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 (슥 14:4-5, 갈 2:20-21)

첨부 1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 (슥 14:4-5, 갈 2:20-21)

미국 워싱턴의 놀런 클리크에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키가 큰 측백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30년 전 정부의 허가로 벌목꾼들이 숲의 나무를 베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이 측백나무도 베어낼 대상이었지만 베기에는 너무 아까워 차마 베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변 나무들을 다 베어내고 나니 이 나무가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나무를 다시 살리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지만 앙상한 가지만을 남긴 채 나무는 죽었습니다. 아무리 큰 나무라고 하더라도 혼자 허허벌판의 거센 바람을 맞으며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나무들이 잘려나가면서 이끼와 다른 나뭇가지들이 죽어버리자 충분한 수분을 얻지 못한 큰 측백나무도 함께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야 하고, 죽을 수 있는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주님이 죽으셨으니까 우리도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야 하고, 살 수 있는 이유도 분명히 있습니다. 주님이 다시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혼자 죽고 혼자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많은 축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양편의 십자가에 박힌 자들은 주님과 함께 못 박힌 자들이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의 십자가 옆의 십자가에 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하나의 십자가에 예수님과 내가 함께 못 박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에 내가 함께 못 박히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1:16에는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유대로 다시 가려고 할 때에 도마가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도마는 절망 가운데 “모르겠다, 우리도 죽어버리자”라는 포기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도마는 우울증세를 가지고 있었고 이 증세 때문에 한 말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절망이나 우울증 때문이 아니라 확신과 용기를 가지고 대담하게 함께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이 말을 잘 묵상해보면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며 영광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못 오를 산이 없고, 주님과 함께라면 못 건널 강이 없네. 주님과 함께라면 날마다 내가 죽고, 내 안에 주님이 사네. 십자가 지고 가는 길 험할지라도 주님과 함께 가면 행복하겠네. 폭풍이 몰아치는 거친 광야도 주님과 함께 가면 못 갈 것이 없네”. 
  
주님과 함께 라면 무엇이든지 기쁨이며, 영광이며, 영예입니다. 루터는 “주님과 함께라면 지옥에라도 가겠다”고 했습니다. 지옥에 가고 싶다는 말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라면 지옥도 두려울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은 누가가 기록한 역사서입니다. 사도행전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 ‘저희’라는 부분(they-section)과 ‘우리’ 부분(we-section)입니다. 사도행전의 앞부분은 ‘저희’라고 하다가 16장에 바울이 빌립보에 왔을 때 ‘우리’라는 말이 처음 등장합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빌립보에 왔을 때에 누가가 바울의 전도팀에 합류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빌립보를 떠날 때에 “저희가 떠났다”고 합니다. 누가는 빌립보에 남아 교회를 돌보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20:6에 바울이 다시 빌립보에 왔을 때 ‘우리’라는 말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빌립보를 떠나”라고 합니다. 그 후 28장 끝까지 ‘우리’라는 말이 계속됩니다. 누가는 의사요, 역사가요, 문장가였습니다. 이런 누가는 바울이 전도하고, 후에 고소를 당하여 왕과 총독 앞에 서고, 유대인들에게 죽을 뻔 하고, 로마로 가다가 파선을 당하고, 로마에 가서 마지막 순교할 때까지 바울과 함께 하였습니다. 병도 많고 몸이 약했던 바울 곁에 의사인 누가가 함께 있었다는 것은 바울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가장 어려울 때 함께 하는 사람이 가장 좋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가장 친밀한 사람입니다. 가장 고마운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가장 큰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 모두에게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바울은 가장 고통스런 그 순간을 예수님과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히겠다고 합니다.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히는 것을 예수님은 가장 기뻐하실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므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입니다. 

갈라디아서 2:20 상반절에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초대교회의 가르침의 초점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사실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초대교회는 두 가지 큰 이단이 있었습니다. ‘가현설’과 ‘양자설’ 이단입니다. 이 두 이단은 예수님의 본성을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본성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만을 인정하던 이단입니다. ‘가현설’이란 예수님은 신성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죽을 수가 없고,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가던 구레네 시몬이었는데 사람들은 환각 가운데 예수님이 죽은 것으로 착각하였다는 이론을 말한 이단입니다. 

‘양자설’이란 예수님은 인성만 가지고 있었는데 어릴 때 삶을 보니 너무 착해서 하나님이 세례를 받을 때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양자로 삼아주셨다는 이론을 말한 이단입니다. 이런 초대 이단은 그리스도의 본성에서 시작된 극단적 이론을 말하므로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은 신성만 가지고 계시다고 하는 단성론을 주장하는 교부들과 교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본성이 왜 문제가 됩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과 부활 때문입니다. 

사람의 눈으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이 다시 부활하셨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신으로만 보기도 하였고, 인간으로만 보기도 하였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기 때문에 ‘단성론’이 생겨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예수님이 사람이며 동시에 하나님이시라는 양성론을 믿을 때에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어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믿음과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라는 말은 예수님을 핍박하던 바울의 삶의 변화를 표현한 말입니다. 그가 율법으로부터 단절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사도행전 8:1에는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고 합니다. 

스데반이 죽은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울은 스데반이 돌에 맞을 때에 스데반의 옷을 지키던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합니다. 이 말은 바울의 완전한 변화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박해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잡아 가두고, 십자가를 박해하던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완전히 돌아섰음을 말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유화는 ‘십자가에 못 박히심’(The Crucifixion)이란 그림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은 가로 길이가 60m이고 세로 길이가 14m인 작품입니다. 오래전 러시아의 화가 얀 스티카가 그린 그림인데 너무 커서 둘 곳이 없었습니다. 

미국의 휴버트 이튼이란 분이 포레스트 론이라는 묘지를 설립하면서 캘리포니아 글렌데일의 포레스트 론에 이 그림이 들어갈 수 있도록 큰 집을 지어 이 그림을 전시하였습니다. 얀 스티카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을 그리는데 어떤 장면을 그릴까 구상하다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직전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큰 그림의 왼쪽 구석에 사울(바울)을 그렸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을 목격하고 있는 바울의 모습입니다. 상상이지만 얼마든지 가능한 장면이었다고 봅니다. 
  
이전에 사울은 십자가를 조롱하였습니다. 십자가를 부끄럽게 생각하였습니다. 십자가는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후에 바울은 십자가를 사랑하고 자랑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힌다고 말할 만큼 십자가는 그에게 위대한 믿음의 증거였습니다. 

바울이 이제까지 메고 있던 것은 율법입니다. 율법은 그에게 짐이었고, 어리석음이었고, 십자가보다 더 무거운 것이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율법의 짐을 내려놓고, 어리석음을 멀리하고, 무거움으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구속이나 고통이 아닌 자유와 해방입니다. 
  
‘동정’(compassion)이란 단어는 ‘함께 고난을 받는다’는 라틴어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동정심의 극치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우리와 함께 고난 받으신 것이 십자가입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님께 똑같은 동정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동정심의 극치였던 그 십자가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힌다는 것은 참 평안이며, 기쁨이며, 안전한 것입니다. 나와 같은 사람이 감히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는 것은 무한한 영광입니다. 
  
어떤 사람과 함께 있기를 원하는 것은 이기적이지만 그 사람의 멍에를 지기를 원하는 것은 이타적입니다. 그냥 함께 있는 것만을 원하는 것은 이기적이지만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히고 죽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일입니다. 
  
‘임마누엘’로 오신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임마누엘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에는 십자가로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하나가 되게 하셨다고 합니다. 바울의 말대로 이제 내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임마누엘을 이루는 것입니다. 
  
희극 배우 찰리 채플린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나는 평화롭다. 나의 갈등은 인간과 함께 있을 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누구나 평화롭습니다. 함께 있는 그 자리가 십자가라도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평화로운 법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는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고 어느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은 그를 공동묘지에 보내 죽은 자들에게 10분간 욕설을 퍼붓고 오라고 시켰습니다. 제자가 돌아오자 스승은 물었습니다. “죽은 자들이 화를 내더냐?” “아닙니다.” 이번에는 다시 묘지에 가서 10분간 그들을 칭찬하며 박수를 치고 오게 하였습니다. “죽은 자들이 좋아하더냐?” “아닙니다.” “사람들의 갈채에 우쭐대지 않고 세상의 비난에 주눅 들지 않게 되면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아는 셈이다”라고 스승은 말하였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이제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란 말은 세상에 대하여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심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세상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에 대하여 사는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자들입니다. 

갈라디아서 2:20 하반절에는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은 믿음 안에 사는 삶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절대로 십자가에 못 박히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믿음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입니다. 믿음은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십자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바울은 세 가지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첫째는 나 대신 그리스도가 존귀하고 그리스도가 내 삶의 중심입니다. 둘째는 율법 대신 믿음으로 삽니다. 셋째는 옛 사람 대신 새 사람으로 삽니다. 누구에게나 십자가는 변화의 경험을 하게 합니다. 십자가가 변화시키지 못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바울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육체 가운데 살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바울이 육체 밖에서 산 적이 없습니다. 이전이나 이후나 바울은 육체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육체 가운데 살지만 육체로 살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육체 가운데서 육체로 사는 사람이 있고, 육체 가운데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더 이상 육체로 살지 않습니다. 왜 육체로 살지 않습니까? 육체를 죽였으니 육체로 살지 못하고 믿음으로 삽니다. 
  
‘육체’라고 하는 말은 육체를 하나님을 거스르는데 사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육체를 쾌락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육체를 자기 정욕대로 버려둡니다. 자기 육체를 죄의 움막으로 사용합니다. 
  
창세기 6:3에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그들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사람을 멸망시키기로 하신 것은 사람이 육신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떠나가면 육신으로 변질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영의 일입니다. 육신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의 몸은 죄인의 관습으로 꽉 차 있습니다. 육체를 육체로 버려두면 멸망합니다.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죄 속에 삽니다. 육체를 십자가에 묶어 두지 않으면 악에게 묶여 삽니다. 

로마서 1:24에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라고 합니다. 
  
죄를 지어 죽을 몸은 육의 몸입니다. 십자가는 죄의 몸을 신령한 몸으로 만듭니다. 부활은 영의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5:44에는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육의 몸과 영의 몸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면 영의 몸이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면 영으로, 믿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친환경’이란 말을 자주 합니다. 환경 친화적 삶을 의미합니다. 현대인은 육체를 건강하게 하려고 친환경 유기농 식품을 찾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친영혼’입니다. 영혼 친화적 삶입니다. 영혼을 건강하게 하려는 노력이 가장 필요합니다. 십자가는 영혼을 강건하게 합니다. 영혼의 힘이 십자가에서 나옵니다. 
  
영성가 윌리엄 로우는 “당신의 몸은 병약하고 썩어가며 곧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영혼을 온전케 하는 것보다 몸을 꾸미는데 더 집착하는 사람은 아주 어리석은 사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몸을 꾸밀 것이 아니라 영혼을 잘 꾸며야 영원히 삽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20에는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락방강화에서 유독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라는 말을 많이 하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 안에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신비를 제자들을 두고 떠나기 전에 가르치고 다짐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함께 못 박히신 예수님, 부활하셔서 우리를 떠나지 않고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 우리를 떠나지 않는 우리의 주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조엘 오스틴이 들려준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유수한 대학의 총장은 예의 바른 신사였고, 존경받는 리더였습니다. 그의 아내가 말년에 알츠하이머라는 치매를 앓게 되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아내의 병이 깊어져갔고 몇 년 후에는 남편을 못 알아볼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는 간병인을 두고 정성을 다해 병든 아내를 보살폈습니다. 총장은 어느 날 재단 이사들에게 총장직 사임을 통보하였습니다. 그가 사임을 자청한 이유는 아내를 돌보는 데 전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사회는 어떻게든 총장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습니다. 그 때 한 이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리 애쓴 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모님이 총장님을 알아보지도 못하시는데요.” 

총장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50년 동안 이 여인과 평생을 함께 하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아내는 저를 알아보지 못하지만 저는 아내를 똑똑히 알아봅니다.” 진정한 사랑은 어떤 환경에서든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함께 사는 것은 함께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함께 사는 것은 함께 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섹스피어의 ‘헨리 5세’에는 “우리는 우리와 함께 죽기를 두려워하는 자들과 같이 죽고 싶지 않노라”라는 대사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각오가 되어 있는 자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주님을 사랑합니까?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세요. 주님을 구주로 믿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세요. 주님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세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주님과 하나가 된 삶을 살고 아직 육체 가운데 살지만 육체로 살지 않고 믿음 안에서 사는 귀한 주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