했습니다. 고아로 성장하였습니다. 청년 시절에는 혁명당에 들어갔다가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시베리아로 유형 되어 4년 간 살았으며, 결혼은 하였으나 아내는 질병으로 죽고, 재혼을 하였으나 태어난 아이가 또 죽고, 종래에는 자기 자신마저도 간질병에 걸려, 평생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그 무서운 질병이, 자신의 신앙을 강하게 만들었고, 정신을 무장시켜 주었기에, 자신의 병을 ‘거룩한 병’이라고 부르며, 오히려 감사하였다고 합니다. 

정호승 시인의 ‘바람에 감사’라는 시가 있습니다. 바람이 강하게 부는 것은/널 강하게 하기 위해서야. 바람이 불지 않았다면/넌 뿌리가 약해 금방 쓰러지고 말았을지도 몰라/그런데 바람이 강하게 자꾸 불어오니까/넌 쓰러지지 않으려고 깊게 깊게 뿌리를 내린 거야/그게 다 바람이 널 위해서 한 일이야/사실 우린 바람에게 감사해야 돼.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 여정에, 바람은 무시로 불어옵니다. 그리고 고통과 번민의 바람 앞에, 흔들리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람에 흔들리는 동안은 힘들었지만, 견디고 나서 돌이켜 보면, 그 힘든 고통의 시간이, 나를 살리고 키워낸 은인과 같았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 휘테라는 설교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매주일 설교할 때마다, 그 주간에 있었던 일 중에서 꼭 한 가지씩 감사할 조건을 찾아,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한 번은 그 지역에 큰 태풍이 몰아쳐서 많은 피해를 입고, 최악의 한 주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주일 아침이 되자 성도들은, 오늘 아침만은 목사님이 감사할 조건을 찾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그 날 아침에도 여전히 감사기도를 드렸는데, 그 감사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지난 주간과 같은 최악의 재난이, 항상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감사합니다.”

현대인들은 가장 귀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 풍요와 편리함속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의 마음은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차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미 주어진 것에 대해 감사하기보다는, 꼭 현재 없는 것을 찾아서 불평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 종합병원에 가서 진료과목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 많은 병원들마다 환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살펴보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병에 걸리지 않고, 이렇게 당당하게 걸어 다니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보통 감사할 일이 아닙니다. 

정범진이라는 사람은 교통사고로 평생을 전신마비가 되어 살아야 되는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각고의 노력 끝에, 미국 브루클린 검찰청의 부장검사까지 되었습니다. 그가 쓴 책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단 하루만 걸을 수 있다면,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은 화장실에 들어가 변기 앞에서 시원하게 소변을 보는 것이다.” 그는 전신이 마비되었기 때문에, 화장실에 들어가서 볼일을 보는데 2시간 동안 사투를 벌일 때도 있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절대로 당연시 하고 넘길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은혜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18세기의 유명한 기도의 사람 로는 “만일 어떤 사람이 인생의 행복과 만족을 찾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 무엇이냐 하고 묻는다면, 그 사람에게 어떤 사건이 일어나든지, 무조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라고 대답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감사를 많이 하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건강하고 행복하다고 합니다. 감사지수가 높으면 높을수록, 건강지수와 행복지수가 높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인간의 행복을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충고합니다. 

“그대의 마음속에 감사하는 생각이 없으면, 그대는 파멸의 노를 젓고 있는 사람이다. 부디 다른 공부보다도 먼저 감사하는 공부를 배우라!” 감사는 우리의 삶을 윤택하고 행복하게 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 행복은 감사하는 사람의 것이다. ”라고 했고,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감사의 분량이 곧 행복의 분량이다.”라고 했듯이, 감사한 만큼 사람은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빌헤름 웰러는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가장 많이 소유한 사람들이 아니라, 가장 많이 감사하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행복은 소유에 정비례하기 보다는, 감사에 정비례하는 것입니다. 

두 소년이 포도를 먹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 하나가 말했습니다. “이것 정말 달지 않니!” 다른 소년이 대꾸했습니다. “그렇긴 해. 하지만 씨가 너무 많아.” 정원을 거닐며 먼저 소년이 소리쳤습니다. “저 크고 멋진 붉은 장미들 좀 봐!” 다른 소년이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장미에는 가시가 너무 많아!” 따뜻한 날이었습니다. 그들은 상점에 가서 청량음료를 샀습니다. 몇 모금 마신 후 나중 소년이 불평했습니다. “내 병이 벌써 반이나 비었네.” 먼저 소년이 바로 응답했습니다. “내 병은 아직도 반이나 남았어!”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에서의 부정적 사고를 가진 소년과 같습니다. 그들은 항상 감사한 일보다는, 불평할 구실을 먼저 찾습니다.

남편을 잃은 가난한 아줌마가, 아이 셋을 데리고 길거리에서 호떡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점잖은 신사가 다가왔습니다. “호떡 하나 얼마입니까?” “1000원인데요.” 신사는 천 원만 놓고 그냥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날도 신사는 호떡은 안 가져가고, 천 원짜리 지폐 한 장만 놓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1년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신사는 다녀갔는데, 어느 날 천 원을 놓고 가는 신사를 아줌마가 불렀습니다. 아줌마는 뭔가 말을 할듯 말듯 망설이다가 말을 했습니다. “저… 호떡 값 올랐는데요.” 이 아주머니처럼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바로 우리들이 아닐까요?

이동원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전통적인 이발소가 좀 이상해지면서, 어디 가서 이발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데, 누군가가 이 목사님에게 “목사님, 미용실로 가세요.” 라고 충고해 주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지금도 처음 미용실을 찾았을 때를 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목사님이 그때 미용사 분에게 받은 첫 질문이 “어떤 헤어스타일을 원하십니까?”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니 이발하는데도 여러 가지 스타일이 있습니까?”라고 반문했더니, 미용사가 “그럼요, 커트, 펌, 업스타일, 컬러링 여러 가지가 있거든요.”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때 이 목사님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커트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물론 커트지요” 하니까, 또 “롱 커트입니까? 미디엄입니까? 쇼트커트입니까?”라고 해서, 얼결에 “쇼트입니다.”라고 했더니, 다음 주일 교회에 가니까, 교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목사님, 귀순용사 헤어스타일 하셨네요.”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 미용실에 가서는 무조건 “롱 커트 해주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주일에는 교인들이 “목사님, 완전히 히피 스타일이네요.”라고 하더랍니다. 그러면서 이 목사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헤어스타일도 중요하겠지만,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것이 라이프스타일 입니다. 

헤어스타일은 한 사람의 이미지를 만들지만, 라이프스타일은 한 사람의 운명을 만드는 것입니다. 헤어스타일은 쉽게 바꿀 수 있지만, 라이프스타일은 한번 형성되면 잘 바꾸어지지 않습니다. 헤어스타일은 스타일리스트가 만들어 줄 수 있지만, 라이프스타일은 철저하게 자신이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라이프스타일, 곧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이 항상 감사하며 사는 것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주님의 구속의 은총에 감사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사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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