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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고 들은 것을 말하라 (행 4: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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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들은 것을 말하라 (행 4:13-22)

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하여 보고 들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당시에는 예수님에 대하여 보고 들은 것을 말하는 것은 죽고 사는 문제요, 목숨을 거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0절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은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담대히 말합니다. 이 말은 이들이 죽으면 죽으리라하고 목숨을 걸고 하는 말입니다. 원래 이들이 이렇게 담대히 말할 수 있는 용기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아예 예수님을 버리고 갈릴리 바닷가로 고기잡이를 떠나 버린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때 베드로는 대제사장이나 공회원들, 로마군인들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옆에 같이 구경하던 힘없는 하인들, 어린 여자 아이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요한도 담대하고 용기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기는 했지만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는 병사들이 요한을 잡으려고 하니까 웃통까지 벗고 도망간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실 때는 요한을 무서워서 멀찍이서 예수님을 따라갔던 나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들은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담대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이 말을 할 때의 상황은 그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더 위험하고 살벌한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신 후 예루살렘의 상황은 살벌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믿는 사람이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은 다 잡아 가두고 죽이는 때였습니다. 

또한 본문의 상황은 그 당시의 최고의 권세를 가진 공회원들이 “너희들 다시는 예수 이름을 들먹거리고 예수에 대하여서 가르치고 전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위협하고 있는 살벌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담대하게 용기있게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들이 이렇게 용기있고 담대한 사람으로 변할 수 있었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이렇게 담대하고 용기있는 사람들로,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로 바뀌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1. 먼저 베드로와 요한의 변화된 모습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자신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자신들의 허물을 덮어주시고 용서해주시는 주님의 사랑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죽도록 충성하기로 다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된지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 40일을 이 땅에 계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실 때가 되어 제자들에게 당부하였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해주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는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감람산에서 500여명의 무리들이 보는 앞에서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명하신대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명의 성도들과 함께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공석이 된 12 사도 중의 한 명을 선택하기로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도한 후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12사도의 한 사람으로 선택하였습니다. 

이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한 지 10일 만에 오순절 날이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나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의 머리위에 임하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들이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방언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한 그리스도인들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 다시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하며 예수님의 부활을 담대히 증거하였습니다. 그리고 담대히 외쳤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아멘!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인 유대인들 앞에서 담대히 증거하였습니다. “당신들이 못 박아 죽인 나사렛 예수가 당신들이 고대하고 기다리던 메시야 그리스도이다. 그는 당신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으나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당신들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그리스도를 죽인 죄인들이다. 그러니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라.” 

이렇게 베드로가 담대하게 전하니 삼천 명이 되는 사람들이 “내가 어찌할꼬” 회개하며 예수믿고 주님 품으로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또한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나님을 찬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기회는 이때다 하고 또 예수를 전합니다. 예수믿고 구원을 받으라고 담대히 전합니다. 이때 또 이 말씀을 듣고 예수믿고 구원받은 수가 오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온 예루살렘성에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관원들과 장로와 서기관 대제사장들과 그 일행들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와서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행하느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이때 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외쳤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아멘! 

이렇게 담대히 말하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배우지 못한 무식한 사람들이 어떻게 저렇게 청산유수같이 담대히 말할 수 있느냐”고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이들 베드로와 요한은 이제 옛날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옛날같이 무서워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가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제 이들은 담대하고 용기있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2. 어떻게 베드로와 요한이 이렇게 변화될 수 있었습니까? 

(1) 전능하신 예수님께 붙들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예수님께 붙들려서 쓰임받기만 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자가 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붙들리기만 하면 마른 막대기도 능력의 지팡이로 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수믿는 우리들에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마가복음 9:23)”고 하셨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13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은 아주 나약한 자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잡히시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다 도망쳤던 자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큰 능력을 체험하고도 주님을 떠나갔던 자들입니다. 옛날 물고기 잡던 본래 직업으로 돌아갔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약하고 부족한 이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찾아오셔서 부르셨습니다. 이때부터 이들은 예수님께 완전히 붙잡힌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다시 찾아주시고 다시 불러 주시는 주님 앞에 온전히 붙잡힐 때 자기 능력의 한계를 뛰어 넘는 능력있는 인생으로 변화됩니다. 우리가 현재 아무리 약하고 부족하여 자신이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하여도 그것에 매여 인생을 포기하지 말고, 주님께 온전히 붙들려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능력있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부활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부활의 증인된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과 함께 했던 때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체험하고 배우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담대하고 용기있는 사도들로 변했고 초대교회의 초석을 놓은 일등 공신으로 변했습니다. 부활의 증거를 가진 사람들의 특징은 보고 들은 것을 있는 그대로 담대하게 말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오늘 본문 20절에서 보듯이 자신들을 잡아 죽이려는 살벌한 공회원들 앞에서도 담대히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날마다 그리고 영원히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그 신앙이 죽은 신앙이 아닌 살아있는 신앙이 됩니다. 그래야 강하고 담대하게 능력있게 일할 수 있게 됩니다. 

(3)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8절 말씀 보면,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하였습니다. 이들 베드로와 요한은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불같은 역사로 성령세례를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겁쟁이에서 용기있는 사람으로, 소심한 사람에서 담대한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제 이들은 육적인 사람이 아니라 성령이 충만한 성령의 사람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일들은 성령충만하지 않고는 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약한 자를 강하게 하고, 비겁한 자를 용기있게 하고, 도망자가 담대히 나가 증거하는 자가 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할 것은 바로 성령의 충만함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예수님을 증거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전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병든 자를 고쳤습니다. 이들은 지금 예수님을 증거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고친 일로 공회에 붙잡혀 왔습니다.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섰습니다. 이 산헤드린 공회는 우리나라의 국회와 같은 곳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국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권력이 막강한 곳입니다. 여기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까지 재판합니다. 

예수님께서 사실은 여기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빌라도는 이들의 강권에 못 이겨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이렇게 산헤드린 공회는 무섭고 살벌한 곳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이 자리에서 재판 받으실 때, 베드로가 뒷전에서 벌벌 떨다가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바로 그 자리입니다. 지금 그 현장에 베드로와 요한이 섰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들은 담대합니다. 예전의 베드로와 요한이 아닙니다. 용기가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합니다. 이들이 위협합니다. “더 이상 예수를 전하지 말라. 예수에 대하여 가르치지 말라. 만약 이 명령을 거역하면 사형에 처하겠다.”고 위협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말합니다. 

본문 19절을 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 말을 ‘코람 데오’라고 합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자신이 항상 하나님 앞에 서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말 듣는 것이 옳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보름스라고 하는 의회 앞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이곳 역시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마르틴 루터는 하늘을 쳐다보며 담대히 말했습니다. “Oh, God. Here I stand.” “하나님! 제가 지금 하나님앞에 서 있습니다.” 

사람 앞에 서있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스데반 집사도 순교당할 때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았습니다. 거기 보좌에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스데반 집사는 자신이 예수님 앞에 서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죽음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자신을 죽이는 원수까지 용서하신 것처럼 스데반 집사도 자신을 돌로 쳐죽이는 그들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에 가면 원형경기장이 있는데 이곳에서 그 옛날 우리 기독교인들이 거기서 수십만 죽어갔습니다. 거기서 순교한 순교자들의 기록 중에 이러한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나를 저주하십시오. 당신들이 나를 저주하면 할수록 나는 당신들을 더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내게 침을 뱉으십시오. 나는 당신들에게 사랑의 숨결을 불어낼 것입니다. 나를 찌르십시오. 나는 당신들에게 당신들을 사랑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나를 짐승의 먹이로 던져버리십시오. 나는 당신들을 위한 사랑의 제물이 될 것입니다. 나를 불태워 주십시오. 나는 사랑의 열기로 당신들의 증오로 가득한 당신들의 마음을 녹일 것입니다.” 이렇게 그들은 자기들을 죽이는 원수들 앞에서 말하면서 죽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도 성령이 충만하면 가능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처럼, 마르틴 루터처럼, 스데반 집사처럼, 원형경기장에서 죽어간 수많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처럼 담대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합니다. 우리는 무슨 말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합니다. 이 ‘코람 데오’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느낄 때 우리는 담대해질 수 있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성령이 충만하면 근심, 걱정, 두려움, 다 사라집니다. 담대함과 용기가 생겨납니다. 


3. 우리도 베드로와 요한처럼 보고들은 것을 담대히 말하라. 

본문 20절을 다시 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담대히 말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베드로와 요한처럼 담대히 “우리의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담대히 외쳐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21)”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 

베드로는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권위가 있음을 선언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의 좋은 소식, 복음을 담대히 전해야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위로는 없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참 만족을 줄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와 힘과 용기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나 선지자들이나 사명자들이 이 복음의 말씀으로 살고 죽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보고 들은 것을 전하는 것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우리의 이웃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내가 만난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나만 예수 잘 믿는 벙어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날마다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한이 없고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예배를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경험하고,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경험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이 보고 들은 것을 전해야 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보고 들은 것을 전해야 합니다. 듣던지 안 듣던지 보고 들은 것을 전해야 합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전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가족, 친척, 친구들, 공주와 대한민국, 더 나아가서 온 세계를 향하여 전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전도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자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집니다. 하늘의 상급이 있고 전도하는 사람의 후손을 하나님이 축복하여 주십니다. 

전도하는 나라가 강성합니다. 기도하고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면 좋은 결과가 있습니다. 금과 은으로 바꿀 수 없는 축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할 때에 전도가 되고 가정과 자녀들이 잘되며 교회가 부흥하고 이 나라가 힘있는 나라가 될 줄로 믿습니다. 

:21-22절, 병 나은 사람이 40여세나 됨.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16:17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또한 마태복음 21:22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아멘! 

우리 모두 뜨겁게 기도하며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찬양합니다. ‘불속에라도 들어가서’를 힘차게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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