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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눈앞에 밝히 보인 십자가 (삼하 22:25-27, 갈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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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밝히 보인 십자가 (삼하 22:25-27, 갈 3:1-3) 

모세는 120세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 느보산에 오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요단강 건너편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나이가 많았지만 아직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갈 만큼 건강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하나님, 잠시만 들어가 보고 나오면 안 되겠습니까?”라고 때를 쓰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렇게 기다리던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고 눈으로 보게만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에 들어가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느보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모세에게 눈으로 보게 하셨던 그 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약속의 땅입니다. 하나님은 보게 하신 것을 얻게 하십니다. 모세의 눈앞에 밝히 보인 가나안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무 공로 없이 차지하게 하신 땅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모리아 산에 가서 이삭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모리아는 이스라엘에게는 굉장히 의미 있는 산입니다. 이삭을 드린 산이며,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바로 그 자리입니다. 모리아라는 ‘야(Jah)께서 보시다’라는 뜻입니다. ‘야(Jah)’는 히브리어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의 축약입니다. 모리아는 ‘하나님의 관점의 산’이란 의미입니다. 모리아는 하나님이 보시는 산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을 내가 보면 내가 그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13:14 하반절-15절에는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주시려는 것을 먼저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자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땅을 주시려고 먼저 땅을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려고 먼저 복을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로 구원받게 하시려고 먼저 십자가를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바라보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바라봄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는 것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는 것을 닮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는 것에 의해 변화되게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십자가를 얻고 십자가의 주인인 그리스도를 닮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마귀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마귀가 왜 구원받지 못합니까?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구원을 받을 텐데 마귀는 절대로 십자가를 바라보지 못합니다. 흡혈귀 뱀파이어를 보세요. 드라큘라는 십자가를 안 보려고 피합니다. 드라큘라를 쫓는 방법은 십자가를 보게 내 미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고 구원받을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십자가가 구원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가 달리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보게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만지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을 우리가 잘 알지 못하게 희미하게 보여주시거나 아리송하게 말씀하시거나 긴가민가 하게 만지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언제나 가장 확실하게 우리에게 알게 하십니다. 
  
요한복음 1:1에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바라”고 합니다. 우리의 구원에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가장 확실한 것은 보고 만진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게 하시려고 십자가를 눈앞에 밝히 보게 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영의 눈이 밝아져 눈앞에 있는 십자가를 밝히 보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첫째, 지혜로운 자는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눈앞에 보입니다. 

갈라디아서 3:1에는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합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눈으로 본 듯이 명백한 사실입니다. 
  
“밝히 보이거늘”이란 말은 ‘프로에그라페’라는 말로서 “미리 기록하다”란 뜻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이미 과거에 편지와 방문을 통해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미 십자가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이미 선명하게 십자가를 전파하였습니다. 십자가를 그들에게 보는 듯이 확실하게 제시했다는 뜻입니다.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바스카넨’인데 ‘악한 술책으로 타락시키다’는 뜻입니다. 악한 꾀로 선명한 복음의 핵심을 잃어버릴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십자가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눈으로 똑똑히 보아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인데 악한 꾀로 핵심을 흐리게 하였다는 말입니다. 
  
‘명약관화’(明若觀火)란 말이 ‘서경’에 나옵니다. 불을 보는 것 같이 밝게 보인다는 뜻입니다. 말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은 불을 보듯 확실한 일인데 눈을 흐리게 꼬여서 보지 못하게 하였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본다고 다 믿는 것은 아닙니다. 눈앞에서 뻔히 보면서도 놓치는 것이 많습니다. 요즘 마술하는 것을 보면 눈앞에서 뻔히 보는 것도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치 심령술로 홀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눈을 의심하게 하는 것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 눈앞에서 보던 것이 사라지고, 눈앞에서 물체가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심지어 사람의 몸을 싹둑 자르기도 합니다. 눈을 의심할 정도가 아니라 바보가 된 느낌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때때로 ‘귀신에게 홀렸나?’라는 말을 합니다. 악한 영의 악한 술책에 빠지게 되면 눈에 보는 것도 믿지 못하게 됩니다. 마치 귀신에게 홀리듯 눈앞에서 보는 것도 믿지 못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눈에 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눈을 우러러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보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우러러 보아야 합니다. 우리 눈으로 보기를 거부하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시편 123:1에는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라고 합니다. 눈을 들어 주님을 향하면 주님이 보이고, 빛을 향하면 빛이 보입니다. 세상을 향하면 세상이 보이게 꼬이고, 어둠을 향하면 어둠을 보게 꼬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오실 때 자기도 물위로 걸어가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오라”는 말씀을 듣고 물위를 걸어가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가다가 가까이 가서는 출렁거리는 물결을 보았습니다. 물결을 보는 순간 베드로는 물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을 보면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물결을 보면 빠집니다. 바라보는 것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사람은 세상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예수님께 눈을 고정시키자는 뜻입니다. 마귀는 세상이 끝없이 바다처럼 출렁이는데 뭘 하느냐고 바다를 보게 우리를 꼬입니다. 그래서 물에 빠지게 합니다. 
  
출애급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가데스 바네아에서 큰 실패를 맛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므로 하나님께서 불 뱀을 풀어 백성들을 물어 죽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불 뱀에게 물린 사람들이 높은 장대에 달린 구리 뱀을 보게 하였고 구리 뱀을 보는 사람은 모두 살았습니다. 높은 장대에 달린 구리 뱀에게 잠깐 고개만 들면 될 것을 사람들은 들지 않고 죽었습니다. “그걸 본다고 낫겠나?”라고 했을 것입니다. 마귀는 뱀에게 물린 사람들을 꾀어 구리 뱀을 쳐다보지 않게 하고 멸망을 당하게 하였습니다. 
  
사무엘상 22:25에는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대로, 그의 눈앞에서 내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눈앞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눈을 들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 죄를 씻어 깨끗하게 하시고 구원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진짜로 지켜보는 것, 특히 나를 우러러 보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상대방에게 아주 중요한 축복입니다. 우리가 봐주는 사람들에게서 우리도 복을 받습니다. 누군가를 보아줌으로써 복을 받는다는 사실은 아이들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열심히 장난하고 놀면서도 끊임없이 부모님 쪽을 보면서 “엄마, 아빠, 여기 좀 보세요”라고 합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복을 받고 친밀한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십자가가 존귀케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내가 십자가를 통하여 복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못 박히신 십자가를 밝히 바라보면 십자가가 축복이 됩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축복이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통하여 얻는 복과 지혜가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둘째, 어리석은 자에게 십자가가 보이지 않는 것은 육체로 마치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3:3에는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라고 합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육적 자아를 못 박은 성도가 어떻게 다시 육적으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를 바라보면서도 십자가를 느끼지 못하고 육체로 돌아가는 것이야 말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가장 타락하고 추한 세상의 상징입니다. 천사의 경고를 들은 롯은 아내와 딸들과 사위들에게 그 말을 전하고 소돔과 고모라를 떠날 것을 권했습니다. 그러나 롯의 사위들은 아예 소돔과 고모라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롯의 아내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나왔지만 나오다가 뒤를 돌아보아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아예 나오지 않은 사위들이나 나오다가 악한 땅에 미련이 남아 뒤를 돌아본 아내는 어리석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때로는 반쯤 어리석은 것이 완전히 어리석은 것 보다 더 방해가 됩니다. 반쯤 침몰한 배는 완전히 침몰한 배보다 훨씬 지나가는 배에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출애굽할 때를 보세요. 고라는 백성들을 선동하여 다시 애급으로 돌아가자고 하였습니다. 백성들은 고기가 없다고 불평하며 애급의 고기 가마가 생각이 난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의 정탐꾼은 여리고 사람들이 보기에는 자신들이 메뚜기와 같을 것이라고 좌절하였습니다. 이들은 다 은혜로 시작하였다가 불평으로 끝난 사람들입니다. 완전구원을 받지 못하고 중도에 끝난 사람들입니다. 최종 목적지인 가나안에 적합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빌레몬서 1:24에는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데마를 바울은 동역자라고 부릅니다. 

디모데후서 4:10에는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라고 합니다. 데마는 바울의 좋은 동역자였는데 무슨 일인지 바울을 버리고 세상으로 갔습니다. 교회를 잘 섬기다가 교회를 떠난 것입니다. 

11절에는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합니다. 누가는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데마와 누가는 완전히 다른 길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데마는 중도에 바울을 떠나 세상으로 갔지만 누가는 끝까지 바울과 함께 하였습니다.

골로새서 4:14에는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고 합니다. 누가와 데마는 여러 번 두 사람의 이름이 함께 성경에 등장합니다. 

빌레몬서 1:24에는 데마의 이름이 누가보다 먼저 나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데마가 누가보다 교회에서 더 유력했다는 증거입니다. 두 사람이 다 바울의 충실한 동역자였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완전히 반대입니다. 누가는 끝까지 교회와 바울을 떠나지 않았고, 데마는 교회와 바울을 떠나 세상으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지만 육체로 마치는 위험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이런 위험은 바울도 예외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9:27에는 바울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 합니다. 자기가 버림이 되는 위험 때문에 바울도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시켰다고 합니다. 
  
비행기가 비행하는 동안 ‘에어포켓’이란 것을 만나게 되면 비행기가 흔들리고 아래로 뚝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비행기는 멈추지 않고 속도를 늦추지 않고 계속 날아갑니다. 배가 바다를 항해하는 도중에 풍랑을 만나면 풍랑이 심할수록 멈추지 않고 쾌속으로 파도를 향해서 갑니다. 기차가 터널을 지나갈 때에 깜깜하다고 멈추지 않고 조금만 지나면 터널을 빠져나가고 밝은 빛이 있는 것을 알고 승객들은 뛰어내리고 않고 계속 갑니다. 뒤로 돌아서는 것은 곧 파멸을 의미합니다. 믿음의 사람이 세상으로 향하는 것은 멸망을 의미합니다. 
  
독일의 심리학자 헤르만 에빙하우스는 인간에게는 ‘망각곡선’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새로운 정보를 기억하고 있어도 1개월이 지나면 거의 백지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1개월이 지나면 정보를 접하기 전의 수준으로 되돌아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책을 잘 기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1개월 이내에 다시 읽어야 한다고 합니다. 인간은 그냥 버려두면 다시 원래의 무지, 본래의 더러움, 죄악의 상태로 되돌아갑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해야 하고, 꾸준히 돌아서야 합니다. 
  
베드로후서 2:22에는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고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육체에 몸을 맡기면 육체로 돌아가 육체로 마치게 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옆을 보지 않고 앞을 향해 갑니다. 세상에 기웃거리지 않고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삽니다. 뒤를 보지 않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갑니다. 이런 삶을 살아야 육체로 끝나지 않는 성령의 삶을 살게 됩니다.  
  
제1세대 복음성가는 참 소박한 의미가 있는 가사가 많습니다.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뒤돌아서지 않겠네”. 십자가를 바라보고 가면 뒤돌아서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가면 천국을 향해 갑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가면 육체로 끝나지 않습니다. 

  
결론 

춘추전국시대에 한비자라는 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위대한 학자였고, 책략가였고, 전국책이었고, 정치에 조예가 깊은 뛰어난 학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고분’, ‘오두’, ‘내외저설’, ‘세림’, ‘세난’과 같은 책을 썼습니다. 진시황은 한비자의 책을 보고 그의 지식에 감탄하여 그를 얻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한 사람을 얻기 위한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나 한비자는 그 후에 다른 신하의 모함 때문에 진시황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의 책 ‘오두’에 나온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송나라에 어떤 농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토끼가 세차게 달려와 밭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의 그루터기에 부딪쳐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운이 좋게 토끼 한 마리를 얻은 농부는 그 후로 농사는 안 짓고 매일 그 나무 그루터기만 쳐다보고 토끼가 달려와 부딪치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농부는 결국 세인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멀리 하늘을 바라보지 못하고 땅만 보는 것은 그 자체가 어리석은 일입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아닌 세상의 사람들만 바라보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성령이 아닌 육체에만 집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베드로후서 1:9에는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고 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영적 눈을 뜨지 못한 자입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은 사람입니다. 눈에 밝히 보인 십자가를 보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밝히 보게 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속죄를 잊지 않고 십자가의 신앙으로 살아가는 복음으로 무장한 그리스도인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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