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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정한 믿음 (히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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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믿음
히브리서 6:1-8

‘(히 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히 6: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히 6: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히 6: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히 6: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히 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히 6: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요즈음에는 많은 사람이 성경이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내용 가운데서도, 천국과 지옥, 죄사함과 거듭남, 부활과 영생이란 말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모습을 봅니다. 심지어는 교인들조차도 이런 문제에 별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히려 이런 것에 관심을 갖는 사람을 향하여, 신앙적으로 맹신자들이 아니면 비정상적인 열광주의에 기울어진 신앙인이 아닌가? 라고 간주하는 경향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저의 짧은 소견으로는, 그리스도인의 이런 입장들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 다양한 이단들에 대한 경계심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이유는, 평안하고 아름다운 개인과 가정의 믿음생활을 무참하게 파괴를 하고, 사회적으로 적지 않은 혼란을 초래하는 이단들이, 대부분 현세의 성실한 삶보다는 내세의 삶에 대하여 유달리 강조를 하기 때문입니다.  이단들은 주장하기를  ‘세상의 마지막이 왔는데, 그까짓 썩어 없어질 돈만 벌면 무엇하느냐?’ 라고 주장하면서, 이제 다 그만두고 자기 집단에 들어오라고 갖은 감언이설로 어리석은 사람들을 미혹을 합니다. 

세상의 종말이 가까웠는데 집이 무슨 소용 있느냐? 다 팔아서 바치라!고 가르치면서 강요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단교회의 지도자들은 세상 종말을 굉장하게 이야기하면서도, 자신의 집은 크게 짓고 부동산을 모으고, 교인들의 험금은 자기의 이름으로 적금을 들고서는, 세상에 말뚝을 더욱 깊히 박고 살려고 합니다. 영적 형편이 이러하다보니, 기성 교회의 목회자들은 오히려 성도들에게 증거해야만 하는 종말에 대한 설교는, 오해를 받을까 봐 그런지 잘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현금의 목회자들이 종말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 것은 물질주의와 세속주의와 번영주의, 기복주의적 신앙에 진하게 물이 들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성경의 핵심 이야기는 죽고 사는 이야기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야기가 바로 그렇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지니신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하늘보좌를 버리고 세상에 내려오셔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으로 세상에 태어납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인 나사렛 예수는 수많은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는 삶을 살다가, 결국은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전혀 죄가 없는 분이지만 산헤드린과 빌라도의 법정에서 죄인으로 정죄를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십니다. 하지만 그런 나사렛 예수가 죽은자 사흘만에 생전에 예언한대로 죽음에서 부활합니다. 이 부활을 통하여 나사렛 예수는 당신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였고, 인류의 그리스도가 되심과 그리스도인도 마지막 날에 부활하고, 영생을 얻게 됨을 증거 한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러니까 나사렛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그 날에 부활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영화로운 몸, 신령한 몸’으로의 부활이 있은 후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가 증거하는 핵심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 이야기 입니다. 

성경 말씀과 설교의 내용은 ‘선포된 말씀과 가르침의 말씀’ 등 크게 두 가지로 나눕니다. 신약성경을 기록한 헬라어로는 ‘선포된 말씀’을 ‘케리그마’라고 하고, ‘가르치는 말씀’을 ‘디다케’라고 합니다. 선포된 말씀은 말하는 사람의 권위 때문에, 이유를 불문하고 순종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왕이 자신의 뜻을 백성이나 개인에게 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왕권 시대에는 왕이 명령을 하면, 신하들은 무조건 그 명령을 따라야만 합니다. 비록 왕의 명령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논리에 맞지 않아도, 왕의 명령이기 때문에 순종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왕은 절대권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왕의 명령을 거절하는 방법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목숨을 내 놓으면 됩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는 분명히 죄가 없는 사람도 왕이 죽이라고 하면 죽여야 합니다. 그 명령이 오직 최고의 권력자인 왕의 말이기 때문에 순종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 가운데에도 야훼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된 말씀은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그 말씀이 다 이해가 되어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그 말씀이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그 분의 말씀은 우리에게 손해가 안 되고, 언제나 유익하다는 한 가지 믿음 가지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전제 하에서 성경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죄인으로 죽으셨고, 대속적인 죽음은 인류의 모든 죄를 사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지금부터 2천여년 전에 예루살렘 성의 갈보리 언덕에서 로마제국의 당시 팔레스타인지역의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서 집행 된, 십자가형으로 처형된 나사렛 사람 예수의 죽음이, 전 인류가 지은 모든 죄를 사함받게 했는지에 대하여는, 법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이 대속의 논리를 증명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설명을 하지만 사실상 논리적으로 따지면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지 않는 사람은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셀 사람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지 않는 사람이, 장차 죽어서 지옥에 갈 것이라는 것을, 이 땅에서 검증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씀이 분명하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성경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러질 줄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재림하셔서 심판을 행하시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서운 벌을 주시고,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복을 누리고 살 것이라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의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실 이 종말에 대한 믿음도 논리적으로는 설명을 못하는 것이고,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닙니다. 단지 그리스도인은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논리적으로 명확하게 설명할 수도 없고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방법도 없지만, 그 말씀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야만 하는 말씀을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구원에 관련된 말씀들이 모두 여기에 해당합니다. 나사렛 사람 에수의 동정녀 탄생, 십자가에서의 죽으심, 부활하심, 승천하심, 죄인들의 심판, 성도들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복과 생명이 다 여기에 포함됩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선포된 말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르침의 말씀’인 ‘디다케’가 있습니다. 헬라어로 ‘디다케’란 우리말로는 ‘교육, 교훈’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고, 현실생활에서 검증이 가능한 말씀입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가르치는 것처럼, 논리와 경험을 바탕으로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들은 우리 실생활에 필요한 말씀입니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훈화들입니다. 어떻게 가정생활을 할 것이며, 부모 노릇을 잘 할 것이며, 자식의 도리를 잘 할 것이며, 부부가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를 가르쳐 주는 말씀들입니다.

여러분이 불신자에게 전도를 하면 많은 사람이 ‘교회 가면 좋지요. 좋은 말씀도 듣고’라고 합니다. 여기서 좋은 말씀이라는 것이, 대개는 실생활에 필요한 말씀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가정교육을 위한 열 가지 법칙, 행복한 부부생활을 위한 열 가지 법칙, 사업 성공을 위한 열 가지 법칙’ 등 이와 같은 말씀이 가르침의 말씀입니다. 신자나 불신자나 다 수긍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구원의 도리는 아닙니다.  

그런데 요즘의 신자들은, 논리적으로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고, 경험적으로 검증도 불가능한, ‘선포된 말씀’을 좋아하지를 않습니다. 지옥, 하나님의 나라, 영생, 부활, 이런 이야기는 좀 무식한 사람이 하는 이야기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인들 가운데는 ‘목사님! 지옥 천국 그런 이야기 말고 다른 말씀 좀 하시죠?’ 라는 생각을 가진 교인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목사가 교회에서 이런 설교를 잘 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설교하는 사람도 이런 설교 할 때에는 부담이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목회자가 ‘예수님을 믿으면 이제까지 지은 모든 죄를 사함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부활할 것이고, 장차 때가 이르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라고 증거하는 것은 자기 믿음을 가지고 하는 것이지 어떤 객관적인 증거를 가지고 증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런 말씀을 가지고 불신 이웃을 설득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하는 사람도 선포된 말씀을 전하기를 주저하고, 말씀을 듣는 사람도 전적으로 들은 말씀에 대하여 아멘 하기가 어려운 형편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포된 말씀’이 ‘가르침의 말씀’보다는 훨씬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의 본질이 ‘선포된 말씀’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선포 된 말씀’이란 곧 ‘나사렛 사람 예수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고, 나사렛 예수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마에 부활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대로 나사렛 예수를 자기의 구세주 곧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지은 모든 죄를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어서, 천국에서 영원히 영광을 누릴 것이며,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지 않는 사람은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간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곧 그리스도교가 전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나사렛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도, 바로 선포된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성경의 처음 시작은 가르침의 말씀이 아니고 선포된 말씀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은 어떻게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물인지를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과학적으로도 증명하지를 않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셨다.’라고 선포만 합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받아들이든가, 거부하든가,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운동을 전개하면서, 처음으로 하신 설교가 선포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예수님께서도 하신 말씀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이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선포 된 말씀’인, 지옥과 천국과 영생과 부활에 관한 말씀이 없었다면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종교가 못되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선포된 말씀이 없으면 그리스도교도 다른 종교와 똑같이 도덕을 가르치는 윤리학이나 철학이 되고 맙니다.

그리스도교가 생명의 종교인 것은 오직 ‘선포된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논리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고 검증이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믿어야 하는 선포된 말씀이, 가르침의 말씀보다 더 중요합니다. 선포된 말씀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인간에게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 히브리서 6:1-11절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선포된 말씀에 대하여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선포된 말씀은 큰 구원입니다.
히브리서 2:3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기를,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큰 구원’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시골 할아버지가 괘종시계를 하나 사러 장에 갔습니다. 할아버지는 제일 큰 시계를 하나 사고는, 주인에게 큰 시계를 하나 샀으니 덤으로 뭘 하나 주라고 합니다. 시계방 주인이 “할아버지, 뭘 하나 드릴까요?” 물었더니, 진열되어 있는 손목시계를 하나 주라고 합니다. 마치 장에서 큰 고기 사면 작은 고기 한 마리 얹어 주고, 큰 수박 사면 작은 복숭아 하나 얹어 주니까, 시계방에서도 큰 시계 하나 샀으니, 작은 시계 하나 얹어줄 수 있다는 것이 할아버지 생각입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종 치는 괘종시계보다 손목시계가 더 비쌌습니다. 그래서 시계 장수가 할아버지에게 이 작은 시계가 큰 괘종시계보다 비싼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는데 애를 먹었다고 그럽니다. 

여기서 ‘큰 구원’이라는 표현은 외형적으로 크기가 큰 구원이 아니라 ‘더 중요한 구원’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병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사실 성경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의 역사를 보면,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다가 중한 질병에서 고침을 받고 구원을 받은 역사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으면, 많은 사람이 삶의 불행에서부터 해방을 받고, 구원을 받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삶을 살던 사람들이, 예수 믿고 나서 변화되어 복된 삶을 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변에 보면 예수 믿고 가난에서 구원받은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르쳐 주는 가르침을 잘 지키면, 사업도 잘 되고 행복한 가정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예수를 믿지 않지만 성경의 진리를 생활 속에 실천하여서, 성공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인도의 마하트만 간디가 그런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간디는  비폭력 저항으로 영국을 이겼습니다. 그런데 간디는 비폭력의 원리를, 성경 마태복음에 나오는 산상수훈에서 배웠습니다. 간디는 평생 신약성경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윤리적인 가르침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이 하나님께서 선포한 말씀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생활, 곧 삶의 자리에서 그 말씀대로 실행함으로써, 간디는 작은 성공을 했습니다. 하지만 간디가 거둔 작은 성공은 모두 일시적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더 중요하고 더 큰 구원은 죄의 용서함을 받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더 중요한 구원을 등한히 여기고 살아갑니다.

자동차 운전을 하는 사람에게 과속이 더 무섭습니까? 감시 카메라가 더 무섭습니까? 과속을 하다가 사고 나면 죽습니다. 감시 카메라 걸려 보았자, 최고 벌금이 8만원 이하입니다. 죽는 것이 무서운 일입니까? 벌금 8만원이 무섭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많은 사람이 과속도보다 감시 카메라를 더 무서워합니다. 죽음보다 8만원 벌금을 더 무서워합니다.

지금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옥에 가지 않고 영생을 얻는 것보다는, 이 세상에 살면서, 육신이 조금 편하게 사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작은 구원을 큰 구원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 땅에서 뭐가 잘못되고 불행해진 것을, 지옥에 가는 것보다 더 두려워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여러분의 눈을 빼고, 다리를 자르는 한이 있더라도, 지옥에는 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일시적인 작은 구원에 연연하지 말고, 큰 구원을 얻기 위하여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선포된 말씀을 믿지 않으면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구구단을 외우지 못하면 나누기나 곱셈을 할 수 없습니다. 믿음생활을 하면서, 선포된 말씀을 믿지 않으면, 성경에 나온 윤리적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성경을 처음 기록할 당시에는 성경 자체가 구전으로 전해져왔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앞부분에 선포된 말씀, 하나님의 일방적인 말씀이 나오고, 뒤따라서 윤리적인 규칙들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먼저 예수님이 누구인가, 예수 믿고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를 설명한 다음에, 윤리적인 문제를 말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선포된 말씀을 믿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의 보좌에 우편에 계신다고 선포한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이 선포된 말씀을 믿을 때에, 비로소 가르침의 말씀과 윤리적인 규칙을 진지하게 지킬 수가 있습니다.

구구단을 외우지 못하면 나누기와 곱셈이 불가능한 것처럼,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으면, 성경에 나온 규정을 즐거우 마음으로 지킬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나온 규정은 인간의 의지로 지키는 것이 아니고 지킬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주셔야만 지킬 수가 있습니다. 

신학용어 중에 ‘성도의 견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표현은 한 번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절대로 아주 망할 수가 없다는 의미의 말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다가도 가끔 신앙을 떠나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하고, 죄를 짓기도 하지만, 그런 사람이라도 성령의 이끄심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서 아주 망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것이 부모와 자식의 관계입니다. 아버지가 아들 더러 내 아들 아니라고 말해도, 부자관계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아들이 당신은 내 아버지가 아니라고 말해도 부자관계는 끊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도 한 번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 관계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본문 4-6절에 보면,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관계가 끊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기를,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런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습니까? 한 번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 아버지와는 끊어질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입장인데, 왜? 히브리서 기자는 본문에서 예수 믿고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있다는 말씀을 합니까?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타락한 자란, 선포된 진리를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그 안에 생명이 없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구주라는 진리를 믿지 못하면 그 안에 생명이 없습니다. 그들이 ‘디다케’ 즉, 가르침의 말씀을 몇 가지는 지켜서, 예수를 믿는 것 같지만, 그들은 선포된 진리, 나사렛 예수가 인류의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믿지 않은 것입니다. 몇 가지 그리스도교의 규정을 지켰기 때문에 예수 믿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선포된 진리를 믿지 않은 것입니다. 몸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선포된 말씀은 믿지 않으면서, 몇 가지 교회의 규정을 지켰기 때문에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을 했지만, 실제는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고,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도 없는, 진리의 말씀을 생명에 이르는 진리를 믿지 않은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 사람은 결국 진리에서 떠나갑니다. 예수에게서 떠난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게 되고, 다시 회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말씀 가운데 윤리적인 규정보다는 선포된 말씀이 더 중요합니다. 윤리적인 규정을 잘 지키면 삶에 이익이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이해가 되지 않고 경험적으로 증명이 불가능한 것이지만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보여지고 산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나사렛 예수를 통하여 보여주고 드려준 복음을 들은 그대로 받아들이고, 복음대로 살고자 정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선포된 말씀 곧 복음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른 믿음 생활을 하자면, 선포된 말씀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람을 설득하는 강연은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1) 논리입니다.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해야 사람이 그 말을 듣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따라옵니다. (2) 감정입니다. 감정이 고조되면, 논리에 조금 어긋나도 사람들이 받아들입니다. 그 예로 제 3제국의 지도자 히틀러는 선동적인 연설로 사람의 감정을 고조 시켜서, 자신의 주장을 온 독일 국민이 따르게 합니다. (3) 연설자의 인격입니다. 연설하는 사람의 인격이 고상해서, 다른 사람에게 신뢰를 받으면, 그 사람이 하는 말은 설득력을 갖습니다.

그러나 이런 좋은 연설자의 세 가지 장점을 다 가지고 있어도, 단지 연설로만, 나사렛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고, 장차 때가 되면 세상에 다시 재림하실 것이라는 것을 사람에게 설득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논리와 연설 실력으로도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를 명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이미 예수를 믿고 있는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런 주장을 하면서 불신자를 설득하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면 논리로 설명할 수 없고, 경험으로 증명할 수도 없는 말씀을, 어떻게 불신 이웃이 받아들일 수가 있겠습니까?
복음은 믿음으로,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서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께서 인류의 지은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예수의 십자가 고난이 모든 인류의 죄를 사함받게 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었으니 그것을 겸손히 믿음으로 받아들여야만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인간이 죽은 후에 심판이 있고, 신자는 천국으로 불신자는 지옥으로 간다는 진리도 성경에 기록된, 이미 하난미에의해서 선포된 약속이고 진리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능력으로는 그것의 옳고 그름을 증명할 길이 없고, 오직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아멘으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선포된 진리를 받아들이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4:1-2절에서 말하기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약속이 아직 남아 있는 동안에,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여러분 가운데서 아무도 생기지 않도록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하십시오. 그들이나 우리나, 기쁜 소식을 들은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들은 그 말씀은 그들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듣고서도, 그것을 믿음과 결합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합니다. 진정 복음이 되려면 들은 말씀을 들은대로 믿어야만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자, 하늘나라에서 호기심 많은 천사가 예수님께 묻기를 "세상을 구원하는 사역을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다 이루셨나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다 이루었다."하고 답변을 합니다. 천사가 다시 묻기를,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그처럼 어려운 일을 다 이루셨나요."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대답하기를, "나는 제자 열둘을 택하여 가르치고, 그들에게 모든 일을 위탁하고 왔다."라고 합니다.그랬더니 천사들이 깜짝 놀라면서 "아니 도대체 어쩌실려고 맡겨두고 옵니까?"하고 한 마디씩 합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나는 그들을 믿는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여러분을 믿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믿음을 가지고 들은대로 살고자 정성을 다하는 신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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