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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신을 속이지 말라 (고전 3: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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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속이지 말라 (고전 3:18-23)
 
 
18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19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20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실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끔 세계 거짓말 대회라는 기사를 접하곤 합니다.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거짓말쟁이들이 한 자리에 모인 세계 최고의 거짓말 대회가 열렸습니다. 각국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대단한 거짓말들에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그 날 영예의 대상을 받은 한국 거짓말쟁이가 등단했습니다. 모두들 숨을 죽이며 듣고 있었습니다. “주변 환경이 너........무나 아름다운 공원 벤치에, 옷을 짜아....악 빼입은 두 여자가 1분도 아니고, 2분도 아니고, 5분 동안 아무 말 없이 마주 앉아 있었다.” 다섯 명의 심사위원들의 심금을 울린 이 거짓말이, 그 날 영의 대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남자는 하루 2만 5천 마디만 하면 입에서 단 냄새가 나서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지만, 여자는 하루에 3만 마디 이상을 해야, 이야기 좀 했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딸에게, 주변 모든 여성들에게 말 많이 한다고 절대로 말하지 맙시다! 라는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또한 세계 최고의 거짓말이 있는데,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거짓말하지 않았다!”는 거짓말이 1 등을 했다고 합니다. 이 모두가 거짓말에 대한 유머인데, 이들 유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간 중에 거짓말과 무관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속아 사는 세상’ 또는 ‘속아 사는 인생’이란 말들이 있습니다. 또한 ‘속는 것은 수치가 아니고, 속이는 게 수치다.’는 말도 있습니다. 인생은 과연 속아 사는 인생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람에게 속고, 내일에 속고, 마귀에게 속아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런데 모든 거짓말 중에서 자신을 속이는 거짓말보다 더 큰 거짓말이 없고, 모든 속임수 중에서 자신을 속이는 속임보다 더 불행한 속임은 없습니다. 

인간은 악하고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남을 속이기도 하고, 남에게 속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는 자기 스스로에게 속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속이는 대표적인 일이, 스스로 지혜 있는 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모든 지혜가 자신에게서 나온다는 착각 속에 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람들을 가리켜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경계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래 전에 깨달은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본래가 이기적이어서, 만일 자신이 지혜가 부족하여 속아서 살고, 그래서 커다란 손해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 누구도 계속해서 그렇게 살기를 고집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누가 뭐라고 해도 듣지 아니하고, 지금처럼 살기를 고집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사실은 자기의 생각, 자신의 판단이 더 옳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해도 믿지를 않습니까? 그 궁극적인 이유는, 불신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은 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아 하늘나라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보다, 현세에서 부귀영화와 쾌락을 누리고 사는 것이, 훨씬 더 지혜로운 일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하면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가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말씀은 지혜로운 자가 되기 위해 몸부림치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참된 지혜 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도 바울의 역설적인 권고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권고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누구든지 스스로 지혜롭고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인간적 지혜에서 벗어나, 더 높은 하나님의 지혜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는, 결코 양립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로 개선되거나 발전되지도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택일만이 있을 뿐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세상적으로는 미련하게 보이고,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고린도 교인들은 이 ‘역설적 대립관계’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직시한 사도 바울은, 세상 지혜는 영적 미련이고, 세상 미련은 영적 지혜라는 역설을 통하여, 이 세상의 지혜를 내세워 교회를 분열시키는 일이 없어야 함을 교훈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세상적 지혜를 기준으로 지도자들을 평가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파당을 만들어 분열했다는 점에서, 그들은 스스로 지혜 있다고 착각한 자들이요, 자기를 속이는 자들이었습니다. 

19절에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의 지혜가 아무리 탁월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있어서는 미련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모든 지혜가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므로, 모두 거부하라는 뜻인가? 하나님께서 주신 타고난 지혜나 터득한 지혜도 있지 않은가? 사도 바울이 세상 지혜의 무력성과 공허함을 지적한 것은, 어디까지나 구원의 진리를 발견하는 일과, 인간을 구원을 성취하는 면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세상 지혜가 구원과 관계없는 부분에서는, 쓸모도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천부적인 명철도 하나님의 선물이고, 교양 지식과, 과학 지식 등도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세상적인 지식과 지혜는 그 용도의 한도 내에서만 유용한 것이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수단으로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점입니다. 칼빈은 “세상의 지식이나 지혜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종속되지 않는 한, 공허하고 무가치할 뿐 아니라, 구원의 지식을 얻는 데 방해물이 되기까지 한다.”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고 갈파했습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곧 하나님의 지혜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19절 하반절에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욥 5:13절의 “간교한 자로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며, 사특한 자의 계교를 패하게 하시므로”라는 말씀의 인용입니다. ‘궤휼’이란 말은 ‘교활함’ ‘간악함’이란 의미입니다. 세상 지혜를 추구하는 자는, 썩어질 육신의 만족만을 도모하는 자이기 때문에, 결국 자신의 꾀에 자기가 넘어가 파멸하게 된다는, 세상 지혜의 한계성을 보여줍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어머님께서 “여시가 자광을 물었구먼!”이라고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설교 준비를 하면서 아무리 사전을 뒤져보아도 자광이라는 뜻을 알 수가 없었어요. 별 수 없이 어머님께 그 뜻을 다시 한 번 여쭈어보았더니, 여시란 꾀가 많은 짐승인데, 여우처럼 교활한 사람이 결국은 자기 꾀에 빠진 것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분” 또는 “간교한 자로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분”이라고 하셨는데, 성경에서 우리는 그와 같은 인물을 봅니다. 

곧 애굽 왕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려보내지 않으려고, 온갖 계교를 다 동원합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자신의 왕자로부터 애굽의 모든 초태생이 다 죽임을 당하는 재앙을 받게 됩니다. 또한 페르시아 총리 하만은 경건한 유다인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높은 장대를 만들었다가, 오히려 자신이 그 나무에 달려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간교하고 교활한 꾀를 부리면 안 됩니다. 

20절에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시편 94:11절의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는 말씀의 인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어떤 치밀하고 탁월한 계획일지라도 모조리 파악하고 계시며, 나아가 그런 생각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미련한 것이요, 헛것에 불과함을 백일하에 드러내시는 분이심을 가르쳐 줍니다. 

21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칼빈은 “인간보다 더 허무한 것은 없다. 사라지는 그림자를 의지하는 것이 허무한 것처럼, 인간을 의지하는 것 역시 얼마나 불안한 것인가?” 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사람들을 자랑하는 것은, 이 세상의 지혜를 따르는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 보시기에 허무하고 공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지혜를 가진 인간들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사람을 비롯한 세상의 어떤 대상을 자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나 그 어떤 대상을 신뢰의 근거, 명예와 축복의 원천으로 삼는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도 바울의 지적은, 곧 고린도 교인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책망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는 바울을 자랑하는 이가 있었는가 하면, 아볼로를 자랑하는 이들, 그리고 게바를 자랑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렇게 어리석은 행위를 그만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권면을 통해 사도 바울은 자랑이나 영광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사실을 강하게 역설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 바울은 각각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분열하고 있는 고린도 교회의 위험한 현상에 대해 쐐기를 박고 있는 것입니다. 

21절 하반절에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고린도 교인들이 사람을 자랑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왜 사람을 자랑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것은 고린도 교회의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만물이 다 고린도 교인들을 비롯해, 교회 공동체에 속한 모든 성도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촬스 핫지는 이러한 사실을 가리켜 “롬 8:28절에 나타난 대로, 모든 것이 성도들의 구원의 완성을 향해 사용되므로, 성도들에게 종속된 것”이라는 의미와 “교회의 머리로서 만유를 소유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이 만유의 상속자”라는 의미라고 해석하였습니다. 

단적으로 말해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귀한 신분의 소유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놀라운 신분과 특권을 소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인들은 실상 자신들의 것이요, 자신들을 위해 존재하는 지도자들을 각각 숭배의 대상으로 삼아, 파당을 만들고 서로 분쟁하고 분열하였으니, 그야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었던 것입니다. 

22-23절에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자신이나 아볼로나 게바는 고린도 교인들을 위해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주로 전하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전하는 자들로서, 그리스도의 종들이요 교회의 종들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역자를 추종하고, 믿음과 신뢰의 대상으로 떠받드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주권을 부인하는 처사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 다 교회 공동체에 속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나열하고 있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며, 사람들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열된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은, 모두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사람의 삶을 지배하는 폭군적 세력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력들 앞에서, 자신의 무기력함과 초라함을 발견하고 이내 주눅이 듭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것이 교회에 속해 있다고 주장하여, 그리스도인의 고귀한 신분과 영적 부요함을 깨우쳐 줍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한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본래 자신의 소유인 이 세계에 깃발을 꽂으시고, 그것을 그리스도의 것으로 확증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의 문제가 다 해결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망각한 이 놀라운 신분과 부요함을 상기시켜, 지금 그들이 지도자를 추종하여 벌이고 있는 교회의 분열이, 얼마나 한심하고 어리석은 일인지 깨우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누구나 자신을 속일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 말씀입니다. 자신을 속이는 것 중의 하나가, 피조물인 자신의 한계와 무지를 모르고, 자신이 하나님보다 지혜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같은 무지함을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처럼 실천하기 어려운 일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든 인간들은, 천부적으로 생각하는 능력과 판단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단 자기 생각에 옳다고 여겨지면, 그 외의 어떠한 생각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습성은 비단 나이가 든 성인뿐 만 아니라, 어린아이들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도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자기 생각을 가지게 되면, 그때부터 벌써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행동하여 부모들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바둑의 원리나 지침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는 ‘위기십결’에는 “소탐대실이니, 사소취대하라.”는 가르침이 있다고 합니다. 즉 “작은 것을 욕심내면 큰 것을 잃게 되니,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지간히 수양이 되어 있거나,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한 사람이 아닌 이상, 대개의 사람들은 눈앞에 작은 돌들이 아까워 이를 살리려다가, 정작 큰 대마를 잃고 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두고 바둑의 고수들은 “기훈에 따르면 언제나 하수들은 살 수 있는 아흔아홉 가지의 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욕심에 눈이 어두워 단 하나의 죽는 길로 간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나 영적인 삶도 이와 같습니다. 즉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시는 무수한 생명과 축복의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와 욕심에 눈이 어두워 어리석게도 단 하나의 사망의 길로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눈으로 보았을 때 자신의 판단은 옳은 반면, 하나님의 길은 오히려 어리석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고 경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영광과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세상이 가는 넓은 길로 가지 말고, 좁은 길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큰 문 넓은 길로 가는 자의 결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분명히 멸망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넓은 길로 갑니다. 좁은 길로 가는 것보다, 넓은 길로 가는 것이 지혜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이 역시 자기를 속이는 일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속이는 일 가운데 또 한 가지는,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1서 1:8절에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이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하는데도, 가끔은 자기는 죄가 없다는 정신병자 같은 사람을 보게 됩니다. 

또 사람이 자기를 속이는 일이 있습니다. 약 1:26절에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했습니다. 경건은 신앙과 동의어인데, 곧 누구든지 자신에게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혀에 재갈을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 이 사람의 믿음은 헛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중환으로 고생하다가 임종을 앞두고 뼈저린 회개를 하였습니다. 곧 그 목사님은 자신을 속이고, 성도를 속이고, 하나님을 속인 큰 죄인이라는 통절한 회개를 하였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자신을 속이고, 성도를 속이고, 하나님을 속인 죄가 없습니까? 저는 자신을 속이고, 외식으로 성도를 속이고, 하나님을 속인 죄인임을 이 시간에 고백합니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우리 모두 자신이 하나님보다 지혜롭다거나, 죄가 없다는 소리를 하여 자신을 속이지 말고, 다른 사람도 속이지 말고, 하나님을 속이는 일이 없는, 진실무망한 사람들로 살아가기를 죽을 때까지 힘쓰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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