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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역의 동역자인 부부 (고전 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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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의 동역자인 부부 (고전 7:1-7)


미국의 컬럼비아-바이블 대학의 로버트슨 맥퀼컨 학장이 그의 아내 무리엘이 치매에 걸리자 그 동안 맡아온 학장직을 돌연 사임하고 아내를 돌보기로 선언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아내 무리엘은 지난 8년 동안 건강이 점점 약해졌습니다. 최근 제가 그녀와 함께 있어 주는 것을 그녀가 아주 만족하게 생각하여 이제는 제가 그녀를 잠시라도 떠나 있으면 몹시 불안해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심할 때 그녀는 불안해 하는 정도가 아니라 저를 잃었다는 상실감에 두려워하여 집밖으로 나올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저는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학장직을 사임하고 아내 곁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은 제가 42년 전 결혼식에서 “병들었을 때나 건강할 때나 함께 하며 죽음이 우리를 갈라 놓을 때까지 아내를 돌볼 것”을 서약했을 때 약속한 것이었기에 별로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 동안 아내는 40년이 넘도록 저를 돌보아 왔습니다. 이제는 제가 그 사랑을 빚을 갚기 위해 아내를 돌보는 것입니다. 물론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아내에 대한 사랑과 기쁨으로 할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얼마나 감동적인 고백입니까? 부부는 이렇게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서로를 섬겨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부부란 5단계 변화가 있습니다. 좋아서 살다가, 어쩔 수 없이 살다가, 필요해서 살다가, 불쌍해서 살다가, 묻어 주려고 살지요.”
또 어떤 분은 이런 말도 하였습니다. “남녀간의 사랑은 5단계로 익어갑니다. 황홀의 단계로 결혼은 시작합니다. 조금 살다 보면 단점이 드러나 실망의 단계, 아이를 낳고 살면서 포기의 단계로 접어듭니다. 
그리고 미운 정 고운 정 다 드는 단계로 들어갑니다. 늙으면 등을 긁어줄 사람이 없어서 사는 단계입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꽃 중에 ‘해당화’라는 꽃이 있습니다. 어느 부부에게 이 ‘해당화’라는 말로 상대방에 대한 감정을 표현하도록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남편은 “해가 갈수록 당신은 나를 화목하게 해!”라고 말했는데, 아내는 “해가 갈수록 당신은 나를 화나게 해!”라고 말했습니다. 
“해가 갈수록 당신은 나를 화목하게 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부부 십계명을 꼭 지켜야 합니다. 

1. 두 사람이 동시에 화내지 말자
2. 집에 불이 났을 때를 제외하고 고함을 지르지 말자.
3. 눈이 있어도 흉을 보지 말고, 입이 있어도 상대의 실수를 말하지 말자.
4. 아내나 남편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자.
5. 아픈 곳을 긁지 말자
6. 화를 간직한 채 잠자리에 들지 말자
7. 처음 사랑을 잃지 말자
8. 결코 단념하지 말자
9. 서로 숨기지 말자.
10. 부부는 하늘의 섭리로 됨을 믿자.

부부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
남자와 여자가 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루어 사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이고 축복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서가 쓰여질 당시 고린도 지역에서는 좀 이상한 사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육체는 전혀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사용하든지 상관없고, 본능이나 육욕을 충분히 만족시켜도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는 사상입니다. 이는 극단적인 쾌락주의자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이들이 있습니다. 이단 종파 가운데 우리가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았으니 육체는 어떻게 사용해도 상관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단들처럼 육체를 아무렇게나 내던져 쾌락에 빠지는 것은 결국 자기 몸을 방치하여 도덕을 폐기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사상과 정반대의 사상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육체의 욕망을 극단적으로 혐오했습니다. 그들은 육체는 악하기 때문에 육체를 억압해야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극단적인 금욕주의자였습니다.
그들은 육체가 자연적으로 가진 본능과 육망을 모조리 부정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극단적인 쾌락주의와 극단적인 금욕주의 사이에서 중용을 지켰고, 그런 중용의 도를 고린도교인들에게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다음과 같이 권면했습니다. “너희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라. 너희는 거리에 나가기만 하면 반드시 세상의 유혹이 사방에서 엄습하는 고린도에 살고 있다.
너희 자신의 몸을 보면 너희 몸은 자연적이고 건강한 욕망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만일 그 육체의 욕망을 건전한 방식으로 해소하지 못하면 죄에 빠질 수도 있다. 우리는 적당히 먹어야 하고, 적당히 운동해야 하고, 적당히 자야하고, 좋은 것들을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고 많이 먹고, 운동하지 않고, 자지 않고, 나쁜 것들을 보면 우리 몸은 병들게 된다.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 사랑하여 결혼하는 것도 자연적인 욕망이다. 만약 그 욕망을 결혼이라는 방법으로 적절히 해소하지 못하면 잘못하면 죄에 빠질 수 있으니, 홀로 살면서 죄에 빠지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것이 훨씬 좋은 방법이다.“

독신으로 사는 것이 좋을 수도 있고, 결혼을 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독신으로 살든, 결혼을 하든 그 목적이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독신으로 살면서 온갖 음행을 저지른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기에 올바른 선택이 아닙니다.
결혼을 하면서 빛과 소금의 삶을 산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기에 올바른 선택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해 결혼보다는 독신의 삶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독신의 삶 또한 아름답다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독신보다는 결혼하여 부부로 사는 것이 보다 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 수도 있기에 결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도 올바른 선택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결혼을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가 아니라 독신과 결혼 둘 중에서 어떤 삶이 자신에게 보다 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 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진리는 독신이냐 결혼이냐 하는 문제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 사이에서도 적용됩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 가운데에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되기 위해서는 부부관계를 일체 끊어야 한다는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부부관계를 하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고, 부부관계 자체를 멀리하는 부부들마저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부관계를 하지 않는 것이 영적인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부부관계를 하느냐 마느냐는 그 자체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부부관계를 하지 않는 부부가 도리어 육체의 욕망에 빠져 그릇된 욕정의 삶을 살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기에 부부관계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부부관계를 하는 부부 또한 부부관계를 하는 것 자체가 악하거나 선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목적입니다. 부부관계에만 집착하여 그 어떤 금욕적인 영적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결혼을 했다면, 바로 결혼한 배우자들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협력하는 동역자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결혼을 협력이라고 보았습니다. 

부부는 한 몸이라 남편은 아내로부터 독립적일 수 없고, 아내 또한 남편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없습니다. 부부는 서로를 의지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부부는 언제가 같이 행동해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수단으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남편은 아내를 자기의 욕망을 단순히 만족시키는 도구로 보아서는 절대 안되고, 아내 또한 남편을 오로지 돈을 벌어오는 일꾼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부부가 서로 존경하며,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배려할 때 최고의 만족과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부부가 서로 협력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일입니다. 
신자는 결혼을 신앙적인 관점에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신앙적인 면에서 결혼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결혼하는 배우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일을 하는데 함께 동역하는 동역자입니다. 

우리들 부부는 주의 일의 동역자들입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의 삶이 보여주는 것처럼 부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동역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성도들이 부부 간에 함께 교회 봉사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 어떤 청년이 제게 말했습니다. “모 집사님 부부의 주일학교 봉사는 저희들에게 얼마나 아름다워 보이는지 모릅니다. 우리도 앞으로 결혼해서 집사님 부부처럼 함께 교회를 섬기고 싶습니다.”
부부가 함께 교회를 섬기는 것이 결혼하지 않고 혼자 섬기는 것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유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일을 하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생각에 반대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과 같이 살기를 원한다고(7절) 권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독신의 유리한 점을 말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직 주의 일에 전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삶의 모든 목적은 바로 주의 일에 전념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기에 독신으로 살면 주의 일에 전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처럼 독신으로 살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성경에 바울이 결혼을 했는지, 그냥 독신으로 살았는지는 확실하게 나와 있지 않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그가 결혼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유대인 랍비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는 유대교의 율법과 유전에서 규정하고 있는 의무를 빠짐없이 지켰다고 말했습니다.
유대교는 전통적으로 결혼을 의무로 규정하였기 때문에 바울이 결혼을 했을 것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파문당하는 이는 아내를 가지지 않은 유대인과 자녀가 없는 유대인이라고 할 정도로 결혼은 유대인의 의무 가운데 중요한 의무였습니다.

또한 유대인의 결혼적령기는 18세였습니다. 결혼 적령기를 지난 바울이 만일 결혼도 하지 않고 자녀도 없다면 그는 유대교의 랍비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는 관원 즉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었습니다. 산헤드린 회원은 기혼자여야 한다는 규칙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정을 가진 자가 자비심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아내가 없을 수도 있었습니다. 아내와 사별했을 가능성이 있었고 또 바울이 예수를 만난 후 가정을 멀리하고 복음 전도에만 힘쓰니까 아내가 그를 버리고 떠나 버린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 사실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울이 아내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바로 주의 일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보기에는 독신으로 사는 것이 주의 일에 전념할 수 있기에 자신처럼 아내 없이 살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바울은 결혼 생활과는 담을 쌓았고, 혹 사별하거나 아내가 자신을 버렸을지라도 재혼을 생각치도 않았습니다.
만약 가정을 가졌더라면 유럽을 세 번 돌면서 기독교의 초석을 놓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될 수 있으면 자기 같이 되기를 원한 것은 복음 전도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고, 가정이 이루어지는 목적은 부부의 만족을 위한 것보다는 주의 복음과 교회를 위해서 두 사람이 복음의 동역자가 되라는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은 결혼과 부부관계를 결코 경시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바로 주님의 일에 그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입니다. 주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결혼할 수도 독신으로 살 수 있는 것이 바로 신앙의 자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부부는 주님의 일에 동역자임을 알고 함께 행복하게 살면서 주의 복음과 교회를 위해서 함께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장 보람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전병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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