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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요 4: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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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요 4:19-26)

지난주 월요일 오후에 참으로 좋은 소식들을 연이어 들었습니다. 우리교회 장로님은 위암 치료를 받지 않아도 되고, 성도님 가정의 폐암 말기 환자가  90% 치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라 정말 놀랍고 놀라웠습니다. 제 입에서 ‘감사 합니다. 감사 합니다’ 가 연신 터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감사하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환우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기적같이 회복이 되었는데 그들이 돌아온 자리는 특별한 자리가 아니라 아프기 이전의 평범한 자리였습니다. 이것을 통해 평범한 현재의 우리의 삶이 얼마나 큰 기적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평범한 삶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감사함이 없이 삽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기적이 나타나지 않는 삶이라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죽음의 사선을 넘나드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을 덧입어 돌아오는 자리가 평범한 자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평범한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연속적인 기적 가운데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평범한 삶을 위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오늘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평범한 삶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고 기적입니다. 감사하며 삽시다’ 옆 사람들과 함께 격려하며 인사를 나눕시다.

이와 같은 원리는 예배하는 우리의 영적인 자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의 전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평범한 이 시간이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싶어도 건강이 여의치 못해 예배하는 자리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평범하게 예배드리는 이 시간이 은혜 중의 은혜의 시간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설교가 은혜가 된다. 은혜 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성가대가 은혜가 된다. 은혜가 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대표 기도가 은혜가 된다, 은혜가 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그 자체가 감사이고, 은혜입니다. 

영어 단어 가운데 Present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선물’ ‘은혜’이라는 의미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현재’ ‘지금’의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가 우리에게 주는 귀한 교훈이 있습니다. 현재가 바로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범한 지금의 삶이 가장 귀한 은혜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평범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진정한 행복을 깨달을 때 그 자체가 소중한 것이고, 산 제사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일주일에 여러 차례 예배를 드립니다. 주일예배, 수요예배, 새벽예배, 금요기도회, 구역예배 등 많은 예배를 드립니다. 성도들은 예배를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드려야 하는 의식 정도로 생각합니다. 

예배를 타성에 젖어 드리다 보면 예배하는 자세에 감사함과 간절함이 없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인데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과 기쁨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사람을 의식하며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를 연극에 비유한다면 예배 자는 관객이 아닙니다. 예배 자는 배우입니다. 예배에서 유일한 관객은 하나님이십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 자는 배우가 되어 온 몸과 마음으로 경배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런데 예배 자가 자신의 역할을 잘못 인식해 자꾸 관객석으로 내려가 자신이 예배를 관람하며 판단하고, 평가하려고 합니다. 도리어 더 잘못된 예배 자는 하나님을 무대로 올려 자신들에게 무엇인가를 보여 줄 것을 요구합니다.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된 예배 자의 모습입니다. 

구약에 아모스 선지자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패역한 삶을 살 때 하나님은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회개할 것을 촉구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신실함과 간절함이 없는 형식적인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예배 자세와 마음가짐을 지적했습니다. 

아모스 8장 5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며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월삭과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성전에 나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배에는 마음이 없습니다. 돈벌이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월삭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너무나 지루하고,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했습니다. 월삭과 안식일을 빨리 끝내고 밀을 매매해 돈을 벌고 싶을 뿐입니다. 그들의 머리에는 예배를 드리면서 저울을 속여 돈을 더 버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아모스 8정 7절을 통해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두고 맹세하시되 내가 그들의 모든 행위를 절대로 잊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마음과 정성을 다해 드리지 않는 형식적인 예배를 거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가볍게 여김을 잊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예배에 관해서 말씀하신 것은 오늘 본문이 유일한 말씀입니다. 23, 24절의 말씀입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 할지니라’

여기 ‘찾는다’는 말은 원어로 ‘제테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누가복음 15장에도 사용되었습니다. 100마리의 양을 키우던 목자가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우리에 놓아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다고 할 때 사용했습니다. 10개의 드라크마를 소유하고 있던 여인이 잃어버린 한 개의 드라크마를 찾으려고 등불을 켠 채 온 집안을 쓸면서 찾아 헤맬 때 사용했습니다. 아들을 잃어버린 부모가 아들을 찾아 나설 때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진심으로 예배하는 자를 얼마나 간절하게 찾고 계신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를 찾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 자는 영으로 예배하는 자입니다. 

여기에서 영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압니다.  예배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중심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잘못하면 예배가 사람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어느 교회는 주일 예배를 20분 만에 드리는 교회도 있다고 합니다. 현대인들이 바쁘게 사니까 짧은 예배를 원합니다. 교회가 거기에 맞춰 예배 시간을 짧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편리에 따라 20분 만에 드려지는 예배 안에 진정한 예배의 영성이 살아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예배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진리로 예배 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순수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보면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간절함으로 예배하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에는 그의 제사를 믿음이 없는 제사라고 말합니다. 말씀에 따르지 않고 자신의 환경에 따라 예배하며, 간절함이 없이 형식적으로 드려지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에 뿌리를 두고, 사모함으로 드린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제사를 믿음의 제사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킵니다. 그들은 금요일 저녁 해가 지는 시간부터 안식일을 지킵니다. 가족들이 그 시간에 맞춰 다 집으로 돌아옵니다. 어머니는 하나님의 빛이 가정에 들어오기를 기원하며 초에 불을 붙입니다. 가족이 식탁에 둘러 앉아 안식일 의식에 따라 아버지의 인도로 가정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일주일 중에 최고의 식탁을 마련해 음식을 나눕니다. 

흩어져 있던 가족들도 안식일에는 가정으로 모여 가족이 함께 안식일을 지킵니다. 토요일 아침이 되면 온 가족이 함께 회당이나, 성전으로 나가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가족이 함께 음식을 나누며 대화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 대화는 아버지가 토라를 중심으로 이끌어갑니다. 

아버지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질문을 하고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대답 합니다. 율법의 말씀을 가지고 토론을 합니다. 그들의 토론은 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생각과 삶에 적용시키기 위함입니다. 부모와 대화를 나누는 안식일을 통해 유대인의 자녀들은 논리적인 사고력과 창의성, 남의 말을 귀 기울여 경청하는 자세, 남을 설득하는 설득력, 사회성 등을 배우고 익힙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밥상머리 교육입니다. 

안식일이 끝나는 시간이 되면 부모들은 아이들을 하나씩 품에 안고 축복의 기도를 해 줍니다. 그들이 지키는 안식일은 회당과 성전에 나가 한 번 예배 드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루 종일 하나님의 말씀과 정신을 중심으로 자신들을 살피는 삶을 삽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골프로 치지 않습니다. 건강을 위해 등산도 하지 않습니다. 친구들과 만나 술을 한 잔하며 스트레스를 푸는 시간도 갖지 않습니다. TV도 보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돈을 더 벌기 위해 시간을 쪼개 일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준으로 그들을 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삶입니다. 재미가 없는 삶이고 비생산적인 삶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유대인들이 세계의 경제, 과학, 문화 모든 영역에 걸쳐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구촌에서 청소년 탈선이 가장 적은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2000년이 넘는 오랜 박해 속에서도 유대인들이 저렇게 굳건하게 서서 세계를 지배하는 민족이 된 것은 그들이 안식일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이 안식일을 지켰고, 안식일이 유대인을 지켰다’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2000년이 넘도록 전 세계를 떠돌며 모진 박해와 조롱을 당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박해를 당해 위기에 몰려 도망을 하게 되면 다른 것 보다 안식일에 가정 예배를 드릴 때 사용하는 용품 가방을 가장 먼저 챙겼다고 합니다. 이것이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세이고 산제사입니다. 그 위에 하나님은 축복하셨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예배에 성공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배에 성공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예배는 분명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의 모습이 되어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복된 자리에 서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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