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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까? (갈 6: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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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까? (갈 6:11-17)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갈라디아서 6장 11∼17절)

옛말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 세상에 자기의 이름, 자기의 흔적을 남기길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일생을 통해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 육체의 자랑

갈라디아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수하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지방을 떠난 후에 교회 안에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다른 복음’ 즉 거짓된 교리를 전한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에 초보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은 혼란에 빠져 동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율법주의자들의 가르침을 따라 할례를 받고 경건한 척하며 자신의 육체의 행위들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이 갈라디아교회의 성도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고 했던 것은 자기를 돋보이게 하여 육체를 자랑하기 위함이었습니다(갈 6:12∼13).

이 율법주의자들은 마치 종교적 행위를 자랑하던 바리새인들과 같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정기적으로 금식하며, 경전을 연구하며,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등 자신들이 정한 율법의 항목들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의 이르는 길이 행위가 아닌 믿음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1장 17절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율법을 가장 잘 지켰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마 23:33). 왜냐하면 그들의 열심이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사람들을 실족케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혹여 새벽기도에 열심히 참석하고, 십일조 생활을 하며, 성가대에서 봉사하고 전도하는 것을 자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앙생활을 오래 한 것이나 교회에서 받은 직분을 자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헌신과 충성이 육체를 자랑하기 위해 행해진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열심과 헌신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이 할례를 강요한 또 다른 이유는 기독교가 과격한 유대인들에게 당할 박해를 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십자가는 패배와 수치 그리고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가르치는 기독교의 메시지는 유대인들에게 걸림돌이자 미련한 가르침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과격한 유대인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으며 그들과 교제를 나누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박해를 가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거짓 교사들이 할례를 강요하는 것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오는 박해를 면하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육체의 행위를 자랑하기 위함이라고 편지를 쓴 것입니다. 

육체의 행위를 자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욱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학식이나 도덕이나 물질을 자랑하고 ‘자기’라고 하는 우상에 빠져 예수님과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육체의 행위나 세상의 것들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육체가 아닌 성령을 따라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만 자랑하고 예수님만 높이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해 주십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이유도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는 잘못된 교리를 바로 잡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성 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한 돈을 모으기 위해 존 테젤(John Tetzel)이라는 사제가 돈을 내고 면죄부를 사면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사람들을 현혹시켰습니다. 그리하여 19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가톨릭 교리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95개조 항목을 발표하며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는 것을 선포한 것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하는 모든 선행과 헌신은 구원의 전제 조건이 아닌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여 주님께 드리는 구원의 열매로 나타나야 합니다.

2. 우리의 자랑

사람들은 누구나 나름대로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산을 자랑하고 어떤 사람은 학식이나 명예 혹은 업적을 자랑합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도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정통 유대인이요, 베냐민 지파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요,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요,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 이 모든 자랑거리를 다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구원 받은 후 사도 바울의 자랑거리는 오직 십자가뿐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는 십자가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이를 위해서라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를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요, 구원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인간과의 관계를 해결해 주는 화해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0절은 말씀합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절망을 희망으로, 저주를 구원으로, 죽음에서 영생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십자가에는 자유와 치유와 기쁨과 평안이 있고 무한한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영성작가인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 목사님은 십자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역사의 단 한 가지 불가항력적인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모든 것의 중심이다. 십자가는 우리의 전부이다. 다른 모든 것은 거기에 종속될 뿐이다. 이 십자가에 인생을 거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새로 지으심을 받은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갈 6:15).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행위가 자랑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1973년도 제가 교회학교 교사로 섬길 때 성결교회의 한 장로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우리교회 교회학교로 보내셨습니다. 자택이 마포였는데 장로님 댁에 심방을 가니 아이들을 우리교회로 보낸 이유에 대해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 장로님께서는 교회가 성전을 건축할 때 많은 헌금으로 교회 건축을 도왔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성도들이 그 장로님을 매우 존경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장로님께서 자기 딸이 교회학교에서 노는 모습을 우연히 지켜보다가 그만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이들끼리 놀다가 의견출동이 일어나자 장로님의 딸이 그 아이들을 야단치듯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너희들 나한테 함부로 하지 마. 이 교회 우리 아빠가 지은거야” 딸의 말을 듣고 놀라신 장로님께서는 그 자녀들을 우리교회에 보내어 1년 이상 신앙생활하게 한 뒤 다시 본 교회로 돌아가 교회를 섬기게 했습니다.

그 자매가 35년이 지난 어느 날, 제게 연락을 했는데 장로님이신 아버지께서 유산으로 땅 2만평을 주셨다며 양로원을 지어 달라고 저에게 땅문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서 해남 땅 끝 마을에 목사님, 선교사님들이 은퇴하고 거하실 수 있는 은퇴교역자 숙소를 짓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자매는 장성하여 예수님만 자랑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이 세상 사람들은 육체를 자랑합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평생 자랑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여야만 합니다. 

3. 예수님의 흔적

바울은 자기에게 ‘예수님의 흔적’이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헬라어 성경을 보면 바울이 말하는 ‘흔적’은 낙인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노예가 어느 주인의 소유임을 증명하기 위해 노예의 몸에 불에 달군 인두로 지져 낙인을 찍었습니다. 또한 장군들이 황제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의미로 스스로 자신의 몸에 낙인을 찍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바로 자신이 예수님을 위해 살고 예수님을 위해 죽는 예수님의 소유물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7절은 말씀합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그러므로 바울이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말한 것은 자신이 예수님의 종, 예수님의 소유물이었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위해 살고 예수님을 위해 죽기로 결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자신의 고백처럼 복음을 증거하다가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수없이 매 맞아 온 몸이 상처투성이였습니다. 이 상처들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의지를 버리고 예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삶 속에서 갖게 된 예수의 흔적이었습니다(고후 11:23∼27).

예수의 흔적이란 자기 의지를 죽이고 예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삶 속에서 남은 흔적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따라 가려면 갈등도 겪고, 손해도 보고, 힘든 일도 겪습니다. 때로는 사도 바울처럼 몸에 상처가 남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를 위한 흔적이 아니라 바로 예수의 흔적입니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은 여수 애양원에서 나병환자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곳을 출입할 때 마스크에 장갑을 끼고 장화를 신었지만 손양원 목사님은 맨손으로 그들을 만났고 나병환자의 고름 나는 발을 입으로 직접 빨아주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놀라며 경계의 눈빛을 보내던 나병환자들도 손양원 목사님의 진심을 알게 된 이후 오히려 목사님이 병이 걸릴 것을 걱정하며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때 손양원 목사님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차라리 내가 나병에 걸렸으면 좋겠다. 그리되면 저들처럼 가까이 오지 말라고 뒷걸음치는 환자가 없지 않겠는가? 언제라도 그들과 함께 웃고 떠들고 뛰놀 수 있지 않겠는가?” 또한 손양원 목사님은 여수 반란 사건 때 두 아들이 공산당원이었던 안재선에 의해 살해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자신의 아들들을 죽인 공산당원 안재선을 용서하고 자신의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야말로 예수로 인해 살고 예수를 위해 죽은,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는 삶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흔적을 남기고 있습니까?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이제 새롭게 결단하여 일평생 주님 뜻대로 살다가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입술로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마음으로는 나를 사랑하고 주님과 멀어져서 늘 내 마음 속에 미움과 분노와 이기심을 가지고 살았던 것을 회개합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한 번뿐인 인생, 짧은 인생길을 걸어가는데 정말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주님 앞에 쓰임 받는 저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은혜 내려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영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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