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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데스다에서 성전으로 (요 5: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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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데스다에서 성전으로 (요 5:10-18)


요한복음에는 일곱 개의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첫 번째 기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신 기적입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고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기적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의도적으로 예수님이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한 기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사역이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일곱 개의 기적 가운데 마지막 기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바로 가지 않으시고 이틀을 머무신 후에 올라가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난 후에 예수님께서 그의 무덤에 도착하셔서 무덤을 향해 ‘나사로야 나오너라’ 라고 외치셨고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나사로를 살리는 과정에서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나눈 대화의 주제는 ‘부활’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난 후에 어떤 놀라운 사역을 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이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이 나사로 개인의 삶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적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강한 메시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부활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신 다음 날에 어린 나귀를 타고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십자가을 지시고 돌아가시지 바로 직전에 죽은 나사로를 나흘 만에 살리신 것은 십자가 죽음 이후에 부활하실 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요한복음에 기록된 일곱 개의 기적은 그 하나하나가 전하고자 하는 분명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요한복음에 기록된 세 번째 기적인 베데스다 연못에 누워 있었던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을 통해 일어나는 기적 사건을 보았습니다. 이 기적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여러 각도로 묵상해 보기를 원합니다. 
  
지난주에는 본문의 기적의 말씀을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물음과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말씀을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38년 된 병자가 자신이 누웠던 자리를 들고 일어나 베데스다 연못에서 성전으로 이동하는 과정과 그 가운데서 변화되는 그의 모습을 중심으로 말씀은 나누려고 합니다. 
  
베데스다라는 말은 ‘은혜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이 한 번씩 동할 때 그 연못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병자가 낫는다는 말이 유대인 가운데 전해 내려왔습니다. 그 말을 믿고 많은 병자들이 베데스다 연못에 모여들어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연못에 ‘은혜의 집’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그곳에 모인 병자들은 자신이 은혜를 입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은혜의 정신은 없고 치열한 경쟁과 경계심으로 긴장감이 팽배한 곳이었습니다. 정글의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어 가장 강하고 빠른 한 사람만이 승자가 되어 웃음을 짓고 나머지 사람들은 한숨과 눈물을 흘리는 곳이었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그곳에 모인 모든 병자들의 고통과 절망감을 대표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능력과 의지로는 베데스다 연못에서 말하는 은혜를 누릴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은혜를 입을 수 있도록 도와줄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는 절망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통해 치유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치유함을 받은 38년 된 병자가 병상을 들고 일어나 향한 곳은 성전이었습니다. 그가 성전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그리고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의 ‘자기의 정체성’을 찾아 나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믿음 안에서 변화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하나님과 사람 앞에 서는 것이 베데스다 연못의 기적의 의미이고 목적입니다. 기적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일어나는 믿음의 변화가 기적의 목적입니다. 
  
38년 동안 병석에 누워 있다가 치유함을 받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누웠던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어떤 노동도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조그만 바늘을 하나 옮겨도 노동으로 여깁니다. 잉크를 찍어 알파벳 서너 글자를 써도 노동으로 여깁니다. 그러기에 안식일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병에서 나은 사람이 안식일에 누웠던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 유대인들은 놀랐습니다. 안식일에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은 화를 내며 ‘안식일인데 어떻게 네가 누웠던 자리를 들고 걸어가느냐?’ 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병에서 나음을 받은 사람이 ‘나를 38년 된 병으로부터 낫게 한 분이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셨기에 나는 그 분의 말씀에 따랐을 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 사람이 누구냐?’라고 물었습니다. 병에서 나음 받은 사람은 자신을 낫게 하신 분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낫게 하신 후에 많은 사람들이 있어 그곳을 피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38년 된 병자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그 분을 통해 자신이 치유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병석에서 일어나 누웠던 자리를 들고 처음으로 찾은 곳이 성전입니다. 그가 병에서 나은 후에 고향을 찾거나, 부모를 찾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가 병에서 나은 후에 성전을 가장 먼저 찾았다는 것은 그의 마음에 자신이 병으로부터 나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가 성전에 들어갔을 때에 그곳에서 자신의 오랜 질병을 낫게 해 주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다가가서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그 38년 동안 고통을 겪던 그 질병으로부터 나았으니 이제는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일어나 그 길로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신을 고치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구원하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 입게 된 은혜와 그 은혜를 주신 예수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데스다의 연못에 누워있는 그의 모습은 자신의 신세와 한계를 탄식하며 다른 사람과 환경을 원망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치유함을 받은 그가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으로 자리를 이동하면서 자신을 치유하신 예수님을 더 분명히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 은혜를 입고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한 그는 어느 곳에 가든, 누구를 만나든 예수님을 통해 치유함을 받은 사람으로서의 감격을 가지고 예수님을 증거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이 없으면 세상에서 살아갈 때 믿음의 사람으로서의 영향력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목회자로서의 정체성이 없으면 교회 안에서는 목회자처럼 행동해도 교회 밖에 나가서는 목회자로서의 삶을 살지 않습니다. 성도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으면 세상에 나가서 생활할 때 성도로서 향기 나는 삶을 살지를 못합니다. 
  
제가 부교역자로 섬기던 교회에 여성부 장관을 하신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분의 요청으로 장관실에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 그 권사님이 하신 말씀이 ‘목사님, 제가 장관으로 부임하고 나서 과장급 이상의 대부분의 고위 공직자들 책상위에 성경책이 다 놓여 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 분의 말에 의하면 예수님을 믿는 장관이 오면 모두가 예수님을 믿는 것처럼 하고 불교를 믿는 장관이 오면 모두가 절에 나가는 것처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합니다. 행복한 교회의 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약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행복한 교회를 다닌다고 분명하게 말을 못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을 향해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이 희박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상태는 어느 상태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전혀 모르는 체 자신의 힘과 능력을 자랑하는 상태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무능력함과 불행함을 탄식하며 환경과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베데스다 연못의 38년 된 병자의 상태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감사함과 기쁨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나를 불러주신 하나님에 대해 자세히 모르고 있는 상태입니까? 

아니면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나 나를 부르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그 분이 베푸신 은혜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을 감사하며 삶의 자리에서 그 분의 이름을 증거하며 사는 삶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베데스다 연못의 자리에서 성전의 자리로 이동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믿음의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가정과 일터와 교회와 이웃들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갈 때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임하실 것입니다. 
  
6·25사변 때 진주 지방에서 공산군들이 후퇴를 하면서 사람들을 붙잡아서 운동장에 모아 놓았습니다. 차에다 태워 다른 곳으로 데려가려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차에서 내리라고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죽이려는 것입니다. 장로님 한 분이 차에서 내리며 내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가운데 같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긴장감이 맴돌았습니다. 장교는 장로님을 죽이려고 한 쪽으로 끌고 가게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전화가 왔고 장교는 전화를 받더니 얼굴색이 변하며 급하게 차를 몰고 출발했습니다. 얼마나 급했던지 장로님을 죽이지 못한 채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끌려간 사람들 중에 한 사람도 돌아온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 죽은 것입니다. 장로님은 후에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되었고 여수에 가면 성광교회라는 큰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를 세워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그 분이 김희용 목사님입니다. 그 분의 아들이 바로 새문안 교회를 시무하시던 김동익 목사님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어떤 상황, 어떤 사건 앞에서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바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향기가 납니다. 그 향기가 다른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사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베데스다 연못에서 성전으로 향하는 믿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가정과 직장, 교회와 이웃들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은혜를 증거 하는 삶이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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