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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울의 전도 (고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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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전도 (고전 2:1-5)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지혜의 절정이어서, 결코 미련한 것일 리가 없지만, 다만 멸망하는 인생들에게는 그것이 미련하게 보여 진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받는 사람들의 약함을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이 말은 하나님께서 불러서 예수 믿게 한 사람들의 면면을 보라는 뜻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첫째,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육체를 따라”라는 말은, 세상적인 입장에서 보는 관점을 말합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가운데는, 헬라의 철인들처럼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 많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지혜와 웅변에 뛰어난 사람이,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는데 채용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을 제외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부분 갈릴리 출신의 미천한 어부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계 만민을 제자로 삼도록 위임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복음을 세상에 전파할 그릇이었습니다. 학문과 지혜를 뽐내는 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히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둘째, 능한 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능한 자란, 정치적으로 권력이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는, 권세 있는 정치인들이 많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어떤 새로운 계획이나 제도를 창시할 때는, 그것을 널리 알리기 위해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기독교의 구원의 복음은, 결코 위대한 왕이나 정치가의 후원 하에 선포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기독교와 그리스도인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박해하였습니다. 기독교 복음은 힘없는 서민들에 의해 전파되었습니다. 

셋째,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문벌 좋은 자란, 왕족이나 혹은 명문 귀족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다는 것은, 상류계급 출신이 많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은 말씀들은 그 때의 그리스도인 중 대다수가, 육체적으로 우수한 조건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님을 밝혀줍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기준은, 외모나 학식, 재능, 물질과 같은 외적인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즉 학식이나 재산, 출신 성분 등은, 세상적인 지혜에 의한 가치 판단의 기준일 뿐, 인간의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분명히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미련한 것들’ ‘약한 것들’ ‘천한 것들’ ‘없는 것들’-무디는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께서 즐겨 쓰시는 네 가지 군대라고 하였습니다. 지혜, 권세, 부귀는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아름답습니다. 인간들은 모두 그것을 흠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혜 자나, 권세 자나, 상류층을 즐겨 택하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폐하시려 한다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거기에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러하십니까? 거기에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들은 이러한 세상적인 지혜와 권세와 부귀영화로, 하나님을 멸시하고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그 위력으로 성도들을 유혹해, 믿음을 거두어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비웃으시고 꺾어버리십니다. 그것도 세상의 미련하고 약하고 멸시받는 자들을 통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능하고 문벌 좋은 자보다,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없는 것들을 즐겨 택하여 쓰실까요? 빛은 밝은데서 보다 어두운데서 더욱 잘 드러나는 법입니다. 밝은 태양빛 아래서는, 밝은 전등도 무의미하게 되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능력이 세상 사람들에게 뚜렷하게 나타나려면, 본래 지혜 있고, 능하고, 강한 자보다,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없는 사람들이어야, 더욱 밝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또한 이러한 사람들을 부르시는 이유는, 29절의 말씀처럼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 얻는 일에 있어서, 누구든지 자기의 힘을 믿거나 자랑하는 자는, 주님의 보혈을 무시하는 죄를 범하는 자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게는 미련하게 보이고,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도, 미련하게 보이는 전도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이제 고린도전서 2장에서는, 사도 바울이 십자가의 도를 어떠한 방법으로 전했는가? 그의 실제 체험을 통한 간증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1절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2차전도 여행 중 고린도에 들려, 그곳에서 1년 반 동안 전도한 일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고린도에서 전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이란, 헬라의 웅변이나 철학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웅변조나 철학적으로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수사학에 능한 아볼로를 좋아한 아볼로 파는, 사도 바울의 말이 시원치 않다고 흠을 잡기도 한 모양입니다. 

사도 바울은 훌륭한 연사나, 유명한 철학자인체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청중의 환심을 사려고 유창한 웅변이나, 깊은 철학적 설교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표현과 고상한 생각으로, 청중의 마음을 즐겁게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전도자였지, 수사학자나 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이러한 것들을 다 배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만일 사도 바울이 하려고만 했더라면, 당대의 그 누구보다 깊고 심오한, 철학적인 연설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위싱턴 D. C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사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때문에 이들이 나가는 교회의 설교자들은 그들의 수준에 맞추어, 설교를 굉장히 유식하고 고상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순수한 설교를 듣기 위해, 근교에 있는 시골 교회로 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명한 정치인임이 알려지면, 시골 교회 역시 다음 주일부터 또 목사의 설교가 세계정세니, 경제니 하면서 순수성을 잃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치가들의 요청이 있는데, 그것은 “목사님,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만 전해주십시오.”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당시 헬라 철학이 왕성하여, 지혜와 웅변이 환영받던 고린도에서, 복음을 인위적으로 수식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십자가의 도를 전할 때, 소극적인 면에서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고, 적극적인 면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만 전했다고 했습니다. 2절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간 유일한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전할 때, 예수님을 한 사람의 선생으로, 또는 모본할만한 사람으로, 인류의 어떤 새로운 지도자로 전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을 전했습니다.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한 말 중에는, 사도 바울이 다른 많은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 모든 것들을 마치 알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빌 3:7-8에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관한 지식을, 모든 지식의 구심점과 정수로 여겼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지혜의 정점에 오르는 유일한 지식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하잘 것 없는 지식에 의존하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곧 피의 복음, 구원의 복음, 생명의 복음만을 단순하게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라는 엄청난 대주제를 전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고 했습니다. 3절에 “내가 너희 가운데에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이 말을, 신중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안전을 두려워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결코 용기나 결단력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백절불굴의 강직하고 담대한 위인이었습니다. 이 같은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 함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라는 주제가 너무나 어마어마한 것이었으며, 그것을 감당하는 자신의 부족과 연약함을 느끼는, 겸손함에서 오는 떨림이었습니다. 진정한 전도자는 이렇듯 두렵고 떨림을 느끼면서, 자신의 능력이나 재능을 믿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엉터리 전도사가 있었는데, 그는 자기의 친구에게 편지하기를, 목회처럼 쉬운 것이 없다고 하면서, 서점에 가면 설교집이 많이 있으므로 그것을 사서 읽어주기만 하면 되니, 너도 목회를 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엉터리 전도사가 가는 교회에서마다, 처녀 교인을 꼬여서 줄행랑을 치곤했습니다. 한 번은 도망쳐버린 처녀의 어머니가, 그 전도사의 고향으로 그를 찾으러 온 것을 제가 직접 만나본 적도 있습니다. 목회처럼 쉬운 것이 없다고요? 그러나 목회처럼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까요? 설교처럼 쉬운 것이 없다고요? 그러나 설교처럼 어려운 일이 있을까요? 김선도 목사님은 “교인들은 항상 목사에게 야구선수의 홈런 같은 설교를 원한다. 그러나 홈런 같은 설교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라고 실토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전할 때, 앞에서 말씀드린 철딱서니 없는 전도사처럼, 그 사역을 쉽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호언장담하지도 않고, 두렵고 떨림으로 감당했습니다. 4-5절에 “내 말과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만고의 전도의 모본을 배우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에, 지혜로 유혹하는 말, 근사한 말, 아름다운 말, 공교한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과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했습니다. 살전 1:5절에도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이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한 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같은 바울의 전도는, 아름다운 열매로 나타났습니다. 그의 전도는 성령의 능력 있는 증거로, 많은 열매와 커다란 변화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어떤 방탕한 술주정꾼이 예수님께 붙들리게 되었습니다. 그의 친구들이 이 사람에게 신앙을 버리게 하려고 “자네와 같은 양식 있는 사람은, 성경에 있는 기적을 믿을 수 없을 걸세. 예를 들면 예수가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는 것 같은 기적 말이야”라고 선동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예수가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는지 아직 나는 잘 모르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집에서는 예수가 맥주를 가구로 변화시키는 것은 사실이야”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술 취할 때마다 가구를 때려 부수어 성한 것이 없었는데, 예수를 믿은 후에는 술을 끊어버리게 되니, 그 술값으로 값비싼 가구를 많이 장만할 수 있었다는 간증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예수께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기사가 나옵니다. 유대인과 바리새인들은 맹인에게 어떻게 해서 눈을 뜨게 된 것인가? 꼬치 고치 캐물었습니다. 그러면서 맹인에게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줄 아노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맹인은 말하기를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다시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맹인은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 도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라고 하면서, 힘주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은 이렇게 방탕한 술주정꾼을 변하여, 새 사람이 되게도 하고, 날 때부터 맹인 된 자의 눈을 뜨게도 하는 체험의 종교, 능력의 종교, 생명력이 약동하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기독교회의 역사는 전도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온 세상에 이처럼 구원의 기쁜 소식이 알려진 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헌신적인 전도활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들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여, 모진 핍박과 고통 가운데에서도,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은, 오늘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모든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로 구원받게 된 성도는, 마땅히 복음전파에 열심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도는 우리의 의무인 동시에 특권이기도 합니다. 죄악에 빠져 멸망의 길로 치닫는 사람들을, 돌이켜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기쁨과 환희, 그로 인하여 영광 받으실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복음 전도자에게 준비하신 상급 등은, 전도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같이 소중한 의무요 특권인 전도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1.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만을 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고자 했던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뛰어난 스승이나 어떤 완전한 모범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 곧 우리의 죄를 대속키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였습니다. 우리들도 사도 바울을 본받아, 오직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2. 전적으로 성령의 능력에 의지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전도할 만한 말주변이 없다, 지식이 없다, 혹은 용기가 없다는 식으로, 전도를 포기하거나 기피하곤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전도할 말주변이 없다거나, 지식이 없다거나, 시간이 없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가짐입니다. 사도 바울은 16절에서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노라고 고백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연민이, 사도 바울 자신에게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열심과, 죽어가는 영혼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언제 어디서나 전도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반드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170여명 제자대학 졸업생 및 재학생 여러분, 꿈에도 소원은 재생산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몇 년 몇 월까지 12명의 제자를 삼겠다고, 각자 하나님 앞에서 약속한 것이 있는데, 그 약속을 꼭 지키는 신실한 주님의 제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송정 중앙 교회 성도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사도 바울처럼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만을 전하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무더운 여름철에도 불구하고, 한 영혼이라도 주님께 인도하기를 위하여 항상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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