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 11:26)

첨부 1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 11:26)

예수께서 하신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한마디로 요약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권을 계시하신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계시하는 목적은 인간의 거역하는 마음을 복종시키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의 뜻 앞에 자신의 뜻을 포기하게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 실천이 어려운 것은 자기 자신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아니하면 결단코 남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았던 미국의 헌법을 재정한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의 서재에는 "화가 나면 열을 세어라. 남을 죽이고 싶으면 백을 세어라. 자신을 포기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사랑할 수 없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영어의 화(anger)는 위험(danger)에서 한 글자가 빠진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참을 인忍자 세 개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얻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습니다(빌 3:8).

욥은 자신의 뜻을 낮추고 전능자 앞에 자신을 비하하기를 주저하지 아니했습니다.

욥기 42장 5-6절에 『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왕이신 하나님을 보는 순간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사야 6장 5절에 『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거룩한 하나님의 이상을 보았습니다.

다니엘 10장 6절에 『 그 몸은 황옥 같고 그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 눈은 횃불 같고 그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고 했습니다.

이 환상을 다니엘이 혼자 보았으나 자기와 함께한 모든 사람에게 미칠 것을 알았습니다.

다니엘 10장 7-9절에 『 이 이상은 나 다니엘이 홀로 보았고 나와 함께한 사람들은 이 이상은 보지 못하였어도 그들이 크게 떨며 도망하여 숨었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이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내가 그 말소리를 들었는데 그 말소리를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었느니라 』고 했습니다.

그는 절대 주권을 행사하시는 하나님을 보자 힘이 다 빠졌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앞에 우리의 취할 태도가 분명해야 합니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 앞에 

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로마서 3장 18절에 『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 성도를 가리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부르던 때가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은 그렇게 부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부르는 자가 있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결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시편 103편 13절에 『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는데 누가 당하겠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이단들이 교주나 자기 신들에 대한 굴욕적인 두려움이 아닙니다. 맹수를 만났을 때 느끼는 어쩔 수 없는 공포심의 두려움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 앞에 두려움이란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은 이사야 66장 2절에 『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두려움은 영혼의 두려움입니다. 경건한 두려움은 베드로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7절에 『 뭇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앞에


Ⅱ. 절대 복종하는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3장 19-20절에 『 내가 아노니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애굽 왕이 너희의 가기를 허락지 아니하다가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 』고 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교만과 불순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바로는 출애굽기 5장 2절에 『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고 했습니다.

당시 바로에게는 히브리인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무신론자가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다만 다원주의, 즉 여러 신들 여러 종교를 거부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에게 복종하는 태도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해야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무시하고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36절에 『 내 마음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치 말게 하소서 』라고 했습니다.

시편 119편 133절에 『 나의 행보를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아무 죄악이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복종과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절대 순종은 어느 것이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병행선상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앞에


Ⅲ. 완전히 맡기는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사무엘상 3장 18절에 『 사무엘이 세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니 그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 하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 그 분에 대한 불평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진정으로 깨닫게 되면 이와 병행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행하실 완전한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로마서 9장 21절에 『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64장 8절에 『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고 했습니다.

이사야 45장 9절에 『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찐대 화 있을찐저 진흙이 토기장이를 대하여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 할 수 있겠으며 너의 만든 것이 너를 가리켜 그는 손이 없다 할 수 있겠느뇨 』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29장 16절에 『 너희의 패리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린 사무엘에게 당신의 뜻을 계시하셨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그들의 사악함 때문에 죽이시겠다는 것입니다(삼상 2:27-34). 

다음날 사무엘은 이 메시지를 늙은 엘리 제사장에게 전합니다. 이 엄청난 비극의 소식을 접한 엘리 제사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고 했습니다(삼상 3:18). 인간이 이렇게 태연할 수 있습니까?

한 가정이 문을 닫는 이른바 멸문지화滅門之禍(멸문을 당하는 큰 재앙)의 소식을 접하고 난 엘리의 태도는 절망이 아니라 복종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 앞에 놀라운 순종의 태도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태도는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고 이와 병행해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욥의 생애도 주목할 만합니다. 당시 욥을 가리켜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했습니다. 

그에게는 일곱 아들과 세 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창대케 하고 번성케 하므로 그는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욥의 부와 명성은 하루 아침에 안개처럼 날아가 버렸습니다.

이때 욥은 욥기 1장 21-22절에 『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고 했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을 뿐 아니라 기뻐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자신의 뜻과 계획을 하나님에게 맞추는 것입니다.
아더 핑크(A. W. Pink)는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진정으로 인식하면, 자신의 모든 계획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게 된다. 이것을 보여주는 사건이 영국에서 일어났다. 빅토리아 여왕(1819-1901. 재위 1837-1901)이 죽은 후, 여왕의 맏아들 에드워드 황태자의 즉위식이 1902년 4월로 잡혔다. 그런데 이를 알리는 모든 공문에 D. V. (Deo Volente, 하나님의 뜻이라면)라는 작은 두 글자가 빠져 있었다. 영국 역사상 가장 장엄한 대관식을 위한 계획이 수립되었고 모든 준비가 완벽하게 갖춰졌다. 

세계 각지의 왕들과 황제들이 즉위식에 참석해 달라는 초대장을 받았다. 황태자의 포고들이 인쇄되어 게시되었다. 

그러나 필자가 아는 한 D. V. 라는 두 글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가장 성대한 대관식이 계획 되었으며, 서거한 여왕의 황태자가 아무 날, 아무 시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에드워드 7세(Edward the Seventh, 1841-1910, 재위 1901-1910)로 즉위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개입하셨고, 인간의 모든 계획이 좌절되었다. 고요하고 작은 음성이 들렸다. "너희는 나를 빼놓고 계획을 세웠다!" 에드워드 황태자가 갑자기 맹장염에 걸렸고, 그의 대관식은 수개월 연기되었다! 말했듯이 하나님의 주권을 진정으로 인식하면, 자신의 계획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게 된다."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4장 13-15절에 『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것이거늘 』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우리의 또 다른 별칭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앞에,


Ⅳ. 감사하며 기뻐하며 예배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시편 103편 1절에 『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장 20절에 『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감사와 기쁨의 생활을 가르쳤습니다.
빌립보서 4장 4절에 『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고 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습니다(빌 4:6).
빌립보서 4장 13절에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고 했습니다.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살후 1:3).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고전 15:57).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고전 9:15).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엡 5:20).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골 3:15).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고 했습니다(단 6:10). 주께 감사하고 주께 찬양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단 2:23).

"존 헨리"는 말하기를 "감사는 최고의 항암제요, 해독제요, 방부제다. 우리는 가장 축복받은 사람이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가장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퍼슨"은 "감사는 고귀한 영혼의 얼굴이다."라고 했습니다. "콘레드"는 말하기를 "중생치 못한 자의 특징은 감사가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시세로"는 말하기를 "감사는 모든 덕행의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린너"는 말하기를 
"감사는 어느 한 날에 국한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세익스피어"는 말하기를 "감사를 모르는 자식이여, 독사의 혀만큼이나 잔인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청교도들은 교회를 하나 지을 때 무덤을 일곱 개나 파야 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감사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말하지만 경건한 두려움은 노예의 공포나 맹수를 만난 공포가 아니라 아들의 순종과 공경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잠 9:10). 예수님은 성부 아버지께 순종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2절에 『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원하여 행하신 성부 하나님의 의존적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7-18절에 『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 34절에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시편 40편 8절에 『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시편 성도는 시편 22편 6절에 『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야곱과 이스라엘을 가리켜 지렁이라고 했습니다(사 41:14).
하나님의 주권은 폭군의 독재적인 주권이 아니라 무한히 지혜롭고 선하신 분이 행하시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무한하기 때문에 오류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의는 무한하기 때문에 그릇 행함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앞에 우리가 취할 태도는 ① 경건한 두려움 ② 절대 복종 ③ 온전히 맡기는 것 그리고 ④ 감사하며 기뻐하며 그에게만 예배 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 살 동안 어떤 곳에서 무슨 일을 만날 지라도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라고 해야 합니다. (강구원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