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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브라함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강하심 (창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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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강하심 (창 20:1-7)

창세기 20장에는 아브라함의 약함과 하나님의 강하심이 대비되어 있습니다. 어떤 설교학 교수가 설교의 목적이 하나는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존귀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20장이 기록된 목적도 역시 두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하나님을 존귀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2장에도 거짓말을 했고 창세기 20장에도 거짓말을 했는데 거짓말의 내용이 동일합니다. 자기 아내인 사라를 누이라고 말해서 잘못하면 다른 사람에게 아내를 빼앗기게 될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것이 원래 한 사건인데 두 종류의 문서에 있던 것을 편집자가 둘 다 넣어서 성경에 두 번 나오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창세기 12장과 20장에 거짓말의 내용은 동일해도 나머지는 다릅니다. 장소가 창세기 12장은 애굽이고 20장은 그랄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12장은 바로 왕이 나오고 20장은 아비멜렉 왕이 나오며 창세기 12장에는 롯도 같이 있었지만 20장에는 롯이 없습니다. 여러 가지가 다릅니다. 

그렇다면 왜 창세기 12장과 20장에 아브라함은 거짓말을 반복했느냐? 거짓말을 반복한 중요한 이유가 창세기 20장 12~1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그는 실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처가 되었음이니라 하나님이 나로 내 아비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창 20:12~13).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나올 때 자신의 아내 사라와 언약을 맺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오라비라 하고 또 나는 그대를 누이라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라는 아브라함의 이복 누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내를 아내라 하지 않고 누이라고만 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죽지 않으려고 자기 아내를 가는 곳마다 누이라고 하자는 언약을 출발할 때부터 맺었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그런 거짓말을 동일하게 반복했던 것입니다. 

창세기 12장과 20장 사이에는 20년 이상의 간격이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의 아브라함은 75세이고 20장에서는 100세 가까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헤브론’ 혹은 ‘마므레’라고 불리는 곳에 살다가 블레셋 족속이 살고 있는 그랄로 내려갔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랄로 내려간 이유는 그가 유목민족이었기 때문에 좋은 목초지를 찾아 옮겨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랄 왕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에게 관심을 보여 사라를 취한 것입니다. 당시 사라의 나이는 90세이었습니다. 90세에도 아름다워 보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하지만 아비멜렉이 꼭 사라의 육신적인 매력이 이끌려서 사라를 취한 것은 아닙니다. 옛날에는 왕들이 다른 지역에서 큰 집단이 들어오게 되면 그중에 여자를 취하여 그들과 화친을 맺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를 취하려고 했던 것도 정치적인 목적이 다분히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브라함은 다시 한 번 거짓말을 했고 다시 한 번 사라를 위험에 빠뜨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왜 동일한 죄에 빠졌으며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을 어떻게 대하시고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가를 생각하면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Ⅰ. 아브라함의 연약함 

아브라함은 지난 20년 동안 하나님을 많이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시기도 했고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기도 하셨으며 갖가지 은혜를 많이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도 동일한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연약하고 어리석은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왜 이런 죄를 반복했느냐? 네 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아브라함이 사람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창 20:11). 아브라함은 자신이 죽을까 봐 거짓말을 해서 자기 아내를 위험에 빠뜨린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비겁함이 거짓말을 낳게 되었고 거짓말은 결국 아브라함을 더 큰 위험과 죄로 이끌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방패라는 말씀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 15:1).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니 사람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시 118:6). 

두려워할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사람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시 34:4). 

아브라함은 기도가 없었기 때문에 마음속에 두려움이 생겨났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이십니다.
 
둘째, 아브라함이 자신의 경험을 쉽게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장에도 거짓말을 하다가 애굽 왕 바로에게 심하게 책망을 듣고 망신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결론은 동일합니다. 인간은 역사를 통해 교훈을 받을 줄 모르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역사를 통해 교훈을 받지 않기 때문에 동일한 실수를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사사기를 보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짓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방 나라 사람들을 들어 징계를 내리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사를 보내 구원해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다시 동일한 죄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순환이 열 번 이상 반복됩니다. 

우리는 아무리 바빠도 과거에 실수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잘 검토해서 다시는 동일한 실수를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망각능력이 굉장히 좋은 것 같습니다. 6‧25를 겪은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부터 공산주의가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나눠쓰자고 하는 공산주의가 말로는 좋은 것 같아도 실제로 공산주의 나라들은 대부분 망했습니다. 그럼에도 공산주의가 좋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의 교훈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셋째, 아브라함이 영적인 생활을 게을리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영적인 거성이라 할지라도 경건생활을 게을리하면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다윗 같은 사람도 경건생활을 게을리하고 지붕에 올라가서 거닐다가 목욕하고 있는 밧세바를 보고 시험에 빠져 간음하고 그 남편 우리야를 간접 살인했습니다. 베드로도 주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있을 때 대제사장의 계집종에게조차 거짓말을 합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하는 죄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모세도 자기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반석을 가리키라고 하셨는데 두 번이나 때리는 바람에 물은 나왔지만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징계를 받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성도라 할지라도 경건생활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20장에 아브라함이 기도했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어려운 시험이 오게 된 것입니다. 

넷째, 문자상으로 기록되어있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사단이 역사했기 때문입니다. 사라는 세상 모든 민족이 복 받게 될 아브라함의 씨를 생산할 여인입니다. 아브라함이 다른 여인에게서 자식을 낳아도 그것은 아브라함의 씨가 아닙니다. 오직 사라에게서 나오는 자식이 아브라함의 씨입니다.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예수님이 나오시게 되고 예수님을 통해 세상 모든 민족이 복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단은 지금 사라를 어떻게든 망가뜨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왕의 첩이 되게 하든지 아비멜렉의 첩이 되게 하든지 사라에게서 태어나는 자식이 아브라함의 자식이 아니도록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라는 말씀의 의미를 사단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자 이제는 아브라함의 후손 중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가 자식을 낳지 못하도록 역사했습니다. 유다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자식을 낳지 않자 하나님이 고약하게 여기시고 둘 다 죽입니다. 그리고 유다가 다른 동네에서 바람을 피우는데 누군지 몰랐다가 나중에 알고 보니 자신의 며느리 다말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볼 때는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유다의 자식으로부터 여자의 후손이 나와야 했기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인의 후손이 다윗 지파로부터 나온다고 하니까 이제는 사단이 다윗 지파에 속한 왕들을 모두 죽이려고 했습니다. 남 왕국 유다의 일곱 번째 왕인 아달랴는 아합의 딸이었는데 다윗의 후손들을 다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요아스를 살려주셔서 다윗의 후손이 계속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페르시아 왕국에 남아있는 유대인들을 아각 사람 하만이라는 자가 다 몰살시키려고 했을 때도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하만과 아각 족속이 도리어 몰살당했습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고 하니까 헤롯 대왕이 근처에 있던 두 살 아래 어린아이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벌써 예수님을 애굽으로 피신가게 하셔서 살려내신 것입니다. 

사단의 목적은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님의 대를 끊는 것이었습니다. 사라는 여인의 후손을 낳을 여자였기 때문에 사단이 역사해서 아비멜렉의 첩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좌절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Ⅱ.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 

아브라함의 거짓말은 작은 거짓말 같지만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 대재앙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시기고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사단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하나님의 역사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결국 사라는 열국의 어미가 되고 아브라함이 사라를 통해서 아들을 낳고 그 후손이 하늘에 별처럼 바닷가에 모래처럼 번창하리라는 언약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딤후 2:13).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의 마음도 바꿀 수 있고 행동도 바꿀 수 있으며 육신도 고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밤에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 (창 20:3). 

꿈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개꿈은 지저분하고 비논리적이고 기억하려고 해도 생각나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꿈은 깨끗하고 메시지가 분명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꿈을 주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횟수가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성경을 다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다 말씀하셨기 때문에 꿈으로 많이 말씀하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매일 하나님이 꿈으로 말씀하신다고 하는 사람은 위험합니다. 그 꿈에는 하나님이 주신 것도 있을 수 있지만 마귀가 준 것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꾼 꿈이라도 다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비멜렉의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사라는 남의 아내니 건드리면 네가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니까 아비멜렉의 마음이 변했습니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 (잠 21:1).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도 바꾸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마음을 바꿀 수 없지만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은 능히 마음을 바꾸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행동도 바꾸십니다.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 이 까닭이니라” (창 20:6).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하려고 하다가 하나님이 막으셔서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비멜렉의 행동도 지배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율의지를 가진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자율의지를 빼앗지 않으시면서도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시는 능력을 가지셨습니다. 

창세기 20장 17~18절을 보면 하나님이 사람의 육신도 지배하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으니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연고로 아비멜렉의 집 모든 태를 닫히셨음이더라” (창 20:17~18). 

하나님이 아비멜렉의 아내와 그 종들이 아이를 낳지 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기도하니까 다시 태가 열려 자녀를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집에 거하게 하사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시는도다” (시 113:9).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시 62:11). 

하나님은 또한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이 거짓말을 했음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지자라 하시고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아비멜렉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큰 재물을 주셨습니다. 

“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노비를 취하여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고” (창 20:14).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으로부터 양과 소와 노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사라 덕분에 은 천 개도 받았습니다. 

“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 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풀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선히 해결되었느니라” (창 20:16). 

아브라함이 부자가 된 것은 순전히 사라 덕분입니다. 애굽에 가서도 사라 덕분에 부자가 되었고 그랄에 가서도 사라 덕분에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지자로 사용하실 뿐 아니라 큰 재물도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능력과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능력과 은혜의 하나님을 만나고 싶으시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Ⅲ. 창세기 20장의 교훈 

창세기 20장에는 아브라함의 약함과 하나님의 능력이 대조되는데 여기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첫째, 사람은 높이 올라갔을 때 조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9장에 아브라함은 기도를 통해 소돔과 고모라가 망하는 가운데 자신의 조카 롯을 건져냈습니다. 기도로 승리한 것입니다. 이렇게 창세기 19장에 위대한 승리를 하고 곧바로 창세기 20장에 큰 죄를 지어 하마터면 아내를 잃을 뻔했습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 10:12).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자꾸 높이면 나중에 남는 것은 고꾸라지는 것밖에 남질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자꾸 높이지 마시고 높이 올라갔다고 생각될 때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등산도 올라갈 때는 잘 올라가다가 내려갈 때 고꾸라져서 다친 사람이 많습니다. 계단도 올라갈 때는 잘 올라가다 내려갈 때 넘어져서 다리를 다칩니다. 사람은 높이 올라갔을 때 조심해야 됩니다. 

둘째, 성도들은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거짓말을 하면 잠깐의 위기는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큰 위기를 초래하고 더 많은 죄를 유발하는 것입니다. 

“의인은 거짓말을 미워하나 악인은 행위가 흉악하여 부끄러운 데 이르느니라” (잠 13:5).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잠 30:8). 

사람들은 거짓말을 잘합니다. 남의 돈을 빌려가도 갚는 사람보다 떼어먹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케 하시도다” (사 26:7). 

“정직한 자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어질고 자비하고 의로운 자로다” (시 112:4).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하면 되고 실수했으면 실수했다고 하면 됩니다. 

저는 군대생활을 공군 장교로 했습니다. 그런데 장교들은 병사들이 먹는 짬밥을 못 먹고 돈을 주고 밥을 사서 먹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훈련받을 때 먹었던 짬밥이 너무 먹고 싶어서 식당에 가서 한 그릇 먹고 있었는데 사령관님이 순시를 와서 제 앞에 온 것입니다. 그래서 얼른 경례를 하니까 왜 여기서 밥을 먹고 있냐고 물어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훈련받을 때 먹던 짬밥이 너무 먹고 싶어서 먹고 있다고 하니까 그냥 가는 것입니다. 나중에 대대장님이 저를 부르더니 정직하게 말해서 살았다고 했습니다. 거짓말은 인생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정직하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셋째, 성도들은 인생의 위기와 환란이 와도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시며 큰 도움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시 46:1).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시 115:9). 


결론 

창세기 20장에는 하늘과 땅이 대조되듯이 은혜로우신 하나님과 거짓말하는 아브라함이 대조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인간 가운데 가장 훌륭한 인간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믿음의 조상이 이런 수준인데 우리 수준은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아브라함보다 낫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첫째, 항상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둘째, 존귀하신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해야 합니다. 언어나 삶이나 예배를 통해서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방패가 되어주시고 큰 도움이 되어주실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영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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