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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 향한 진실함과 깨끗함 (고후 1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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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향한 진실함과 깨끗함 (고후 11:1-15)


고린도후서 10장부터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자기를 겨냥한 여러 가지 비난에 대한 응수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11장에서도 계속합니다. 먼저 본문 1절에서 그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원하건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 합니다. “용납하라” 한 것은 달리 말하자면 “참아달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대적하면서 자기 자랑을 늘어놓고 스스로를 사도로 자천하는 자들을 어리석고 미친 자들로 경멸했습니다. 그런데 그들과 맞서기 위하여 바울도 자기 자신에 관해 있는 그대로 말하려고 하면서 자기의 어리석음을 조금 참아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자랑을 하는 어리석음을 스스로 행하고 싶지 않지만 대적하는 자들이 하도 거짓말로 자기를 공격하고 비방하기 때문에 사실대로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고 그래서 그것이 자기 자랑을 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이해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그렇게 어리석어 보이는 일을 하는 것도 다 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위한 열심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열심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본문 2절 상반절에서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한 것이 그 말입니다. 여기서 “열심”이란 말은 “질투”라고도 할 수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옛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십계명 중 제2계명을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4-6, 신5:8-10) 하셨습니다. 

다른 어떤 신도 우상도 용납하지 않으시는 이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또한 고린도 교회 신자들로 하여금 바울 자신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과 복음 외에 다른 어떤 예수나 영이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한 것입니다. 사람의 질투는 나쁜 것이지만 하나님의 질투를 나누어 갖는 것은 선입니다. 바울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 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향하여 가지신 그 열심을 자기에게도 나누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린도 교회가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순결한 신부같이 나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하는 열심을 자기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영적 아버지로서 딸과 같은 고린도 교회가 순결한 신부로서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데 참 신랑 아닌 가짜 예수 그리스도들이 고린도 교회를 유혹하여 그 신자들의 마음이 어지럽게 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는 열심 곧 질투심을 갖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 본문 2절 하반절부터 4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사도 바울은 여기서 고린도 교회를 향한 자기의 마음을 애지중지 기른 사랑하는 딸을 시집보내려고 하는 아버지의 심정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딸에게 과분한 너무 너무 좋은 신랑을 찾았습니다. 이제 둘이 혼인하기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정혼한 상태입니다. 그 당시 정혼한 남녀가 정식 부부관계에 들어가기까지의 기간은 보통 일 년입니다. 그 일 년 동안 서로의 순결을 유지하며 혼인예식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남자 저런 남자가 정혼한 딸 주변에서 서성대며 딸을 유혹합니다. 딸이 몰래 이 남자 저 남자 만나기도 하고 놀러 다니기도 하며 한데 어울려 술도 마시고 춤도 추러 다닙니다.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혼사인데 딸이 마음과 행실이 흔들린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그 아버지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딸에게 접근하는 모든 남자들을 딸의 행복과 일생을 망칠 자들로 여겨지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그자들이 딸에게 “네 아버지가 다른 욕심이 있어서 너를 빨리 저 남자에게 팔아넘기려는 것이라”고 속삭여서 딸이 아버지를 보는 시선이 예전과 다르다면 그 아버지의 심경이 어떠하겠습니까? 바울은 그런 심경으로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자기가 전하지 않은 예수나 어떤 영이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가리켜 말하기를 에덴동산에서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뱀과 같은 자들이라고 서슴지 않고 말합니다. 뱀의 그 달콤한 말에 넘어간 하와가 하나님 앞에서 타락했듯이 그자들의 감언이설에 넘어가면 고린도 교회 신자들의 마음도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렵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진실함”이란 “단순성”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향한 한결같은 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신자들은 그 뱀과 같은 자들의 말을 어찌 그리 잘도 용납하느냐고 바울은 질타합니다. 

이어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정신을 차리게 하기 위하여 뱀과 같은 자들이 그들을 미혹하려고 자기에 관하여 한 악평과 비방에 대해 반박합니다. 바울에 대한 그의 적대자들의 첫째 악평은 그가 말을 잘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대답합니다. 본문 5-6절을 먼저 봅니다: “나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 생각하노라.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바울은 헬라의 궤변가들처럼 수사학과 웅변술을 익히지 않았고 화려한 언변을 구사하지 않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지식에 있어서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음을 자신 있게 말합니다. 스스로 “지극히 큰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보다 부족할 것이 전혀 없다고 장담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스스로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가짜 교사, 거짓 사도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고린도 교회를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 지키기 위한 열심 때문에 자기 자랑을 하는 어리석음을 참아달라고 서두에서 바울은 이미 양해를 구한 바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 대한 그의 적대자들의 둘째 악평은 그가 비천하다는 것입니다. 즉 그가 복음을 전하는 대가로 교회로부터 보수를 받지 않으며 스스로 천막 만드는 일을 해서 자기 생활을 꾸려가는 것은 가르치는 자로서의 신분을 아주 격하시키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연사들이 얼마나 받느냐에 따라 평가되곤 했던 것 같습니다. 아주 유명한 연사는 사례를 많이 받고 덜 유명한 연사는 조금 받으며 무명의 연사는 공짜로 연설을 하곤 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돈을 받지 않고 복음을 전한 것에 대해 그의 대적들은 그가 권위가 없거나 능력이 부족한 아마추어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그의 사도로서의 권위를 부인하려 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반문합니다. 본문 7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값없이 받은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전한 것이 잘못된 일이냐는 것입니다. 교회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손수 일해서 돈을 벌어 먹고사는 것이 혹 스스로의 신분을 낮추는 일이 되었다 치더라도 그것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높이려고 한 것인데 그것이 죄인가 반문한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너희를 높이려” 했다 하는데 그가 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높이려 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슨 말이겠습니까? 그것은 영적으로 그들의 수준을 높이려 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즉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해서 일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값없이 복음을 전한 것은 거기에 거짓 교사들이 연설을 통해 많은 돈을 벌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요구할 수도 있었지만 그가 거짓 교사들 가운데 하나처럼 여겨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의 거짓 사도들의 비방을 원천봉쇄하기 위하여 고린도에서는 교회로부터 자기를 위한 일체의 재정적 도움을 사양했지만 그것은 그 자신이 본래 신자들과의 친밀함이나 사랑의 관계를 맺고 서로 돕는 일을 몰라서가 아님을 말합니다. 본문 8-9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비용을 받은 것은 탈취한 것이라. 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비용이 부족하였으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리라.” 

8절에서 바울은 “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비용을 받은 것은 탈취한 것이라.” 합니다. 과격해 보이는 이 말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우선 고린도 교회에서는 열심히 섬기기만 하고 그 대가를 받지 않았으면서 다른 여러 교회에서는 비용을 받은 것은 탈취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고린도는 경제적으로 부요하고 풍성한 데 반해 마게도냐 지방은 극심한 가난에 처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탈취한다”는 말은 강탈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말은 군대 용어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옛날 군대에서는 전투에 참가하는 병사들에게 급료 대신 패한 적군들에게서 전리품을 취하게 하곤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여기서 “탈취한다” 한 것은 “급료를 받는다”, “정당한 대가를 받는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마게도냐 같이 가난한 지역에서도 복음을 전하고 그 사역에 필요한 재정적 지원을 받은 바울이 보다 부유한 고린도에서 얼마든지 자신의 복음사역을 위한 재정적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고린도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킬 자들을 잠재우기 위하여 일부러 일체의 재정적 부담을 주지 않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정문제로 자기를 비방하는 자들은 사탄의 일꾼들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한 대가로 보수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보수를 받지 않았다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열심히 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더욱 열심히 했습니다.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구원의 진리를 그는 힘껏 전했습니다. 그 진리를 위해 온갖 고초를 겪었습니다(고후11:23-27). 그것을 고린도 주변의 아가야 지방에서는 다 아는 일입니다. 아가야 지방에서 바울이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면서도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 그리스도의 구원의 진리를 전한 사실을 자랑하는 것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본문 10절입니다: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 아가야 지방에서 나의 이 자랑이 막히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11절에서 바울은 묻습니다: “어떠한 까닭이냐?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아니함이냐?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어떠한 까닭이냐?” 한 것은 고린도 교회를 위한 바울의 그 놀라운 헌신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적자들이 그를 비방하며 그의 사도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물음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아니함이냐?” 한 것은 바울의 대적자들이 말 퍼뜨리기를 바울이 대가를 받지 않은 것은 고린도 교회를 위해서 한 일이 없으며 그것은 고린도 교회신자들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그들도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반문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기가 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스스로 말하기보다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복음을 전하되 보수를 받지 않는 그의 사역의 원칙을 계속해서 지키려는 그의 뜻을 밝히고, 그 이유는 사탄의 일꾼들에게서 자기를 비방하며 스스로 사도들로 사칭할 기회를 박탈하고자 함이라 말하고, 그런 자들은 그 행한 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 경고합니다. 

본문 12-15절입니다: “나는 내가 해 온 그대로 앞으로도 하리니 기회를 찾는 자들이 그 자랑하는 일로 우리와 같이 인정 받으려는 그 기회를 끊으려 함이라.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옛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그때 그들만의 문제가 아님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교역자를 비방하고 음해하는 말에 쉽게 귀 기울이는 교인들, 정통교회가 성경대로 선포하는 말씀이 아닌 이단들의 궤변에 잘 넘어가는 교인들, 무슨 일이든 부정적이고 악의적으로만 해석하며 교인들의 마음을 흐트러뜨리기를 즐기면서도 스스로를 의의 일꾼으로 행세하는 자들은 오늘날도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가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교회이며 그런 자들을 자기의 일꾼으로 사용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본문32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를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러한 사태를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뱀의 간계에 미혹된 사건에 연결시켰습니다. 사탄에게 속은 하와는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입니다. 그녀가 왜 불순종했습니까? 교만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무슨 교만입니까? 선악과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다는 말에 그만 교만한 마음을 품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과 악의 유일하신 입법자이신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하나님이 정해주신 대로 선과 악을 알고 따르기보다 자기 좋은 대로 자기 마음대로 선과 악을 정하며 행하고 싶어한 것입니다. 그것이 교만입니다. 그런 교만은 그런데 어디서 왔습니까? 불신앙입니다. 선악과의 열매를 먹으면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그것을 먹어도 죽지 않으리라는 사탄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인 것입니다. 

그 불신앙이 교만을 낳고 교만이 불순종을 낳았으며 그 불순종이 인류의 온갖 불행을 초래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인간의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겸손과 순종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인 믿음과 그 앞에서 마땅한 겸손과 절대적 순종의 삶을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삶의 자세를 흔드는 다른 일체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을 향한 우리의 진실함과 깨끗함을 지키는 길입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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