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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회복(3) : 용서를 통한 쓴 마음의 치유 (마 18: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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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3) : 용서를 통한 쓴 마음의 치유 (마 18:21-35)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이 용서에 대하여 설교를 하고 있었답니다. 설교하던 중 "여러분들 중에 미워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신 분 손들어 보세요."라고 말했답니다. 그러자 아무 반응이 없었다고 합니다. 

다시 목사님은 물었답니다. "아무도 없습니까? 손들어 보세요." 그때, 맨 뒤에 앉은 한 할아버지가 손을 들었답니다. 목사님는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답니다. "할아버님,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는지 우리에게 말씀해 주세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답니다. "응, 있었는데… 다… 죽었어." 

우리 성도님은 미워하는 사람이 없습니까? 보기만 해도 분노가 치미는 사람이 없습니까? 속된 말로 밥맛 떨어지는 사람은 없습니까? 만나고 싶지 않고, 말도 하기 싫은 사람은 없습니까? 누구에게 그 사람에 대하여 말하면 늘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목사님들 가운데서도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얼마 전 어떤 목사님과 전화를 하는데 자신과 함께 신앙 생활하다 교회를 떠난 사람 중 몇 명은 죽는 날까지 만나지 않았으면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얼마나 그 교인들로부터 심각한 상처를 받았으면 목사님에게 그런 쓴 마음이 생겼을까?’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의 명예에, 나의 감정에, 나의 물질에, 나의 건강에, 나의 사업에, 나의 인생에 심각한 피해를 주어 절대 용서해 주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이런 사람이 있다면 마음에 쓴 뿌리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신약 성경에 쓴 뿌리라는 말이 한 번 나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히12:15)”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쓴 뿌리는 독이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의 뿌리입니다. 비유적으로 불신과 배교를 나타내는 완고한 기질을 가리킵니다. 좀 더 포괄적으로 해석하면 인생을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불행하고, 부정적인 사건들로 말미암아 생긴 상처로 인하여 마음이 독한 마음, 쓴 마음으로 변한 사람입니다. 

이 쓴 뿌리는 문맥적으로 볼 때 교훈이나 악한 사상을 가지고 교회의 화평과 성결을 손상시키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쓴 뿌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게 합니다. 쓴 뿌리는 교회에 내에 사악한 영향을 끼칩니다. 개인적인 의미에서는 예리한 상처, 괴로운 상처를 말합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마음속에 입은 심각한 상처로 핵심 감정을 말합니다. 이 상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사람들과 정상적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쓴 뿌리는 특징은 "쓴 뿌리가 나서"라고 표현한 것처럼 성장을 합니다. 치유되지 않으면 더 악화되고 깊어집니다.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라고 말씀한 것처럼 쓴 뿌리는 고통과 괴로움이란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뿌리 깊은 분노가 생깁니다. 앙심이 생깁니다. 원한이 맺히게 됩니다. 미워하게 됩니다. 그 상처가 마음을 지배해 버려 쓴 마음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음을 휘저어 버리는 것입니다. 인생을 비틀거리게 하고 곁길로 가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라고 말씀한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혹시 우리 성도님 중에 인생을 괴롭히는, 용서하지 못하는 이런 쓴 뿌리가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마음의 쓴 뿌리를 우리가 어떻게 치유 받아 회복될 수 있겠습니까? 심리적인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치유 방법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4절에 쓴 뿌리를 제거하는 방법을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모든 사람으로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할 때 서로 화평해지고 용서할 때 서로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용서할 때 원한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용서할 때 쓴 마음이 단 마음으로 변합니다. 용서할 때 쓴 뿌리가 단 뿌리로 변합니다. 용서할 때 분노가 사그라지는 것입니다. 용서할 때 응어리가 풀리고 한이 풀이는 것입니다. 용서할 때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용서할 것을 말씀합니까? 

1. 우리가 어떻게 쓴 마음을 치유받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용서가 비결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나에게 심각한 피해를 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난 7월10일 밤 부산의 한 아파트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한 남성이 9차례나 찔러 한 여성을 살해했습니다. 언론은 '정사갤 살인사건'으로 광주에 사는 진보적 생각을 가진 백씨가 부산에 사는 보수적인 김씨를 죽였다고 이념논쟁으로 보도했지만 사실은 둘 다 "둘 다 전땅크(전두환 전 대통령을 지칭하는 은어) 지지자였다"고 합니다. 

김 씨는 논리적인 글과 뛰어난 외모 때문에 사이트 회원들 사이에서 '여신'으로 불렸는데 백 씨가 지난해 9월 김 씨에 대한 성적 비하 표현을 했고, 사생활이 문란하다며 글을 올리자 김 씨가 화를 내며 백씨를 즉각 고소했고 백씨는 친필로 사과문을 써서 게시판에 올리고 김 씨가 사는 부산까지 찾아가 해운대 경찰서 앞에서 사진을 찍어 사과글을 올렸답니다. 그러나 수차례 사과 의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받지 못하자 분노한 백씨가 살해로 앙갚음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분은 부모는 백씨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딸을 죽인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습니까? 딸의 인생을 망쳐 논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습니까? 내 인생을 쑥밭으로 만들어 놓은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회사를 망하게 한 사람, 자신에게 엄청난 재산 손실을 준 사람, 가슴에 피맺힌 한을 남겨놓은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날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어 보았습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 하오리이까?” 베드로는 이 정도 용서해 주면 많이 해 주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당시 경건하게 살았던 바리새인들은 세 번까지 용서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베드로는 4를 더해 완전수를 만들어 7번까지 용서해 주면 예수님이 칭찬해 주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2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490번까지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490번까지 반복적으로 용서해야 할 대상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이겠습니까? 우리의 인내심에 한계를 주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이겠습니까? 있다면 아마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일 것입니다. 어떻게 끝없이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어떤 임금에게 빚은 진 종이 있었습니다. 1만 달란트의 빚을 졌습니다. 일만 달란트란 얼마나 되는 액수입니까? 그 당시 화폐 단위로 일달란트는 육천 데나리온입니다. 1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빛은 육천만 데나리온입니다. 

당시 유대 전역에서 거두어들인 일 년 세금이 고작 900 달란트 정도였다고 하니 1만 달란트란 얼마나 엄청난 액수였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1년은 365일이니까 노동자가 164,384년 동안 벌어야 갚을 수 있는 분량입니다. 하루 품삯 10만으로 계산한다면 6조가 넘는 돈입니다.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탕감해 준 근거는 무엇입니까? 27절을 보십시오. 불쌍히 여겨서입니다. 주인의 긍휼한 마음, 자비의 마음 때문입니다. 얼마나 행복하고 기뻤겠습니까?

그런데 그 종이 자기에게 배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합니다. 빚을 갚지 못하니까 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이 종의 행동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배은망덕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벌을 마땅히 받아야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쓴 마음을 가지고 살면 바로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상처는 기껏해야 천만원 정도이고 내가 하나님께 준 상처는 6조가 넘는데 그것 가지고 평생 목을 비틀고 저주하고, 분노를 품고, 응어리진 마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입니다. 

지옥의 형벌을 당해야 할 인생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과 피를 다 찢기시면서 용서해 주셨는데 우리는 우리 자존심 하나 건들면 용서하지 못합니다. 내 마음에 조금만 상처를 주어도 그것을 생채기로 간직하고 씹고 씹으며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뭐 그렇게 많이 죄를 지었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거울 앞에 서면 내가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32-3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받았으니 우리에게 피해를 입힌 사람들 용서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용서를 생각하면 끝없이 용서하는 사람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대로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면 쓴 마음은 치유가 됩니다. 100데나리온은 만달란트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입니다. 용서함 받고 생명을 구원받았는데 나의 감정을 조금 상하게 하였다고, 내 재산에 손상을 입혔다고, 명예에 상처를 입혔다고 용서하지 못하며 쓴 마음 가지고 사는 인생되지 말아야 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을 두 아들을 죽인 사람은 용서해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얼마 전 신문에서 남아공의 만델라 대통령이 병원에 입원했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억울하게 27년 동안 외딴섬의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최고 권력자가 되었지만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설치하여 복수의 악순환을 끊고자 했습니다. 규칙은 간단했습니다. 백인경찰이나 군인이 자발적으로 고소자들 앞에서 범행을 털어놓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 그 범죄로 인해 재판을 받거나 처벌받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청문회 자리에서 반드 브렉이라는 경찰관이 자기의 죄를 털어 놓았습니다. 자신과 동료들이 18세 소년을 총으로 쏘고 시체를 불태운 뒤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그 시신을 바베큐처럼 불에 그슬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8년 후 반드 브렉은 다시 그 집으로 가서 소년의 아버지를 체포했는데, 불쌍한 그 아내는 경찰관들이 남편을 장작더미에 묶어놓고 몸에 휘발유를 끼얹은 뒤 불을 붙이는 광경을 강제로 지켜봐야 했습니다. 아들과 남편을 차례로 잃은 노부인에게 법정에서 말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판사는 물었습니다. "반드 브렉 씨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녀는 남편의 장례를 제대로 치를 수 있도록 부탁한 후 한 가지 요구 사항을 추가했습니다. "반드 브렉 씨는 제 가족을 모두 데려갔습니다. 그러나 저에겐 아직도 그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 많습니다. 제가 엄마 노릇을 할 수 있도록 한 달에 두 번 우리 집에 와서 시간을 보냈으면 합니다. 나는 반드 브렉 씨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것과 나도 그를 용서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나는 내가 정말 용서했다는 것을 반드 브렉 씨가 알 수 있도록 그를 안아주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요일4:20)"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받았다면 무엇을 용서하지 못하겠습니까? 평생 쓴 마음 가지고 살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용서로 용서해 주며 회복된 마음으로 살겠습니까?


2. 우리가 용서하지 않고 계속 쓴 마음을 품고 살면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3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주인의 진노를 당합니다. 그 빚은 내가 다 갚을 때까지 감옥 생활을 해야 합니다. 결론적인 말씀을 보십시오. 35절 큰 소리로 읽겠습니다.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용서하지 않는 자가 피해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피해를 입힌 사람,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사람,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그것을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피해를 당한 사람은 오래도록 그것을 품고 삽니다. 그러면 피해를 보아 손해고 그것을 잊지 못하고 정상적으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손해입니다.

"인생의 응어리를 풀라"의 저자 크리스티 김은 영적 성숙의 출발점은 용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오래 출석했어도 속 사람이 변화하지 않는 이유 중 한 가지는 상한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진정한 성숙을 위해서는 마음을 상하게 했던 사람을 반드시 용서해야 한다고 합니다. 

저자는 용서하지 않은 자가 당하는 영적 피해를 다음과 같이 12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용서하지 않으면 마음이 더러워집니다. 
둘째, 용서하지 않으면 사탄이 틈을 탑니다. 
셋째, 용서하지 않으면 미워하는 사람을 닮아갑니다.
넷째, 용서하지 않으면 그런 이성과 결혼하게 됩니다.
다섯째, 용서하지 않으면 주님과 멀어집니다. 
여섯째, 용서하지 않으면 주님을 닮아갈 수 없습니다. 
일곱째, 용서하지 않으면 관계가 회복되지 않습니다. 
여덟째, 용서하지 않으면 몸이 쇠약해집니다. 
아홉째, 용서하지 않으면 외롭게 삽니다. 
열째, 용서하지 않으면 과거에 묶입니다. 
열한째, 용서하지 않으면 상처가 치유되지 않습니다. 
열두째,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죽는 날까지 쓴 마음을 품고 살면 죽는 날까지 손해입니다. 왜 그렇게 계산적으로 불리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우리 나라 사람들 일본 사람들 끝까지 용서하기 싫어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인, 일본인 그리고 한국인 세명이 아프리카를 여행하다 무단침입으로 야만인들에게 붙잡혀 곤장 100대씩을 맞게 되었답니다. 다행이 야만인 추장은 이들에게 단 한가지씩 소원을 들어 주기로 했답니다. 첫째로 미국인 "제 등뒤에 방석 6장을 올려 주십시요." 추장은 소원을 들어 주었답니다. 그리고 곤장 100대를 맞았답니다. 

하지만 방석이 너무 얇아 70대째에 방석이 다 찢어져 정신을 잃었답니다. 이 과정을 지켜본 일본인 "제 등위에 침대 매트리스 6개를 올려 주십시요.” 일본인의 소원을 들어 주고 곤장이 시작 됐답니다. 일본인은 100대를 맞는 동안 줄곧 웃기만 하다 일어 났답니다. "역시 나는 모방의 기술이 뛰어난 민족이야" 하며 좋아 했답니다. 야만인 추장은 한국인을 향해 "자, 네 소원은 무었이냐?" 하고 물었답니다. 한국인은 쓱 웃으며 “저 일본 놈을 제 등뒤에 올려 주십시오” 라고 했답니다. 

신문에 보니까 직장인 10명 중 6명은 회사 내에서 복수를 경험했다고 합니다. 직장인 1323명을 대상으로 '직장 내 소심한 복수 경험 여부'를 조사한 결과 '여성'(64.3%) '남성'(49.9%)가 복수를 했다고 합니다. 

서울 동작구에서는 여자 친구가 배신했다고 칼로 28번 찌러 숨지게 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울산에서는 여자가 결별을 통보하자 찾아가 자매를 죽인 사건도 벌어졌습니다. 

부산에서는 변심한 애인에게 복수한다고 복면을 쓰고 찾아가 교제할 때 쓴 돈 다 내놓으라고 흉기를 들어대며 500만원을 빼앗은 일도 벌어졌습니다. 부산에서 사귀던 남자 친구가 만나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원룸 출입문 앞에서 불을 낸 여인이 방화한 일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한다고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사랑하다 배신당하면 프랑스 여자들은 배신한 남자의 연적을 죽이려 한다거 합니다. 이탈리아 여성은 배신한 남자를 죽이려 한다고 합니다. 영국 여성은 다른 남자를 찾는다고 합니다. 한국 여인은 연놈을 감옥에 보낸다고 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며 복수하면 통쾌할 것같이 보이지만 결국 손해입니다. 한 때 받은 상처가 핵심감정이 되면 그 감정은 그 사람을 움켜잡고, 평생을 불행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사는 가격보다 그 유지비가 훨씬 더 많이 드는 물건입니다. 인간 영혼에 가장 강력한 독소로 작용하여 자신을 괴롭히고 인간관계에 불화와 갈등을 조장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의 쓴 뿌리는 정서의 독으로 주변을 오염시켜 스스로를 고립화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일생동안 과거의 끈에서 자유함을 누리지 못합니다. 용서하지 못한 마음은 상처를 만들어 내고 분노와 적개심, 복수심을 증가할 뿐 아니라 가장 피해를 보는 사람은 용서하지 못하는 당사자입니다. 

쓴 마음을 가지면 마음이 과거 사건에 갇혀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쓴 마음은 적개심을 도발하여 다른 사람에게 증오심을 품게 합니다. 그 사람에 대해 적개심과 원한을 품고 살게 됩니다. 쓴 마음을 품은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쓴 마음을 품고 있다고 인정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에 의해서 상처를 받았거나 실망했거나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말합니다. 과거 사건의 노예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1)신체적인 결과로 화학적 균형이 깨집니다. 우리가 분노하면 뇌하수체, 신장, 갑상선과 다른 내분비선으로부터 특정 호르몬이 나오게 된답니다. 이런 호르몬이 지나치게 많게 되면 신체의 어느 부분에서나 질병을 유발할 수 있답니다. 그래서 궤양성 대장염, 독성 갑상선종, 고혈압들의 질병에 걸릴 수 있답니다. 쓴 마음을 품으면 자신의 육체와 인격을 파괴뿐 아니라, 신체적 건강을 해치게 됩니다. 불면증, 변비, 소화불량, 두통, 면역력 저하, 세포재생산 능력의 감소, 암 등 질병을 유발합니다. 쓴 마음을 품으면 얼굴 표정이 달라집니다. 신체적 피로를 가져오게 되고 성경은 골수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피를 생산하는 기능은 뼛속에 있는 골수이므로 뼈의 건강은 몸의 건강을 좌우하게 됩니다. 쓴 마음은 뼈에 직접적이며 아주 치명적이라는 것입니다(잠15:30; 잠17:22). 

2) 영적 결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이지 못하고 영적 성장에 큰 지장을 초래합니다. 쓴 마음을 품으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요일4:20-21). 쓴 마음을 품으면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의심하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6:12)를 반복하면서도 내가 이웃을 용서해 주지 않으면 자연적으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심하게 됩니다. 우리가 쓴 마음을 가지면 그 쓴 마음이 우리가 확신하고 있는 것들을 배척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성경에 대한 지식이 많다하여도 영적 성장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3)쓴 마음은 감정적인 나쁜 결과를 나타나게 합니다. 가장 현저하게 나타나는 증상은 우울증입니다. 원한을 계속 품으면 감정적 에너지를 소모하게 됩니다. 우리의 육체적 에너지가 다했을 때 피곤해지는 것처럼 우리의 감정적 에너지를 다 쓰게 되면 그 결과로 우울해 집니다. 우리에게 피해를 준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면 맞출수록 우리도 똑같은 사람이 됩니다. 

4)쓴 마음을 품으면 정신적으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분노를 품고 있는 사람은 정신이 그 분노의 종이 되어 폭군처럼 마음을 사로잡아 삶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5)쓴 마음의 결과는 자신에게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자손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끼칩니다(신5:9). 부모의 엄격한 훈련에 대한 자녀들이 쓴 마음을 품으면 자녀들은 그릇된 대상에 초점을 맞추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부모를 닮아갑니다. ‘나는 결코 아버지와 같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자녀는 비교의 기준을 그의 아버지로 삼게 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


3. 쓴 마음을 용서를 통해 깨끗이 치유하면 어떻게 회복될까요?

나에게 상처를 주고 손해를 주고 괴로움을 준 자를 더 이상 빚진 자로 간주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큰 용서의 강물이 내 삶의 전반에 흥건히 적시게 되는 것입니다. 주인은 그를 빚쟁이로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내게 피해를 주고 아픔을 준 자를 빚쟁이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관계가 달라진 것입니다. 

나에게 상처 준 시어머니를 내 인생을 망친 남편과 아내를 내 인생에 치명적인 손해를 끼친 부모를 더 이상 나에게 손해를 끼친 분으로 상처를 주신 분으로 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정상적인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면 우리의 죄를 기억치도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31:34)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모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다 아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문제 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를 징계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용서하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아직 기억이 있습니다. 아직 상처의 흔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갖는데 문제를 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 문제로 상처를 후비며 괴로워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괴로움을 주었던 사건이 잊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로 더 이상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않는 것입니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행하여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할 때 우리는 현재의 삶에 충실하고 미래를 향해 발전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진실한 마음 없이 겉으로만 용서한 척한다면 결국 과거에 얽매여 미래를 향해 보다 발전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용서한다고 고통이 즉각적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고통이 우리를 계속 붙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과거의 상처에 얽매여 과거의 시간에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앞으로는 그들의 잘못이나 허물을 그들에게 불리하게 이용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쓰라린 감정이 회복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나 용서하겠다는 결심을 한 순간 사탄은 이미 틈을 탈 곳을 잃어버린 것입니다(엡 4:26,27). 용서는 혈액순환과 같습니다. 우리 몸에서 더러운 피가 심장을 거쳐서 새 피로 만들어진 후 다시 온 몸을 순환함으로 모든 세포 세포가 항상 싱싱하게 살아 있게 됨과 같이 용서라는 것을 통해서 죄책감이나 혹은 증오감에서 죽을 지경이던 사람이 해방을 얻어 새 삶을 살게 됩니다.
 
용서는 힘이 있습니다. 심리적 치유효과가 있습니다. 정서적 고통을 완화해 주고, 우울과 불안을 감소시켜주며, 개인의 자존감을 회복시켜주며, 분노의 폭발을 막아주며, 분노와 죄의식으로부터 개인을 자유롭게 해 주며, 해를 준 사람으로 말미암은 증오심으로부터 해방시켜 줍니다. 용서는 신체적 치유 효과가 있습니다. 건강을 촉진시켜주고, 혈압을 낮추며, 분노로 인한 고혈압과 같은 신체적 증상을 완화해 줍니다. 용서는 개인의 심리적 건강과 안녕의 회복을 가져올 뿐 아니라,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줍니다. 용서는 강력한 치료적 체계로서 개인의 변화와 성장을 증진시키고 창조성과 활력을 강화하며 진정한 자유를 얻게 합니다. 

용서는 영적 힘이 있습니다. 용서를 통해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가지게 하고 진정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합니다. 

용서는 바로 다른 한사람의 죄의 결과를 내가 용납하고 살아가겠다고 희생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쓴 마음이 회복되면 오히려 내가 받은 상처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내가 상대방의 행위로 인해 고통을 받을 때 그러한 행위가 일어나도록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대단히 힘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를 깨달으면 그러한 행위가 일어남으로서 내게 미치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뛰어난 목적들로 감사하게 됩니다. 내게 거슬리는 자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보게 됩니다. 

나를 공격하는 개인을 원수로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내 삶에 특별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특별히 보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욥은 갈대아 사람들의 공격으로 많은 재물의 손실을 보았지만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욥1:20-21). 

요셉은 형제들로 말미암아 애굽의 종살이를 했지만 그들을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도구로 보았습니다(창50:20). 다윗도 시므이가 자신을 저주할 때 쓴 마음을 품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도구로 보았습니다(삼하16:9,10).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인류의 궁극적인 구원의 큰 목적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길로 보았습니다(눅23:34). 

나를 공격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으로 보면 그 사람에 대하여 쓴 마음을 계속 품지 않습니다. 나를 최고로 공격하는 자를 하나님의 지배하에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을 배웁니다.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히12:6-7).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우리에게 맺히게 합니다. 
고난은 자신을 조사해 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고전11:31-32). 

고난은 우리의 자랑을 극복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잠13:10). 
고난을 통해 우리의 교만은 무너집니다. 고난은 우리의 약함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고후12:7-10). 
고난은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도록 해 줍니다(시3:4). 
고난은 우리가 영적 싸움에 참여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엡6:11-18). 
고난은 우리의 믿음을 순결케 하고(히11:6) 
우리로 하여금 악을 더욱 증오하게 만들며(히11:25) 
기도하게 합니다(딤전2:1-2). 
내 적대자를 위해 기도하게 합니다. 

웃음으로 인사하게 합니다. 그의 적극적인 성품을 칭찬하게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그를 변호하게 합니다. 그에게 감사함을 표현하게 합니다. 그의 필요한 것을 채워주게 합니다.

고든 맥도날드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는 훌륭한 아내와 함께 훌륭한 교회에서 사역을 하는 목사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안락하고 풍파없는 그의 삶은 권태로 나타났습니다. 그는 교인 중 한 사람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일을 잊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 여인은 목사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한 교인에게 토로하고 말았습니다. 그 소식은 즉시 당회에 전해졌고 당회원들은 이미 그 교회를 떠나 다른 선교 단체의 총재로 봉사하고 있는 그를 소환해서 징계하였습니다. 그는 당회의 징계에 순복했습니다. 자신의 죄를 토설하고 회개하였습니다. 무려 3년 동안이나 당회원들의 지도하에 징계를 받았습니다.

3년이 지난 후 당회원들은 그가 충분히 회복되었다고 판단하고 그를 다시 목회 일선에 복귀시켜 주었습니다. 그는 그 후 뉴욕시의 어려운 지역에 들어가 목회를 하였습니다. 그의 목회는 성공적이었습니다. 당회는 다시 그를 자신들의 교회로 불러 담임 목사직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충성스럽게 다시 그 교회에서 목사의 직무를 감당했습니다. 이미 다른 곳에 가있는 사람을 과거의 문제로 불러 치리한다는 것도 보통일이 아닙니다. 오리발을 내밀며 버틸 수도 있을 것이고 교회 교인들도 과거사이니 그저 덮어 버리자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매듭을 확실히 풀었습니다. 그저 묵인하고 손가락질하고 혐오하며 비방한 것이 아니라 확실히 정리하고 용서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자신들의 담임목사로 모셔 정상적인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이 용서입니다. 이것이 쓴 마음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길입니다. 과거의 문제, 그것은 과거의 사건입니다. 과거의 허물 그것 역시 지나간 사건입니다. 과거에 얽매여 사는 삶이 아닙니다. 

용서란 과거를 마음에 품고 덮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실수를 인정하고 회개하여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로 회복하고 사람들과도 정상적 관계를 누리는 것입니다. 과거의 실수가 현재와 미래의 정상적 관계를 갖는데 거침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 어떤 죄를 지었다할지라도 그 어떤 실수를 하였다할지라도 하나님께 회개하면 모든 죄를 용서해 주고 정상적 관계를 가지게 합니다. 35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용서로 쓴 마음 치유받아 회복되어야 합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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