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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밥벌이나 하라고? (암 7: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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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벌이나 하라고? (암 7:10-17)


[베델의 아마샤 제사장이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에게 사람을 보내서 알렸다. "아모스가 이스라엘 나라 한가운데서 임금님에 대한 반란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는 모든 말을 이 나라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아모스는 ‘여로보암은 칼에 찔려 죽고, 이스라엘 백성은 틀림없이 사로잡혀서, 그 살던 땅에서 떠나게 될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아마샤는 아모스에게도 말하였다. "선견자는, 여기를 떠나시오! 유다 땅으로 피해서, 거기에서나 예언을 하면서 거기서, 밥벌이를 하시오. 다시는 베델에 나타나서 예언을 하지 마시오, 이곳은 임금님의 성소요, 왕실이오."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오. 나는 집짐승을 먹이며, 돌무화과를 가꾸는 사람이오.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양 떼를 몰던 곳에서 붙잡아 내셔서,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로 가서 예언하라고 명하셨소. 이제 그대는,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시오. 그대는 나더러 ‘이스라엘을 치는 예언을 하지 말고, 이삭의 집을 치는 설교를 하지 말라’고 말하였소. 그대가 그런 말을 하였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오. ‘네 아내는 이 도성에서 창녀가 되고, 네 아들딸은 칼에 찔려 죽고, 네 땅은 남들이 측량하여 나누어 차지하고, 너는 사로잡혀 간 그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꼼짝없이 사로잡혀 제가 살던 땅에서 떠날 것이다.’"]

• 아름다운 연합교회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한국교회가 교회연합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세상에는 정말 많은 교파와 교회가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단 하나의 교회만 존재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교회는 한 몸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같은 세례와 성례를 행하면서도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참 많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아픔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아픔이기도 합니다.

지난 주간 저는 괌(Guam)에 있는 <아름다운 연합교회>의 가을 집회를 인도하고 돌아왔습니다. 아름다운 연합교회는 세 개의 교회이면서도 하나의 교회입니다. 12년 전 감리교, 장로교, 침례교 목회자 세 분이 분열을 거듭하는 이민교회의 현실을 안타까이 여겨 오히려 연합하는 길을 모색한 끝에 교회를 합치기로 결정을 했던 것입니다. 교회를 합치고 나니 개교회가 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목회자가 세 분이다 보니 사역의 다양성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자체 교회 건물이 없는 데도 마이크로네시아에 교회를 지어 봉헌하기도 했고, 평창에 있는 교회를 리모델링해주는 일도 했습니다. 

쉽지 않은 길이었기에 사람들은 6개월도 못 버틸 거라고 말했지만 1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교회는 아름다운 성장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이 세 교회가 통합할 때 류연복 화백에게 교회 로고를 부탁했다고 하는데 그 로고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전체 공간은 하늘을 상징하는 반 원 형태의 윗부분과 땅을 상징하는 사각형이 아랫부분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밑바닥에는 나지막한 산이 있고 그 위로는 달과 별과 해와 구름이 떠 있습니다. 한복판에는 가지가 셋인 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는데, 가지가 떠받치고 있는 무성한 나뭇잎은 또 다시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나무 우듬지에는 새 한 마리가 내려앉아 즐겁게 지저귀고 있습니다. 세 교회의 하나 됨을 멋지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절묘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 분의 목회자들이나 교인들의 생각이나 성정이나 지향이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마음을 열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존중하면서 그 교회는 성숙한 교회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었습니다. 가서 말씀을 전하고 오기는 했지만 저는 한국 교회가 지향해야 할 좋은 본을 본 것 같아 참 행복했습니다. 

• 욕망과 왜곡

오늘 한국교회의 위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겸허한 마음으로 경청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욕망에 따라 말씀을 왜곡하고 변질시키는 이들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주전 8세기에 북왕국에서 벌어졌던 한 에피소드를 통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신앙을 가늠해보고 싶습니다. 드고아의 목자였던 아모스가 예언자로 부름 받은 것은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때였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협하던 열강들이 세력 균형을 이루고 있던 때라, 이스라엘은 그 힘의 공백기를 이용해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나 마찬가지이지만 그 부는 공정하게 분배되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소수의 사람들은 사치스러운 삶을 즐길 수 있었지만 민중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습니다. 

북왕국은 출애굽 정신을 국가의 정체성으로 삼고 세워진 나라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평등 공동체의 이상이야말로 북왕국의 꿈이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부가 특권층들에게 집중되면서 그 꿈은 퇴색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역사에 대한 배신인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배신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모스를 일으시키어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게 하셨습니다. 아모스의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하나님께 등을 돌린 백성은 망한다는 것입니다(암6:1). 그들은 재난이 닥쳐올 날을 피하려고 하면서도, 하는 일을 통해 폭력의 날을 불러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망한다! 상아 침상에 누우며 안락의자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골라 잡은 어린 양 요리를 먹고 우리에서 송아지를 골라 잡아먹는 자들, 거문고 소리에 맞추어서 헛된 노래를 흥얼대며, 다윗이나 된 것처럼 악기들을 만들어 내는 자들, 대접으로 포도주를 퍼마시며, 가장 좋은 향유를 몸에 바르면서도 요셉의 집이 망하는 것은 걱정도 하지 않는 자들, 이제는 그들이 그 맨 먼저 사로잡혀서 끌려갈 것이다. 마음껏 흥청대던 잔치는 끝장나고 말 것이다."(암6:4-7)

베델의 제사장인 아마샤에게 아모스 선지자의 외침은 불편함 그 자체였습니다. 부유한 이들의 호의에 기대어 살고, 자신 역시 특권을 누리고 살던 사람이었으니 아모스의 말은 마치 비수처럼 아팠을 것입니다. 그는 아모스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 왕의 손을 빌리려 합니다. 그는 여로보암 왕에게 가서 아모스가 백성들에게 반란을 선동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가 하는 말을 이 나라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도 말합니다.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는 애국자이고 아모스는 반민족주의자입니다. 그는 아모스가 왕은 칼에 찔려 죽고 백성들은 사로잡혀 가게 될 것이라면서 민심을 뒤흔들고 있다고 말합니다. 

아마샤가 전혀 근거 없이 아모스를 모함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모스는 분명 그런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아마샤는 맥락을 제거한 채 아모스의 말을 제멋대로 발췌하여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모스가 고발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왕으로 하여금 부정의의 현실과 대면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권력자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그의 관심입니다.

• 타락한 종교

아마샤는 아모스에게도 권고를 가장한 위협을 합니다. 남왕국 출신인 그가 왜 뜬금없이 베델까지 와서 평지풍파를 일으키냐며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는 충고라는 게 가관입니다.

"선견자는 여기를 떠나시오! 유다 땅으로 피해서, 거기에서나 예언을 하면서 밥벌이를 하시오. 다시는 베델에 나타나서 예언을 하지 마시오. 이곳은 임금님의 성소요, 왕실이오."(12-13)

이 구절은 애국을 가장하고 있는 제사장 아마샤의 진짜 관심이 무엇인지를 제유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밥벌이’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밥벌이’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그것처럼 중요한 일도 없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마치 사소한 문제인 듯 말하는 사람은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자기 삶을 바친 사람들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직무를 ‘밥벌이’의 수단으로 삼는다면 그처럼 비극적인 일이 없습니다. 

종교행위가 밥벌이의 수단이 되는 순간, 그는 자기에게 밥을 주는 사람의 눈치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듣고 싶은 말만 하게 됩니다. 아마샤는 그런 타락한 종교인의 전형입니다. 그는 스스로 그런 자신의 모습을 알기에 당당하게 할 말을 하는 아모스가 못내 불편한 것입니다. 타락한 종교인들은 권위주의의 옷을 입고 참 소리를 잦아들게 합니다.

아마샤는 “이 곳은 임금님의 성소요, 왕실”이라고 말합니다. 그곳이 설사 사마리아라 해도 하나님의 사람이, 그것도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의 베델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이 한 말이라고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는 온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종이라기보다는 그에게 밥을 보장해주는 왕의 종으로 살고 있는 겁니다. 무서운 전락입니다. 신앙생활의 가장 큰 적은 둔감함입니다. 

저어주지 않으면 금방 더께가 생기는 팥죽처럼, 매 순간 마음을 하나님께 들어 올리지 않으면 우리는 부푼 욕망에 덧없이 끌려가게 마련입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입니다. 가끔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를 떠올려 봅니다. 폭포는 연어가 모천으로 회귀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난관입니다. 연어는 어떤 힘에 이끌려 그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것일까요? 물에 맞아 떨어지기를 반복하면서도 연어는 포기할 줄을 모릅니다. 연어들의 그 끊임없는 반복을 보며 저는 깊은 경외심을 느꼈습니다.

아모스야말로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연어와 같은 사람입니다. 넘어지고, 깨지고, 상처 입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의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를 압니다. 그 말로 인해 자기에게 닥쳐올 박해의 현실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달아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치욕과 모욕거리가 되고만 자기 삶에 지쳐 다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 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렘20:9)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에게 참으로 붙잡힌 사람은 어쩔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도 죽음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는 까닭을 이렇게 밝힙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고전9:16b). 아모스는 아마샤에게 자기는 직업적인 예언자도 아니고 그들의 제자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삯을 받고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그는 하나님의 부름에 이끌려 역사의 무대에 서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똑똑한 사람, 유력한 사람보다는 단순하게 순명하는 이들을 통해 당신의 일을 하실 때가 많습니다.

• 아마샤의 미래

아모스는 아마샤에게 닥쳐올 심판을 예고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은 죄,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타락시킨 죄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네 아내는 이 도성에서 창녀가 되고, 네 아들딸은 칼에 찔려 죽고, 네 땅은 남들이 측량하여 나누어 차지하고, 너는 사로잡혀 간 그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다."(17)

이것은 어찌 보면 아마샤만의 운명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은 사람들이 미구에 맞이할 운명입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사람들은 우리에게 불편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사실을 제자들에게 엄중하게 경고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할 때에, 너희는 화가 있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눅6:26)

공자님은 일찍이 "향원鄕原은 덕지적야德之賊也니라"(論語, 陽貨, 第十七, 13)라고 말했습니다. 향원이란 마을에서 점잖고 바르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시류에 영합하고 여론에 따라 줏대없이 흔들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덕을 해치는 이입니다. 그는 다수의 인기에 영합하기에 언제든지 악을 저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샤야말로 향원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아모스의 말은 거칠고 투박하지만, 그 말은 사람들의 둔감함을 깨뜨려 하나님의 뜻에 엎드리게 했습니다.

아마샤와 아모스 이야기를 하면서 내내 마음이 무겁습니다. 오늘 나의 모습이 아모스보다는 아마샤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싶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저는 내가 누구의 종인지 묻고 또 묻겠습니다. 아모스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입니다. 그런 목마름이야말로 타락을 막아주는 백신입니다. 의가 무너진 세상, 악인들이 처처에 횡행하는 세상, 사람들이 삶의 깊이와 대면하기보다는 가볍고 파편적인 오락거리에 정신을 팔고 있는 세상에서 외롭더라도 끈질기게 하나님의 뜻을 외치는 이들이 많이 등장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뜻을 겸허하게, 두렵게 받아들여 자기 삶을 조금씩이라도 바꾸려는 이들이 등장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의 삶의 자리를 찾아가고, 불의에 항거하고, 일상의 모든 순간마다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려는 이들이 늘어나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거룩한 부름 앞에 있습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일상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 자리에서 옹골차게 하나님의 뜻을 받들려는 이들이 늘어날 때 교회와 사회는 새로워질 것입니다. 이 거룩한 소명에 기쁨으로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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