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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의 핍박 (요 15: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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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핍박 (요 15:18-27)


제가 지금 드리는 몇 가지 질문을 잘 들으시고, 손을 들어 대답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묻는 말에 ‘예’ 하시는 분은 오른 손을 들어 표시하시고, ‘아니오’ 하시는 분은 왼손을 들어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이는 먼저는 우리 자신에게 진실한 대답을 하는 것이고, 다음으로는 지금 우리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신앙고백이고, 나아가서 여러 성도들에게 우리 자신의 믿음을 알리는 신앙간증입니다. 대답하기가 곤란하거나, 손을 들기 싫으신 분은 가만히 계셔도 괜찮습니다.

1. 당신은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예. 아니오.)2.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예, 아니오.)3. 당신은 구원받은 성도입니까? (예, 아니오.)4. 당신은 포도나무 가지입니까? (예, 아니오.)5. 당신은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 살고 있습니까? (예, 아니오.)6. 당신은 하나님과 주님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를 사랑하십니까? (예, 아니오.)7. 당신은 이웃과 성도들을 서로 사랑하십니까? (예, 아니오.)8. 당신은 주님이 당부하신 사랑의 계명을 지키고 있습니까? (예, 아니오.)

9. 당신은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까? (예, 아니오.)10. 당신은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입니까? (예, 아니오.)위의 10 가지 질문 중에서 최소한 6개 이상에 '예'로 대답하신 성도는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6개 이상 '아니오'라는 대답이 나온 분은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문제는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 좋으냐,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것이 좋으냐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움을 받아도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싶으냐, 아니면 하나님께는 사랑을 못 받아도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 좋으냐고 하는 문제도 됩니다. 여기에는 누구의 강요나 부탁이 아니라, 성도 여러분 스스로의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은 강요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신의 자유의사에 따라서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복음 전하다가 잡혀가 하룻밤을 감옥에서 지낸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 공회 앞에 세워졌습니다. 

불법이나 비리를 조사해 보았으나 아무 잘못을 찾지 못한 당시의 권력자들이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이에 대해서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담대하게 대답했습니다.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이면서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는 것을 결코 편안하고 쉬운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어 주님께 속하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환난과 핍박을 받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따돌림을 당하고 버림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성도의 길입니다. 믿음의 순례자들은 어떤 고난이나 역경이 닥쳐와도 주님을 끝까지 믿고 따르겠다는 각오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핍박이 있습니까? 왜 세상은 우리들을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을 하는가요?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보다 먼저 주를 미워한다는 사실입니다. 
뉴욕의 한 유대인 여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가족들은 그 여자로 하여금 새로이 얻은 믿음을 버리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 했습니다. 유럽 여행을 시켜주기도 하고 그리스도를 부인하기만 한다면 갖고 싶은 것이나, 하고 싶은 어떤 일이라도 다 하게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리스도께 대한 그녀의 사랑 안에서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굳세게 버티었습니다. 마침내 여자의 부모는 딸을 위해 만찬회를 베풀고 모든 친구들을 다 불렀습니다. 

아버지가 식탁에 서서 손님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오늘밤 어떤 특별한 이유로 여러분을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우리 딸이 저 비천한 나사렛 사람을 따르기로 작정했습니다. 오늘 밤 내 딸은 마지막 결정을 내려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단념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부모의 집을 떠나든가 해야 합니다.” 
놀라고 당황한 딸은 한 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습니다. 얼마 후 딸은 피아노를 치면서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를 따라가도다. 이후부터 예수로만 나의 보배 삼겠네..” 
노래를 마친 딸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꾸려 부모의 집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최상의 희생을 기꺼이 치렀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처럼 대가를 치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요한복음 15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절로 11절까지는 주님과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 하면 내제적인 관계여야 된다. 주님이 먼저 나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은 내 안에 받아들임으로 내가 주 안에 있게 되는 것이고 내가 주 안에 있게 되면 주님에게서 진액이 오고 주님에게서 기운이 오고 주님에게서 생명이 오고 주님에게서 능력이 쏟아져 들어와서 잎도 피고 꽃도 피고 열매도 맺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12절로 17절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하면 사랑의 관계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은 없다. 어떻게 사랑하는 것이냐 하면 친구를 위하여 그러니까 상대방을 위해서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도 자기 목숨까지도 내어줄 수 있는 사랑이라야 한다. 나를 위해서 남을 이용하지 말고 저편을 위해서 나 자신을 주라 나 자신을 희생하고 나 자신을 봉사하고 내 자신을 갖다가 바쳐라. 

고전 10:33에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 하신 말씀처럼 너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남을 이용하지 말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해 주고 나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도록 하라. 그래서 그 사람들이 다 구원에 이르도록 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어디서 오느냐 하면 바로 주님으로부터 주어진다. 이미 주님이 그렇게 나를 사랑하셨고 또 지금도 그런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나도 다른 사람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도록 내 안에 사랑의 열매가 맺어 자라게 하셨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세 번째로 바로 그리스도인의 대 사회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리스도인의 세상과의 관계는 어떤 관계냐 하면 수난이란 말로 표현이 됩니다.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 세상으로부터 환난을 당하게 돼 있다 환난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예수님 말씀대로 예수님의 빛을 받아 가지고서 세상을 향해서 좋은 빛을 발하고 소금 노릇을 하고 그러면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받게 돼 있을 텐데 어째서 칭찬이 아니고 미움을 받게 됩니까? 참 이상한 얘기 아닙니까? 세상을 위해서 그렇게 희생적이고 봉사적이고 세상을 위해서 그렇게 좋은 일을 하는데 칭찬받아야 마땅하지 않나요? 그러면 당연히 칭찬이 올 텐데 어째서 환난을 당해야 하고 그렇게 어려움을 많이 당하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우리가 빛 되고 소금되고 선행만을 하는데도 왜 수난을 당해야 됩니까 하는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먼저 미움을 받았고 예수님이 자신이 먼저 고난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주를 미워합니까? 주님은 세상의 법칙을 따르지 않습니다. 세상은 자기 멋과 함께 자기 맛을 내고자 합니다. 오늘처럼 개성이 강한 시대, 그래서 자기를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시대, 소위 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과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기 때문입니다. 소금은 전혀 자기 색깔을 내지 않습니다. 소금의 기능은 바로 맛을 내는 기능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맛을 내는 기능을 가져야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 잘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했을 때 그리스도인은 소금이죠? 그러면 나머지는 뭡니까? 소금이 아니면 세상이죠? 그러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을 빼면 세상이 어떻게 됩니까? 맛이 없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음식에 최고급 한우 최고 비싼 부위를 넣고 제일 비싼 버섯을 넣고 최고급 요리사를 데려다가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데코레이션을 하고 본 차이나 제일 비싼 그릇에 음식을 담아서 내 놓았는데 소금을 넣지 않았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맛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능이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이 화려하고 발달하고 문화가 뛰어나고 얼마든지 멋있을 수 있습니다. 뛰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맛을 내게 하는 자는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 없으면 세상은 무미건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입니다. 

소금은 들어가면 맛을 바꿔 버리잖습니까? 여러분들이 국을 먹을 때 심심한 국을 싱거운 국을 떠먹다가 소금을 쳐 보십시오. 맛이 어떻게 됩니까?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소금을 쳤는데 국 맛 좋다고 합니까 소금 맛 좋다고 합니까? 국 맛 좋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풍요롭게 하고 맛을 내게 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그런 영향력을 나타내지만 결국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에게 영광을 안 돌립니다. 어쨌든 그리스도인이 바로 세상의 맛을 내는데 무슨 맛이냐 하면 세상의 살맛을 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살맛 즉 살맛 안나는 죄악으로 가득차고, 살맛 안나는 범죄로 가득차고, 살맛 안나는 부패로 가득 찬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살맛을 내야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영향력을 미쳐야 됩니다. 그런데 이 맛을 낼 때 소금이 어떻게 됩니까? 소금은 들어가서 녹아 버립니다. 아무리 굵은 소금을 처음에 뿌렸어도 시간이 지나면 그 소금은 없어져 버립니다. 이 원립니다. 우리가 영향력을 나타내고 맛을 드러내는 게 하나의 침투의 원리입니다. 침투의 원리는 자기 모양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소금이 자기 덩어리 그대로 있으면서 짠 맛을 낼 수 있습니까? 자기가 녹아 버려야 됩니다. 

자기가 없어져 버려야 됩니다. 바로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맛을 내는 사람들이 돼야 됩니다. 그 사람만 가면 그 어떤 단체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사람들의 삶에 힘이 넘치고, 삶에 바른 길을 찾게 되고 이런 맛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될 일입니다. 이것을 꼭 우리가 무슨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이 다 여의도 광장에 모여서 궐기 대회를 하고 이렇게 해서 되는 게 아녜요. 우리 형상을 드러내고 우리 모양을 드러냄을 인해서는 우리가 소금 역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어디에 처해있든지, 어디에 뿌려졌든지 거기서 내가 녹아 버려야 되는 겁니다. 내가 녹아 버릴 때 바로 맛을 내게 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은 맛이 있습니까 맛을 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두 번째는 소금이 부패를 방지합니다. 세상은 그대로 두면 썩어가는 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점점 세상이 발전하고 향상되어가고 과학과 혹은 문명이 발전해 나아가고 그래서 사람들의 의식이 깨이고 사람들의 교육 수준이 높아가고 그러면 이 세상은 밝은 세상이 오고 이 세상은 복지 국가가 오고 이 세상은 낙원과 같은 세상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그렇게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심각한 오륩니다. 그건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그대로 두면 썩게 돼 있습니다. 그래 세상은 점점 부패하게 돼 있습니다. 세상은 부패를 향해 달려갑니다. 내버려두면 곪아 썩어 문드러집니다. 그런데 그 일을 누가 막느냐면 그리스도인들이 부패를 방지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랬을 때 우리는 세상이 썩는 것을 방지하는 그런 역할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니 고난과 핍박이 오게 마련입니다.
딤후 1:8에 보면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주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버린 자들 아닙니까? 명예도 버리고 유익된 물질도 다 버리고 오로지 주를 위해서 충성하겠다고 나섰는데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많은 고난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고난들은 아름다운 고난이에요. 
딤후 2:3은 말씀합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고난의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이기 때문입니다. 시시한 군인, 별 볼일 없는 병사는 사탄도 우습게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라 그래서 마귀가 다 겁내는 게 아니고 좋은 군사만을 겁내는 겁니다. 시시한 군사는요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이등병 누가 거들떠봅니까? 적어도 영적인 스타는 돼야 적군들이 거들떠보죠. 마지막 시대의 마귀의 전략은 뭐냐면 대장을 치는 겁니다. 교회 목사 하나만 딱 쳐 노면 교회의 장로 하나만 딱 쳐 놓으면 그래서 담임 목사와 장로님들만 쳐 놓으면 그 교회 영혼들 다 말아 먹을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목사나 장로만 딱 치는 거예요. 구태여 밑의 성도 한두 명 쳐 봐야 안 되죠. 그러니까 가장 머리를 치는 거 그게 원래 전쟁의 한 병법 중의 하나인데 마귀가 그런 전법을 씁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왜 고난을 받는가 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기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예수로 인해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마귀도 인정할 만한 주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니 더욱 감사할 것이요 주님이 그런 나를 떠나지도 아니하시고 버리지도 아니하시며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면 지켜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의 돌보심을 항상 사모하는 믿음의 사람들 승리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에 고난을 당합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우리가 비록 살기는 이 세상에 살지만 그러나 어디까지나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이 아닌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입니다. 미국에 사는 우리 교포들 중에 비록 미국 영주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래서 그가 미국에 살고 있지만 그는 엄연한 한국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의 이름은 이미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이 되어졌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로서 이 땅에 사는 것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으로 미움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소속이 이 세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하늘나라의 소속된 백성된 것이 어떻게 된 것인가 하면 세상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자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사 43:1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또한 사 44:2은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하나님께서 택하셨습니다. 택하시고 지명하여 불러 주시고 우리를 깨우쳐 주시고 성령을 보내 주시어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고백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시고 사기꾼 같은 야곱 같은 우리를 의로운 자 여수룬으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래 이제 우리는 근본부터가 다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내주하여 계십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을 좋아하겠습니까? 

우리가 흔히 불륜과 로맨스라는 말을 합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네가 하면 불륜이라고 세상이 꼭 그렇습니다. 자기들이 하는 것은 작은 것 하나도 대단하다고 하면서 교회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거 당연한 거 가지고 그러느냐고 합니다. 세상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그저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도 교회가 잘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입에 침을 튀기면서 말합니다. 지난 번 샘물교회가 아프카니스탄에 봉사하러 갔다가 테러 단체에 의해서 어려움을 당할 적에 얼마나 이 사회가 대단했습니까?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나라가 처음에 그런 나라였다는 것을 압니까? 우리나라에서 희생당한 선교사와 개신교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조선 말기는 물론이고 일제 때도 많은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보다도 더 많은 순교자가 이북 공산당에 의해서 나왔습니다. 6.25 남침 전쟁 이전에 이북에서는 물론이고 6.25 이북에 의한 남침 전쟁 때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희생이 됐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이북에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발각되기만 하면 죽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이건 인간 취급도 안 합니다. 강제 수용서로 끌려가서 평생 햇빛도 보지 못하고 지하 감방에서 지내는 것을 물론이고 지하 광산에서 중 노동으로 이건 사람 같지 않은 날들을 보내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목숨을 걸었기에 오히려 그런 핍박을 당하면서도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주님 앞에 갈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더 어려운 것은 우리들입니다. 자유로운 것 같으나 알게 모르게 교회에 가해지는 그리스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해지는 사회의 핍박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게 만들고자 하는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방송에서 하나님이라는 말은 기독교 방송이 아닌 다른 방송에서는 금지어가 된 지 오랩니다. 무슨 국가고시 치고 주일날 치러지지 않는 고시가 없습니다. 

지난 번 화성시 각 지역별로 가진 6. 25 특별 연합 기도회 때 행사 현수막을 각 지역에 붙였습니다. 그랬더니 향남읍 사무소에서 다니면서 그걸 떼어냈습니다. 누군가가 전화를 했던 모양입니다. 그거 불법 현수막을 왜 그냥 내버려 두느냐고! 한데 그들이 하나 몰랐던 것이 있습니다. 얼마 전 대법원 판결에 교회 행사에 관한 현수막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붙일 수 있다는 판결이 나왔습니다. 이것이 알려져서 동탄은 다 떼어냈다가 사과하고 다시 붙였습니다. 

그런데 향남읍은 이런 사실을 이야기해 줘도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법원 판결문을 받아다 제시하고 난 다음에야 그들이 사과를 하고 자기들은 인력이 부족하니 교회에서 알아서 현수막을 다시 설치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구요. 아니 떼어낼 사람은 있어도 다시 붙일 사람은 없어요? 이게 바로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탄식할 이유는 없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핍박하고 우리를 힘들게 한다고 해도 우리는 거기에 지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세상이 우리를 비난하고 핍박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이 우리를 향한 기대 수준이 높다는 뜻도 됩니다. 세상은 어두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빛이 비쳐지면 어둠은 사라집니다. 어둠은 그만큼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빛이 사라지게 만들려고 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빛이 있어야 어둠이 어둠인 것입니다. 빛이 있음으로 어둠 속에 숨겨진 것들이 세상에 드러납니다. 그리고 어둠만으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모든 생명이 빛으로부터 시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세상은 또한 빛을 고대합니다. 

밤이 깊으면 곧 날이 밝기를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세상과 교회는 애증의 관계입니다. 미워하면서도 마냥 미워할 수만도 없는 관계라는 뜻입니다. 세상도 그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교회를 끌어내리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으로 남아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교회를 향한 독설을 날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교회 역시 그러한 독설과 핍박과 시련과 고난들이 있기에 우리 스스로를 바로 세워나갈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감리교 뉴저지 연회는 책 한권을 추천하여 읽고 토의하도록 교역자와 평신도에게 권장하고 있습니다. 그 책은 Loren Mead가 쓴 “Once and Future Church: 한 때 있었던 교회와 미래의 교회”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서구교회 퇴조의 원인이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초대교회의 부흥은 강력한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밖으로는 정치적 탄압, 기독교 박해, 고린도에서 보듯 풍기의 문란, 도덕의 퇴폐, 교회 내부로는 이단의 창궐, 유대교와의 알력 등 그 당시 예수를 믿으려면 육신적으로 고통을 당해야 했고 순교자가 줄을 이었습니다. 그 많은 안팎의 적과 싸우려면 전쟁터에 선 병사의 각오 없이는 기독교인이 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틴 대왕이 모든 식민지 주민을 강제로 기독교인으로 만들고 기독교를 나라의 종교로 선포하면서부터 교회는 적을 잃게 되었습니다. 자동적으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 핍박 없이 예수 믿을 수 있다는 것, 조상대대로 으례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닙니다. 서구교회가 퇴조하는 것이 너무 오랜 세월 전통적인 종교로 답습하다 보니까 맥을 잃고 신앙이 일상생활의 능력이 되지 못해서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짧은 역사지만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너무나 적이 많아 신앙의 불이 꺼질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으로는 일제의 기독교 탄압과 공산주의의 기독교 핍박이 북쪽에서는 지금까지 60년 계속되고 있습니다. 제사의식이나 남녀 7세 부동석 따위 유교 전통과의 충돌은 얼마나 심했습니까? 우리의 어머니, 할머니들은 남편에게 머리를 뜯기고 시부모의 학대를 받으면서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핍박은 결코 저주가 아니라 복이었음을 온 세계에 증명한 것이 한국교회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를 향한 세상의 비난이 계속되고 교회를 향한 세상의 핍박이 계속되는 것 역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깊으신 은혜인 줄 알아 감사하면서 고난을 오히려 복으로 바꾸어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세상은 주님도 핍박하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사람들은 지금 그런 어두움 가운데 있거든요. 깜깜한 어두움 속에서 방황합니다. 어떤 것이 바른 길이고 어떤 것이 살 길인지를 모릅니다. 어떤 것이 자신들에게 복을 주는 길인지 모릅니다. 자신들은 지금 자기가 가는 길이 행복한 길이라고, 성공을 보장하고, 참으로 만족을 줄 것이라고 생각되는 길을 따라서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두움 속에서 바른 길을 찾지 못합니다. 늘상 다니는 길이라고 해도 빛 하나도 없는 칠흑같이 어둥 밤이면 한발 앞으로 내딛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반드시 빛이 있어야 합니다. 

길을 비춰주는 빛이 횃불이 되었든 호롱불이 되었든 아니면 현대적인 랜턴이 되었든 간에 빛이 있어야 길도 찾을 수 있고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둠에는 빛이 없어요. 빛이 있으면 왜 어둠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빛이 되어야 합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주님으로부터 비쳐진 빛을 우리가 세상에 되비쳐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으로부터 빛을 받았습니다. 우리 안에 빛이 있습니다. 생명이 있습니다. 그 빛을 세상에 비쳐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사는 것이 행복의 길이고 생명의 길이고 평안의 길이고 만족의 길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인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점점 어두워져 갑니다. 하지만 그런 어둠 속에 살던 우리가 세상의 참 빛으로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고 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빛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도 이제 세상의 빛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빛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숨길 수가 없습니다. 빛은 어두움을 드러냅니다. 어두움에 속한 것을 드러냅니다. 아니 반대로 어둠이 빛을 드러냅니다.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작은 빛도 더 밝히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둔 어둠의 눈은 빛에 가 있기 때문입니다. 빛이 있어 어두움에 속한 것을 드러내면 세상의 죄가 드러나게 됩니다. 불법이 드러나게 됩니다. 불의한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부정직한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사람들 사이에는 자기네들끼리는 어떤 무언의 약속처럼 돼 가지고 서로 간섭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시비 걸지도 않고 그것이 정당한 것처럼 그것이 그냥 지당한 것처럼 살아버리는, 진리처럼 여겨 버리는 그런 것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가끔 그런 얘기 듣습니다. 그건 하나의 관행이었다 뭐 그런 말 있죠? 누구나 다 거기 있을 때는 다 그래 온 것이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그 일을 해 오면서 누가 그 일 때문에 시비 건 사람도 없고 그것 가지고 문제 삼을 사람도 없고 그 자리에 앉아서는 당연히 그렇게 사는 것이 관행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세계에서는 전혀 그것이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그리스도인 책임자가 부임을 딱 했다고 칩시다. 그러면은 어두움에 속한 것이 드러나야 되는 거예요. 세상이 어두움 속에 있어요. 드러나지도 않아요. 그리스도인이 있어서 이 어두움을 드러내야 되는 것입니다. 

불의하고 부당하고 부정직하고 죄악된 모든 것들이 또 그것에 속한 모든 것들이 드러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빛이 있음으로 자연히 어둠 속에 숨어 있던 것들이 숨겨져 있던 것들이 드러나게 되더란 말입니다. 빛이 어두움을 드러냅니다. 자기들의 본 모습이 드러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것이 기다 아니다 할 것도 없습니다. 말 하지 않아도 압니다. 빛이 있는 그 자체로 어둠에 묻혀 있던 어그러진 모습들이 그대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단지 어둠을 드러내는 것으로 그치면 안 됩니다. 그 어둠에 생명을 불어 넣어주어야 합니다. 빛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살 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어두움을 밝히는 자로서만이 아니라 길을 안내하는 안내자로서, 그것이 아니라 이것이 가야할 길이라고, 이것이 옳은 길이라고, 이렇게 사는 길이 결국 나와 내 가족과 내 민족과 모두를 위한 길이라고 그 길을 보여줘야 됩니다. 진정한 길을 안내하기 위해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됩니다. 마 5: 16에 보면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랬습니다. 

이 착한 행실 속에는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바르게 산다는 의미도 포함돼 있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적극적으로 전파하고 전도하며 산다는 의미도 들어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죄를 알려주고 죄를 지적하고 하나님 말씀의 기준에 비추어서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를 다 드러내야 됩니다. 속속들이 드러내야 됩니다. 가르쳐 줘야 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거 아니에요. 우리는 그 길에서 벗어나 바른 길을 안내해야 되는데 그런데 그 바른 길을 안내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 먼저 착한 행실로 살아야 되고 자신이 먼저 그렇게 본을 보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른 말하면 싫어합니다. 싫어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핍박하게 되어져 있습니다. 눈의 가시와 같으니 핍박이 오게 되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사셨던 삶이었고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이 걸어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보다 지혜롭게 살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잘못을 말하기보다 우리가 먼저 그들 앞에 착한 행실을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든 어둠 속의 시선은 빛으로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대고 너희는 어둠이라고 굳이 말해줄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빛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때 세상을 그것을 보고 두 가지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숨어들어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빛으로 나아오는 사람도 있게 될 것입니다. 빛 아래 살아간다는 것이 부담이 아닌 기쁨이요 감사요 행복한 삶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우리 자신이 먼저 깨달아야 하고 주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앞서 가시며 승리하는 복된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전에 우리가 많이 들었던 이야기이지만 다시 한번 하겠습니다.
어느 날 고난 받던 한 그리스도인이 꿈을 꾸었는데 그가 넓은 바닷가를 주님과 손을 잡고 걷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멀리 하늘가를 보니 그의 지나간 날들이 그림처럼 스쳐 지나가는데 거기에는 두 사람의 발자국이 계속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심각한 어려움을 당하던 때에는 이상하게도 발자국이 한 사람의 것뿐이 아닙니까? 그가 주님께 불평조로 물었습니다. 
“제가 어려울 때에는 특히 같이 계시겠다고 했는데. 저기에는 발자국이 한 사람의 것밖에 없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나란히 걷고 계시던 예수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대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너무 고통스러워하기에 내가 업고 걸었던 것이란다.” 
예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같이 계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후로 한 번도 하루도 우리를 버려두신 적이 없으십니다. 더욱이 그의 사랑하는 성도가 믿음 때문에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성경대로 살다가 환난을 당할 때 주님께서는 가장 마음을 쓰시며 도우십니다. 환난을 통해 더 강해지기를 원하시기도 하지만 그것이 너무 심할 때에는 직접 그 일에 간여하시고 업고 가신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히13:5은 말씀합니다. 
하루는 새 한 마리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무거운 날개를 두 개씩이나 양 어깨에 달아놓으셨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날 수 있는 것은 그 무거운 날개 때문이란다” 
우리는 하늘을 날기 원하지만 무거운 날개는 싫어합니다. 무거운 짐을 싫어합니다. 모세도, 엘리야도 짐이 무거워 이제 죽여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들은 그 짐 때문에 자신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선교사 한 분이 아프리카로 선교를 갔습니다. 원주민들과 함께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 원주민이 큰 돌을 선교사 가슴에 안겨주었습니다. 자신들은 큰 돌을 머리에 이거나 가슴에 안고 강을 건넜습니다. 그 선교사는 그 이유를 강 중간쯤 왔을 때 알았습니다. 강 중간쯤에 급류가 흐르고 있었는데 만약 무거운 돌이 없었다면 급류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무거운 짐이 자신들을 살린다는 지혜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볍고 편한 것만이 행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고 침체의 강을 건너게 하시는데 그것은 우리를 죽이기 위함이 아니고 우리를 살리기 위함입니다.

야고보서 5장 13절은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 지니라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환난이 있고 핍박이 있고 고난이 있을 때 오히려 기도하며 내가 하나님의 자녀된 증거가 그것도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된 증거가 나타남을 인해서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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