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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그네 길 (창 47:8-10, 히 11:13-16)

첨부 1


나그네 길 (창 47:8-10, 히 11:13-16)
   
 
8.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9.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10.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창세기 47장 8~10절>

13.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1장 13~16절> 

할렐루야! 
좋은 계절이 되었습니다.
명절도 다가오고 있습니다.
올 한해 새로운 ‘도전과 변화’를 하자고 했는데
여러분은 어떤 도전을 하셨고, 어떤 변화를 이루어가십니까?
아직까지 마음에만 있고 해보지 않은 분들이 계시다면 늦지 않았습니다. 
매일, 매주, 매달 새로운 마음으로 결심하고 도전하여 
변화의 열매를 거두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거룩한 주일에 강단을 통해서 전해지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험악한 세월을 산 야곱

흔히 험난한 인생을 산 사람에게 인생이 파란만장하다 … 고 합니다. 
성경의 여러 인물 중에 그런 삶을 산 사람이 야곱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속여 아버지(이삭)으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때부터 순탄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축복기도를 받은 후 정말 굴곡진 인생을 살았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되는 야곱의 고백을 보면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46, 47장에는 야곱이 요셉을 만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야곱은 요셉이 죽은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살아 있었습니다.
부자는 서로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집트의 총리가 된 요셉은 애굽 왕 바로에게 자신의 가족을 소개했고, 
바로는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온 그들에게 
가장 좋은 땅에 가서 살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바로는 야곱에게 나이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 하였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살아온 130년이라는 시간이
나그네의 길이었다는 것을 …
그리고 결코 쉽지 않은 험악한 세월이었음을 고백했습니다. 

인생의 말미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사용한 말이
‘나그네 길’, ‘험악한 세월’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인생의 끝자락에 있다고 한다면
여러분의 인생을 무엇이라고 표현하시겠습니까? 

‘난 참으로 행복한 삶이었다, 
난 만족한 삶이었다, 기쁨의 삶이었다, 난 감사의 삶이었다, 
난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 …’어떻게 표현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중에도 험난한 파도 속에서 인생을 사셨다고 
말하실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야곱의 이야기와 나이를 생각해보면
야곱이 얼마나 ‘험악한 세월’을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30세에 총리가 된 요셉은(창 41:46)
7년간의 풍년이 끝나고, 7년 흉년 중 2년이 지났을 때(창45:6), 
즉 요셉의 나이가 39세(30+7+2)였을 때 다시 아버지 야곱을 만났습니다. 
요셉이 처음 노예로 팔려갔을 때가 17세였으니(창37:2)
아버지 야곱과 요셉이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하고 지낸 기간은 22년이나 됩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야곱은 자신의 나이를 130세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계산해 보면 야곱은 108세 때 아들 요셉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요셉의 형들이 100세 넘은, 
아버지 야곱을 속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야곱은 91세 백발의 나이에 낳은 아들 요셉이 얼마나 예뻤겠습니까?
그리고 108세에 아들을 요셉을 잃었으니 
그 상실감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보통 젊었을 때는 인생의 굴곡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합니다. 
그러다 중년이 되고, 노년이 되면 
점점 큰 파도 없이 사는 것이 사람들의 꿈이고 보통 사람들의 삶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인생은 노년기에 더 힘들어지고 
여러 가지 더 큰 인생의 파도에 부딪쳤습니다.

아버지를 속여 형 에서가 받을 장자의 복을 가로챈 야곱이었지만 
형을 피해 도망 다니는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야곱의 인생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
그런 복을 받은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야곱은 
‘차라리 장자의 복을 받지 않았더라면 이렇지는 않았을텐데 …’
하며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것을 후회했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 중에도 의문을 품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하는 일마다 승승장구할 것 같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어 복 받았다고 간증을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하는 간증 때문에 마음에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아니 저 사람은 복 받아서 간증하는데 나는 왜 안되는거야?
하나님은 왜 나를 이렇게 어렵게 하시는 거야?’하며 
원망과 탄식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든 인생이 힘듭니다. 어렵습니다.
야곱이 자신의 인생을 
‘나그네길, 험악한 세월’이라고 한 것처럼 
누구나 이 땅에서의 삶이 
나그네의 삶이고 힘들고 어려운 삶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그 사람이 다 잘된 것 같고, 
다 얻은 것 같고, 부족한 게 없어 보이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사람의 속 깊은 눈물이 있습니다.
마음속에 감추어둔 슬픔이 있습니다.
그런 사연 한 가지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사람은 한 명의 나그네일 뿐입니다. 

요즘 높았던 사람, 전직 대통령과 그 가족이 부러우십니까?
요즘 높은 사람, 법조계의 높은 분과 그 가족 부러우십니까?
요즘 돈 많은 사람들 식구/형제끼리 싸우고, 
걸핏하면 불려 다니고 도망 다니고 부럽습니까?
도망 다닐 때 도망 다니더라도 
그렇게 한번 가져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십니까?


외국인과 나그네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예외 없이 모두 이 세상의 나그네입니다. 
흔히‘믿음장’이라고 말하는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으로 살아간 선조들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 에녹은 … 노아는 … 아브라함은 … 
이렇게 믿음의 사람들을 설명해 놓고 
그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1장 13절에 보면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히 11:13)
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선조들도 이 땅에서 믿음을 따라 살았던 것은 틀림없지만
땅에서의 삶은 외국인의 삶이었고 나그네였다는 뜻입니다.
- 아브라함은 헷 족속에게 사라의 매장지를 구할 때
자신을 나그네로 사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창23:4)
- 나그네의 삶을 살던 이삭은 블레셋 사람들의 시기를 받았을 때
그의 우물을 몇 차례나 양보하였습니다.(창26:12-15)
-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팔지 말라고 하시며, 
그들은 이 땅에서 사는 나그네라고 하셨습니다. (레25:23)
- 하나님의 전을 건축할 예물을 드린 다윗은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은 
나그네의 삶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대상 29:15) [ 비전성경사전 참조 ]

이처럼 외국인과 나그네는 이 땅에 사는 성도들의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입니까?
천국의 소망을 가졌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외국인이요, 나그네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따라해 보겠습니다.
“나는 외국인이다. 나는 나그네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들도 외국인이었고 나그네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도 외국인이어야 하고 나그네여야 합니다.
저도, 외국인으로 살아보았습니다. 
참을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설움도 많았습니다.
그들이 저를 어떻게 해서가 아니라
생소한 그들의 삶에 어울려 살려니까 힘들었습니다.
말도 잘 안통하지, 삶의 스타일도 다르지 … 
왜냐하면 제가 외국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에 와서 사는 외국인들을 만나면 잘 대해주시기 바랍니다. 
사업하시는 분들 가운데 외국인을 고용할 기회가 있으시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잘 대해주시기 바랍니다. 
외국에 가서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외국인은 언어, 문화, 습관, 생활방식이 우리와 다릅니다.
그래서 외국인의 가장 큰 특징은 이질(異質)감입니다. 
길을 가다가도 외국인은 금방 눈에 띱니다. 
외모부터 다르기 때문입니다. 
TV를 보면 외국인인데도 우리말을 잘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지어 사투리를 능숙하게 말합니다.

외국인들 가운데는 자기 나라의 국적을 포기하고
우리나라 국적을 취득하여 아예 귀화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그들을 외국인이라고 느낍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외국인이 되었다는 것은
예수 믿고 천국 백성 된 우리가 세상의 언어, 세상의 문화, 
세상의 생활방식과 다르게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믿음으로 천국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국은 천국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는 외국인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 천국이 본국인 그리스도인들은 말이 다릅니다. 
교회의 언어, 그리스도인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면 안됩니다.
군대에 가면 군대 용어가 있고, 경찰관들이 쓰는 용어, 
법조인들이 쓰는 용어, 건축현장에서 쓰는 언어가 다릅니다.

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쓰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면 안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 사느냐,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에 따라
사용하는 용어, 언어가 달라지는 것처럼
우리가 하늘 백성이라면 하늘의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당연히 우리를 모르는 사람, 천국의 소망이 없는 사람들은
‘할렐루야, 승리하세요. 아멘 …’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우리를 보고 이상하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천국에 소망을 두었기 때문에
우리는 기쁨과 감사의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감사하다’는 말도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이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교통사고로 큰 화상을 입고 손가락을 절단하게 된 
‘이지선’이라는 청년이 있습니다.
TV나 신문 인터뷰에서
“손가락 전체가 아닌 마디 하나라도 남아 있는 것에 감사하다”
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은 그 상황이 / 그런 말이 이해되십니까?

- 천국이 본국인 그리스도인들은 문화가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시며, 쾌락을 추구하지만,
우리들은 찬양을 부르고, 성령에 취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 천국이 본국인 그리스도인들은 생활방식이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좀 더 가지려고, 좀 더 먹으려고,
좀 더 높아지려고 하지만, 
우리들은 남을 위해 희생할 줄 압니다. 사랑할 줄 압니다. 
나누고 베풀 줄 압니다. 겸손하게 낮춥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놓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다른 언어, 다른 문화, 다른 생활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에서 외국인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 사람 교회 나가더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어.
같이 어울릴 수가 없어.’라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이번 명절에 고향에 가서 
옛날에 어울리던 친구들과 다 잘 어울리고 
아무 불편함이 없게 된다면 여러분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한잔 해. 옛날에 다 했잖아’라고 말하는 친구의 말에
‘그럴까?’한다면 그냥 똑같은 사람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천국백성, 외국인입니다. 어색한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과 똑같다면 이상한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 말과 문화와 생활방식을 따르며 구별되지 않는다면
본국이 천국임을 망각하고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또한 나그네는
지금 발을 딛고 있는 곳에 계속 살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시 어디론가 떠날 사람이 나그네입니다. 
나그네는 아무렇게나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그네는 목적지를 향해 가는 사람입니다.
여행을 가는 사람은 짐이 간단합니다. 
갔다가 다시 돌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민을 가는 사람의 짐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나그네가 아니라 이사를 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이 세상으로 끝날 것인지 
아니면 정말 가야 할 본향을 사모하며 사는 
세상의 나그네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시편 39편 5절에 
“주님께서 내게 고작 한 뼘밖에 안 되는 짧은 인생을 주셨습니다. 
내 일생이 주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의 일생은 한 순간의 입김일 뿐입니다. 
(시 39:5 - 쉬운성경)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지 못할 것을 압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완벽한 노후대비는 물론 
영생에 필요한 것들을 갖추려고, 가지려고 합니다. 
하지만 나그네에게 그런 것들은 거추장스러운 짐이 될 뿐입니다. 
아무것도 가져갈 수가 없습니다.
믿음의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늘백성의 정체성입니다. 
그것이 하늘백성의 자기 모습이어야 합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

히브리서 11장 14절에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히 11:14) 하였습니다. 

여기서 본향은 
진정한 평안과 쉼을 누릴 수 있는 곳을/이상향을 의미합니다. 
[ 오경준 저, <구약에 더 있다>, 홍성사, p.98. 참조] 

메시지 성경으로 보면 
본향을 ‘true home’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진정으로 돌아가야 할 곳이 본향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서에는 본향이 2가지라고 설명합니다.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히 11:15-16)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창12:1)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새로운 곳으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고통과 눈물과 걱정거리가 많은 삶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전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을지도 모릅니다. 
‘나온 바 본향’, 즉 육신의 고향으로 가는 게 
낫겠다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습니다. 
내 육신의 고향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기 때문에 
기꺼이 힘들고 어려운 외국인과 나그네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진짜 고향이 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6절에 중요한 단어가 또 나옵니다. 

“…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6)

15절에서 더 나은 본향을 말하고 
16절에‘이러므로’라고 하였습니다. 
‘이러므로’를 뜻하는 헬라어 ‘디오’는 
정확한 인과관계를 나타내는 접속사입니다.
즉, 우리가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깨달아 
하늘을 진짜 돌아가야 할 본향으로 생각하고 사모할 때, 
하나님께서 비로소 그들을 위한 성을 마련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말하는 분들은
생각한 대로/말한 대로 죽으면 끝입니다.
그러나 ‘나에겐 영원한 본향이 있어. 
나는 본향에 돌아갈 것을 믿습니다’라고 하는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한 성을 마련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에 따라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해 성을 예비하실 줄 믿습니다.

본향을 제대로 사모하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시고, 
우리를 위한 성을 예비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 오경준 저, <구약에 더 있다>, 홍성사, pp.99-100. 참조 ] 

그래서 골로새서 3장 2절에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 하였고
예수님은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 하였습니다.

천국에 소망을 둔 사람, 천국 시민권을 가진 우리는(빌 3:20) 
항상 천국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이번 추석에 / 명절에
여러분의 참 본향은 어디인지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나온 바 본향’을 그리워하십니까?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십니까?
예수 믿는 우리는 
이 땅에서 외국인이자 나그네임을 인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본향을 향해 가는 인생길은 힘이 들어도 즐거운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 
천국에 소망이 있기 때문에 참는 것이요, 
세상의 언어가 아닌 천국의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명절이 되면 예수 믿는 사람들도 혼동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오늘 꼭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
‘추모’와 ‘추도’를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두 낱말 모두 고인을 생각하는 것이지만 쓰임이 같지는 않습니다.
추모(追慕)는 
고인을 그리워하고 기억하는 의미를 더 강조합니다.
그러나 추도(追悼)는 
고인을 애도하고 슬퍼하는 데에 무게를 둡니다.
(2007년 4월 23일자 중앙일보 ‘우리말 바루기’ 참조)

그리스도인들은 명절에 
앞서가신 어른들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의미를 담는 것입니다.

예수 믿어 구원 받은 우리는 이미 천국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지만 
예수 믿고 본향을 사모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하나님의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천국을 향해 가는 순례자의 삶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이 명절에 … 이 좋은 때 … 어디에 가든지
예수 향내 풍기며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며 
외국인 취급을 받아도 본향을 향해 가는 순례자로 
하늘백성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발걸음을 옮겨가는 우리들
비록 연약하지만 부족하지만 우리의 발을 붙들어 주옵소서.
그래서 하늘 그곳에 가게 하여 주시고
그곳에 가는 데 부끄럽지 않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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