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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을 아끼지 않는 자 (행 15: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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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아끼지 않는 자 (행 15:22-41)
  

들어가는 말

저는 지난 6월 24일부터 7월 12일까지 18박19일 동안 인도남부 벵갈로 지역에 단기 선교를 다녀왔습니다.
먼저 여러분의 기도에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여러분의 기도 덕분으로 별 탈 없이 팀을 이끌고 잘 다녀왔습니다.
인구 1,000만의 도시 벵갈로는 한마디로 정신을 차릴 수 없는 도시였습니다.

먼지, 폐차수준의 차들이 뿜어내는 매연, 소음, 소떼, 짐승들의 배설물, 사람들, 오토바이, 삼륜택시, 200만개의 갖가지 우상을 모셔놓은 힌두교 사원들, 우기철의 질척거리는 도로........ 한마디로 혼돈이었습니다.

일정을 끝내고 인천 공항에 내리니 숨이 탁 트였습니다.
여러분, 한국은 좋은 나라입니다.
그리고 우리민족은 정말 대단한 민족입니다.
자긍심을 가져도 될 만합니다. 
이렇게 무질서와 혼돈의 벵갈로이지만 그곳에도 그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길 기도하며 헌신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한사람을 여러분께 소개드리면서 오늘 말씀을 시작할까 합니다.

저희가 만난 사람 중에 기차역에서 거리의 고아들과 매춘 아동을 섬기는 제임스라는 인도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의 간증을 우리 팀에 통역하면서 저도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제임스에게는 두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는 첫째 어머니의 삼형제 중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건설현장의 일용직으로 일하던 아버지로부터 사랑이라고는 받아보지 못하고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술이 없으면 못살았고, 술을 먹으면 어머니와 자식들을 때렸습니다.
제임스는 학교는 고사하고 7살에 돈 벌어오라고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7, 8살 어린 나이에 철도역을 배회하면서 가출소년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나의 긴 인생 여정을 짧은 간증으로 소개한다.”면서 울면서 말을 이어갔습니다.
팀원들도 함께 울었습니다.
가출 소년으로 벵갈로 역전을 배회하던 중 그리스도인을 만났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영접하였고, 그동안 받지 못했던 아버지의 사랑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YWAM에서 제자 훈련을 받던 중 하나님께 물어보았답니다. 

“주님, 내 삶을 어떻게 주님께 드릴까요?”
주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너의 어린 시절을 돌아 보거라. 너처럼 역전에서 배회하는 청소년들을 위하여 살라.”
그는 역전에서 배회하거나 몸을 파는 청소년들의 아버지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가 데리고 있는 아이들은 그를 ‘아빠’라고 불렀습니다. 
결혼을 하여 1남 1녀를 둔 제임스는 거리의 아이들의 아빠가 되어 함께 살면서 아이들을 가정으로 돌려보내거나 매춘소굴에서 빠져나오게 하거나 제자훈련을 시키면서 그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다시 돌아보기 싫은 그곳에서도 주님의 위로를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너무 놀라웠습니다.
주님의 솜씨를 찬양합니다.

오늘의 말씀입니다.
초대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얻어지는 것이냐’ 아니면 ‘예수님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모세의 율법을 지킴으로 완성되는 것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아주 심각했기 때문에 예루살렘 사도회의가 열리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습니다.
회의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첫째,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여러분, 이 진리에 확실히 서길 바랍니다.
그런데 교우들 중에는 구원 받았다고 생각하면서도 뭔가 더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즉 뭔가 더 선행을 해야 할 것 같고, 뭔가 더 많이 알아야 할 것 같고, 헌금이나 봉사나 전도도 더 많이 해야 내 구원이 완성될 것 같은 불안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습니다.
“현재는 80% 구원 받은 것 같아. 20%는 내가 더 노력해야 하겠지. 담배도 끊고, 술도 먹지 말고....... 그래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겠어?”라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성도들의 생활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내 생활의 변화가 구원을 완성시킨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여러분의 구원을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구원을 미완성 구원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구원을 뭔가 더 보태야할 불완전한 구원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구원을 ‘일회적으로’ ‘영원히’ ‘완전하게’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완벽한 사람을 삶을 살았느냐, 얼마나 실수를 하지 않았느냐를 물으시는 것이 아니고,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를 물으십니다.
우리에게 실수가 있고, 허물이 있고, 죄가 있고, 야곱처럼 사기꾼 기질이 있다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구원을 확신하십시오.

둘째, 예수 믿고 구원을 받으면 구원받은 자로서의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행15: 20, 29절)
이것을 다시 술, 담배라는 말로 쉽게 설명해보겠습니다.
술을 끊어야만 구원을 받습니까?
아닙니다.
술과 담배를 해도 구원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얻는 것이지 술 끊는 것과 같은 바람직한 행위를 함으로써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셔야 합니다.

술과 담배를 끊었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받으면 술과 담배를 끊게 되어 있습니다.
삶의 목적, 삶의 방법, 가치관, 취미, 관심, 기쁨을 얻는 방법 등 모든 면에서 구원받은 자로서의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돌 감람나무가 참 감람나무로 접붙임을 했다면 참 감람나무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참 감람나무로 접붙임을 했다고 하면서 여전히 돌 감람나무 열매를 맺는다면 그 접붙임을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구원받았다면 구원받은 자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본문을 묵상할 때 두 구절이 저의 마음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①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 ② ‘위로’입니다.
이제 받은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

오늘 본문에서 먼저, 우리가 교훈으로 받고자 하는 내용은 예루살렘 교회가 바울과 바나바에게 붙여 준 명칭입니다. 
그것이 25-26절에 나와 있습니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않는 자’
아무리 읽고 생각해 보아도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인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수사학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 바나바와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습니다.
저도 교회로부터 이런 인정을 받고 싶습니다.

성경의 호칭대로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생명까지 아끼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는 바로 앞 장인 행 14장에서도,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을 뻔하였습니다.
어쩌면 아직도 그 때 받은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예루살렘 회의에 참석했을지도 모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그들을 ‘생명을 아끼지 않은 자’라고 표현했는지 모릅니다.
또 행20:23-24절에서 바울은 그가 지극히 사랑한 에베소 교인들과 헤어질 때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란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리고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에 가이샤라에 들렀을 때, 그를 사랑하는 교우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순교하게 될 것이라고 바울의 길을 막았습니다.

그 때도 대답은 분명했습니다.
행21:13절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느니라.” 
어쩌면 이렇게 사명에 불타오를 수 있습니까?
어쩌면 이렇게 주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저의 메일에 올라 온 글입니다.
「어느 권사님의 믿음」이란 제목입니다. 
우리 민족의 비극인 6.25의 일사후퇴 때였습니다.
장00집사님의 작은 아버님 내외는 피난을 가다 마포나루 근처 백사장에서 인민군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피난민들을 줄줄이 세워놓고 출신 성분을 조사하여 처단하였는데 벌써 여기 저기 사람들이 죽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한 인민군 장교가 사람들을 향해 외쳤습니다.

“여러분 중에 예수 믿는 사람 있으면 나오시오!”
그렇지만 아무도 나오는 이가 없었습니다.
모두들 긴장하여 손에 땀을 쥐는 순간, 이게 웬일입니까? 삼십 대 초반의 곱단한 젊은 아낙이 인민군 장교 앞에 썩 나섰습니다.
그 절박한 순간에 주님을 위해 순교할 각오로 자신의 신앙을 몸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바로 그 젊은 아낙이 장 집사님의 작은 어머니 김덕례 권사입니다.
그런데 젊은 아낙이 믿음을 지켜 죽으려 나갔을 때 그 남편은 대열에 남아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당시 남편은 100kg가 넘는 거구로서 장군의 아들 김두한과 함께 주먹세계를 주름잡았다는데 그 당당하던 주먹이 정작 인민군 앞에서는 침묵의 대열에 숨어 벌벌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아낙은 남편을 돌아보며 크게 외쳤습니다.
“ 여봇!! 당신도 나와욧!!!”
그 뒷이야기는 어떠하였을까요? 

작고 담대한 믿음의 아내와 큰 덩치에 벌벌 떠는 남편이 인민군 장교를 따라 막사에 들어가자 인민군 장교가 말했습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어 인민군 노릇을 합니다만 나는 목사의 아들입니다. 당신들은 진정 성도가 분명하군요. 그러니 이 선물들을 가지고 어서 여기를 떠나십시오. 길은 이 길로만 가야합니다. 다른 길은 이미 차단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꼭 잘 믿으십시오.”
한 가문의 뿌리 깊은 믿음에 감동이 됩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약속하신 주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을 제물로 드린 이삭을 살려주신 주님께서,
김덕례 권사님 내외의 주님을 위한 순교 각오를 그냥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할렐루야! 

찬양- 내 안에 사는 이

내 안에 사는 것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나의 왕 내 노래 내 생명 또 내 기쁨 나의 힘 나의 검 내 평화 나의 주 
내 안에 사는 것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2. ‘위로’

본문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를 선택하라고 하면 ‘위로’라는 단어를 선택할 것입니다.
31절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할례 문제를 들어 나온 사람들로 인해 이방인들은 영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즉 그들의 논리는 ‘구원을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모세의 명령인 할례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사도회의는 이에 대한 결정사항을 유다와 실라를 통해 전달함으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였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가끔 본질이 아닌 다른 것으로 사람들을 영적으로 어렵게 만들기도 합니다.
즉 신앙습관, 형식, 태도 등이 나와 다르다는 것 때문에 본인도 불편하고 다른 사람도 불편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찬양을 할 때 꼭 손을 들어야 하는가?’ ‘왜 찬양을 하는데 손을 안 드는가?’
‘찬양을 할 때 꼭 일어나야 하는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데 앉아서 할 수 있는가?’
‘교회가 너무 조용하다.’ ‘교회가 너무 시끄럽다.’
아무튼 본질이 아닌 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영적으로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경우가 없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본질은 놓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는다는 이 놀라운 은혜의 복음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본질이 아닌 다른 것에는 관대하십시오.
그것은 다른 것일 뿐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와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위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만나든지 상처를 주는 자가 아니라 위로, 격려, 용기, 그리고 열심을 회복하게 하는 위로자가 되십시오.
힌두교는 윤회설을 믿는데, 사람의 인생을 연령대별로 이렇게 구분했습니다.

0-25세 때에는 무엇이든지 열심히 배워야 하는 학습기이고, 
25-50세 때에는 열심히 노력하여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뤄야 하는 성취기이고,
50-75세 때에는 자기 영역에서 후배를 잘 키워야 하는 후학 양성기이고,
75세 이후는 다음 생을 준비하는 준비기이어야 한답니다. 
힌두교에서도 사람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우어주어 사람을 세우는 일을 소중한 것으로 여깁니다.

우리 사회는 근세사만 보더라도 일제 식민 36년간, 6.25전쟁 등으로 국난이 많아 한이 많고, 상처가 많습니다.
어떻게 삶의 울타리인 남편을 잃고, 어떻게 생떼같은 자식을 전쟁터에 보내면서 아픔과 한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겉은 멀쩡한 것 같지만 얘기를 들어보면, 쓴 뿌리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별의 아픔, 가난의 고통, 결손가정의 어려움, 거절의 두려움 등 쓴 뿌리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위로가 필요한 민족입니다.
여러분이 비수를 들이대지 않아도 충분히 상처받은 이웃입니다.
위로자가 되십시오.
우리의 짧은 인생은 위로하면서 살아도 모자랍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① 바울과 바나바에게는 ‘주님을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는 자’란 별명이 붙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위해 어떤 별명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까? 
② 초대 예루살렘 교우들은 위로자가 되기를 선택했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자입니까? 위로를 주는 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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