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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노예 (고전 7: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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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노예 (고전 7:17-24)


아브라함 링컨이 노예를 해방하기 전 뉴올리언스의 노예시장에서 한 아름다운 흑인 혼혈 소녀가 경매에 붙여졌습니다.
경매자들은 평소처럼 입찰을 하다가 군중 속에서 들려오는 강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계속 가격을 높여 불렀고 경매는 그 사람이 1,450달러에 소녀를 살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북부에서 온 사람이었는데 소녀는 그 사람의 노예가 되는 것이 너무 싫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그 사람은 소녀의 집으로 왔습니다. 소녀는 슬픈 목소리로 함께 갈 준비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한 증서를 소녀에게 건네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오. 난 당신과 함께 가기를 원치 않소. 나는 당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당신을 샀소. 이걸 보시오. 이것이 당신의 자유를 보장하는 증서요.”
소녀는 잘 믿기지 않아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날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 샀다고요? 정말 나는 자유인가요? 정말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나요?” 
“물론 당신은 자유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소.” 소녀는 기쁨의 감격에 목이 메어 겨우 말을 이었습니다. 
“그러면 선생님, 남은 생애 동안 당신을 섬길 수 있도록 저를 데려가 주시겠어요?” 드디어 그 소녀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과거 반상제도가 있었는데, 그 때 상놈으로 태어나면 얼마나 비참했습니까? 
요사이 MBC 드라마로 ‘구암 허준’이 방영되고 있는데, 허준은 무관출신의 아버지와 첩에게서 나서 서출로 살아 나갔습니다. 
그의 아내는 양반출신이었나 자기의 신분을 속이고 남편 허준을 신뢰하고 존경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만일 양반이 서자 출신과 결혼하면 큰 화를 당하기 때문에 계속 숨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상놈의 신분은 정말 비참했습니다. 자기의 뜻을 펼칠 수 있는 그 어떤 길도 상놈의 신분에게는 없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고린도 교회에는 노예들이 교인으로 들어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교회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를 믿어 자유인이 되었는데도 아직은 사회적 신분이 노예 그대로인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예수를 믿고 자유인이 되었으니 사회적으로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영적으로는 자유인이었지만 사회적으로는 노예 생활을 그대로 하고 있었습니다.
보통은 한 번 그리스도인이 되면 지금까지 하고 있는 일을 그만 두거나 지금까지 관계하고 살던 사람들과 관계를 끊거나 전혀 새로운 생활을 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새로운 신분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옛 생활을 새롭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이면 유대인으로, 이방인이면 이방인대로 있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17절).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는 신앙에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신분적으로는 노예일 수도 있지만 신앙적으로는 결코 노예가 아닙니다. 육으로는 노예일 수도 있지만 영으로는 자유인일 수 있습니다.
그 반대도 가능합니다. 신분상 자유인일지라도 그가 행한 잘못된 행실 때문에 그는 죄에 매여 있어 자유인이라 할 수 없고 단지 노예일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참 자유의 무한한 기쁨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대속의 죽음으로 신분에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참 자유를 선사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가 주님의 노예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값을 주고 우리를 사셨기 때문입니다. 
고대사회에서는 노예가 노력을 하면 자기의 자유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노예는 약간의 자유시간에 일을 해서 두세푼의 동전을 벌 수 있었습니다. 
노예는 그 번 돈을 그가 섬기는 신전의 제사장에게 맡깁니다. 이렇게 여러 해를 모아 자기의 몸값을 치를 만하면 그는 자기 주인을 모시고 신전으로 갑니다. 

신전으로 가면 그 신전의 제사장이 그 노예의 몸값에 해당하는 저축한 돈을 그 주인에게 줍니다. 그럼 그때부터 그 노예는 자유인이 됩니다.
그 노예는 제사장을 통해 상징적으로 신의 소유물이 되고, 결국 모든 인간에 대해 자유인이 됩니다.
바울은 이런 고대 노예의 ‘속량’을 생각하면서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피흘려 죽음으로 우리 인간을 속량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십자가의 속량, 즉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적인 신분이 어떠하더라도 모든 죄로부터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유함을 얻었다고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께 반역하거나 억누르고 있는 세상에 반항하면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종에 합당한 행동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노예입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28-30).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세상의 노예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지고 있는 짐은 무겁습니다. 그 짐을 누군가 대신 져 주지도 않습니다. 

남의 집살이, 처가에 매여 있는 것은 무섭습니다. 그 누구에게 예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이 매여 있는 것 중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죄의 노예입니다. 죄는 인간으로서 그 누구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죄의 굴레는 무겁습니다.
예수님 시절 이스라엘 백성은 로마의 속박과 헤롯의 폭정 그리고 율법주의적인 제사장들에게 얽어매어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고난으로 그것들을 다 소멸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원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 당시 율법의 노예였던 사람들이 예수의 노예로 부름 받았습니다. 복음의 멍에를 매라고 부름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매고 있는 짐은 쉽고 가볍습니다. 세상의 종에서 예수의 종이 되면 모든 짐이 쉽고 가벼워집니다. 
어떤 성도가 교회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주일 일찍 와서 주일학교 교사를 하고 성가대 연습과 예배에서 성가대를 서고 점심을 한 다음에 교회 재정부에서 봉사를 합니다.
그리고 오후 예배를 끝나고 주차장에 내려가 차 속에 들어가서 “휴우 오늘 다 끝났다, 피곤해 못살겠네”고 한숨을 쉬었습니다.
이 성도의 신앙생활은 기쁨이 아니라 너무 무거워 고통이었습니다. 주일 하루의 삶이 직장보다 더 피곤했습니다. 오히려 신앙생활이 짐이 되고 신앙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이런 현실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란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주의 일에 힘쓰면서 무한한 행복감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멍에는 쉽고 가볍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매는 멍에이기 때문입니다.
어미 소가 쟁기의 멍에를 매고 갈 때 송아지는 따라가면서 젖을 빨면서 따라갑니다. 우리가 주님과 멍에를 같이 메는 것은 이토록 쉽습니다.
교회 일은 너무 피곤하게 몸에 부치면 안 됩니다. 감격해서 적당해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너무 고생스럽더라도 주님을 위한 일이라면 그것은 쉽고 가볍습니다. 행복합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세울 때 ‘사형 선고를 받을 정도로’ 고통을 당했지만 그는 주님의 일이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했습니다. 그래서 조지 올버트는 이런 시를 지었습니다.

당신에게 붙들리면
세상에 싫은 일이 없고,
당신을 위하여 일하면
모든 것이 맑게 빛나리라

당신을 생각하는 종에게는 
힘든 일도 하나님의 일
당신의 일을 위해 비를 들면 
온 세상이 깨끗해지리라 

모든 것을 금으로 변화시키는 
세상에 다시 없는 귀한 바위여!
하나님의 손가락에 닿는 모든 것은
어쩌면 그렇게도 존귀해지는지!

이제 우리는 주님의 노예들입니다. 종과 같이, 부르신 자리에서 주님의 노예가 되어 주님의 일로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충성된 종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악하고 게으른 종이 아니라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될 수 있겠습니까? 
여기 다섯 달란트 받은 종에게서 배울 점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곧 가서’라는 태도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주의 말씀에 따라서 ‘곧’ 순종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으며 베드로와 바울이 역시 그랬습니다. 

둘째로 ‘그것으로 장사하여’라고 했습니다. 즉 받은 바 재능을 활용하였습니다. 
우리는 내 귀로 듣고 마음에 받아들인 생명의 말씀을 현실생활에 활용해야 합니다. 생활과 믿음을 분리하는 것은 말씀의 활용이 아닙니다. 
셋째로 ‘다섯 달란트 더 남겼다’고 하였습니다. 주인이 돈을 맡겼던 것은 종으로 하여금 늘리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주인의 그와 같은 마음을 짐작하여 아는 일, 그것이 바로 다섯 달란트를 남긴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자주 ‘주의 뜻을 일러 주소서’하는 말이 나옵니다. 
주 예수께서는 믿는 자들을 향하여 충성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은 주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말씀드린 이 세 가지 점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종으로서 이윽고 주님 앞에서 셈해야 할 날이 이른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고 주의 일에 더욱 충성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1-2)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종으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바로 충성입니다. 충성의 기본적 자세로 다음 다섯 가지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1) 충성은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억지로가 아니라 즐거운 마음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활용해야 합니다.
(2) 충성은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은 마음의 자세이지만, 최고가 되는 것은 끊임없는 노력과 일정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충성에 인내의 기다림과 수고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 그 때문입니다. 
(3) 주인은 아니지만 주인처럼 일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들은 하나님의 종이요 청지기들입니다. 비록 주인은 아니지만, 우리들은 주인처럼 정성을 다하여 일하고 게으름이나 눈속임으로 일하지 말아야 합니다.

(4) 충성스러운 종이 되려면, 처음과 나중이 똑같은 시종일관의 자세로 일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날마다 새로워지면서 점차적으로 최고를 향하여 나아져가는 진지한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시작은 미약하더라도 마지막에 가서 창대하게 되는 결과가 있어야 합니다.
(5)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랑으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고전16:14). 그 출발점은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그것을 늘 마음에 새겨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감격과 순수한 열정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종인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충성입니다. 맡은 바, 있는 그 자리에서 종으로서 최선을 다해 이 땅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곳으로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전병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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