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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조상이 된 여인 (수 2: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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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조상이 된 여인 (수 2:15-21)
    
오늘은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이 되신 한 여자, 기생 라합의 신앙과 그의 생애에 대하여 말씀드리면서 은혜 받으려고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과 역사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생애에서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만남을 통하여 우리의 삶의 방향이 결정되는데, 좋은 영향력을 주는 만남이든지, 아니면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만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만남이라고 말합니다. 

인생길에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그의 인생이 바뀌게 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누구를 만나고 있습니까? 인생길에서 우리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만남은 하나님과의 만남,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인생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존귀한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구속사에 쓰임 받는 일꾼이 됩니다. 나를 만난 사람이 나로 인하여 죽을 사람이 살아나고, 불행한 사람이었는데 복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40년간 광야를 방황하다가 드디어 요단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와 싯딤에 주둔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와서 제일 먼저 여리고성을 점령해야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싯딤에서 두 사람의 정탐꾼을 여리고에 들여보내면서 그 땅을 엿보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지난 40년 전에 모세는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들여보냈지만, 12명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이 생존하였고, 두 사람이 긍정적으로 보고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신앙이 좋고 믿음이 가는 두 사람을 선발하여 정탐하고 오라고 여리고로 들여보냈습니다. 

두 사람 정탐꾼은 여리고에 들어가면서 여리고에서 널리 알려진 기생의 집에 들어가 유숙하려고 했습니다. 기생의 집은 중동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는 대상들, 카라반들이 즐겨 들어가는 곳이었습니다. 

당시의 기생 집이란 윤락여성만 있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몸을 파는 기생의 집이지만, 여러 나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묵어가는 여관과 같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음식을 먹고, 정치 경제 등 현안문제를 가지고 자유 토론하는 곳이었습니다. 이런 기생의 집은 가나안 여러 부족의 동태나 민심, 정치 군사적인 움직임을 파악하기에 적당한 곳이었습니다. 

두 정탐꾼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요, 거룩한 민족이란 신분으로 보면 그런 기생의 집에 들어가면 안 되지만, 이스라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그의 거룩함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정탐꾼이라면 주어진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거룩함도 유보하고 사명에 충실하려고 합니다. 

여리고의 어떤 사람이 여리고 왕에게 알렸습니다.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중의 몇 사람이 우리 땅을 정탐하려고 여리고 성에 들어왔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정탐꾼이 들어왔다면 기생의 집으로 갈 것이 뻔하였습니다. 여리고 왕이 기생 라합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합니다.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이스라엘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정탐하러 왔느니라” 거역할 수 없는 명령입니다. 

기생 라합은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두 정탐꾼을 숨겼습니다. 라합은 두 정탐꾼을 데리고 지붕으로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려놓은 삼대 속에 숨겨주었습니다. 예전에는 삼베를 베어다가 쪄서 말리고 껍질을 벗겨 실을 낳고 옷을 만들었습니다. 라합의 집에는 넓은 지붕 위에 삼대를 많이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라합이 말합니다.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내가 알지 못하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을 따라 잡으리라”고 둘러댔습니다. 

여리고의 군사들이 요단 나루터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을 쫓아갔고, 군인들이 나가자 성문을 닫았습니다. 혹시라도 정탐꾼들이 성안에 있더라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성문을 닫아걸었습니다. 주경학자들은 성경을 깊이 연구하면서 요단을 건너는 나루터는 여리고 동쪽에 있었고, 기생 라합의 집은 여리고성의 서쪽에 있었다고 합니다. 라합은 여리고 왕이 보낸 군인들이 자기 집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멀리 가도록 유도하여 보냈습니다. 

기생 라합은 이런 일을 일어날 것을 어떻게 알고 두 정탐꾼을 지붕으로 인도하였고 삼대 속에 숨겨주었는지 라합은 정말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두 정탐꾼을 여리고에 보내실 때에, 그들을 보호하려는 한 사람을 예비하고 있었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이요, 하나님의 예정이요 섭리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합은 평소에 어떤 아내들이 그들의 남편을 찾으려고 집으로 몰려오면 여자들이 돌아갈 때까지 삼대 속에 숨겨준 일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기지는 라합만이 가지고 있는 노하우, 경험적인 지혜로 보여집니다. 

라합이 두 정탐꾼을 숨겨준 일 자기와 자기 가족들의 목숨을 건 모험이었습니다. 정탐꾼을 숨겨준 일을 여리고 왕이 알게 되면 그의 가족은 다 몰살될 수도 있었습니다. 라합은 목숨 걸고 엄청난 일을 꾸미고 있습니다. 

라합이 왜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까? 라합이 왜 자기 민족을 배반하고, 위험한 일을 꾸미고 있습니까? 라합이 생각할 때에 이제 여리고의 역사는 종말을 고하고 운명은 끝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여리고 성을 이스라엘에게 넘겨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는 그의 목숨을 걸고라도 붙잡아야 할 영원한 가치와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라합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붙잡았습니다. 두 정탐꾼을 선대하여 살려 보내면 여리고가 함락될 때에 자기와 자기 가족을 살려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라합은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하나님의 편에 서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영원을 위하여 하나님 편에 서야만 합니다.

깊은 밤이 되어 라합은 지붕위로 올라가서 두 정탐꾼에게 말하였습니다. “지금 여리고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사람들로 두렵고 간담이 녹아내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홍해바다를 건너왔는데, 바닷물이 마르고 육지와 같이 건너왔다고 들었습니다. 요단강 동편에 있는 강력한 두 나라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의 나라를 전멸시켰다고 합니다. 

이런 소식을 들은 여리고는 전의를 상실하였고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정신을 잃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잘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손들어 주시기 때문에 이긴 싸움이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하나님이시고,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신 것을 알았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상천하지의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기생 라합이 두 정탐꾼을 살려주고 선대하는 것은 여리고가 함락될 때에 자기 집을 선대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12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고 호소합니다. 

지금 라합은 자기만 살겠다고 이런 모험을 감행하지 않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해달라고 합니다.  자기 민족 여리고 전체를 살려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라합은 아버지의 집, 그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가족들을 살려달라고 요청합니다. 

라합이란 여자는 분명히 한 사람인데, 아버지의 집, 곧 형제들, 그리고 그 형제들의 가족까지 책임지고 있습니다. 나 한 사람이 받을 복으로 나의 부모님, 나의 형제들, 그리고 그들에게 속한 가족들까지 먹이고 입히고 살리고 있습니다. 라합은 큰 믿음을 가진 여자입니다.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하여 기생으로 살아가던 사람이 아니라, 삶의 중요한 기로에서 올바른 선택으로 인생을 승리한 사람입니다. 

라합은 확실한 보장을 원하였습니다. 두 정탐꾼이 믿음 있는 사람이요,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인 것을 확신하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자기 앞에서 맹세하고 증표를 내어놓으라고 요구합니다. 말로만 선대한다고 하면 믿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일에는 확실하게 해두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증표를 내어놓으라고 합니다. 내가 당신들을 선대한 것처럼 당신들도 우리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라고 합니다. 

두 정탐꾼들이 말합니다.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목숨으로 너희를 대신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는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우하리라”고 약속해주었습니다. 

라합이 두 정탐꾼을 창문에서 줄로 달아내려주었습니다. 라합의 집이 성벽위에 지어져 있었습니다. 라합이 말합니다. “두렵건대 뒤쫓는 사람들이 너희와 마주칠까 하노니 너희는 산으로 가서 거기서 사흘 동안 숨어 있다가 뒤쫓는 자들이 돌아간 후에 너희의 길을 갈지니라” 

두 정탐꾼이 라합에게 확인해줍니다.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라합의 식구지만 성이 함락될 때에 거리로 나간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죽여야 하는 여리고 사람이요 라합의 가족이냐고 물어볼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라합의 집안에 있는 가족을 죽이면 그 피 값은 이스라엘이 책임져야 합니다. 라합이 이렇게까지 약속해놓고도 두 정탐꾼을 밀고하여 돌아가는 길에서 죽게 된다면 어떤 약속도 무효가 되고, 누구도 책임을 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라합은 두 정탐꾼을 믿었습니다.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두 정탐꾼을 보내어 돌아가게 하고 그 즉시 그의 창문에 붉은 줄을 창문에 매어달았습니다. 

기생 라합은 하얀 거짓말을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오직 진실만을 말하고, 옳은 것은 옳다, 아닌 것은 어떤 유익이 된다고 해도 아니라고 합니다. 라합의 거짓말은 ‘사실과의 불일치’라는 측면에서 거짓말이지, 하나님을 대하는 측면에서 보면 진실한 믿음과 충성심의 표현입니다. 하얀 거짓말을 하더라도 생명을 살리고 영원을 선택하는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라합이 자기 민족을 배반하고, 여리고 왕에게 거짓으로 고하였습니다. 여리고 사람들에게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만약 라합이 두 정탐꾼을 보았을 때에 머뭇거리다가 정탐꾼을 도와줄 기회를 잃게 되었다고 하면 그와 그의 가족도 다 여리고와 함께 멸망당하였을 것입니다. 은혜라는 것은 항상 주어지지만, 붙잡아야 할 기회는 항상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라합이 거짓말을 하면서 이기적으로 자기와 자기 가족만 살려고 했지만, 성경에서 라합은 믿음의 사람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라합은 행동하는 믿음의 여성이었습니다. 실천하는 믿음을 가진 여성이었습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는 기생 라합의 진지함과 간절한 표정이며, 두 정탐꾼을 대하는 진실한 태도, 두 사람을 신뢰하는 자세는 성경에 기록할 수 없는 행동언어들입니다. 라합의 부모와 남녀형제들, 그리고 그들에게 딸린 가족들이 전쟁의 날에 라합의 집에 모였습니다. 무슨 말을 자세히 하면 여리고 왕에게 들통 날 수도 있습니다. 그의 식구들이라고 해도 기생의 집에 모이기를 마다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라합의 진지한 얼굴, 그의 간절한 부탁, 그녀의 민첩한 행동은 거역할 수 없는 무언의 명령이었습니다. 자기 집에서 나가지 말라는 간절한 음성이 하나님의 명령과 같이 여겼을 것입니다. 한 영혼을 살리려고 하는 라합과 같은 진실하고 간절한 호소로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성경은 기생 라합을 평가하는데 믿음의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라합은 믿음의 여인이었다고 자신있게 말합니다. 

히11:31에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약2:25에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고 하셨습니다. 

결정적으로 그 분의 이름이 기록된 것은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마1:5에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라고 하였습니다. 다윗 왕의 고조부로 살몬이란 분이 계신데, 그가 기생 라합과 결혼하여 보아스를 낳았습니다. 보아스는 아버지처럼 이방 여인 룻을 아내로 맞이하여 오벳을 낳았습니다. 

살몬이란 사람에 대하여 성경은 자세히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유대의 랍비들은 살몬이란 사람의 다른 이름이 살마요, 역대상 2장에는 살마라고 했습니다. 살몬은 라합을 보면서 그녀의 결단과 진지한 모습과 의연한 태도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살몬은 두 정탐꾼 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라합이 자기의 목숨을 살려주었기 때문에, 과거에 몸을 팔던 기생이었지만, 그런 부끄러운 과거를 다 묻어두고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사람으로 과거에 더럽고 추한 삶을 살았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결혼할 때는 다 순결한 사람과 결혼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살몬이 라합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라합으로부터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정황으로 살몬은 정탐꾼의 한 사람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살몬은 라합과 결혼하여 보아스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아들 보아스는 모압여자인 룻과 결혼하여 오벳을 낳게 됩니다. 보아스는 그의 어머니가 이방여인이요, 과거에 기생이었는데, 이스라엘 유다의 가문에 들어왔습니다. 보아스라는 사람도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이방 여인 룻을 아내로 맞이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보아스는 어머니의 신앙을 본받아 가난한 사람을 돌아보아주고, 이방에서 시어머니를 따라 온 모압 여인 룻을 귀하게 여기고 그 집안의 재산을 찾아주고, 룻을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기생이었던 라합의 신실한 신앙을 물려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과거에 전과가 있었던 사람이 완전히 변하여 새로운 사람, 성숙한 사람, 인격적인 사람으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색안경을 끼고 사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사람을 보기 때문에 아무리 선하게 살려고 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심리학적으로는 ‘낙인효과’(Stigma effect)라고 합니다. 

한 사람이 한번 잘못한 것으로 사람들이 잊어버리지 않고 반복해서 지적하고 ‘너는 항상 그런 사람이라’고 낙인을 찍으면 아무리 새롭게 살고 좋게 살라가려고 해도 인정받을 수 없음을 알고 옛날의 나쁜 생활로 돌아가게 된다는 이론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로 사람을 믿어주고 칭찬해주고 격려해주면,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변화되고 더 좋게 되는 것을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라고 합니다. 

살몬이 라합의 훌륭한 행동에 감동을 받아 결혼하였지만, 라합이 전날에 기생질하던 것을 버리지 못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상대로 기생으로 살았다고 하면 그녀는 메시아의 거룩한 족보에 오르지 못하였을 것이 확실합니다. 라합은 한번의 결단으로 자신을 살리고 자기 가족을 살려냈습니다. 

그러나 라합이 정말 훌륭한 것은 옛날의 가치관, 옛날의 습관, 옛날의 언어를 버리고 새로운 삶, 새로운 가치관으로 살았기에 믿음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과거 기생이었지만, 하나님의 선민으로 신실하게 살아갔습니다. 환경이 중요합니다. 거룩한 사람들과 어울려 거룩한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도 구원받고 나서 함께 구원받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있다면 기생으로 살면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그런 여인입니다. 기생이란 직업이 좋아서 할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형편상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열악한 환경 때문에 기생으로 살았을 줄 압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런 기생의 인생을 끝내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기를 사모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영원을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결정적인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도 기생 라합처럼 하나님의 큰 구원을 위하여 자기 세계를 포기하고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여리고의 부귀영화보다도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모실 수 있는 기회를 붙잡았습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들이 것입니다. 마11:12에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침노하는 사람들, 사모하고, 나의 것으로 삼고, 차지하려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우리도 라합과 같은 이방인이요, 죄인이요, 타락한 범죄자들이었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가족이 아니라, 이방인이었습니다. 우리는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정절을 지키지 못한 창녀와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도 라합처럼 나와 나의 가정을 구원하기 위하여 구속의 붉은 줄을 창문에 내어 걸어야 합니다. 라합의 시대와 같이 오늘도 믿음의 붉은 줄을 내어걸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구원받았음을 만천하에 공포하고 구원받은 확신을 가지고 살아갑시다. 

라합의 집 창문에 드리워진 붉은 줄은 라합과 그의 가족을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음으로 증거하며 공개적으로 시인하는 표입니다. 이 세상과 세상의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때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사람, 예수님의 보혈의 피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붉은 피로 예수님에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인생을 실패한 인생이요, 마침내 심판받아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와 나의 가정을 구원하겠다는 뜨거운 열정으로 천국을 차지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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